서큐버스 세비체
A타입, 1차(던전밥 au) / 10,244자
여느 때처럼 식사를 마친 저녁이었다.
지난번의 강행군 끝에 막심의 발이 심하게 부르튼 이후로 히르칸은 되도록이면 일찍 캠프를 차리려 했다. 막심은 돌연 성가실 만큼 그를 챙기는 히르칸의 태도에 종종 그 정도 약골은 아니라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히르칸의 ‘발 마사지’는 제법 좋아했다. 히르칸도 그 시간을 좋아했다. 편안한 시간이냐 하면 오히려 아슬아슬한 선을 무너뜨릴까봐 단어 하나하나도 조심해서 고르는 불편한 시간에 가까웠지만.
아무 생각 없는 척 날씬한 발을 만지작거리다 우묵한 부분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발뒤꿈치부터 종아리를 따라 슬그머니 손을 올리기도 했다. 다리를 받쳐 잡은 채 고개를 들면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멍하니 히르칸을 내려다보는, 그러다 혼자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는 얼굴이 히르칸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별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히르칸과 막심은 제자리로 돌아가 긴장을 가라앉히고 내일을 위해 각자의 무기를 다듬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도 예의 그 시간이 찾아왔다. 히르칸은 헝겊에 기름을 묻혀 검의 날을 닦으며 잡생각을 쫓아보내고 있었다. 마물도 마물이지만 검을 원체 험하게 쓰는 터라 매일 기름칠을 해주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낭패를 보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지팡이는 아무렇게나 내다버려둔 채 부산스럽게 짐을 뒤적거리던 막심이 “저기, 히르칸…” 하고 조심스럽게 불러왔다. 히르칸은 눈을 들었다.
“나갔다 와도 돼요?”
“왜?”
“돈주머니를 떨어뜨린 것 같아요. 잠깐이면 되니까 혼자 다녀올게요.”
얼마 들었더라. 히르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적 막심의 돈주머니가 스쳐 지나갔다. 그야말로 텅 비어있다가, 그래도 여기저기서 주워모으면서 푼돈 정도는 모였던 것 같은데…….
“…중요하냐?”
“…….”
“그래, 열심히 모았는데…….”
히르칸은 칼을 닦던 손을 멈추고 몸을 기울여 바깥을 슬쩍 내다보았다. 바깥은 꼭 지상세계의 밤을 따라하는 듯 고요하고 한적했다. 잠깐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게 던전 탐험이라지만… 오면서 둘러본 바로는 이 근방은 안전지대라고 불러도 좋을 법했다. 짐을 전부 두고 함께 나가는 건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렇다고 그 잠깐을 위해 풀어놓은 짐을 전부 꾸리는 건 너무 과민한 것 같다. …이 근처에는 대형 마물도 없는 것 같았고.
“다녀와.”
히르칸이 고개를 까딱였다. 막심은 그제야 한결 가벼운 얼굴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예전이라면 맨몸으로 대뜸 나가려다 한 소리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지팡이를 챙겨가는 모습에 안심이 됐다. 찾든 못 찾든 금방 돌아오겠지.
그러나 어쩐지 막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방금은 두 번째 검을 닦던 중이었다. 이제 세 번째 검을 닦기 시작한 참이고. 아무래도 잃어버린 걸 찾는다니까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지.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설마 그 한 번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고꾸라지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기만 했다. 히르칸은 결국 닦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넣고 급하게 문 밖으로 나섰다.
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히르칸은 서둘렀다. 다른 길로 새지는 않았을 테고, 문득 낯선 기척이 들려 히르칸은 멈춰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분명히 분간해낼 수 있었다. 인간의 갑옷과 무기가 절그럭거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 그렇지만 그 정도로 큰 마물이라면 분명 오는 길에 흔적이 보였어야 했을 텐데. 소리가 들리는 곳에 막심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히르칸은 달려갔다. 그리고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마자 소음의 근원지와 막심을 동시에 찾아냈다. 그는 히르칸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있었다.
“막……!”
그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막심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히르칸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건 말이었다. 다만… 평범한 말이라기엔 끝내주는 모습이었다. 마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물감을 들이부은 것 같은 백마.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건…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사… 히르칸이었다.
히르칸은 눈을 의심했다. 도플갱어인가? 아니, 닮아야 도플갱어지. 추레하고 너덜너덜한 히르칸에 비해 저 히르칸은 번듯하고 멀끔했다. 무엇보다도… 저 놈은 엘프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고삐를 가볍게 당겨 말을 멈춰 세운 키메라—그건 거의 키메라였다—가 기사답게 정중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히르칸은 바로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뭘 하나 궁금하긴 해서.
“막심.”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히르칸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 했다.
“집에 돌아가자…….”
정말 상상치도 못한 대사로군. 거기다 들어주기 힘든 느끼한 목소리까지. 보아하니 막심은 완전히 넋이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맥 빠지는 안도감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살짝 괘씸하기도 했다. 기가 차네. 안 따라왔으면 쪽쪽 빨려서 죽었겠는데. 속으로 혀를 차며 등 뒤로 손을 옮기던 히르칸은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허벅지에서 예비용 단검을 슬그머니 뽑아든 히르칸은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팔을 한껏 뒤로 당겼다. 그리고 짧은 호흡과 함께 검을 있는 힘껏 던졌다. 그 숨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히르칸을 돌아보았다. 막심이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돌아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엘프 히르칸의 미간에… 검이 보기 좋게 들어가 꽂혔다. 완전 무장이 부끄러울 만큼 허무하게 그가 뒤로 쓰러졌다. 주인 잃은 백마도 매한가지였다. 히르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말은 무릎이 꺾여 솜이 빠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히르칸의 일격에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동안 막심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고만 있었다.
히르칸은 허접한 기사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쓰러진 몸뚱이를 유심히 살펴보다 발로 텅 찼다. 만듦새 하나는 좋은 갑옷이었다.
“뭐냐, 이건?”
“…그게요.”
“집에 가자? 무슨 다섯 살 짜리도 아니고. 그런 말에 설레고 앉았어.”
그러자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와중에도 막심의 입이 조금 튀어나왔다. 히르칸은 그를 달래주는 대신 시체의 이마에서 단검을 뽑아 피를 털었다. 그나저나 꿈이 큰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만, 이건 어린이 동화에도 안 나올 법한 화려한 모양새였다. 이건 뭐… 나한테 바라는 게 있나 물어봐야되나. 단검을 벨트에 도로 꽂아넣은 히르칸은 막심에게 몸을 돌려 고갯짓했다.
“가자.”
풀이 죽은 건지 토라진 건지 알 수 없게 고개를 숙인 막심이 슬쩍 히르칸의 소매를 잡아왔다. 멈칫했던 히르칸은 곧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그래, 손 잡고 가지 뭐.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히르칸의 반대쪽 팔을 또 다른 손이 부드럽게 감싸 안아 왔다. 순간 막심이겠거니, 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막심의 손일 수는 없었다. 히르칸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여러 마리가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더니 한 마리가 더 있었나. 이번엔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러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히르칸은 예상과 다른 모습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완전히 낯선, 그러나 어딘가 너무 익숙한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예쁘다.’
알면서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원초적인 감상이다. 이어 막심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 아니, 닮은 수준이 아니라 이건 누가 봐도 막심이었다. 밀색 속눈썹과 녹색 눈을 가진 여자가 살짝 웃자 마음이 동했다. 여자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다 반대쪽 팔을 당기는 힘에 의식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면 이쪽도 예쁘장한 놈이다. 다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막심의 눈이 차츰 가늘어지고 있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면 지팡이를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뜻을 알 수 없는 영창과 함께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하는 막심을 멍하니 바라보며 히르칸은 생각했다. 그래도 둘이 있어서 다행이네. 아니, 처음부터 혼자 보내지를 말걸. 그럼 이렇게 귀찮은 일도 안 생겼을 텐데…….
*
“죽는 줄 알았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장작 타는 소리만이 서먹한 정적을 채워주었다. 이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막심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겠거니 했다. 자신도 조금 전의 폭발 때문에 귀가 살짝 먹먹했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편이 나았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조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버석해진 머리카락을 한 차례 헤집은 히르칸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막심…….”
“아까는…….”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조금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입을 우물거리던 막심이 한숨을 쉬었다.
“…히르칸 먼저 말해요."
“그래. 너 백마 탄 기사가 좋냐?”
“그러는 히르칸은요? 좀 더 볼륨 있는 게 취향이면 일찍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야, 남자가 돼서 그게 이상한 거냐? 그리고 솔직히 여자인 거 빼면 너랑 큰 차이도 없잖아.”
숨 쉴 틈도 없이 빠른 대화 끝에 막심이 소리 없이 입을 달싹거리다 결국 꾹 다물었다. 심경이 상당히 복잡해보였다. 뾰족한 귀 끝까지 빨개져서는 제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는 막심을 바라보던 히르칸은 아까 전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왜 엘프인데?”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처럼 입을 닫고 있던 막심이 히르칸을 힐끔거렸다. 주눅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0년은 너무 짧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럼 백마는?”
“…….”
다시 말을 잃은 막심을 유심히 바라보며 턱을 만지작거리던 히르칸은 노력이 무색하게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소리를 내며 웃는 히르칸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막심은 곧 정신을 차린 듯 날카롭게 따져왔다.
“웃지 마세요!”
“아니, 나는… 그렇게 고상한 취향일 줄 몰랐지.”
웃느라 들뜬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한 히르칸은 괜히 불똥이 튀도록 장작을 조금 거칠게 들쑤셨다. 둘 다 할 말은 다 했네. 폼은 좀 안 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서로의 시체가 저 바깥에 나란히 누워있는 걸 생각하면 조금 징그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로의 얼굴이었다는 건,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아래 긴장은 조금 전보다 고조되어 이제는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았다. 원한다면 한 차례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막심에게 꼭 물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히르칸은 잠시 혀끝에 맴도는 단어를 고르다 충동을 이겨내고 조금 어렵게 내뱉었다.
“집에 가고 싶어?”
막심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히르칸은 재차 물었다.
“여기 처음 들어올 땐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미궁 맨 밑에는 보물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거라도 가지고 가면 무사히 탐험을 마쳤다고 인정해주실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면 밑바닥까지 갈 생각이었어?”
눈을 내리깔고 있던 막심이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아뇨.”
“그럼 뭔데.”
“…모르겠어요. 그냥… 애초에 모험 같은 건 하기 싫었어요. 집안 전통은 바보 같고, 아버지는 고집스럽기만 하고요.”
어떻게 보면 예상대로였다. 여태 함께 있었던 시간을 전부 부정하는 것만 같은 회의적인 말을 듣고 있으니 입안이 조금 떫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히르칸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분명 여기서 끝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막심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이렇게나 즐거워진 거예요…….”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쳤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색을 하고 있는 눈이었다. 달래줄까 싶어 입을 열었다가도, 곧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입술이 부딪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히르칸은 곧 질끈 감은 막심의 눈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막심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죽은 얼굴이 귀엽고 꼴렸다. 막심에게는 미안하지만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미안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해주면 되지.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끌어당기며 입술을 깨물자 막심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이윽고 좀 더 깊은 입맞춤과 함께 막심과 히르칸은 뒤엉켰다.
처음에는 균형을 잡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위태로웠다. 나란히 앉아있기만 하는 것으로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옷깃을 늘어져라 끌어당기는 손아귀와 질세라 몸을 끌어안는 거칠고 두터운 손바닥이 팽팽하게 힘을 겨루다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막심과 히르칸은 깔고 앉아 있던 모포 위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찰나 막심의 머리를 감싼 손등의 관절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그 통증도 즐길 수 있을 만큼 히르칸은 흥분해 있었다.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조금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히르칸은 모포 위에 등을 대고 누운 막심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서 따뜻한 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시선을 마주해왔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히르칸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만 확실히 하자.”
“…….”
“집에 가고 싶다 그랬지.”
“…네.”
“그럼 우리가 이러는 거, 너한테 의미가 있긴 해?”
그러자 막심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히르칸은 수줍어 보이는 그의 눈, 그늘 속에서도 발그레한 뺨, 말을 고르느라 금방이라도 목소리를 낼 것처럼 벌어진 젖은 입술을 눈으로 집요하게 훑었다. 부드럽고 굳은살 하나 없는 손끝이 히르칸의 옷깃을 살짝 건드렸다. 그 다음에는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내려 앉는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까지 허락해준 적 없어요.”
그리고 차오르는 충족감과 해방감. 이미 끝난 대화 뒤에 구태여 덧붙이는 막심의 속삭임이 흥분과 설렘으로 조금 떨렸다.
“…그만할까요?”
맹랑한 물음에 히르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시 입을 맞췄다.
*
“일어났냐.”
캠프로 돌아오자 막심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막심은 눈을 거의 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물 묻은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어 주자 그제야 그가 눈꺼풀을 들었다. 살짝 인상을 쓴 채 물그릇에 담겨 팔딱거리는 작은 생물을 흘겨보던 막심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우……?”
“아닌데.”
서큐버스 유충이다.
“어디서 갖고 왔어요……?”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알면 안 먹고 싶어질걸.”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막심은 떨떠름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전만큼 거부감을 보이진 않았다. 히르칸이 예의 조리도구들을 달그락거리는 동안 주섬주섬 일어난 막심이 모포를 두른 채 가까이 다가왔다. 징그러운 마물은 외면하고 히르칸이 따온 정체불명의 열매를 만지작거리던 막심은 열매를 껍질 채 코에 가져갔다.
“이건 뭐예요?”
“몰라. 먹어봤더니 시큼하던데.”
“뭔지 모르면서 먹어본 거예요?”
“열매인데 설마 먹고 죽을까 했지. 열매라는 게 원래 다 씨 뿌리려고 만드는 거 아냐.”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막심이 한 번 더 자신을 흘기는 게 느껴졌다. 히르칸이 시선을 모른 체하고 반합에 담긴 물을 데우는 동안 막심은 히르칸이 벗어놓은 벨트에서 나이프를 꺼내더니 서툴게 열매에 칼집을 냈다. 그가 그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넣어 열매를 쩍 벌리자 히르칸에게까지 시트러스 향이 물씬 풍겼다. 한동안 과일을 구하기 힘든 던전에서만 지내던 터라 그 향이 제법 반가웠다. 막심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지 않게 용기를 내선 열매의 과육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 끄트머리를 살짝 베어문 막심이 몸을 살짝 떨었다.
“시다……."
“신 거 잘 먹어?”
“잘 먹는 건 아닌데 가리진 않아요.”
“잘 됐네. 이리 줘봐.”
막심이 넘겨준 열매를 대뜸 반합에 넣자마자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왜 넣어요?!”
“왜? 시다며. 신 건 원래 끓이면 좀 덜 셔.”
“그럼 이거 다 넣고 끓일 거예요……?”
“어.”
그러자 막심이 입술을 달싹이다 우물쭈물하며 히르칸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편식인가. 다만 단순히 마물식이라 먹기 싫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히르칸은 막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할 것처럼 유심히 얼굴을 뜯어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왜,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게, 자신이 있는 건 아닌데요. 전 요리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서…….”
“괜찮으니까 해봐. 먹고 죽지만 않으면 먹어줄게.”
그러자 막심이 발그레한 얼굴로 히르칸을 힐끔거리다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일단 그 안에 들어간 건 건져서 빼주세요.”
직접 하지는 않는군. 히르칸은 푹 익어서 흐늘흐늘해진 과일을 숟가락으로 건져냈다.
“그리고 그 새우… 를, 물에 데치고요. 오래는 말고 잠깐요.”
히르칸은 막심이 더 따지고 들기 전에 유충들을 죄다 물에 쏟아 부었다. 끓는 물에 닿자마자 몸을 앞뒤로 퍼덕거리던 유충들은 차츰 동그란 나선형으로 오그라들었다. 겉껍질이 완전히 붉어진 유충들을 그릇에 도로 꺼내놓고 나니… 새우를 자주 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확실히 새우 같은 모양새였다. …아닌가. 막심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 모양이었다. 막심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 안에 담긴 것들을 가리켰다.
“껍질도 까주세요…….”
“오냐. 다음엔 입에 넣어달라고도 하겠네.”
“…마물이라서요.”
“마물이 아니었으면 넣어달라고 했을 거라고?”
막심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르칸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라, 그럼… 중얼거리며 유충의 머리를 끊고 껍질을 잡아당기면 살과 껍질이 손쉽게 떨어져나간다. 껍질은 불 안에 던져버리고 막심이 내민 그릇에 살을 모아놓으니 전체적으로 허여멀건한게 꼭 날생선의 살점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버터버 남은 거 있어요?”
“응.”
“그럼 이거랑 버터버도 넣어요.”
이거, 하고 막심이 내민 건 조금 전 익히려다 관둔 신 과일이었다. 히르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날 것에 신 것까지. 별로일 것 같은데. 요리는 안 해봤다더니……. 의심 가득한 얼굴로 반으로 자른 열매를 쥐어짜면 새콤한 즙이 살점 위로 주르륵 쏟아졌다. 남은 열매를 얇게 썰어 넣고 버터버 잎까지 적당히 버무리고 나면 희고 반투명한 살 위에 열매의 즙과 버터버 잎이 골고루 묻었다.
히르칸은 그릇 안을 들여다보다 불쑥 물었다.
“이게 끝이야?”
“네. 이렇게 샐러드처럼 먹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막심은 먼저 먹어주길 바라는 듯 히르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히르칸은 살점을 하나 퍼올렸다. 조리하다 만 걸 먹는 기분이라 영 내키지 않았다. 여의치 않으면 날것이라도 뜯어먹고 살아야겠지만. 벌레 살의 단 맛과 열매의 시큼한 맛이 나름 잘 어울렸고, 간간히 말린 버터버 잎이 아작거리며 씹혔다. 무슨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먹을 만 했다. 히르칸이 별 말이 없자 막심도 따라서 음식을 한 스푼 입에 넣었다. 막심의 입에는 나름 괜찮은 모양이었다.
“어떠냐.”
그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괜찮아요.”
“원하던 맛이야? 애초에 원하던 게 뭔데?”
“조금 달라요. 그래도 비슷하긴 하네요. 여기 오면서 해산물을 많이 먹었거든요, 항구에 있었으니까. 이건 집에서도 종종 먹던 거라 즐겨 먹었어요. ”
그러더니 잠시 향수에 잠긴 듯 수저 끝을 입에 물고 있던 막심이 히르칸을 흘끗 보았다.
“…어때요?”
“나?”
“고향에서도 자주 먹었다니까요.”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다. 히르칸은 눈을 끔뻑거리며 입 안에 남은 맛을 되씹어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쁘지 않네. 왜?”
“나중에 같이 갔는데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큰일이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같이 가?”
“그럼 안 갈 거예요?”
“아니… 알았다, 그래. 같이 가자.”
그러자 막심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괜히 그릇 안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먹으라는 아침은 안 먹고 불쌍한 눈을 뜬 채 몸을 기울여 히르칸에게 붙어 왔다.
“어제 한 말 전부 진심이에요.”
“그래, 알겠다. 나도야.”
“100년은 너무 짧은 것 같다고요. 히르칸, 역시 좀 더 오래 살아요.”
“뭐?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면,”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죠.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고요…….”
“대충 주워먹은 거 아니라니까. 아니, 여기서 어떻게 더 건강해지냐, 인마…….”
하나하나 대답하다가도 문득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르칸은 한숨을 내쉬고선 제 숟가락으로 음식을 한 스푼 떠서 막심의 입가에 대뜸 가져다 댔다.
“자, 먹어라. 먹고 이야기해.”
그러자 막심이 징징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히르칸을 쳐다보았다. 좀 심했나. 호기롭게 농담을 던져놓고 살짝 눈치가 보이려던 찰나 히르칸을 슬쩍 째려본 막심이 곧 음식을 고분고분히 받아먹었다. 진지하게 봐달라더니 이런 건 또 좋은가. 황당하다가도 수줍은 얼굴을 하고 가만가만히 입을 우물거리는 막심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미궁을 나가서도 함께 한다니. 그것도 식기를 나란히 두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때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자기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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