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ery Perfect Rose
ㅇㄹ님 커미션(2021) / 1차 / 액션 / 4,200자
해가 빠르게 떨어지고 온통 깜깜해진 바다 위, 호화 크루즈의 그랜드 볼룸에서는 테이블들이 저마다 벨벳을 뒤집어쓴 채 둥그런 불을 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R.”
단정히 차려입은 여성이 귀빈을 맞았다. 높은 굽의 붉은 구두가 연회장으로 한 걸음 내딛자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일제히 단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사람은 그리고, 무수한 시선들에도 개의치 않은 채, 오히려 그것이 익숙한 눈치로 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깔끔한 곡선을 그리는 실크 드레스에 감싸인 늘씬한 다리는 당당한 걸음이 오래 전부터 배어온 듯이 보였으며, 한 번 매어진 허리 위로는 가느다란 목걸이가 어깨를 화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그린 듯한 여유로운 미소는 진한 화장과 잘 어울렸고, 마치 은으로 정성껏 세공된 장미처럼 한데 곱아들었던 머리칼은 등허리를 지나 곧게 흩날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서는 상반된 분위기의 인물이 경직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말끔한 제복 차림에, 빛을 받아 각기 다른 모양으로 테를 두르는 가슴의 훈장들. 언뜻 청회색처럼 보이지만 백색의 속을 가진 머리카락은 곱슬기 없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강박처럼 정돈된 그의 황금색 치뜬 눈이 연회장을 첨예하게 훑었다.
이 낯선 조합의 두 사람은 모두 세계연합의 기원에 속해 있는 이들이었다. 세기의 디바 R, 그리고 가장 완벽한 해경 K.
둘 중 R가 크루즈 시상식에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명불허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배우였고, 이 시상식에서 가장 큰 상을 거머쥘 것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야말로 연회의 주인공이었으니. 그러나 K는 달랐다. 거칠고 엄격한 경찰로서 사치와 향락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을 법한 인물이, 어쩌다 크루즈 선상 연회에 모습을 보이게 된 걸까?
그 전말은 이랬다.
‘시상식에서 R을 살해하겠다.’
활자들을 오려 붙여 아귀가 맞지 않는 고전적인 협박장이 R를 겨냥하고 날아들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범죄 예고라 했고, 또 누군가는 그저 주의를 끌려는 허풍선이의 수작이라 했다. 매스컴에서도 불붙은 여론을 더욱 부추기며 뜨거운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R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범죄를 걱정한 이들이 크게 반발했고, 결국 다른 이들 역시 안전에 신중을 기해 나쁠 것은 없겠다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오늘의 R에게 현시대의 제일 믿음직한 경호가, 즉 K가 따라붙게 된 것이다.
여러 인사치레를 거쳐 자리에 앉은 R는, 목석마냥 서 있는 K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는 크루즈에 오르고부터 여태까지 한 마디도 않은 채 묵묵히 R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목마르지는 않아요? 한 잔쯤 마셔도 괜찮은데.”
ㅤ“사양하겠습니다. 근무 중 음주는 금물이지 말입니다.”
ㅤ“후후…… 귀엽기는. 좀 더 즐겨보는 건 어때요? 파티잖아.”
ㅤ“즐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딱딱한 대답이 꼭 버튼을 누르면 출력되는 로봇의 그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R는 그에게 입력되지 않은 버튼을 건드려보고 싶다는, 짓궂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잠깐만 내 옆에 앉아줄래요? 마침 비었거든.”
ㅤ“안 됩니다.”
ㅤ“다리도 아플 텐데, 잠깐 정도는 긴장 풀어도 괜찮잖아요.”
ㅤ“……안 됩니다.”
이런 배려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지, 당황스러움이 여실히 전해져 왔다. 정말이지 원칙에 이리 빡빡하게 구는 사람도 드물 터였다. R는 부러 더욱 짙은 웃음을 그렸다.
“혹시 말이야, 내가 싫은 건 아니죠?”
ㅤ“아니지 말입니다.”
ㅤ“그럼?”
K는 눈을 깜박였다. R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어쩐지 지금 그의 말씨와 눈빛은 검질긴 구석이 있었다. 머릿속이 점점 휘말려 뒤엉켜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날 어떻게 생각해요, K?”
K가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동안, R는 점차로 K와 거리를 좁혀왔다. 연청색과 금색의 시선이 아주 가까이에서 비껴나갔다. 곧 숨결이 닿을 듯이, 아슬아슬한…… 바로 그때였다.
펑, 펑. 창밖으로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이 꽃 모양으로 스러지고, 또 새로운 불꽃이 쏘아 올려졌다.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선 시간을 내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쾌활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연회장을 채웠다. R는 K에게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하고 단정히 앉았다. 그제야 K는 막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와는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그래서 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쉽게 결론지었다.
개회식에서는 축사와 공연이 이어졌고, 이후 부문별로 배우와 감독들의 지지한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캐비어 좋아해요? 먹어보지 않아 모르지 말입니다. K는 이따금 말을 붙여 오는 R에게 꼬박 대꾸하면서도 부동 자세를 지켰다.
여러 차례의 축하가 지나가고, 밤이 깊을 무렵 마침내 시상식은 마지막 1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누가 불릴지는 뻔한 일이었지만.
“레이디 R!”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가, 그가 기품 있게 테이블 위로 일어나 걸어나가기 시작하자 하나둘 사그라들었다. 구두 굽 소리조차 나지 않는 레드 카펫 위로 일순 내려앉은 정적은 보이지 않는 베일 같았고, R는 그 무언의 찬사를 즐기고 있었다. 낮은 계단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흰 조명이 눈앞에 드리우고 그가 단상 앞에 다다랐을 때……
탕,
한 발의 총소리가 신호탄을 울렸다.
이후의 모든 일은 무척이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무대 위의 R를 하나로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미처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날카로운 폭음이 탄환을 조각조각 찢어놓았다. 파편이 샥스핀과 와인 위로 맥없이 쏟아졌다. 권총을 고쳐 잡은 K는 곧장 마호가니 의자를 밟고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세 차례의 발사음이 곳곳에서 한발 늦은 비명을 터뜨렸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R의 드레스 끝자락으로부터 정확히 다섯 발짝 뒤에 떨어져 무대와 내빈석 사이를 갈랐다. 날아들던 나이프가 경봉에 맞아 튕겼다.
“무사하십니까.”
ㅤ“덕분에.”
무대 위의 배우는 그의 어깨 너머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려 구르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을 보았다.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살려줘, 살려주시오! 그가 총을 갖고 있어요! 찢어지는 목소리와 아우성, 불협화음은 엎어지고 깨지는 소리를 반주 삼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혼돈 속에 급히 몸을 숙이는 그림자가 인파 아래로 섞여들었다.
해경의 기민한 눈은 결코 그것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남자의 걸음걸이와 문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망설임 없이 다시 벽을 박찼다. 앞으로 고작 두 번이면 되었다. 낙하 궤적의 가장 높은 곳에서, 머리 앞에 실탄 한 발. 그리고 반 바퀴 돌아 착지하기 전, 뒤꿈치에 칼 한 자루.
총을 떨어트린 남자 앞에 청색과 백색의 제복이 장벽처럼 내려섰다. 수가 틀리자 주먹을 잡쥐고 발악하던 범인은 손쉽게 팔이 꺾였고, 수갑이 그의 팔목을 단단히 조여들었다. 딱, 집행자의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사위를 짓눌렀다. 탄복하는 웅성거림이 파문같이 퍼져나간 뒤 연회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당신을 배우 R에 대한 협박 및 살인미수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
또각, 또각. 깨진 유리와 잔해들 위로 R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한층 어두워진 연회장 조명 아래 쏟아지는 은빛 머리칼은 마치 스스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디 R는 여전히 이곳에서 가장 완벽한 배우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이브닝드레스의 가장 말단까지도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이 온전한 채였다.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R는 입을 열었다.
“아주 훌륭해요, K. 사례비는 어떻게 드리면 좋을까요?”
ㅤ“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말입니다.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연행되는 범죄자를 두고 K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곧 한 치의 오차 없는 거수경례가 뒤따랐다. R의 우아한 인사를 받고, 소임을 마친 해경의 기원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일정한 걸음걸이로 연회장을 나섰다. 화려한 밤의 마지막 불꽃이 막 터진 참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영화배우의 기원은 그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K의 현관문 앞에는 이름 없는 붉은 장미가 놓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은 겨우 흰 포장지로 싸인 녹색 줄기를 쥐었다.
역시 나와는 결이 맞지 않는 인물이군.
K는 그것을 기꺼이 여길 수 없었으나, 적어도 받아들 줄은 알았다. 그나마 쓰지 않는 상자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선선했다. 선물을 하나 보내야겠다고, 막연한 떠올림이 구두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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