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잔 논제
ㅁㅇ님 커미션(2020) / 1차 / 난해한 / 1,600자(크롭)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것을 집어드는 이는 없었다. 끓는 물――약 화씨 200도에 달했을 검은 액체의 군집이, 실내의 공기를 고작 일부조차 데우지 못한 채 자기 본연의 온도로 느릿하게 복귀한다. 변화하던 물질이 생동을 멈추고 초기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을 혹자는 죽음이라 칭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곳의 모든 인원은 일말의 거동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채 한 죽음을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죄책감 따위를 지니기에는 허황되고 지나치게 경한, 그저 무질서로 향하는 하나의 현상 앞에서, 그들 간에는 아마도 유기된 커피의 안위보다 더 중한 사안으로 간주되는 듯한 또 하나의 현상――다른 표현으로는, 죽음――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는 와인을 마셨죠. E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그래서요? 한 문장의 언어가 담아내는 서사는 그리 많은 양이 되지 못했고, K는 자연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아요. 와인은 원래 쓴맛이 나잖아요――알다시피. A은 썩 불만족스러운 낯으로 미간을 좁혔다. 다음. E의 말대로 일관적인 진술들은 특이한 이야기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모순점을 파헤치길 즐기는 그에게 있어 그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도 분명하다. 그게 다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봐도 와인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요?
과연 와인잔에 관한 한 모든 인과 관계는 분명했다. 그것은 와인을 담는 용도로 제작되기에 와인잔이라고 불리고, 와인잔이라고 불리므로 와인을 담는다. 만들어진 목적에 부합하는 물건이란 이리도 편리하다. 반면 인간은, 출생한 모든 인간은 언제나 그 목적이 불분명하다. 생계를 이어가는 까닭은커녕 자신이 걸음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에는 스스로 움직일 뿐 사물들과 다른 것이 없을진대 이것들이 사유할 근거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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