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1

버터버 차

A타입, 1차(던전밥 au) / 11,68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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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고 지지 않는 미궁이지만 숙련된 탐험가라면 몸의 신호와 피로도 따위를 통해 제법 정확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바깥은 아마 슬슬 노을이 지고 있을 테다. 막심과 히르칸은 잠깐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선 여태 쭉 전진해왔다. 중간에 전투가 한 번 있었고 함정도 하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앞서간 파티가 있는지 대부분의 함정이 분해되어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마지막 함정을 보기 좋게 밟아서 가방에 화살이 꽂히긴 했지만.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식사와 체력 관리다. 식료품이 동나는 경우도 허다했고―물론 그 점은 히르칸과 막심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미궁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탈진해 쓰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히르칸은 염려스러웠다. 이 근처에는 잠시 숨 돌릴 구간도 없어 보였다. 당장이야 괜찮지만 앞으로도 계속 걸어야 한다면 곤란했다. 막심은 히르칸에 비하면 체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에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 건데. 그래도 막심은 군말 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잘 닦여 있는 돌바닥 위로 말라붙은 이파리가 간간이 바닥에 밟혔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가끔 어떻게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미궁은 고요했다. 걷는 시간이 길어지니 말이 없어졌다. 종종 침묵이 길어지면 막심은 히르칸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곤 했는데 오늘은 그도 지쳤는지 조용했다. 체력을 아끼는 편이 좋을 테니 잘된 일이다. 그런 질문은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몰라서 대답하기 어렵기도 했고. 그야 미궁 한복판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히르칸의 고민이라고는 그냥 어디서 뭘 먹어야 할지,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할지, 이 철부지 도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게 다였다. 막심을 만나고 나서는 생각해야 할 게 배로 늘었다.

돌연 불길한 울음소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막심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를 따라 소리의 근원지에 눈길을 한 번 던진 히르칸은 내뱉었다. 소위 ‘까마귀’들은 빠르고 산만하기만 할 뿐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위협이 되는 마물은 아니었다. 히르칸과 막심이 얌전히 있는 놈들을 먼저 건드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다만 지상에서나 지하에서나 까마귀들이 요란하다는 건 어딘가에 시체가 있다는 뜻이다. 까마귀 울음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전진하는 막심과 히르칸의 길을 막듯 시끄럽게 울며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곳곳에 흔적을 남겨두었던 앞선 파티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들을 곧 따라잡게 될지도 모르겠다.

히르칸의 예상대로 머지않아 어디선가 옅은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히르칸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췄다. 막심이 가까이 다가와 서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가자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네.”

그렇게 무겁게 한 말은 아니었는데 부쩍 긴장한 눈치였다. 위험한 마물이 있다면 까마귀가 나타났을 리 없으니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겠지만. 뭐, 정신 차려서 나쁠 건 없지. 히르칸은 막심을 제 뒤로 보내고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피비린내는 나아갈수록 짙어지다, 돌길의 끝에서야 천천히 그 진상을 드러냈다. 막심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길 끝에는 광장이라고 해도 좋을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고, 처절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앞으로 엎어진 남자 톨맨과 뒤로 자빠진 여자 톨맨. 몸 아래서부터 새빨간 피가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살아있는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파티는 용케 전멸을 면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생존자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히르칸이 아는 얼굴이었다. 제 몸만 한 활을 들고 있는 하프풋… 늘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녀서 얼굴을 본 사람은 별로 없지만 모험가들 사이에서 워낙 궁상맞게 설치고 다니는 통에 별칭으로는 제법 알려져 있다―스캐빈저라고.

이쑤시개 같은 활을 들고 다니면서 노련한 모험가 흉내를 내니 초보라면 멋모르고 그를 고용하지만 실은 풋내기들 사이에 하프풋 한 명 합류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결국은 2층에서 몰살당한 파티의 소지품을 훔쳐 가거나, 돈만 왕창 쓰고 돌아온 파티에게서 용병비까지 뜯어내고 사라지는 것이다. 히르칸도 스캐빈저와 딱 한 번 일해본 적이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실력이 어떨지는 모른다. 주먹질 한 번에 나가떨어졌으니까. 뭐 듣기로는 ‘무섭게 따지고 들면 자존심은 내다 버리고 넙죽 엎드려 빈다’던데, 안타깝게도 히르칸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이였고… 이번엔 운 좋게 한 대로 끝나 줄행랑쳤지만 어디선가 또 다른 봉을 잡아서 한몫 당기고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스캐빈저는 답지 않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두 사람 사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꼭 이미 숨이 끊어진 이들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다 뒤늦게 히르칸과 눈이 마주쳤다. 그쪽에서도 히르칸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흠칫 눈을 피한 그가 허겁지겁 후드를 뒤집어썼다. 히르칸은 미간을 좁혔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몰라. 가자.”

히르칸은 막심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시 걸음을 뗐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막심이 히르칸의 손을 꼭 마주 잡아 왔다. 눈이 마주치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왜, 또.”

“왜 또?”

“아니… 왜 그러는데.”

“안 도와줄 거예요?”

“두 다리 잘 붙어 있는데 알아서 잘 나가겠지.”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고요.”

히르칸은 남은 손으로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말고도 여기 지나가는 사람 많아. 누가 살려줄 거야.”

“여기까지 못 올 수도 있잖아요. 당장 이 파티도 이렇게 당했는데…….”

“그래, 네 맘은 알겠는데. 마주치는 파티마다 도와줄 순 없어. 또 지금 우리도 빨리 가야 하고…….”

대화가 길어지자 막심이 눈썹을 모았다. 히르칸은 그가 ‘또 애교를 떤다’고 생각했다. 막심이 저 표정을 지으면 꼭 그의 뜻대로 되고는 했던 것이다.

“하프풋 혼자 다시 돌아가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다 컸는데 뭐가 불쌍해? 히르칸은 혀끝까지 치밀어오르는 질타를 간신히 삼켰다. 하기야 단명종이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는 걸 감안해도 스캐빈저는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대답을 미루며 제 머리를 짜증스럽게 헝클어뜨린 히르칸은 이 소모적인 대화를 만들어 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스캐빈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오도카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로만 히르칸과 막심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와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할 걸 그랬나. 히르칸이 입을 다물고 있자 승리를 예감한 막심이 웃었다.

“그럼 도와주든가.”

못 이기듯 고갯짓하자 막심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시체에 다가갔다. 스캐빈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르칸은 눈을 굴렸다.

“딱 이분만 소생해 드릴게요. 소생술을 쓸 줄 아시니까.”

그렇게 말하는 막심의 목소리가 유달리 다정했다. 꼭 선심을 쓰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그게 히르칸을 향한 선심인지, 이 불쌍한 파티를 위한 선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히르칸…….”

히르칸은 막심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저기, 히르칸… 저 발 아픈데…….”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될 것 같다… 라고 말해줄 수 있었지만 히르칸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런 걸 꼭 말해줘야 아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조금 전의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시간이 지체된 건 사실이었다. 막심은 잔뜩 기가 죽은 채 절뚝거리며 히르칸을 쫓아왔다. 걷는 속도가 확실히 느렸다.

 

하룻밤 눈 붙이기에 적절한 방이었다. 두 사람이 모여 있기에 너무 넓거나 좁지 않고, 수상한 가구 없이 그저 모서리와 벽만 있는 정육면체의 방. 주변에 마물의 흔적이 없고 깨끗한 물이 나는 곳도 있다. 이 정도면 되겠군. 히르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막심이 히르칸을 지나쳐 방으로 기어들어 왔다. 늘 반듯하게 다듬어놓는 머리가 땀이 밴 이마 위로 부스스하게 흩어져 있었다. 히르칸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스태프를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막심을 바라보던 히르칸은 고갯짓했다.

“그래, 쉬자.”

그제야 막심이 가방을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둘둘 만 침낭을 의자 삼아 쭈그려 앉은 그가 부츠를 벗는 동안 히르칸은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방의 중앙에 마른 장작을 모았다. 자신도 마침내 나타난 적당한 방이 반갑긴 매한가지였다. 의식하진 못했어도 피로가 착실히 쌓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막심도 소생술을 썼으니 오늘 밤은 푹 쉬어야 할 테다. 불도 좀 쬘 겸 물을 좀 끓이는 게 좋겠다. 저녁은 점심때 먹고 남은 음식으로 간단히 때우면 되겠고…….

“히르칸.”

그즈음 히르칸은 쭈그려 앉은 채 부싯돌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막심의 부름과 동시에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고 마른 장작에 불이 확 붙었다. 히르칸은 그 위에 물이 든 반합을 걸어놓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막심과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그의 발로 눈길이 향했다. 그냥 형편 좋은 엄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부츠에서 꺼내어놓은 막심의 발은 얼룩덜룩 벌겋게 달아오른 게 한눈에 봐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발끝을 오므리며 히르칸의 표정을 살피던 막심은 히르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고개를 살짝 틀었다. 히르칸을 비스듬히 째려보며 막심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프다고 했잖아요.”

“아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거 조금 더 걸었다고…….”

히르칸은 중얼거리며 막심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그의 발을 덥석 잡았다. 이런 고생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보이는 길쭉하고 마른 발은 이곳저곳 짓물러 있고, 마디에는 물집이 잡힐 기미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굴에 꽂히는 눈빛이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괜스레 막심의 발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히르칸은 결국 자신이 조금은 소홀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알았다… 미안.”

물론 히르칸도 할 말은 많았지만,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한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저 처량한 얼굴이며 꼴을 보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거다. 히르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친김에 한 마디 덧붙였다.

“발 씻어 줄게.”

덧붙이자 막심이 볼을 붉혔다. 아녜요, 그가 중얼거리며 히르칸의 손에서 발을 슬그머니 빼냈다. 히르칸은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털며 핀잔을 줬다.

“뭐가 아니야, 씻어야 약도 바르고 내일 또 걸어 다니지.”

“알았어요…….”

못내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막심은 그 말이 내심 싫지는 않은 듯했다. 히르칸은 가방을 뒤져 개중 가장 깨끗한 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막 데우기 시작한 물을 갖고 와 그의 발치에 도로 꿇어앉았다. 한 손에 수건을 덮은 채 막심을 올려다보자 뺨이 발그레해진 막심이 히르칸의 손 위에 발을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묘해졌다. 당연히 싫다는 건 아니었고. 히르칸의 눈에는 고작 이런 행위에도 수줍어하는 막심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발등에 물을 조금 붓자마자 발이 또다시 손아귀에서 쏙 빠져나갔다. 히르칸은 황당한 얼굴로 막심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별로 안 따뜻해요.”

“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부분까지 귀여운 건 아니었다. 끓는 물로 씻겠다는 것도 아니고. 히르칸은 불 위에 반합을 다시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거나 좀 갖고 있어.”

“어디 가게요?”

수건을 툭 던져주자 막심이 그것을 받아 곱게 접으며 되물었다. 히르칸은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치며 짧게 내뱉었다.

“밖에.”

막심은 지극히 짧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게 히르칸의 고질병이라는 걸 알게 된 듯했다. 막심을 잠시 내려다보던 히르칸은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였다.

“금방 올게.”

미덥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던 막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르칸은 방에서 나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띄게 지친 막심을 보자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원래는 쓸모도 없고 중층 아래로는 흔해 빠진 식물이라 지나쳤지만… 오래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허리까지 솟아 있는 잎이 뾰족한 풀이었다. 히르칸은 이 식물의 뿌리가 마물의 시체를 흡수하는 걸 본 적 있다. 이건 주변의 흙을 죄다 모래처럼 말라 부스러지게 할 정도로 마력 흡수율이 높았다. 그러나 오크들조차도 이 풀이 단순히 생명력 질긴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이 풀의 특징이 어디까지나 그게 전부기 때문이다. 근처에 숙소라도 세웠다간 다음날 뿌리에 뒤덮여 마력을 갈취당하기 십상이고, 꺾어서 버리자니 거기서 다시 뿌리를 내려 자라나고, 태워서 없애자니 마력을 한계까지 머금은 풀에다 불을 갖다 댔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거기다 잎은 뻣뻣하고 겉에 따가운 솜털이 있어서 식용도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말대로 웬만한 잎에는 마물에게 먹힌 흔적도 없다. 그렇지만…….

마물들도 먹을 수 있었으면 먹었겠지. 히르칸은 허리를 숙여 발치에 떨어진 잎을 주웠다. 시든 잎은 불그스름한 빛이었고 줄기에 붙어 있을 때보다 확연히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잎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려보면 촉감은 부드러운데다 특유의 거친 솜털도 느껴지지 않았다. 히르칸은 그런 잎을 두어 줌 정도 주워 담았다. 그리고 내친김에 줄기도 몇 개 꺾었다. 까끌까끌한 촉감이 손바닥에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물에 가볍게 헹군 풀을 가득 안고 돌아오니 막심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멍하니 불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이 한참 끓고 있어 좁은 방은 훈훈했고, 간헐적으로 마른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훤칠한 놈이 작은 모닥불 앞에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앉아 있으니 불쌍해 보였다. 히르칸은 짧게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물을 내려놔야지. 그걸로 발 씻을 거냐?”

그제야 히르칸에게로 눈길을 돌린 막심의 눈이 커졌다.

“그건…….”

뭐예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는데.

“버터버잖아요?”

“버터버?”

히르칸이 되물었다.

“네, 정식 명칭이 그래요. 마법학교 연구실에서 샘플로 몇 개 보관하고 있거든요. 미궁에서만 나는 식물이에요.”

“이런 잡초를? 왜?”

막심의 곁에 털썩 걸터 앉은 히르칸은 나이프를 꺼내 길쭉한 줄기를 전부 반합에 넣을 수 있도록 끊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러자 막심이 전에 없이 반듯하고 조리 있는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테라리움을 만들었다느니, 마력의 순환 구조를 어떻게 한다느니, 무슨 효과가 있다느니. 분명 굉장히 박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텐데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의 한 귀로 흘리다시피 듣던 히르칸은 막심의 입에서 다시 버터버, 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불쑥 말을 끊었다.

“그래? 먹어봤어?”

그러자 막심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잎이 섭취하기에 부적절해서 웬만한 마물들도 안 먹는다고 했어요. 그리고 마력 함유량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에너지원으로서의 효용도…….”

“그래도 너 한 사람 챙길 정도는 되겠지. 안 그러냐.”

“그런가…….”

그래도 막심은 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마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먹기 싫어서인지. 막심에게 시든 잎을 하나 내밀자 그가 그것을 받아 만지작거렸다.

“이거 봐. 시들면 이렇게 부드러워지고 솜털도 가라앉아서 평범해져.”

“그럼 이걸…….”

“뭐 씹어 먹자는 건 아니고. 끓이면 마실 만하지 않겠어?”

그러자 막심은 조금 오래 고민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잎을 먼저 반합에 넣었다. 그를 따라 나머지 잎을 끓는 물에 모조리 넣으며 히르칸은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웬일로 먹기 싫단 소리를 안 하네.”

“낮에 소생술을 쓰기도 했고요, 또… 이건 그냥 식물이니까. 왠지 괜찮아 보여서요.”

막심이 변명하듯 길게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히르칸은 짧게 웃었다. 여태껏 먹은 식사를 생각해 보면 막심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쥐 고기니, 도마뱀 꼬리니 별걸 다 먹으라고 입에 밀어 넣었으니까. 그런 음식들에 비하면 ‘버터버 차’는 만드는 것도, 맛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시든 버터버 잎을 몽땅 끓는 물에 넣고 뚜껑을 연 채로 3분 정도 끓인다. 수증기에서 달콤한 향이 나기 시작하면 1분 정도만 더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 4분가량 지나 버터버 잎의 색이 물에 빨갛게 우러나면 반합을 불에서 치우고 한 김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 물이 어느 정도 식은 걸 확인한 히르칸은 반합을 집어 그 내용물을 막심의 컵과 제 컵에 차례로 따랐다. 막심이 조금씩 흔들리는 수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보니까 꼭 홍차 같네요. 냄새도 그렇고.”

“그냥 빨간 물 같은데.”

히르칸을 한 차례 흘겨본 막심이 손에 컵을 꼭 쥔 채 고갯짓했다.

“히르칸이 먼저 마셔봐요.”

그 정도야 뭐. 히르칸은 서슴없이 컵을 기울여 입에 한 모금 머금어보았다. 분명 향기는 달았는데 입안에 감도는 맛은 씁쓸했다. 맛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따뜻한 걸 마시니까 몸이 좀 풀리는 것 같다. 히르칸은 짤막한 소감을 내뱉었다.

“어, 쓰다.”

그러자 막심이 미간을 좁힌 채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꼭 긴장한 것처럼 김이 폴폴 올라오는 수면을 조금씩 불어 식히던 그가 마침내 차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달콤한데요?”

“그래?”

“음, 네. 차라고 생각하면…….”

히르칸은 막심을 곁눈질했다. 얜 평생 유리병 속에 담긴 곱고 비싼 찻잎만 먹어봤을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시든 잎으로 끓인 차여도 마음에 드는 건가. 말꼬리를 흐리던 막심이 한 번 더 컵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차를 조금 더 길게 들이킨 그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마실 만해?”

“네. 히르칸 말대로… 조금 느리지만 마력도 확실히 회복되네요.”

“다행이네. 나는 마법을 쓰질 않으니까.”

히르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력 회복에 대해선 영 아는 바가 없었지만 체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마력도 낭비하고 비실거리는 마법사들을 많이 봐왔다. 임시방편이 효과가 있었다면 다행이었다. 히르칸이 그런 생각을 하며 한쪽 무릎에 팔을 올려놓은 채로 차를 위스키처럼 홀짝이는 동안 막심은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던 모양이었다.

“우유랑 꿀을 조금 넣어도 좋을 것 같아요.”

“달다며?”

“차는 그렇게 마셔도 맛있거든요.”

중얼거리며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막심이 문득 몸을 조금 기울였다. 팔뚝에 막심의 몸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가 히르칸에게 기대어 있었다.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히르칸은 도로 입을 다물고 시선을 앞으로 둔 채 차를 한 번 더 홀짝이기만 했다. 히르칸은 차의 향미 같은 건 알지 못했다. 혀끝에 느껴지는 맛은 여전히 쓰기만 했다.

“…어릴 때는 집에서 꼭 오후에 한 번씩 티타임을 가졌어요.”

막심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을 한 막심이 고급스러운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히르칸은 상상 속 어린 막심이 아니라 나란히 불빛을 받는 두 사람의 발끝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양이 많지 않은 장작은 거의 다 타들어 불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그 채도 높고 어둑한 불빛 앞에 닳아서 해진 가죽 부츠와 빨갛게 달아오른 맨발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그 광경에서 눈을 떼기 싫어서, 그것을 바라보느라 막심이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그가 종종 그러하듯이 제 몸 어딘가에 시선이 닿아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눈을 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건조하고 삭막한 미궁의 공기는 이제 제법 습윤해졌고 그의 목소리는 이렇게나 부드러우니까.

“미궁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히르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건 히르칸도 마찬가지였다. 이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히르칸은 막심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 자신이 언젠가 똑같은 감상을 느끼고 공유하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

 

남은 물로는 시들지 않은 파란 잎들을 데쳤다. 1분도 안 되어 숨이 죽은 잎들을 건져놓고 열기가 남은 상태에서 잘 으깨면 제법 약초 같은 모양새가 됐다. 히르칸은 그걸 균일하게 펼쳐 막심의 발에 물집이 잡힌 부분마다 잘 붙여놓았다. 찻물로 진물을 닦아낸 발이 반들거렸다.

”어때?“

”음. 안 아파요.“

”따갑지도 않아?“

”네, 시원해요.“

”그럼 됐네. 이러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잠깐만.“

풀이 고루 펼쳐지지 않고 뭉쳐 있는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막심이 움찔 발을 오므렸다.

“왜? 아파?”

“간지러워서요…….”

“아픈 건 참고 간지러운 건 못 참아?”

“당신이 자꾸 일부러 만지작거리니까.”

“내가 언제 그랬어.”

“히르칸.”

막심이 불쑥 히르칸을 불렀다. 공을 튀기듯 둘 사이를 쉼 없이 오가던 대화가 뚝 끊겼다. 히르칸은 왜, 되묻는 대신 막심과 눈을 맞췄다. 막심이 입술을 달싹이다 조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낮에 만난 파티 도와주자고 말했을 때요.”

“응.”

“히르칸이 저한테 ‘왜, 또…’ 그랬잖아요.”

“응.”

“그렇게 말해서 서운했어요.”

“알았어. 다시 안 그럴게. 됐지?”

차분하고 낮게 흘러나오는 대답에 막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르칸은 아이의 투정이나 다름없는 막심의 고백에 자신이 그토록 빠르게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는 것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다물린 입을 힐끔거리던 막심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해요?”

히르칸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낮에는 웬일로 안 묻나 했다.”

히르칸의 거친 웃음소리에 막심이 괜히 제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땐 너무 오래 걸어서. 둘 다 바빴잖아요.”

“바쁘긴 뭐가 바빠. 계속 걷기만 했는데.”

“바빴거든요. 당신이 엄청나게 서둘렀으니까…….”

막심의 애교 섞인 투덜거림을 끝으로 다시금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어색함 없이 오간 대화에도 왜인지 막심과 히르칸은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았다. 히르칸은 잠시 제 뒷덜미를 만지다 손을 뻗어 막심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막심이 그제야 히르칸과 눈을 마주쳤다. 원래도 따뜻한 색을 띤 그의 피부는 걸핏하면 붉어지곤 했다. 히르칸은 처음에 그게 단순히 막심의 타고난 성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왜 자꾸 물어보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하는 생각은 늘 똑같아.”

“…….”

“저녁엔 뭘 먹을지, 언제 어디서 쉴지, 그런 거. 너랑 내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 앞에서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히르칸 그 자신도.

당연한 소리를 하는데 왜 이렇게 낯뜨거운 말을 입에 담은 것처럼 느껴지는지. 히르칸은 입을 여는 순간부터 차라리 대답하지 말걸, 후회했고, 문장을 끝맺을 때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힘을 줘야 했다. 다만 우리, 라는 단어만큼은 제법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고… 막심이 살며시 웃을 때는 그마저도 후회하게 됐다. 답지 않게 너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대신 차라리 그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하냐고…….


1) 버터버 Butterbur, 식물, 크기 120cm, 서식지 미궁 지하 제4계층 이하. 마력이 풍부한 토양에서 자라나는 식물. 그러나 자라는 과정에서 마력을 몽땅 흡수하기 때문에 토양은 황폐해지고 근처 식물은 시들어 죽는다.

땅 밑의 기는 줄기를 통해 퍼진다. 지상의 식물보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근처 지면에 놓여있는 것들을 모조리 흡수하기 때문에 일종의 시체 분해자 역할을 한다. 마력 공급원이 없으면 가장자리의 줄기부터 시들고 잎이 떨어지면 그것을 양분 삼아 다시 자라난다. 이 과정이 모든 줄기가 시들 때까지 반복된다. 청록색 잎은 두껍고 뻣뻣하며 뒷면엔 솜털이 있는데 개인에 따라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빨갛게 물이 들면 잎이 시들고 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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