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1

쥐고기, 줄기콩, 콩 통조림

A타입, 1차(던전밥 au) / 7,143자

SAL by 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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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막심의 목소리였다. 히르칸은 힘껏 꽂아 넣은 나이프를 뽑고 얼굴에 튄 피를 쓱 문질러 닦았다. 쥐를 닮은 그 마물의 목은 히르칸의 마지막 일격에 거의 끊어져, 몸뚱이를 집어 들자 흉하게 덜렁거렸다.

라투스 라투스. 4계층에 진입하는 파티가 흔히 볼 수 있는 쥐 마물이다. 정확히는 보는 게 아니라 식량 가방을 쏠아 먹은 자국이나 쥐똥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지만. 히르칸은 미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찐 쥐를 본 적이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먹기 때문에 시체와 마물과 기타 생물이 널린 미궁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음식물 쓰레기통, 바꿔 말하자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혼자 있을 때는 덩치가 큰 동물들을 피해 다니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 않지만, 무리 사냥을 하기 때문에 그 개체수가 많아지면 소수 파티는 전멸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미궁의 중심부에서까지 무리를 마주치는 일은 드문데…….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외마디 신음을 끝으로 한동안 자리에 굳어있던 막심이 뒤늦게 발을 끌며 다가왔다. 등 뒤에서 순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못 해서.”

“아니다…….”

히르칸은 주변에 널린 마물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영혼 없이 중얼거렸다. 지난번 마물과 싸우던 도중 터무니없이 큰 폭발에 휩쓸려 목이 부러질 뻔한 이후로 히르칸은 그가 지팡이를 드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막심은 뭘 하겠다는 생각을 관두는 편이 더 도움이 됐다. 그와 함께 4계층까지 내려오면서 깨달은 것은 차라리 몸이 힘들더라도 혼자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미궁의 천장까지 솟아 있는 나무를 훑어보았다. 굵은 나무둥치며 가지마다 전부 감겨 있는 매끄러운 덩굴에는 가만 보니 알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큰 군집은 본 적 없어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마물의 둥지였던 모양이다. 식물에서 자라는 동물이라니, 이건 식물과 동물 중 어느 쪽일까. 그야말로 미궁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생물이긴 하다.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이미 터진 알집의 껍데기나 잘 영글어가는 알집이 발에 채였다. 이것들을 다 태우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래서 이 층이 안전해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히르칸이 서성거리며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갈 때쯤 그의 뒤에서 기웃거리던 막심이 조금 전보다 초조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갈까요?”

“왜? 다 죽였는데.”

“아니, 제 말은. 음… 아까 전부터… 그걸… 왜 줍는지 싶어서요.”

막심은 느리고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눈짓했다. 히르칸은 그를 따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악스럽게 쥔 주먹 위로 굵은 쥐꼬리 끝이 툭 툭 튀어나와 있다.

조금 전부터 시체가 성한 라투스들을 골라내던 참이었다. 이유는 이젠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한 마리면 끽해야 별 볼 일 없는 쥐새끼인데 한 손에 모아들고 있으니 제법 묵직하다.

마물이 또 나타날까 봐 초조한 게 아니었나. 제 손아귀에 걸려 고기처럼 매달려 있는 몸뚱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르칸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흠, 글쎄.”

글쎄? 금방이라도 그렇게 되물을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든 히르칸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해 보았다. 슬슬 허기가 지는 걸 보니 저녁때가 된 모양이다. 물론 히르칸에게 허기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심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거기다 만에 하나 이동한 지역에서 또 다른 마물을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2인 파티가 전멸하는 건 순식간이다. 아무리 히르칸이라 해도 애 하나를 지키면서 끊임없는 전투를 당해낼 수는 없으니까. 침묵이 길어지자 막심이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쯤 히르칸은 결론내렸다.

 

사실 정말로 휴식이 필요한 것은 히르칸이 아니었다. 식사도 하고 쉬기도 해야지. 히르칸은 눈을 떴다.

“여기서 좀 쉴까.”

막심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게, 아마 그도 히르칸의 속내를 짐작한 듯했다.

 

*

 

“히르칸은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옛날에 과학자 노움이랑 같이 다녔어.”

“그 노움도 이런 걸 먹었어요?”

“식량이 다 떨어져서. 먹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먹였지.”

“아…….”

모호한 반응을 마지막으로 말이 없어진 막심은 쭈그려 앉은 채 반합의 물기를 하염없이 털어냈다. 반합은 안쪽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나름 깨끗했다. 막심은 깔끔을 떠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설거지를 맡겨놓으면 곧잘 했다. 물그릇과 찬합 뚜껑, 나무 수저도 꼼꼼히 씻었다. 히르칸은 소리로만 짧게 코웃음을 치고 물에 담가두었던 라투스 중 마지막 한 마리의 꼬리를 잡아 물에서 건져냈다. 흐르는 물에 담가두었던 라투스는 보기 좋게 피가 빠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물에 가까운 생물이지만 다른 식물류에 비해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런 상황에는 고기가 아쉽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을 히르칸에게 가르쳤던 노움은 좀 더 유식하게 말했던 것 같고… 고기 대신 먹어도 좋다는 말 같은 건 한 적 없었지만, 히르칸이 받아들이기로는 그랬다. 그리고 결국 라투스의 고기가 식용 가능하다는 걸 둘이서 직접 증명하게 되지 않았던가. 히르칸은 쥐의 몸통에다 능숙하게 칼집을 내고 가죽처럼 생긴 껍질을 쭉 당겨 벗겼다. 살점을 깍둑썰어 넣고, 물기가 빠지면 아직 익지 않아서 얄따란 알집들도 같이 넣고 뒤적거리며 볶았다.

이어 통통하고 굵직한 알집을 집어 들었다. 나이프로 길게 긋고 벌리면 묽은 점액으로 뒤덮인 타원형 모양의 알이 냄비 안으로 쏟아졌다. 씨알이 생각보다 작아서(새끼손톱만 했다) 양이 제법 많았다. 가르기 전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이건 동물의 알이라기보다도 식물의 씨와 비슷해 보였다. 배는 부르겠군. 중얼거리자 막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헛구역질이라도 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막 미궁에 들어왔을 때보단 비위가 강해졌는지, 막심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광경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맛있어 보여서 쳐다보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히르칸은 잠깐 고민했다.

“토마토. 남은 거 있어?”

막심은 그런 걸 비상식량처럼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다 하나씩 꺼내먹고는 했다. 히르칸의 물음에 막심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꾸물거리며 주머니에서 방울토마토를 몇 알 꺼냈다. 히르칸은 손을 거두는 시늉을 하며 짧게 혀를 찼다.

“주기 싫으면 그냥 이대로 먹든가.”

“아니에요, 여기요.”

그러자 막심이 곧바로 히르칸에게 주머니를 덥석 쥐여주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탈탈 털어보니 손에 놓인 토마토는 총 너덧 개 정도 되었다. 나이프로 반 갈라 반합에 쏟아붓고 숟가락으로 사정없이 으깨자 막심의 눈이 처량해졌다. 불쌍한 놈. 마물을 으깨고 삶아서 먹자는데 요리법도 근본 없이 제멋대로니 막심으로선 고역일 테다. 처음엔 그저 팔자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난번에는 ‘네가 허튼 데다 돈만 안 썼어도 이런 음식 먹을 일 없었다…’ 라고 했는데 막심이 완전히 토라져서 히르칸은 팔자에도 없는 아부를 떨어야 했다(‘화 풀어, 인마’라고 하며 막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생각해 보면 사기당한 놈은 죄가 없다. 사기 친 놈이 죽일 놈이지. 혀를 차며 히르칸은 죽을 휘저었다. 휙휙. 처음에는 묽기만 하던 죽이 차츰 점성을 띠며 끈적해졌다. 히르칸은 군에서 가끔 남은 식량을 죄다 쏟아 넣고 끓여 먹을 때랑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생각난 김에 남은 걷는 버섯과 깨끗하게 씻은 이끼까지 뜯어 넣고 뚜껑을 비스듬히 닫았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건 제법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살짝 얹어두었던 뚜껑을 치우자 가장 먼저 뿌연 김이 얼굴로 쏟아졌다. 이어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선명해지며 그 안에 든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르칸과 막심은 머리를 모은 채 반합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하고 되직한 색에, 사이사이 고깃덩어리나 잘 익은 이끼들이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열었다.

“이건…….”

히르칸은 잠시 말을 멈춘 채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냥 고갯짓했다. 막심이 알아서 그릇을 내밀었다. 반합에 든 것을 조금씩 떠내어 그릇에 담자 냄새가 확 풍겼다. 맛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냄새는 제법 맡아줄 만했다. 토마토 덕분인가.

“먹어라.”

접시를 막심의 면전에다 내밀자 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여태 먹었던 것들은 적어도 수상한 모양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버섯을 구웠구나, 고기를 구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직관적인 생김새였다면, 이번 음식은 히르칸이 보기에도 썩 미덥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먹을 수 있는 것만 넣었는데 못 먹을 건 또 없지. 접시를 불편하게 든 채 좀처럼 첫술을 뜨지 못하는 막심을 두고 히르칸은 반합 뚜껑에다가 제 몫을 툭툭 덜었다. 그리고 고기가 있는 부분을 떠서 입에 넣어 보았다. 죽은 뜨거웠고, 토마토 때문에 조금 시큼했고, 끝맛이 달짝지근했다. 고기는 쥐보다는 닭 냄새가 났고 일반적인 고기보다 잘 부서졌다. 버섯과 이끼가 고소하고 씹는 맛이 있어서 제법 음식다운 느낌을 줬다. 마지막으로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알을 삼킨 히르칸은 막심에게 눈짓했다.

“뜨거워.”

못 먹을 맛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자 막심이 머뭇거리다 죽을 콩알만큼 떠서 입에 넣었다. 혀에 닿기도 전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을 우물거리던 막심의 미간이 곧 살짝 펴졌다. 그 광경에 무심코 웃음을 띤 채 물었다.

“괜찮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떠서 입에 넣었다.

“밖에서 먹는 것 같아요.”

“그러냐.”

그 정도인가. 요즘 뭘 못 먹어서 저러나.

“이상할 것 같았는데… 근데 이런 수프도 나쁘지 않네요.”

내내 죽상을 하고 있던 게 민망했는지 숟가락을 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막심이 웅얼거렸다.

“수프. 좋네.”

그를 따라서 중얼거리자 막심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히르칸은 그를 모르는 체하고 죽―그러니까, 수프를 열심히 떠먹었다. 조금 전까지는 꿀꿀이죽이라는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다 막심이 불쑥 묻는 소리에 손을 멈췄다.

“다치셨네요?”

반사적으로 몸을 내려다보아도 딱히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다.

“어디?”

“잠깐만요. 여기…….”

막심의 손끝이 히르칸의 뺨에 닿았다.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히르칸은 그냥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상처가 조금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히르칸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 짧게 혀를 찼다. 한 손엔 반합 뚜껑을,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쥐고 한참 어리숙한 놈이 얼굴을 더듬도록 두고 있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그때 치료해 주면 될걸.”

“몰랐어요. 피가 너무 많이 튀어서.”

“됐어. 별것도 아니야.”

“왜 별거 아니에요. 제때 치료해야…….”

“할 거면 좀 있다 해라, 응? 지금 먹는 중이잖아.”

그가 괜히 고집을 부리는 통에 무심코 짜증을 내는 것처럼 말이 나갔다. 막심은 섬세한 성격이었다.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상하든가 말든가, 괜한 반발심에 속으로 투덜거리다가도 그 후로 한참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반합 뚜껑을 확 기울여 남은 것을 입에 밀어 넣으며 히르칸은 막심을 흘끗 훔쳐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의외라고 해야 할지. 스쳐 지나가듯 마주친 시선은 못마땅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모호하고 흐릿한 얼굴이었다. 이를테면 걱정하는 듯한…….

 

*

 

식사를 마친 히르칸과 막심은 식기들을 헹궈놓고 근처 물가에서 간단히 몸을 씻었다. 흔들리는 수면에 비친 제 얼굴에는 닦이지 않은 핏자국이 어지러워 상처가 어디 있다는 건지 찾기 어려웠지만, 얼굴이며 목덜미를 거칠게 문질러 씻는 동안 상처는 줄곧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제 위치를 알려왔다. 용케도 여태 몰랐다 싶었다. 고통에 정도 이상으로 무뎌지는 게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제 몸이 어떤지조차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 결국엔 자멸하게 된다.

 

막심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뺨을 감싸자 꼭 어울리지 않는 옷을 한 데에 쌓아둔 것 같았다. 얼굴과 손이 닿았는데 꼭 그의 손이 상하기라도 할 것 같았다. 히르칸은 가까이 붙어서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고 있는 막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그래도 도움 되는 구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일단 그는 히르칸의 고용주인 데다가, 그래도 좋은 곳에서 좋은 교육 받으신 도련님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한창 불을 피우고 끓여서 그런지 막심의 뺨에는 발그레하니 열이 올라와 있었다. 히르칸을 마주 보며 눈을 깜빡이던 막심은 곧 어느샌가 영창이 끊긴 것을 자각하고 다시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전보다도 작아진 목소리가 얼핏 들으면 제게 가까이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괜히 엘프들은 죄다 간지럽게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고.

“꼭 이렇게 가까이서 해야 하는 거냐?”

“얼굴을 봐야 아픈지 어떤지 알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마법이 잘못될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좀 떨어져도…….“

“싫으세요?”

말문이 턱 막혔다. 싫고 좋고 할 게 있나. 남자끼리 얼굴 좀 붙어 있는 게 뭐 어떻다고. 그냥 좀, 부담스러워서 그러지. 아니, 조금은 신경이 쓰이나. 아니… 잘 모르겠다. 히르칸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막심은 그가 꼭 시비를 걸기라도 한 것처럼 슬쩍 눈을 흘겼다.

“자꾸 말 걸지 마세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요.”

“알았다…….”

히르칸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평소에는 만만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를 이기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막심의 말대로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걸지도 몰랐다. 이제는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여기도 저기도 영 불편해진 까닭이다. 히르칸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결국 막심이 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온기 아래서 벌어진 살갗이 차츰 입을 다무는 게 느껴졌다. 찬 바람이 드나들듯 시리던 통증은 따끔거리는 불편함으로, 성가신 간지럼으로 차츰 옅어지다 머지않아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민낯에 닿은 온기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떨어질 줄을 모르고 뺨 위에 앉아 있었다.


1) 라투스 라투스 Rattus Rattus, 화충류, 크기 40~80cm(머리에서 꼬리까지), 서식지 미궁 지하 제3계층 이하. 대형 설치류와 비슷하게 생긴 생김새. 보기와 달리 이빨이 매우 날카롭고 치악력이 강하다. 무리 생활을 하며, 보통 작은 생물을 사냥해 잡아먹지만 무리의 개체수가 많을 경우 큰 사냥감을 노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최대 20~30마리가 같이 다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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