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리르]빛 같은 사람
2019. 2. 13. 작성 | 공백 미포함 2,489자
※그랜드체이스 for kakao 대사 일부 인용
휘영청 밝은 달이 오늘따라 시리도록 푸르다. 한숨을 내쉬고 숨을 다시 들이켜면 차디찬 밤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운다. 혼자 나무 위에 앉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정적이 더 크게 다가온다. 주변이 조용하면 내면의 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약해빠졌군요.」
비수를 꽂든 예리했던 그 말. 다시 생각해봐도 까드득 이가 갈린다. 차원을 오가며 내가 약해졌다는 건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 언젠가 죽을 수 있는 것을 알기에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더 발버둥 쳤다. 내가 죽더라도 동료들은 실패하지 않도록. 그러나 발버둥 끝에 돌아온 것은 지독한 패배와 생생한 악몽, 그리고 치욕이었다.
"카제아제..."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독기가 입안에 퍼지는 기분이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나 역시도 조금은 그 녀석의 그늘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아니 잊기도 전에 나타나는 그 녀석 모습에 치가 떨린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보이는 건 악몽뿐이다. 나는 언제쯤,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날이 내가 죽기 전에 오기는 할까.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져 온다. 한숨을 내쉬며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딱딱한 감촉이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이 느껴져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카제아제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고 그랜드 체이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나. 그날도 오늘처럼 달빛이 참 밝았다. 그런 아름다운 밤에 나는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 더 잘 수가 없어서 근처를 서성거렸다. 숲속은 카제아제 성만큼이나 어두웠다. 꿈속이든 이곳이든 어둡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적당히 다른 생각을 하며 해가 뜨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라스님?"
그때 네가 나에게로 왔다. 지금처럼. 아래를 바라보니 리르가 그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걱정스레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네 금빛 머리카락은 빛을 잃지 않는다. 졸린 듯 눈을 비비는 너를 보며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리르."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리르는 가볍게 뛰어올라 바로 내 옆에 앉았다. 나무가 한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에메랄드 같은 네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난다. 반짝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러셨군요."
리르는 짧은 대답이 끝나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상황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은지 리르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항상 주위를 세심하게 챙기려 말을 걸고 다녀도 대화를 불편해하는 내 곁에서는 이렇게 침묵을 지켜주었다. 한 번은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나와 있는 게 지루하거나 불편하지 않냐고 물으니 리르는 어김없이 웃으며 이렇게 답했었다.
「억지로 말하려 하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바라봐도 즐거운걸요.」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나는 그렇긴 했다. 실제로 리르와 함께 있으면 뭔갈 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으니까. 마치 봄 햇살을 받은 것처럼. 태양을 쏘는 명사수. 그 칭호와 다르게 내 눈에 너는 태양 그 자체로만 보였다. 그 빛을 받으면 따스하면서도 정말 내가 이 빛을 받고만 있어도 되는지 불안하기도 한. 그래서 널 지키고 싶었다.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도 그 순간 날 따스하게 감싸준 널 위해서 너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고, 항상 주변을 챙기는 네가 걱정을 덜 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결국 난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과거에 시달리고, 제대로 속죄 못 할 정도로 나약하다. 표정이 구겨지려는 것을 네가 걱정할까 봐 그저 눈을 감았다.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길게 내쉬며 느리게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여전히 어둠뿜니다.
"별이 참 예쁘네요."
"뭐? 별이 예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이 너무나도 뜬금없는 소리라 나도 모르게 반문해버렸다. 다시 물어보듯 옆에 있는 리르를 바라보니 리르는 그저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드넓게 펼쳐진 남청색의 하늘에 초승달이 하나 걸려있었고, 그 주위를 무수한 별들이 감싸고 있었다. 별이 이렇게 많았던가.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아니면 집중한 덕분인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내 어둡게만 보이던 밤하늘이 빛무리로 가득 찼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에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으니 리르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을 걸어왔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져요."
그렇지 않나요? 내게 날아든 질문에 고개를 돌리니 리르는 나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별로,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듯이 말하니 리르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있죠, 저는요. 라스님은 별 같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번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르는 그저 웃으며 내 쪽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연속으로 갑작스러운 리르의 모습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고, 리르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리르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 입을 더 꾹 다물었다. 리르는 내 속도 모른 채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려는 것인지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별처럼 어둠 속에서 조용히 제빛을 발하고 계시니까요. 누가 보지 않아도, 구름에 가려져도 변함없이... 저는 그런 라스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가. 혹시 얼굴 붉어지진 않았을까. 뒤늦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착지하고서 위를 올려다보니 리르가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한 방 먹었네. 아까완 다른 한숨을 흘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 놀리니 재미있어?"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인걸요~"
리르는 말꼬리를 늘리며 나와 똑같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반동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걸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리르가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밤바람이 차네요. 이만 돌아가요."
"...그래."
손을 못 본 척 무시하고 먼저 걸어가 버려도 리르는 군말 없이 내 옆으로 따라와 함께 걸었다. 혹시라도 시선이 마주치면 리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역시 더 강해지고 싶다. 네 곁에 있기 위해, 네 말대로 별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때에는 지금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 웃어줄 수 있겠지. 내일 일어나면 검술 수련부터 하자. 그리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분 탓인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아까보다 밝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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