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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타카] 너와의 하루를

2021. 8. 24. 작성 | 공백 미포함 1,899자

※ 유의사항

- 서머타임 레코드 이후, 루프가 끝난 시점

- 하루카, 타카네 동거하고 있다는 전제


 8월 말, 시기를 놓친 태풍 하나가 뒤늦게 찾아왔다. 벌써 3일째. 바람도 센 탓에 밖에도 못 나가고 있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루카와 그의 동거인은 실내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시한폭탄 같은 몸을 가진 그들에게 바깥은 위험하기만 했으니까.

연신 비를 뿌려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카는 느리게 펜을 움직였다. 하늘만큼이나 그의 스케치북도 어두컴컴하게 물들어 있었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종이에 사각사각 펜이 스치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리고 곧이어 요란한 게임 소리가 모든 소리를 덮어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일어난 건지 타카네가 잠옷차림인 채로 게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총탄과 혈흔이 난무하는 화면에도 불구하고 타카네는 태연하기만 했다. 잠시 손을 떼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여유도 선보였다.

시끄러운 탓에 집중력이 깨졌을 텐데도 하루카는 그저 작게 웃었다. 아예 몸을 돌리더니 스케치북을 한 장 넘겨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둥글게 쪼그린 몸,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집중하느라 찌푸려진 미간... 칙칙하기만 했던 풍경화와 달리 이번에는 생기가 넘기는 그림이 흰 종이에 펼쳐졌다. 조금만 더 명암을 덧그리면 끝날 텐데, 하루카는 스케치와 타카네를 번갈아 보더니 돌연 펜을 내려놓았다.

"타카네, 나 말이야."

"응."

부르길래 대답은 했지만 왜인지 하루카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침묵이 신경이 쓰여 하루카를 흘끔거리는 타카네를 봐줄 정도로 게임은 만만하지 않았다. 한 번 적을 놓치기 시작하니 HP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깎여나갔다. 결국 뜬 패배 화면을 본 타카네가 얼굴을 와작 구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타카네가 하루카를 봤지만 하루카는 그저 창밖 먼 곳을 응시하기만 했다. 입이 몇 번 달싹이더니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나 죽는다면 타카네보다 하루 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뜬금없이 날아온 죽음 얘기에 타카네 손에 힘이 풀렸다. 소파 위로 떨어진 게임기가 반동으로 튀어 오르더니 이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에 시선 한 번 주질 않고 타카네가 쪼르르 하루카 곁으로 다가갔다.

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하루카는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눈동자도 흔들림이 없고, 입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카는 언제나 그랬다.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도, 병원에 입원 중일 때에도. 그때와 똑같이 덧없는 모습이 불안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타카네는 다급하게 하루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부드러운 감촉에 하루카는 타카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자 하루카가 눈을 반달로 곱게 접어가며 웃었다.

"이제는 다른 친구들도 많지만, 타카네는 가장 소중한 사람인걸. 타카네가 없으면 많이 외로울 것 같아."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모든 색채가 빼앗긴 것처럼 새하얗기만 하던 아지랑이 데이즈.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넓은 그곳에서 자신은 홀로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 꽂힌 링거가 그의 몸을 붙들었다. 힘주어 외친 이름은 허무하게 날아가고, 코노하의 시선을 빌려도 검은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던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절망과 고통의 굴레 속에서 벗어났다지만, 네가 없는 세상과 그곳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네 미소를 볼 수 없는 세상이 그곳과...

"이... 이 바보 하루카!"

"아야!"

생각에 잠겨가던 하루카를 타카네가 딱밤 한 방으로 끌어올렸다. 손은 작은데 왜 이렇게 매운 걸까. 눈물 한 방울이 찔끔 흘렀다. 혹이 났을까 봐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하루카는 타카네를 보았다. 다시 마주한 타카네의 표정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잔뜩 찌푸린 미간은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게 그대로 보였다. 분명 맞은 건 자신인데 타카네가 더 아파 보였다.

"타, 타카네? 울어?"

"죽는다느니 뭐니 그런 소릴 대체 왜 해?!"

그런 소리 할 시간에 더 같이 있으면 되잖아, 이 멍청이야! 버럭 화를 내던 목소리는 점차 눈물에 젖어 들었다. 옷 위에 점점 찍혀가는 눈물 자국에 하루카는 당황하여 타카네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울지마. 더듬더듬 반사적으로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자 타카네는 그 품에 안겨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빗소리도 덩달아 거세졌다. 아무리 사과하고 토닥여도 화가 단단히 났는지 타카네는 울면서도 계속 웅얼거렸다. 어떻게 네 생각만 하냐고, 남겨질 내 생각은 안 하냐고, 기껏 여름도 끝나가는데 불길한 소리 말라고... 말투는 사나웠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떨어질까 봐 옷깃을 꽉 잡고 있는 손이 사랑스러워서 하루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웃지 마."

"그렇지만 타카네가 너무 귀여운걸."

"그, 그런 말 해도 나 아직 화났으니까!"

"응. 미안해, 타카네."

하루카는 제 품에 안긴 작은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어깨에 뺨을 비볐다. 품에 어린 온기가 따스했다. 아, 나 사랑받고 있구나. 사랑하고 있구나. 비가 점차 그쳐가도 쿵쿵 들리는 두 개의 심장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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