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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미래]흑백

2017. 11. 22. 작성 | 공백 미포함 2,599자

탁.

바둑판 위에 바둑알이 올라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검고 흰 바둑돌이 점차 바둑판을 채워갈 수록 나도 점점 그 속으로 빠져든다. 학생들이 오가는 복도지만 소란스러운 대화도, 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신경을 잡아끄는 건 오직 흑과 백뿐. 이 명명백백한 바둑판위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내 고민이 끝날 때까지.

"시립 파프리카 재단 교칙 제 11조."

그럴 터였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검은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복도에서는 바둑 묘수 풀이를 하지 말 것!"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이마를 막았다. 손에 잡힌 것은 아니나 다를까 새하얀 위반티켓. 위반티켓을 눈 앞에서 치우자 내 고민의 원이, 미래가 꼿꼿히 서서 날 내려보고 있엇다.

"복도에서 이러는 거 규칙 위반이라고 몇 번 말했잖아, 시온."

짐짓 허리에 손을 얹고 충고를 하던 미래는 이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둑알을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다. 빼곡했던 흑과 배그이 나열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다 흘깃 미래를 훔쳐봤다. 올려 묶은 갈색 포니테일은 오늘도 잔머리 하나 없이 단정하기만 하다. 날카로운 눈매는 미래의 깐깐한 성격을 보여주고 잇는 듯 했다. 빈틈없이 완벽해보이는 겉모습과 분위기. 그건 필시 미래가 알게 모르게 쌓아온 노력의 증표일 것이다. 그런 미래를 보며 나는...

그때,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갈색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올곧은 눈동자에 도둑이 제 발 지리는 심정이었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왜 그렇게 봐?"

"미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뭔데?"

대답을 아끼고 바둑판 위에 딱 하나 남은 검은 바둑알을 집어들었다. 역시 혼자 고민해봤자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부딪혀가며 알아보는 수 밖에.

"나와 한 수 겨뤄졌으면 한다."


"학교에 바둑부실이 있는 줄은 몰랏군."

"바둑부는 예전에 폐부되엇으니까. 다시 생기지도 않았고, 대신 이 부실을 사용할 신설 동아리도 생기지 않아서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상태야."

"그런 곳을 함부로 써도 괜찮은 건가?"

"학생회장이 허락했으니까 괜찮아."

"권력남용이군."

"그냥 쓰게 해주는 거 아니야. 슬슬 여기도 청소할 때가 됐거든."

끝나면 여길 청소하라는 이야기군. 알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바둑판 앞에 앉았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미약하게 났다. 그래도 폐부된 부실 치곤 깔끔한 것을 보면 주기적으로 미래가 관리하고 잇는 것이겠지. 부실을 쭉 둘러보던 미래는 혼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반대편에 정중히 앉았다. 아까 복도와 달리 아무도 없고 정말 적막하기만 한 장소.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선공은 너에게 넘기지."

"여유롭네. 그러다가 당해도 난 몰라."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고나자 대국이 시작되었다.


탁. 탁.

말업싱 한참을 흑과 백을 주고 받앗다. 수 놓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잇다. 그 사람이 승리를 위해 임하는 자세와 전략,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미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시작부터 유리한 정 가운데 자리를 꿰찬 것부터 시작해서 매번 가장 최적의 자리에 수를 놓는다. 치밀하며 계산적이고 거침없다. 학생회장으로서의 미래도, 아이돌로서의 미래도 흑과 백처럼 두 모습은 서로 상반되나 그 점만큼은 그대로였다. 승리를 향한 야망과 그를 뒷받침하는 노력과 치밀한 계산이 현재의 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미래와 서로 절차탁마 해온 결과 현재의 나, 시온이 잇다. 둘도 없는 좋은 라이벌. 나에게 있어서 미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단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에게 미래는 정말 라이벌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면 미래는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오래 품어왔던 이 질문의 답을 이 대국에서 발견해내야한다.

"있지, 넌 왜 바둑을 좋아하는 거야?"

뜬금 없는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미래도 날 따라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뜬금없는 질문이군."

"그냥 갑자기 궁금해질 수도 있잖아?"

"바둑을 좋아하는 이유라..."

흰 돌 하나를 바둑판에 올려놓고 말을 이었다.

"흑과 백이 명백하니까다. 그 어떤 일도 흑과 백으로 나누고 생각한다면 간단해지지. 그렇게 되면 다음 수를 읽는 것도 어렵지 않아. 한 수, 한 수 상대와 겨뤄가며 큰 그림을 펼쳐가는 게 바둑의 묘미지."

"흐응, 그렇구나."

미래가 검은 돌을 바둑판에 올렸다. 탁. 유난히 큰 소리가 튀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교칙 위반임을 알면서도 한 복도에서의 수 읽기, 갑작스런 바둑 대국 요청, 그리고 아까 내 질문의 답변까지. 내 계산대로라면 넌 분명 무슨 고민이 있어. 맞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미래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래는 내 시선을 받아치다가 이내 픽 웃어버렸다.

"계속 그러고 잇으면 도로시랑 레오나가 걱정할 거야. 리더가 팀원들한테 걱정끼치지 마. 아이돌 위반이야."

"레오나는 인정해도, 도로시가 날 걱정할 것 같진 않다만."

"뭐, 확실히 그럴지도. 그래도 고민 있다면 말해. 도와줄테니까."

하얀 돌을 올리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날 걱정해주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신의 한 수를 올렸다.

"미래, 넌 나를 어덯게 생각하지?

"고민하는 게 팬들에게 보이는 네 이미지때문이었어? 내 조사에 따르면 프리파라 아이돌 98%가─"

"아니, 내가 묻는 건 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미래는 두어번 눈을 깜박이더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실제 대국이었다면 시간 초과로 끝났을 테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고 끈기있게 미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에게 있어선 바둑판보다 지금 이 판이 훨씬 중요했다. 잠깐의 정적에 잠시 숨이 막혔다.

"글쎄, 그렇게 진지하게 물으니 뭐라고 해야 좋을 지 잘 모르겠지만..."

검은 돌을 바둑판 위에 올리고선 미래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태연한 척 보여도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네 표현대로 말하자면 유일무이 최고의 경쟁자라고나 할까?"

"아."

드디어 수가 읽혔다. 머릿 속이 맑아진 기분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쉬었다. 유일무이. 그 네 글자를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읊조렸다. 내 고민의 답은 이거였나. 미래 너는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거야. 슬며시 미소를 머금자 미래도 나를 따라 미소지었다.

"어때? 도움이 됐어?"

"응. 무척."

"그렇담 다행이네."

"미래."

"응?"

"좋아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지막 수를 뒀다. 바둑판에서의 대국은 이미 명명백백하게 나의 승리로 끝나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바둑판을 보고 자신의 패배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뭐?"

"바둑도, 아이돌도, 사랑도 질 생각 없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갈피 잃고 왔다갔다 거리는 미래의 손을 붙잡으니 미래의 하얀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며 나는 선전포고로 그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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