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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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일한 친구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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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 있다. 뱀파이어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금발이면 미친놈으로, 흑발이면 우울증으로.

틀린 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대부분이 미쳤으며 동시에 우울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들의 수명은 길고 쉽게 다치지 않는다. 친구를 아무리 사귄다 한들 그 친구는 언젠가 나이 들어 죽어갈 것이다. 아무리 자극을 찾아 헤매도 갈수록 익숙해져 따분해진다.

뱀파이어는 한 부류다. 삶이 무료한 나머지 자극적인 것에 중독되어 버린, 저주받은 종족.

배그렉 가문의 볼라디는 뱀파이어의 피가 짙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은 머리색과 새빨간 눈동자를 타고났다.


“볼라디. 넌 어쩌다 전투 마법사가 된 거야?”

“무슨 뜻이지?”

“전투 마법사는 제국에선 그다지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잖아. 전투 마법 학파도 없었고, 위험도도 높은데 왜?”

“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볼라디 배그렉의 첫 기억은 가문 저택 안의 거실에서 시작된다.

젊고 어린 외관을 지닌, 하지만 나이는 많은 사람들. 활기참과는 거리가 먼 집안의 분위기. 요란스러운 감정보다는 조용하고 효율적인 것을 기꺼워하는, 그런 집안. 그것이 볼라디가 기억하는 배그렉 가문이다.

그가 제 어머니의 배를 스스로 가르고 태어났을 때, 그는 아주 열렬한 축하와 환호를 받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배를 가른 것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뱀파이어이고, 그들의 출산은 출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감염과 기생에 가깝기 때문에, 부쩍 늘어난 사냥 횟수와 식욕을 보며 모두가 볼라디의 탄생을 짐작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어린 뱀파이어가 미적지근한 축하를 받은 이유는 별것 아니고, 그저 ‘그들의 감정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래. 배그렉 가문의 감정은 메말라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볼라디가 자라나던 그때에도.

그런 메마른 환경에서 자라난 볼라디 배그렉이 감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도 또렷이 느끼고 배울 수 있던 감정이 몇 가지 있었는데, 우울과 갈망 정도가 되겠다.

죽음을 갈구하는 저주받은 종족이여. 자극으로 우울을 잊어내라.

뱀파이어라면 왕왕 그렇듯이 배그렉 가문과 그의 방계에도 자극에 중독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고 전투를 좋아했다. 구경에는 흥미가 없었으며 직접 자신의 심장을 걸고 싸우길 원했다.

배그렉 가문의 영지에서도 그들의 피 튀기는 전투를 꽤나 자주 볼 수 있었다. 자극을 위해, 우울을 끊어낼 쾌락을 위해, 무료한 삶을 매듭지을 죽음을 위해.

열 살을 넘긴 볼라디는 마침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햇빛에 눈이 부셨고……, 검에 맞아 한 팔이 날아갔다.

종족적인 본능이 그를 이끌었다. 피 냄새. 죽음. 처음 느껴보는 고통. 그는 팔을 주워 잃어버린 부위에 대충 붙여두었다. 어리다 해도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설령 잘못 붙였다 하더라도 뼈와 혈관이 제자리를 찾아 뒤틀리고 근육과 살이 다시 붙을 것이다.

볼라디의 관심은 그런 시시한 회복에 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뛰는 일을 알았다. 그는 일가 어른들의 전투에 완벽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볼라디 배그렉은 자신의 검을 들었다.


“그렇게 전투 마법사가 된 거다.”

키르민은 살짝 놀랐다. 일곱 번 정도 더 물어볼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답지 않은 자세함이라니. 내 생각보다 기분이 더 좋은가? 이렇게 말이 많은 볼라디는 흔하지 않으니, 키르민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전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알겠는데, 마법사는? 에인로가드에는 어쩌다 입학했어?”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편지가 오더군. 가문에선 어떤 결정이든 상관없다 했고, 내 의사도 마찬가지였으니 입학했지.”

“잘했네. 덕분에 날 만났잖아.”

“그런가?”

“그렇지. 네가 입학 안 했으면 날 만났겠어?”

“하지만 네가 입학할 거라는 걸 나는 그때 모르고 있……,”

“너는 가끔 말이 너무 많아.”

“음.”

“나 생각할 거 있어, 볼라디.”

“알겠다.”

어휴. 이건 또 질문을 계속 해야겠는데? 볼라디의 입을 간단히 막아버린 키르민이 잠깐 투덜거렸다. 질문을 하려면 일단 학창 시절이 어땠나를 생각해 봐야겠지. 환상 마법사가 무방비하게 눈을 감고 회상에 빠져들었다.


1학년 땐 고층으로 올라갈 일이 별로 없어 몰랐는데, 볼라디는 가끔 고층부에서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곤 했다. 하늘이나 풍경을 감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눈동자였다. 그렇다고 사냥감을 노리는 것도 아닌, 음울하게 가라앉은 그 눈동자.

그뿐만이 아니다. 이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겠지만, 볼라디는 멍을 때리는 일이 종종 있다. 원래도 무표정했지만, 아무런 표정도 없이 어느 한 곳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것 또한 볼라디가 가진 뱀파이어의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볼라디.”

“생각은 다 끝났나?”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질문해라.”

“그럼 넌 처음부터 마법 전투를 배우려고 했어?”

“그건 아니다. 다만 전투에 마법을 연계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에인로가드에 입학한 볼라디는 마법을 배우는 족족 전투에 접목해 나갔다. 이제 성년이 되어 완전한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본인에게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볼라디의 본능에는 죽음에 대한 욕구도 들어있었으므로 그의 마법은 누구에게 향하든 동일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 ‘누구’가 설령 자신이라 하여도.

‘잘 움직이지 않는 구슬을 움직여 보려 마력을 과투입했다 조종에 실패해 복부를 강타했다. 마력이 안정되면 다시 해 볼까.’

그가 땅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비록 몸 안이 진탕이 된 덕분에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나 그건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 힐끗대며 지나가지만, 볼라디는 그들의 감정을 눈치챌 정도로 눈치가 빠르진 않다. 볼라디가 피 흘리며 누워있는 곳은 길가도 아니고, 그저 흙바닥일 뿐이니 다른 학생들의 통행에 방해되지도 않는다.

그가 팔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마력도 체력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데, 오늘은 한계인가? 아쉬움에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한계를 억지로 넘어서려고 하면 결국 탄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땅에 누워 숨을 고르던 볼라디가 입술을 물어 피를 냈다. 임시방편이지만, 몸을 잠시 속일 수 있으니 아주 나쁜 방법은 아니지.

볼라디 배그렉이 기숙사 개인실로 돌아갔다.


“아무 데나 누워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었다구.”

“통행에 방해가 됐나?”

“아니. 하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데 당연히 놀라지, 바보야.”

“난 바보가 아니다.”

“그래, 멍청아. 아무튼. 검술 수업은 왜 들었던 거야? 흰 호랑이 탑도 아니면서.”

“전투할 때는 검을 쓸 일도 많지 않겠나.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들의 수업에 들어온 귀족 가문 학생을 반기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볼라디 배그렉은 사회성도 없었기에 친구 또한 없었다. 그 말인즉슨, 볼라디 배그렉 혼자 흰 호랑이 탑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렷다.

하지만 볼라디 배그렉은 기뻤다. 기사 가문의 학생들이 이렇게 여럿이서 한꺼번에 달려들 줄이야. 기습적인 전투가 그를 흥분과 각성 상태로 이끌었다. 그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이제 열다섯이 된 기사 가문의 학생들은 이런 살기 어린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다. 각자의 가문에서 훈련받긴 했어도 목숨을 건 전투에 나가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신체 한 곳이 나가떨어진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달려드는 볼라디의 모습에 상당수의 학생이 겁을 먹었고, 대열을 이탈했다. 남아있는 소수의 학생은 볼라디의 무분별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만큼 검술과 전투에 서투른 점이 있었다.

검 끝이 볼라디의 가슴에 살짝 파고들었다. 볼라디의 옷 위로 그의 붉은 피가 배어나고, 당황한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치려고 시도했다.

볼라디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까다로운 놈이었는데, 실수를 하나. 볼라디가 살벌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검은 얇고, 몸 안에서 비틀려도 그 정도의 상처는 충분히 치유할 수 있다. 심장이 약점인 것은 맞으나 검의 지름 정도 되는 구멍은 위험하지 않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창백한 손이 검날을 쥐어 끌어당겼다. 볼라디의 가슴 속으로 검이 완전히 파고들었다. 검을 쥐었던 학생은 비명을 질렀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볼라디에게 시비를 거는 학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소문 진짜 이상하게 났던 거 알아?”

“모른다.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는군?”

“당연하지! 처음에 소문 듣고 뭐 그런 놈이 다 있냐고 생각했었다니까?”

“우리 같은 탑이었잖나.”

“내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 질문이나 마저 하도록.”

“잠깐. 뭐야? 설마 질투야? 진짜? 어? 야, 볼라디! 너 정말 자꾸 그렇게 귀여울래?”

“다 끝났으면 그만 일어나라.”

“알겠어, 알겠어. 안 놀릴게. 귀여워서 그만.”

“…….”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는 모르지만, 시비나 방해가 없어진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외모에 반해서 다가오려던 학생들도 도망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까지도 문제가 없다. 볼라디는 혼자 다니든 여럿이 다니든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런 수업이다. 짝을 지어, 혹은 한 팀이 되어 목표를 달성하는 것.

곤란해하는 볼라디 배그렉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키르민 쿠였다. 키르민은 짝을 지어야 하는 시간마다 볼라디의 곁에 다가왔고, 셋 이상이 짝을 지어야 한다면 나머지 인원을 데려오는 것도 키르민이었다. 볼라디는 자신과 상반된 친구에게 점점 익숙해졌다.

키르민은 사실 볼라디의 외모에 관심이 있었다. 주변에 무관심하다 못해 자신에게도 무신경한 그 태도까지도. 어린 인큐버스의 눈에 그 뱀파이어는 정말 아름다웠고 탐이 났다.

아, 갖고 싶다. 그래, 키르민은 볼라디를 정말 갖고 싶었다.


“사실 너 예뻐서 다가갔던 거다? 진짜 잘생겼었는데. 예쁘기도 했고.”

“지금은 별로인가?”

“아니. 지금이 더 좋아.”

“그런데 외모 이야기는 안 하지 않았나?”

“네가 무시했잖아! 전투나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 아니면 싹 다 무시했으면서.”

“음.”

“됐어. 그래도 잘 알려줬으니까. 엄청 사납다고 해서 처음엔 좀 긴장했는데.”

“공격하면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넌 지금도 연약하잖나.”

“아하.”


볼라디는 의외로 친절했다. 가르침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질문하면 나름대로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배려의 방향이 조금 뒤틀려 있긴 했지만…….

“키르민, 너 괜찮아?”

“왜 배그렉 같은 애랑 다니는 거야? 걔 싸움밖에 모르잖아.”

“그거 들었어? 저번에 배그렉이 주방 털다가 데스나이트들하고 싸우고 징벌방 간 거, 사실 주방을 털러 간 게 아니고 싸우고 싶어서 그랬던 거래!”

키르민은 황당했다. 그날 오전에 안 보이더니 징벌방 갔다가 탈출한 거였나? 어쩐지 자긴 먹지도 않는 소시지를 가져다주더라니. 이래서 볼라디 앞에서는 말조심해야 한다는 건데. 친구가 뭘 먹고 싶다고 딱 한 번 중얼거린 걸 가지고 징벌방까지 가는 애가 어딨어!

“맞아. 저번에 너도 공격했잖아. 배그렉 걔, 좀 이상해. 아니, 많이 이상해.”

“그래, 키르민. 뱀파이어들은 집착이 강하대.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야.”

대신 변명을 해주려던 키르민은 멈칫했다.

환상 마법 연습이 잘 되어가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니 도와주겠답시고 공격한 건 아무래도 볼라디가 미친 짓을 한 게 맞긴 한데……. 그래도 볼라디 나름의 배려라고. 게다가 볼라디는 내가 연약하다고 착각 중이니까 공격도 평소보다 훨씬 약하고 느리게 해 주었고.


생각해 보면 볼라디는 항상 그랬다. 지나가는 말로 한 것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해 주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문제지만 배려하려고 노력도 하고. 비록 감정은 메말랐고 전투밖에 모르는 바보이긴 하지만, 의외로 따뜻한 소중한 친구, 볼라디 배그렉.

잠깐. 그런데 그거 결과적으로 보면 전투 마법에 더 도움이 된 거 아닌가? 이 녀석 친구로 있으면서 늘어난 건 환상 마법이 아니라 전투 마법인 것 같단 말이지. 이제 초보 전투 마법사와 겨루면 내가 이길 수 있을 만큼……. 수상하리만치 전투 실력이 좋은 환상 마법사가 이제야 이상함을 깨닫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진짜. 이 정도면 배려를 해도 눈치가 없는 게 잘못이지. 고마움에 이어 심술이 난 키르민은 볼라디를 조금 놀려먹기로 했다. 이 친구는 하나뿐인 친구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려고 하니까.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볼라디.”

“응?”

“나 차 마시고 싶어.”

“그럼 일어나라.”

“싫어. 이 자세 편하단 말이야.”

“베개를 가져다주지.”

“네 허벅지가 제일 좋은데.”

“그럼 차를 못 끓이지 않나.”

“염력으로 끓여.”

“음.”

“아니다. 생각해 보니 별로 안 마시고 싶어. 그냥 가만히 있어.”

고민하는 표정의 볼라디가 귀여워 키르민이 킥킥 웃었다. 볼라디의 뺨을 쿡 찌르고, 잡아당기고. 아마 볼라디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리라.

“네가 나보다 더 오래 살겠지?”

“그럴 거다.”

“그건 싫은데.”

“대신 노화는 안 멈췄잖나.”

“보통은 몇 살에 노화를 멈추지?”

“서른다섯 전에는 멈추지.”

“넌 벌써 마흔이고. 아하하. 그럼 뱀파이어 중에는 네가 제일 나이 들어 보이려나?”

“아마도.”

“볼라디.”

“왜 그러지?”

“사랑해.”

“음.”

“…….”

“나도. ……. 사랑한다, 쿠.”

“너 대답 엄청 늦었어. 알아?”

“말을 고르느라. 사과하지.”

“아냐. 네 그런 점까지 좋아하니까. 이리 와, 볼라디.”

볼라디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누운 키르민에게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입술에 키르민이 짧게 입맞췄다.


자신의 목을 내주는 대신 적의 심장을 꿰뚫어 승리하던 뱀파이어는 이제 피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친구가 몹시 심약하여 피를 보면 얼굴이 희게 질리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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