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뱀파이어의 학창 시절
리퀘스트
오수가 볼라디 학창 시절 이한한테 말해주는 게 보고 싶어요 전투광 뱀파이어의 전학파 기초과목만 골라듣는 젊은 시절은 과연
그랑덴 시의 후원자는 종종 불시에 만나봐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그게 바로 이 황금 같은 주말에 워다나즈가 해골 교장과 외출한 이유다.
이한은 붉게 노을 져 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입학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앞두고 있다니. 물론 해골 교장은 진급하라며 몇 년을 달달 들볶고 있지만…….
“그래, 생각은 좀 해 봤느냐?”
“역시 졸업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내 후계자가 되라니까 아직도 그 소리냐? 마령관도 관료잖느냐.”
“그렇게 따지면 배그렉 교수님도 기사입니다.”
“배그렉은 아니지. 그 자식은 기사 서임 안 받았으니까.”
“어쨌거나 검 휘두르는 건 같잖습니까.”
“왜. 아주 학자라고 하지 그러냐. 책은 잘 쓰던데. 너 따로 공부하는 책 지금도 배그렉 교수 거냐?”
“아뇨,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일단 교장 선생님의 마도서랑 이 두 권…….”
“그리고?”
“배그렉 교수님 책이 좀….”
“으하하! 역시 배그렉 교수의 가르침이 잘 맞나 보군?”
“예……. 맞습니다……. 항상 잘 가르쳐 주시죠.”
“그래. 배그렉 학창 시절도 너랑 제법 닮았었으니까.”
“예…. 아니…, 예? 교수님 학창 시절이 대체 어땠길래?”
고나달테스는 옛일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 침묵하던 고나달테스가 다시 눈을 뜨기까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한은 왠지 교장이 방금 치민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배그렉 그놈은…… 전 학파 수강자였지. 물건을 훔쳐놓고 잠시 빌린 것이라 주장하질 않나, 툭하면 밤 산책을 하질 않나. 그런데 들키질 않아서 징벌방 보내기도 힘들었고.”
“하하. 그럼 저랑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물건을 훔치지도 않고 저녁 시간 이후 밖을 돌아다닌 적도 없습니다만.”
“조용히 하고 들어라. 그런 주제에 전투에 미쳐 있어서 데스나이트나 창고지기 같은 하수인만 보면 피하는 게 아니라 달려들어서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
“어, 잠깐. 그런데 왜 가르시아 교수님이 최초의 전 학파 수강자입니까? 그 말씀대로라면 배그렉 교수님이 최초 아닙니까?”
“아. 그건 배그렉이 특이하게 수강했기 때문이지. 그놈은 가르시아나 너처럼 학문에 미쳐있는 게 아니니까.”
“아니……. 저도 그렇게 학문에 미쳐있지는 않은데…….”
“원래 에인로가드에는 전투 마법 학파가 없었다. 알고 있었냐?”
“그랬습니까?”
“그래. 배그렉이 학창 시절에 개설한 학파지.”
“아니, 그게 가능합니까?”
“필수 수업 외에는 자유롭게 들을 수 있으니까. 빈 강의실 찾아서 전투 수련하더라. 막히는 마법은 그때그때 강의 들어가서 듣고.”
볼라디는 에인로가드에 입학했음에도 마법에 큰 뜻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통 학생들이 익힐 마법을 어느 정도 생각해 오는 것과 달리 마법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이제까지 봐 온 뱀파이어 학생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축에 들어가는 모습에 고나달테스는 살짝 난감을 표했다.
뱀파이어들은 기본적으로 감정이 말라있기 때문에 무감각한 존재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뱀파이어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니까 볼라디 배그렉처럼 어린 나이에도 무감정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아니, 사실 그건 문제가 별로 되지 않는다. 뱀파이어들은 성숙해지면 으레 무감정해지기 마련이니까. 진짜 문제는 알고 있는 감정의 폭 자체가 적고, 자신이 아는 감정을 제외한 다른 감정을 느끼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전투를 통해서만 자연스러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뱀파이어라. 아무래도 이번 신입생들 사이에서는 사고가 꽤나 많이 일어나리라.
배그렉.
“교장 선생님.”
꾸준히 듣는 강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특별히 목표는 있고?
“전투 마법사가 되려고 합니다.”
하긴. 그럴 것 같긴 했다.
그 말처럼 볼라디는 필수 과목을 제외하면 꾸준히 듣는 강의가 거의 없었다.
연금술 강의에서는 마력 회복과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물약을, 동물학 강의에서는 각종 몬스터들의 습성과 약점을, 부여 마법 강의에서는 신체 강화와 무기 강화 마법을……. 모든 학파를 돌며 자신에게 필요한 마법만을 익혔기에 볼라디의 시간표는 굉장히 불규칙했다. 어떤 주는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수업으로 꽉 채워져 있었고, 또 어떤 주는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아무 수업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수업을 듣지 않을 때의 볼라디는 지하 1층의 버려진 강의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볼라디는 마력 소모가 적고 시전속도가 빠른 저서클 마법을 굉장히 많이 연습하곤 했다. 볼라디는 자신의 태생적 조건을 잘 이해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마력 탈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연습하지 말라는 경고는 들었지만 혼자 공부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은가.
지하 1층의 강의실. 그곳에서 볼라디는 마법의 기초에 대해 다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이해와 마력의 운용, 마력의 순환, 응집, 폭발 등의 학술적 이론. 그는 깨달은 것과 막힌 것을 책에 기록했다. 막힌 부분을 모두 지웠을 때 볼라디는 실습에 나섰다. 물론 강의실엔 저 혼자였기 때문에 이론을 체화하는 것도 혼자 깨쳐야 했지만. 몇 권의 책이 너덜해지고 나서, 마력 탈진으로 강의실에 몇 번이고 쓰러지고 나서, 마력의 한계를 완벽히 깨닫고 나서야 볼라디는 몇 가지의 마법을 자신에게 맞게 개량할 수 있었다. 1학년이 혼자 이뤄낸 성과라고 치기엔 꽤나 훌륭했지만 볼라디는 만족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탓에 출석 일수가 적어도 성적만은 잘 나왔지만, 성적과는 별개로 필요에 따라 가끔씩만 나와 강의를 듣고 가는 볼라디가 교수들의 눈에도, 학생들의 눈에도 좋아 보일 리는 없었다. 교수들과 학생들은 정도의 길을 걷는 반면 볼라디 배그렉은 어찌 보면 사도라고 할 수 있는, 특정 학파의 길을 걷고 있지 않았으니까. 기초만 튼튼하게 갈고 닦은 마법을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켜 전투에 결합해 쓴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가. 마법이라는 것을 전투에 쓰는 전투 마법사 자체도 굉장히 특이한 편인데.
물론 볼라디는 이런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렇게 봐서 자신에게 피해가 오기라도 하나? 아니? 그렇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이쯤에서 볼라디 배그렉의 하루 일과를 설명해 보자면,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바로 지하 1층의 강의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몸풀기를 하는데, 원소 구슬로 원을 돌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부터 시작해서 불, 흙, 공기, 냉기, 번개, 암흑 등등. 다룰 수 있는 모든 원소로 원을 완벽하게 그리고 나서 필수 강의가 있을 시, 강의를 들으러 간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원소로 만든 구슬에 마법을 걸어 스스로를 공격하고, 볼라디는 그 구슬들을 피하거나, 막아내거나, 떨어뜨리거나 혹은 역마법을 걸어 해제시킨다. 모든 뱀파이어는 강렬한 자기 파괴적 성향이 있으므로 볼라디는 스스로의 마법에 제법 심하게 얻어맞는 편이었으나 뱀파이어 특유의 자가치유력 덕분에 강의실에서의 일을 누군가 눈치채지는 않았다.
오전 시간이 지나면 기숙사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검술 강의나 체력 훈련을 간다. 강의가 없는 날이라면 역시 지하 1층의 강의실에서 원소 마법이 아닌 다른 기초 마법을 연습한다. 오전 시간과 달리 이 시간은 그날그날 다른 마법을 연습하기 때문에 오후 시간은 정해진 일과가 없다. 보통 이때 연습하다 막힌 부분을 인지하고 기억해 두었다 다음 시간에 선택 강의를 찾아서 듣기 때문에 오후 연습 시간은 볼라디에게 중요한 시간이다.
“잠깐. 아니. 그럼 원래 지하 1층이 배그렉 교수님 공간이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 쓰던?”
“그놈이 쓰기 전까진 그랬지. 반쯤 던전이라 못 쓰던 게 맞을 거다. 교수들이 그런 곳을 일일이 청소해 주진 않으니까.”
“지금도 던전이 있긴 합니다만.”
“그거 배그렉이 만든 거 아니냐? 몬스터 밀어 넣어서. 하여간 누가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어두운 곳에 집착한단 말이지.”
“햇빛 아래도 잘만 돌아다니시던데요.”
“나도 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언젠가 동급생 중 하나가 볼라디에게 소리친 적이 있었더랬다. 뭐라더라? “네 머리 위에 태양이 뜨길 빈다, 빌어먹을 흡혈귀 새끼야!”랬던가. 하지만 볼라디는 그 말대로 머리 위에 해가 떠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야 뱀파이어를 죽이는 방법은 햇빛 아래 밀어 넣는 게 아니라 심장을 회복 불가할 정도로 뚫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필수 강의 외에도 볼라디가 자주 듣는 강의를 꼽자면 놀랍게도 치유 마법 강의가 꽤 상위권에 위치해 있었는데, 볼라디는 이 강의를 통해 여러 종족의 신체와 약점에 대해 배우고자 했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심장이라지만, 적의 급소는 심장뿐만이 아니니까.
치유 학파의 교수는 볼라디를 보며 골치를 썩였다. 볼라디 배그렉만큼 급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학생은 드문데 정작 그 볼라디는 치료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급소를 찔러버리려고 드니 환자를 돌보는 데 쓸 수 없지 않겠나.
살아있는 학생이나 교수를 대상으론 실습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볼라디는 에인로가드의 외진 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이 구석에서 종종 나타나는 침입자들이 그 목적이었다.
급소를 정확하게 노리는 연습인 만큼 초반의 배그렉은 침입자들을 죽여 교장에게 가져다주었다. 고나달테스는 황당해하면서도 침입자들을 부활시킨 후 끌고 가며 ‘최소한 숨은 붙여두라’고 잔소리했다. 그러나 고나달테스에게는 불행하게도 볼라디 배그렉이 학습한 것은 ‘아, 침입자들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되는구나’가 아닌 ‘아, 에인로가드에서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군’이었다. 덕분에 볼라디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고 볼라디에게 발각된 침입자들은 모조리 언데드가 되어보는 교훈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축제에선 외부인으로 인한 사고가 조금 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
덕분에 고나달테스는 평소보다 배로 바빴다. 이유는 단연 볼라디 배그렉이렷다. 조금만 늦게 도착하면 배그렉 그놈이 외부인은 죽여버리고 “제가 처리했습니다.”하는 말로 복장을 터지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나는 외부인을 함부로 습격하여 죽이지 않겠습니다.’를 종이에 써내려가는 볼라디와 그의 동기들을 보며 고나달테스는 기초 인성 강의를 필수 강의로 지정해 둔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정작 볼라디는 ‘나는 학교에 피해를 입힌 버러지들만 죽였으니 이번 축제 때 누군가 외부인을 함부로 죽였나 보군.’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애꿎은 고나달테스의 속만 다시 터져나가고 있었지만.
“그래. 그 자식은 눈치가 심각하게 없지. 이 부분은 너와 매우 다르구나.”
“설마 그때랑 지금이랑 눈치가 똑같았…….”
“아니. 지금이 훨씬 나아진 거란다, 배그렉의 사교적인 수제자야.”
“저 교장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 배그렉이 애지중지하는 첫 제자야.”
“……. 대체 눈치가 얼마나 없으셨던 겁니까?”
“말했잖냐? 침입자 습격해서 죽여놓고 당당했다니까? 맹세컨데 그놈만큼 전투에 미친 놈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거다. 없어야만 하지. 신입생 때부터 데스나이트와 전투하는 놈은 그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쾅!
별관 지하층이 폭발하는 굉음이 들렸다. 불길함을 느낀 고나달테스가 서둘러 날아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벽의 일부는 이미 날아가 구멍이 뚫려 있었으니까.
데스나이트와 뱀파이어가 싸우는 이 희귀한 광경에 고나달테스는 개입해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데스나이트들이 고개를 저으며 개입하지 말란 신호를 열심히 보낸 것도 그 고민의 이유가 되었다. 대체 왜 저러고들 있단 말인가? 한숨을 내쉰 고나달테스가 결정을 마치고 벽 근처에서 싸움을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징벌방 행이고 정문도 아니니 더 싸워도 문제 될 건 없으며 오히려 배그렉 저놈은 들여보내기 전에 저렇게 체력을 쭉 빼놓는 것이 더 좋겠지.
지금 볼라디 배그렉이 벌이고 있는 전투는 마법 전투라기엔 모호한 감이 있었다. 마력 탈진이 오기 직전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인 배그렉의 몸 상태가 그랬으며, 몸 안에 겨우 남은 마력을 극도의 컨트롤로 순환시키며 육탄전을 벌이는 상황이 그랬다. 하지만 볼라디는 지금 이 상황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언데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존재. 그러니 급소를 찾기도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지금 겨루고 있는 데스나이트가 바로 그런 언데드 아닌가. 데스나이트의 몸 구석구석을 찔러보며 급소를 탐구하는 모습이 고나달테스의 눈에는 상당히 이상한 호기심으로 보였다.
데스나이트들의 태도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학생이 저녁 늦게 돌아다니고 있으면 제압해서 징벌방에 넣어야지, 이건 제압이 아니라 대련 아닌가? 그도 모자라 검술 자세를 봐주고 또 조언하는 건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냐.
사실 볼라디가 싸우는 방식은 학생이나 마법사라기보단 용병에 가까웠는데, 고나달테스는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 가문의 지독한 우울과 무감에서 비롯된 자극 중독과 자살 충동은 제국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견디지 못한 뱀파이어들은 목숨을 내건 전투를 이어가기 마련이었고. 하지만 보통 이런 열망은 태어난 지 500년은 지나야 강하게 형성되는데, 배그렉은 뱀파이어의 본능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했다. 아마 뱀파이어의 피를 너무 짙게 타고난 탓이겠지. 다른 뱀파이어들보다 훨씬 일찍 검을 잡았기 때문인 탓도 있을 것이고.
고나달테스가 안타까움을 담아 혀를 찼다. 벌써부터 저러면 힘들 텐데.
고나달테스는 볼라디의 전투를 관찰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첫째로 그는 푸른 용의 탑임에도 불구하고 실전 검술에 가까운 검을 구사한다는 것. 둘째로는 마법에서는 그 무엇보다 기초를 중시하는 배그렉치고 기초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다는 것.
실전 검술에 가까운 검이야 뱀파이어 가문 특유의 검이라고 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후자는? 볼라디 배그렉의 일과를 알기에 고나달테스는 의아했다. 오전 내내 마법 기초만 다지는 저놈이 검술은 불안정하다? 배그렉은 그걸 그냥 두고 있을 녀석이 절대 아닌데. 게다가 지금 배그렉의 검술은 어느 정도 그 형形을 갖추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검술의 형이 잡혔는데 기초를 탄탄히 다지지 못한 것. 볼라디 역시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볼라디는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를 찾고 있었고, 찾아낸 교수가 고나달테스에게는 운이 없게도 하필 데스나이트 들이었다.
데스나이트들은 고대의 기사들이다 보니 검술이 탄탄하고 배울 기술들이 많았다. 교장의 하수인인 만큼 강함 역시 증명되어 있으니, 교수로서 그들보다 좋은 인재가 있겠는가.
……, 그것이 지금 볼라디 배그렉과 데스나이트들이 싸우고 있는 이유였다.
데스나이트들은 언데드인데다 고대의 기사들이라 부상에 약간 무감각한 경향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볼라디는 뱀파이어라 사소한 상처는 생겼다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빨리 나아 버렸다. 물론 ‘어, 지금 찌른 것 같은데’하는 느낌은 몇 번 들었지만, 상처도, 피도 없고 볼라디 본인도 다치지 않았다는데 데스나이트가 알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전투는 데스나이트 하나의 검이 볼라디의 심장을 꿰뚫고서야 끝이 났다.
- 잘 싸우는군!
- 내가 살아있었다면 내 종자로 들이고 싶었을 정도야!
- 볼 때마다 실력이 느는 걸 보니 훌륭한 기사가 될 걸세.
- 그럼, 그럼! 솔직히 처음엔 정신 나간 줄 알았는데.
- 약간 호전적인 건 절대 나쁜 게 아니라네!
- 그래. 성급한 거랑 호전적인 거랑 같나! 전혀 다르지.
데스나이트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수다를 떠는 사이 볼라디는 꿰뚫렸던 심장에서 검을 뽑아 바닥에 박아두고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스카프로 닦아 마셨다.
이 정신 나간 광경에 고나달테스는 두개골을 딱 소리 나게 짚고 말았다.
다들 미쳤나! 학생들 단속하랬더니 여기 옹기종기 모여서 신입생이랑 전투를 해?
- 엇.
- …….
“전투가 아니라 강의입니다.”
어색함을 깨뜨린 건 볼라디였다. 옷에 스몄던 피를 전부 마셨는지 평소처럼 멀끔한 모습으로 허리에 검을 찬 볼라디가 지친 기색으로 숨을 몰아쉬며 고나달테스의 말을 지적했다.
볼라디는 당당했다. 강의를 듣기 위한 목적이던 만큼 거리낄 것도 없고, 교칙엔 분명 필수 강의 외에는 어떠한 선택 강의를 얼마나 듣든 일체의 관여가 없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이 원하는 강의는 폐강된 강의라도 부활할 수 있으며, 없는 강의는 개설할 수 있고, 설령 수강생의 인원이 오로지 한 명뿐이라도 폐강시키진 않는다고. 그러니 볼라디는 데스나이트를 교수로 삼아 자신이 원한 전투 강의를 개설해 듣고 있던 것이다. 이건 교칙에 어긋나는 행위가 전혀 아니지 않는가.
아니.
“별관 지하에서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인로가드의 교장이라면 당연히 모든 강의를 파악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데스나이트는 교수가 아니다 이 망할……, 뱀파이어야.
“교칙에 학생이 원하는 강의는 개설 혹은 부활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볼라디의 모습에 고나달테스가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마력은 왜 그 모양이 난 거냐?
“마력량을 파악했습니다.”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강의를 강력하게 추천하마.
“필수 과목을 빠지진 않습니다.”
그래……. 그래서 대체 왜 마력이 그것밖에 안 남은 거냐?
“아까 설명드렸습니다?”
아니. ……. 그래. 됐다. 이만 들어가 봐라.
고나달테스는 꾸벅 인사하는 볼라디를 그대로 징벌방으로 이동시켰다. 연행되어 가면서도 볼라디는 표정으로 ‘난 정말 잘못한 것이 없는데 교장 선생님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고 있던지라 고나달테스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그건 저랑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너도 시공간 수업 부활시켜서 들었으면서 뭘.”
“아니, 그건 정규 수업이잖습니까.”
“배그렉 그 자식도 그게 정규 수업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짓을 벌이고도 당당했지.”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징벌방에 온 건-물론 탈출과는 별개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므로, 볼라디 배그렉은 징벌방에 뻗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언제나 그랬듯 교장 선생님이 심술을 부렸다고밖엔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볼라디는 탈출을 결심했다.
다행스럽게도 볼라디의 탈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교장실이나 교수들의 탑과 공방에서 무언가를 빌려 가다 교장의 하수인이 보이면 전투가의 피가 끓어 이목을 끄는 바람에 생각보다 자주 징벌방에 연행됐다. 교장은 놀랍게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신입생을 심층 징벌방이나 영원 징벌방에 가두진 않았기에 볼라디는 이번에도 그리 어렵지 않은 탈출을 짐작했다. (하지만 고나달테스는 요즘 볼라디 배그렉만큼은 심층 징벌방에 가둬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볼라디는 남은 마력을 가늠해, 쓸 수 있는 마법을 궁리하는 동시에 징벌방을 지키는 정령의 위치를 파악했다.
‘지금 정령이 쉬는 위치에서 이곳의 탈출 시도를 알아차리기까진 약 3.4초가 소요되겠지. 징벌방의 벽을 부수는 것은 준비만 철저하게 되어있다면 0.8초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남은 2.6초 동안 모습을 은폐하고 기척을 숨겨 탈출해야 하는데, 미리 마법을 써두기에는 남은 마력이 너무 부족하다. 강의를 듣고 왔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지친 상태군.’
다만 볼라디는 뱀파이어였고, 뱀파이어인 덕분에 가능한 종족 특성 속임수가 있으니 체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볼라디는 눈을 감고 다시 생각했다. 그의 손톱으로 벽의 마법진에 흠집을 내어 환상을 조금 뒤틀어 속인다면 정령이 자신의 탈출 시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조금 더 걸리리라. 그리고 그 약해진 부분을 힘으로 뒤틀어 파괴한다면 마력을 아낄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이 구역의 번개 정령은 볼라디 자신이 많이 겨뤄본 상대이기에 공격 패턴도 잘 파악하고 있어 자신이 있었다. 생각을 끝마친 볼라디의 손톱이 단단하고 날카롭게 굳어갔다.
징벌방의 벽에 새겨진 마법진은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이쪽은 다행스럽게도 학생들 위주의 일반 징벌방이었기에 결계가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다. 그리고 볼라디에 있어 징벌방의 결계들은 전투에 응용하기 아주 좋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에, 볼라디는 이 마법진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볼라디가 벽에 새겨진 마법진의 마력을 신중히 감지해 가며 손톱 끝으로 마법진 위에 선을 덧그리자, 마법진에 깃들었던 마력이 선을 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볼라디는 선 끝에 손을 대고 마법을 시전했다. 마도서에서 찾아 익힌 마나 드레인을 뱀파이어라는 종족 특성에 맞춰 자신에게 맞게 개량시킨 마법이었다. 적의 마법진에서 마력을 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에서 한 발짝 나아가 마력을 버리지 않고 자신이 흡수해 버린다.
마력을 회복한 볼라디는 아직 날카롭게 굳어있는 손톱을 손등에 찔러넣었다. 이건 일종의 편법이라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너무 많이 마시면 몸이 역효과를 내니까. 손등에서 뚝뚝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는 볼라디의 눈에 붉은빛의 이채가 돌았다.
쿵.
벽이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볼라디는 소음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피로 보충한 체력은 편법인 만큼 빠르게 소모되고, 마력도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다 보니 불안정해 금방 흩어질 확률이 있는 만큼 위험을 감수하고 빠른 시전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소리를 듣고 번개 정령이 달려왔으나 볼라디는 이미 그곳을 벗어나 계단 위로 내달리고 있었고, 검고 긴 머리칼을 본 정령이 번개를 날렸으나 볼라디는 마력의 파동만으로 원소를 피해 돌파했다. 징벌방을 빠져나온 볼라디는 곧바로 탑 안으로 뛰며 생각했다.
‘원소 감지 훈련에 도움이 되니 더 자주 징벌방에 방문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고나달테스는 징벌방의 흐름을 감지하고 머리를 짚었다. 이런 성물함 부서지는 기분이란. 하루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심층 징벌방에 가둬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징벌방 탈출이 그렇게까지 미친 짓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건 정말 똑같구나, 뛰어난 전투 마법사 제자야.”
“관료격멸자보단 전투 마법사가 낫군요.”
“……. 아무튼 배그렉이 미쳤다는 건 그냥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그놈은 전투에 정말 미친 놈이거든.”
“저는 전투에 그렇게까지 미치진 않았습니다.”
“수상하면 일단 공격부터 하고 보는 놈이 말이 많구나.”
“아니 진짜 수상하잖습니까.”
“그래, 전투에 미친 놈아.”
“아니……. 그래도 배그렉 교수님보단 덜 합니다만.”
“배그렉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 교수님이 전투에 관심이 많긴 하시지만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다들 전공 분야에 관심 많으시던데.”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니까 그렇지.”
볼라디는 원래 주방을 터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주방보다는 각종 시약 재료를 빌리면 빌렸지. 가끔 주방을 털 때는 제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 털거나 신선한 채소를 먹겠다고 할 때밖에 없었는데, 징벌방에서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후로 주방을 터는 일이 잦아졌다. 그뿐이 아니라 일부러 잡히려는 듯 태연하게 주방에 머물러 있다 창고지기에게 발각되기도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것까진 문제가 없었다. 자기가 징벌방 가겠다는데 보내주면 되지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진짜 문제는 징벌방에 간 이후부터다. 징벌방을 지키는 정령은 번개 정령뿐만이 아니다. 여러 정령이 징벌방의 구역을 나눠 지키는데, 볼라디는 이 정령들을 훈련의 교관으로 삼았는지 징벌방에서 탈출하며 원소 탐지 훈련을 하는 것 아닌가.
징벌방을 무슨 강의실 가듯 드나드는 모습에 고나달테스는 정말로 성물함이 부서질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층 징벌방에 옮겨라? 좋지! 그래서 심층 징벌방으로 옮겨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이놈이 탈출 경로를 파악하겠답시고 다른 놈들의 감방까지 전부 부숴버리는 거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나달테스는 볼라디를 일반 징벌방에만 가두기로 했다. 징벌의 효과는 없었지만…….
“제가 그렇게까지 미치진 않았는데요. 무슨 마법을 위해 징벌방에 갑니까?”
“방학 때 따로 마법을 배우긴 하잖느냐?”
방학을 맞은 볼라디 배그렉은 이름난 전투 마법사를 찾아다녔다. 다른 학생들이 놀러 다니거나 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유미디후스를 만난 것도 방학 때의 일이었다.
유미디후스에게 방학 내내 가르침을 받고, 또 남는 시간에는 주변의 결투 클럽을 박살 내고 다니다 에인로가드로 돌아온 볼라디는 전투 마법사로서의 실력이 몇 층 더 높아져 있었다. 아직 2학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에인로가드에 의뢰가 들어오면 볼라디 배그렉이 호위로 거론될 만큼, 에인로가드 안에서 분쟁을 가릴 때 볼라디를 먼저 선점하는 학생이 승리를 확신하고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만큼.
제국의 전투 마법사라면 누구나 그렇듯, 볼라디는 귀를 뚫었다. 오른쪽 귀에 달린 얇은 금속판 귀걸이에는 볼라디의 이름을 비롯한 신원이 적혔다.
고나달테스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청동 대가리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 인식표를 다느냐?
“전투 마법사로 자격을 인정받았으니 달아야 하지 않습니까?”
내 말뜻은 그게 아니다, 눈치 없는 녀석아.
“?”
좀 나중에 보고하지, 그걸.
고나달테스는 혀를 차며 둥둥 날아갔다. 볼라디 배그렉은 교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야 전투 마법사로 인정받았다는 건 제국에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징집되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안 달고 다니시던데요.”
“때 되면 달겠지. 그땐 제국에 소란이 좀 잦아서 하고 다니던 거고.”
제국에 등록된 볼라디는 한동안 호출이 잦았다.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반불사의 몸을 지닌 에인로가드 출신 전투 마법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볼라디도 점점 제 귀에서 달랑대는 인식표에 익숙해졌다. 볼라디 배그렉은 전투에 나가는 것에 불만이 없었기에 못마땅한 것은 고나달테스뿐이었다.
제국에선 열다섯이면 성년이라고 보지만, 이제 겨우 열여섯인 볼라디는 고나달테스가 보기엔 너무나 어렸다. 마법사치고도 어린 나이인데 하물며 전투 마법사라니. 위험도가 너무나 높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황제 역시 볼라디가 어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관료들 또한 새로 등록된 전투 마법사의 나이를 보고 기겁했기 때문에 고나달테스의 항의 없이도 배그렉의 위치는 주로 후방으로 배치되었다. 전투 현장에서의 마법사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지팡이 없이 매직 미사일 수백 탄을 전부 정확한 위치에 날리는 전투 마법사는 전방으로 배치해야 하지 않겠나?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학업을 병행하던 볼라디는 언제부턴가 혈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적의 마법을 눈으로 익히고 아군의 마법을 물어 배우더니 자신에게 맞게 개량시킨 것이다.
평소 피를 즐기지 않는 배그렉이었으나 제국의 호출을 받으면서, 혈마법을 익히면서부터는 흡혈의 횟수가 부쩍 는 것이 고나달테스의 눈에도 보였다. 적의 피를 뽑아 그것들을 매개로 혈액 시약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혈마법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는지 연습은 에인로가드 내부에서만 한다는 점이었으나…….
에인로가드로 돌아온 볼라디가 고나달테스를 찾아왔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으니 확인을 받으려 한 것이다.
볼라디 배그렉. 전투 마법사가 되겠다는 네 목표는 그대로냐?
볼라디는 끄덕였다. 전투는 여전히 즐거웠고 자극적이었으며, 그 외의 목표는 생각해 본 적 없으므로.
그렇다면 당분간 인식표는 빼고 있어라.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학업은 마치도록 해 두었으니. 전투를 즐거워하는 건 안다만 넌 아직 학생이니까.
“그러겠습니다.”
강의도 좀 들어라.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듣지 말고.
“들을 필요가 없는 것까지 들어야 합니까?”
월반이라도 하게 해 주랴?
“감사합니다.”
……. 피곤할 테니 들어가 봐라.
고나달테스의 예상보다 볼라디는 쉽게 수긍했다. 솔직히 놀랍긴 했으나 따르겠다는데 왜 반항하지 않느냐 묻는 것도 이상했기에 고나달테스는 볼라디를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월반 건은……,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겠지. 볼라디는 제국 천재들의 요람인 에인로가드에서도 굉장히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였으니까.
“그러니까 월반한 게 저랑 닮았다는 뜻은 아니죠?”
“똑같잖냐?”
“아니…….”
“농담이다. 배그렉도 내가 가르친 적이 있지.”
원소와 부여 마법은 심화로 넘어가라. 유미디후스에게서 배워왔다면 물 원소는 넘겨도 되겠군. 시공간 마법도 듣는 게 좋겠는데? 더 관심 있는 마법 있냐?
“언령입니다.”
그건 못해도 칠백 년은 걸릴 텐데. 차츰 가르쳐주마. 더 쉬운 건?
“주문 단축, 무영창.”
음. 됐다. 네놈 강의는 짜 준 대로 들어라. 멋대로 듣지 말고.
고나달테스의 농담 같은 제안에 따라 볼라디는 몇몇 강의를 월반했고, 언령과 무영창을 목표로 하는 만큼 그 부분은 고나달테스가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 무영창 마법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면 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마법이나 볼라디는 그 부분에 있어선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일단 알고 있는 감정의 폭이 적었으며, 기본적으로 무감한 성향을 타고났다. 또한 고통에도 무뎌 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있었으니 통제력이라면 이미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혼자 무영창 마법의 기초를 익힌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후방이긴 했지만 전투 현장에서 애송이 전투 마법사가 주문 축약을 완성해 올 정도라니, 아마 배그렉 이 녀석은 무영창을 꽤나 빨리 익히겠다고 고나달테스는 생각했다.
그럼 지금까지 한 것 좀 보자.
고나달테스는 볼라디 배그렉이 쓴 책을 읽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기초 혈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를 고작 2학년이 혼자 집필했다 하면 누가 믿겠나. 볼라디의 전투 실력을 본 고나달테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그렉을 전방으로 보내라던 마법사들의 말에 화내던 게 무안해질 정도로 훌륭한 시범이었던 것이다.
이제 걱정되는 건 볼라디의 마력과 정신력 정도인데, 마력은 혈마법을 통해 증폭하는 방법을 찾았으니 차치하고, 정신력은……, 생각이 단순한 건지, 없는 건지, 아니면 정신력 자체가 강한 건지, 마법만 생각하는 건지, 뭘 해도 괜찮아 보여서 고나달테스는 고민했다. 보통 제일 괜찮아 보이는 놈들이 제일 안 괜찮던데, 하고. 하지만 전투를 할 때면 뱀파이어 특유의 우울이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기에 무어라 더 첨언하진 않았다.
냉정히 보면 볼라디 배그렉은 전투 마법사를 해야 했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원래 자극에 무디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자극에 취약하다. 그 때문에 전투에서 나오는 쾌감에 중독되기 쉬운데, 볼라디 배그렉은 그 뱀파이어의 피를 너무나 짙게 타고났다.
게다가 천재적인 머리, 유연한 사고, 극한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정신력, 냉철한 판단력, 타고난 무감각, 목표를 놓치지 않는 끈질김. 그 모든 것이 합쳐진 볼라디는 전투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 다음 시간까지 익혀와라.
볼라디의 품에 마도서 한 권이 안겨졌다. 무영창의 기초에 관련된 책이었는데, 안고 있어도 멋대로 들썩이는 것이 꼭 고나달테스가 쓴 책다웠다.
그리고 너 지팡이는 어떻게 할 거냐? 그게 손에 익은 것 같아서 내버려 뒀다만.
볼라디가 자신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팡이라 하기도 조금 애매한 것이, 일반적인 지팡이의 형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형태였다. 차라리 레이피어라고 하는 게 더 올바른 명칭일 정도로 검과 닮은 형태의 지팡이를 두 사람이 빤히 바라보았다.
볼라디는 언제나 그랬듯 고나달테스의 말뜻을 조금 오해했다.
“안 쓰는 게 낫습니까?”
아니. 바꾸란 소리였는데.
고나달테스는 언제나 그랬듯 볼라디의 화술에 답답함을 느꼈다.
졸업할 때까진 전쟁터 안 보낼 거니까 그동안 새 지팡이에 적응해라. 부여 마법 수업 하나 더 추가해 놓으마.
볼라디가 자신의 지팡이를 쥐었다 펴 보았다. 아직 충분히 쓸만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고나달테스는 배그렉의 수강신청서를 다시 꺼내 강의들을 새로 써 내려갔다. 배그렉은 그 옆에서 얌전히 구경하는 대신 자신에게 필요 없다 판단된 강의들을 지워나갔다.
- 지팡이 재료와 마법 증폭 그냥 듣게 할 것!
- 시공간 마법의 기초와 그 이해
- 원소 마법과 그 응용
- 예지 마법의 기초적 활용
자꾸 지우지 마라
- 흑마법의 운용과 원리
- 부여 마법의 이해
- 기초 춤과 사교
- 기초 아티팩트 제작술
“교장 선생님.”
왜. 다 배웠다고?
“예.”
알고 있다. 기초만 다졌겠지. 더 배워라, 더.
“비효율적입니다.”
고나달테스는 배그렉을 공중에 거꾸로 매달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설명했다.
네 전투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축에 속한다. 그걸 부정하진 않으마. 그러나 넌 아직 어리다. 마법 안에는 네가 모르는 연계도 많이 들어있지. 그러니 배워라. 네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니까.
“하지만 기초 춤과 사교는 마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들어라. 넌 사교술이 극도로 부족하니까.
몇 가지 강의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수긍했기에 배그렉은 고나달테스의 강의 목록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신청만 해놓고 익힌 마법을 가르칠 땐 결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춤과 사교 강의는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저 1학년 때도 넣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야 너희 두 놈 다 필요한 강의였으니 그렇지!”
“배그렉 교수님은 그렇다 쳐도 저는…….”
“춤 하나도 못 추던 놈이 말이 많다.”
“아무튼 배그렉 교수님이 지팡이는 잘 만드셨습니까?”
“하여간……. 그건 직접 물어봐라.”
이한은 고나달테스의 손끝을 따라 마차의 밖을 바라보았다.
“아.”
언제 에인로가드의 성문을 지난 건지, 본관 앞에 멈춰 선 마차의 창밖으로 볼라디 배그렉이 보였다. 교수님이 대체 왜 저기 계시지? 혹시 약속이 있었는데 내가 잊었나?
고나달테스도 이한과 같은 생각을 했다. 배그렉 저놈이 왜 저기 있지? 혹시 워다나즈랑 일정이 있었는데 그걸 못 봤나?
“교장 선생님.”
배그렉 교수, 무슨 일이오? 오늘 워다나즈의 일정은 비어있던 걸로 아는데.
이럴 땐 선수 치는 게 좋지! 해골 교장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지만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교장 선생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알겠소. 워다나즈, 그건 내가 다음에 말해주마. 그럼 따라오시오.
“아니, 저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닌데.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나달테스가 앞장섰고, 볼라디는 이한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뭐였소? 워다나즈의 진학?
“아닙니다. 언령 마법의 시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 자네도 참. 좋다, 배그렉. 약속했으니까. 교장실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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