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유료

예속의 키스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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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다나즈 조교, 아니, 교수님 돌아오셨대!”

“헉, 진짜? 나 막힌 연구 있었는데!”

“지금 교장실에 계셔.”

“뭐? 누가 돌아왔다고?”

“워다나즈 선배. 아니, 교수님.”


후배들은 아직도 워다나즈의 호칭을 섞어 불렀다. 어느 학파에서는 선배로, 어느 수업에서는 조교로, 워다나즈의 수업에서는 교수로 있었으니 헷갈리는 일이야 당연했다.

워다나즈로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6학년을 마치고 교수로 스카우트 당해 정교수로 가르친 게 2년인데. 미미르의 샘을 찾아 자리를 비운 게 1년인데. 아직도 호칭을 섞어 부르다니.

이제 헷갈릴 수 없겠지. 너한텐 잘된 일 아니냐?

“개소리하지 마십쇼, 교장 선생님.”

내가 왜 교장이냐? 이제 네가 교장이라니까.

워다나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고나달테스를 노려보았다. 저 얄미운 해골 같으니라고.

그런데 왜 하필 눈을 팔아먹었느냐. 너도 참 미친놈이다.

“미미르가 몸 반쪽을 달라고 하던데요. 이것도 겨우 타협한 겁니다.”

얼씨구. 기다려 봐라. 의안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 테니 끼우고 다녀라.

“앗. 황금으로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

“아니면 말고요.”

동공은 황금이 맞긴 한데 네가 그러니까 되게 만들어 주기 싫구나…….

“아니! 무르는 게 어딨습니까?”

무른다고 안 했다, 이 웬수 같은 자식아!

고나달테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유리와 황금으로 정교한 의안을 만들어 주었다. 교장의 자리를 드디어 때려치울 수 있는데, 이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이런 것도 못 해주겠나.

물론 눈을 팔아먹고 온 건 상당히 미친놈 같았지만….

자, 다 됐다.

“금이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 더 들어가면 균형 깨진다.

“농담입니다.”

교장 자리는 한 달 뒤에 정식으로 물려주마. 그전까지는 일도 좀 배우고 하자꾸나.

“예…….”

고나달테스가 즐거운 만큼 워다나즈가 시무룩해졌다. 이런 미래는 정말로 피하고 싶었건만.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나달테스가 교수들의 계약서를 꺼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마령관도 관료 아니냐.

“그 즐거운 눈빛이나 어떻게 하고 말씀하시죠.”

어라. 들켰구나?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으셨으면서…….”


“그거 헛소문 아냐?”

“아냐. 교장실 근처에서 본 적 있다고 했어.”

“근데 한 달째 망토 끝부분도 안 보이잖아.”

“해골 교장도 잘 안 보이는 거 보면 뭔가 일이 생긴 거 아닐까? 워다나즈 교수님 닮은 범죄자라거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워다나즈 선배 말고 누가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폴리모프 한 드래곤…?”

모여 있던 학생들이 멍청한 것을 보는 눈으로 마지막 말을 꺼낸 학생을 쳐다보았다.

“아니! 마력만 따지고 보면 말이지!”

“그 말도 틀린 것 같진 않구나.”

“교, 교, 교장 선생님!”

“으하하! 틀렸다! 이제 워다나즈 저놈이 교장이다!”

“폐하께 자랑하러 가신다면서요. 학생들 괴롭히지 말고 가세요.”

“워다나즈 교수님!”

“내가 뭐랬어! 돌아왔다니까!”

“아, 놀리지 말고 가시라고요. 이제 제 영지입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반응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역시 짜증이 났다. 이제 진짜 교장이 되어버렸군. 워다나즈가 이를 악물었다.

“난 폐하 달래주러 가야겠구나. 마령관 위치도 물려줘야 하니 편지 보내면 오거라.”

“예, 가십쇼.”

“맞다. 내가 비블레에게 의뢰한 아티팩트 있었는데 창고에 그냥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으니 꼭 확인하고.”

“어느 창고입니까?”

“나도 모르지. 미미르의 지혜로 확인해 봐라.”

진짜로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버두스 교수, 이 자식은 학생 때나, 조교 때나, 교수 때나, 교장 때나 똑같이 속을 썩이는군!

워다나즈는 지팡이를 휘둘러 모여 있는 학생들을 전부 각자의 탑으로 이동시켰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질문을 주고받는 사소한 일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교장실로 돌아온 워다나즈는 인계받은 것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았다.

학사 일정과 커리큘럼, 교수들이 보고한 내용들. 제국에서 내려온 지원금과 예산. 아무튼 관료 놈들 머릿속엔 지원금을 깎을 생각밖에 없지! 그렇게 깎여나간 예산만 대체 얼만지. 가장 속을 많이 썩이는 건 역시 버두스 교수고, 크라어 교수는 학년말에 조심해야 하고, 가르시아 교수에겐 잘 해줘야겠다.

예상과 제일 다른 건 배그렉 교수였다. 의외로 순하고 말도 잘 들었던 것이다. 버두스 교수만큼이나 말썽을 잘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실례일 정도로 얌전한 거 아닌가. 단 한 번도 보고를 잊지 않고, 지시도 최대한 따르려고 하고.

워다나즈는 의아했으나 금세 납득했다. 이 뱀파이어 교수는 누구보다도 고지식했다. 학생 시절 자신의 고백을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거절했던 것처럼. 그럴 정도이니 교장의 지시에는 일단 따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종이 새가 교수들을 찾아 날아갔다.

계약을 새로 체결해야 하니 남는 시간에 교장실에 들리십시오.

- 워다나즈.


볼라디 배그렉은 에인로가드의 새로운 영주와 계약하기 위해 교장실로 올라왔다.

“들어오세요.”

“워다나즈 님.”

“마지막이네요, 배그렉 교수님.”

“예. 늦었습니까?”

“아뇨, 아직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하여간 이놈의 뱀파이어 마법사는 고지식해도 한참 고지식한 게 문제다.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워다나즈라고 잘만 불러댔으면서 위양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호칭을 그리 딱딱하게 바꿔버리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워다나즈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지막 계약서를 꺼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은 바꾸고 싶은 계약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계약을 이어가는 걸로.”

“Άμείβοιμι μόνον βασιλεύς συναλλάγματος!”

고나달테스의 이름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워다나즈의 이름이 들어갔다. 빨라서 좋군. 워다나즈는 계약서를 도로 집어넣었다.

볼일은 끝났건만 배그렉 교수는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할 말이라도 남은 건가? 이제 교장이 되었으니 고백을 받아주려는 건가? 워다나즈는 살짝 기대에 부풀어 배그렉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배그렉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교장실 탁자 뒤로 다가와 워다나즈의 앞에 섰다. 일어나야 하나? 워다나즈가 고민하는 사이 볼라디 배그렉이 워다나즈의 의자를 자신에게 돌리더니 몸을 낮추었다.

워다나즈는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배그렉 교수님은 쓸데없는 짓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쓸데없는 짓을 하실 분인 것 같았다. 이한이 기겁해 소리쳤다.

“교수님, 뭘 하시는 겁니까?”

“?”

“아니, 아니, 왜 하필 발에…….”

“에인로가드의 주인이 바뀌었잖습니까.”

“고나달테스에게도 했었습니까?”

“예.”

워다나즈의 말문이 막혔다. 고나달테스에게도 했다는데, 이러면 할 말이 더 없던 것이다.

배그렉 교수가 의자 밑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한은 몰래 한숨을 쉬더니 볼라디의 손 위로 자신의 맨발을 올렸다. 그의 창백한 손이 이한의 발을 감싸 받쳤다. 무릎 꿇은 볼라디 배그렉의 허리가 이한 워다나즈의 아래 숙여졌다.

발등에 닿은 차가운 입술이 어색했다. 누가 발에 입 맞추는 일 자체도 처음인데 그게 볼라디라니. 이한은 순간 볼라디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학생 때라면 결코 허락해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은.

그리고 볼라디의 입술이 발등에서 떨어졌다.

어쩐지 부끄럽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이한은 쉽게 발을 회수하지 못했다. 볼라디는 그저 발을 받치고 있었으므로 살짝 들어올리기만 하면 됐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볼라디가 놓아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볼라디 배그렉이 에인로가드의 두 번째 주인, 이한 워다나즈에게 예속되었음을 알립니다.”

여느 때와 같이 감정의 기복 없는 목소리가 이한의 귀에 들려왔다. 할 일을 마친 볼라디는 자신이 벗겨놓은 것을 차례대로 손수 신겨주고는 일어나 살짝 묵례했다.

“잠깐, 잠깐만요, 교수님.”

이한이 교장실을 나가려던 볼라디를 불러세웠다.

“말씀하시죠.”

“잠시 대화하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배그렉 교수님과 학생 워다나즈로.”

“음.”

이한은 속으로 빌었다. 이 외곬으로 생각하는 뱀파이어라면 거절할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이 되었다 한들 과거의 사제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자가 요청하면 스승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들어주어야 한다……, 는 것이 배그렉 교수의 생각이었으니까.


테이블 위에 따끈한 차가 담긴 찻잔 두 잔이 놓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각각 배그렉과 워다나즈가 앉아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놀랍게도 배그렉이었다.

“부담이 되어서 그러나?”

“예, 뭐, 그런 것도 있고요. 아직은 모든 게 어색합니다. 의안도, 안대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거슬리는 것 같고.”

“괜찮다.”

‘그러니까 뭐가.’

이놈의 뱀파이어 마법사는 할 말을 속으로 다 삼킨 다음 결론만 내뱉는 것이 아주 고질적인 문제다. 화술이 전혀 늘지를 않는군!

“너라면 잘할 테니까.”

취소하겠다. 화술이 아주 조금은 늘었군.

“감사합니다.”

이한은 볼라디의 격려를 대충 넘겨두고 정말 궁금했던 주제를 꺼냈다.

“그런데 왜 하필……, 발등입니까?”

“?”

“키스 말입니다. 아니, 손등도 있고, 다른, 다른 곳이 많은데, 발등은 좀, 그렇잖습니까.”

“예속의 키스는 발등에 한다.”

“왜 예속의 키스를……? 다른 교수님들은 안 하셨습니다만…….”

“계약서에 들어가 있다.”

‘아하. 그렇군요. 이해됐습니다.’

“고나달테스 이 미친 해골이 정신 나갔나?”

“긴 시간을 살아왔으니 정신이 나갔을 수도 있지.”

이한은 제 입을 찰싹 때렸다. 말실수를 해도 하필!

“아니, 왜 들어가 있던 겁니까?”

“내용을 안 읽었나?”

“……. 바빠서 잊었습니다.”

“계약서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것보다 그래서 왜…?”

“전투 마법사가 학교 안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위험하지 않겠나.”

“아니……. 교수님이 그럴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젊었다.”

“…….”

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 젊었다. 한 마디로 설명이…… 되나? 싶긴 하지만 설명이 되긴 됐던 것이다. 그래도 유마디후스 님과 함께 있을 때를 보면 윗사람에겐 제법 깍듯해 보였는데. 젊은 시절에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아니지, 유마디후스 님에게도 예속의 맹세를 하셨나? 무릎이 너무 싼 거 아닌가? 전투 마법사라며, 이렇게 아무한테나 무릎 꿇어도 되나?

빠르게 납득하려고 해 봤지만, 이한은 점점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에 잠식된 이한을 구해준 건 볼라디였다.

“학창 시절 고나달테스를 종종 공격했다. 졸업 후에도 몇 번 공격했더니 맹세를 받더군.”

“아하. ……. 아니, 교수님도 에인로가드 출신이셨습니까?”

“대부분이 그럴 거다.”

어쩐지! 이한은 얼굴을 턱 덮었다. 다들 그냥 오래 일해서 익숙한 줄로만 알았지, 아예 에인로가드 출신이었을 줄이야!

볼라디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넘기고 옛 제자를 격려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자신은 이런 것에 썩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워다나즈라면 자신의 조언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을 알았지만, 지금 워다나즈는 격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너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주지.”

“아,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

“아니. 그래도 교수님이신데…….”

“버두스 교수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나?”

이한은 살짝 민망해졌다. 알고 계셨나? 배그렉 교수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늘 바라고 있던 일이긴 했지만, 그건 연인으로서 부르길 바라던 거였지, 상하관계에서 부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건 버두스 교수가 하도 속을 썩여서 그럽니다.”

“그럼 내킬 때 이름으로 부르도록.”

“부를 일이 생기면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볼라디가 살짝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이한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감탄했다. 이 교수 얼굴은 정말 누구에게도 안 뒤진다니까.

“그래, 괜찮아진 것 같군.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다.”

차를 다 마셨는지 그만 일어나려던 볼라디를 이한이 다시 한번 잡았다.

“어차피 교수님이 마지막이라 더 올 사람도 없는데, 식사라도 같이하시겠습니까?”

“제자로서 하는 부탁인가, 교장으로서 하는 명령입니까?”

이한이 심호흡했다. 지금,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꺼낸다. 세 번은 없어.

“워다나즈로서 하는 데이트 신청입니다, 볼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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