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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지? -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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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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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인데 이한은?”

“아까 배그렉 업고 방으로 가던데?”

“뭐?”

“왜?”

“설마 둘이 전투하다 배그렉이 죽은 거야?”

“의외군. 전투에 있어서는 배그렉이 한 수 위 아니었어?”

“…….”

“그 자식, 요즘 혈마법 연구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마력 폭주 탓에 죽은 게 아닐까.”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한과 볼라디는 이한의 방에 얌전히 살아있었다. 서로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으니 나가려던 차, 볼라디가 이한을 잡았다.

“그래서 혈마법의 시전을 위해서는 전날 핏기 진한 고기 요리를 먹는 것이 중요한데,”

“잠깐, 볼라디. 넌 어제 고기 안 먹었잖나.”

“사냥했다.”

“……. 아하.”

“ 다시 설명하자면 혈마법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많이 요구한다. 너에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그렇군. 알려주어 고맙다. 그런데 왜 지금 알려주는 거지?”

“궁금해하지 않았나?”

그렇게 이한은 볼라디의 혈마법 강의를 듣게 된 것이다. 시간 외 강의로 고통받던 이한은 시계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다행이다!

“볼라디. 저녁 시간이군.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 아쉽지만, 설명은 식사 후에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렇군.”

“그래, 그러니 함께 내려가지.”

“알겠다. 식사를 준비하며 마저 설명하지.”

‘아니…….’

이한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볼라디와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채소와 버섯들을 썰고, 달걀을 구워 얇고 길게 저미고, 전병을 부치고, 고기를 굽자 볼라디가 미소 지었다.

“혈마법이 그리 기대되었나?”

“아니, 음. 그래. 맞다…. 기대되는군….”

자신이 뭐라고 대꾸하건 무시해 버릴 친구의 모습에 이한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긍정했다.

“그런데 이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지?”

“넌 왜 매번 떨거지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건가?”

“볼라디.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그냥 챙겨주는 게 아니고 은화를 받고 판매하는 거다.”

“그건 저 떨거지들의 자존심을 생각한 행위 아닌가.”

‘음. 더 떠들어도 소용이 없겠군.’

“네 단점은 유약함이다. 정말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면 네가 좋아하는 것만 요리했겠지. 너는 동부식 음식을 즐기지 않나. 그런데 식단의 절반 가까이가 서부식이었다. 이건 떨거지들을 고려한 행위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아. 너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 웁.”

“볼라디. 이건 네 몫이다.”

이한은 시끄러워진 볼라디의 입에 채소전병을 하나 쑤셔 넣고 손에 접시를 들려주었다. 제 몫의 음식도 챙겨 자리를 잡자 볼라디가 우물거리며 따라왔다. 식사할 때의 볼라디는 먼저 질문하지 않는 한 조용했으므로 이한은 다행히 조용한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이 끝나고 후식도 나누어 먹은 학생들은 이한의 눈을 피해 탑을 빠져나갔다. 이한이 볼라디 혼자에게 이렇게 꽉 잡혀있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자유를 즐길 수 없었다. 이한이 한숨을 쉬었다.

“내 몫엔 고기가 빠졌군.”

“그래. 채식을 좋아하잖나.”

“배려해 준 건가? 고맙다, 이한.”

“이왕 고마운 김에 일 좀 도와라. 함께 치우지.”

“그건 떨거지들에게 치우라고 하면 되지 않나?”

“하아…….”

“왜 그러지?”

“볼라디.”

“응.”

“전투 마법과 관련하여 궁금한 것이 있다. 물어보고 싶군. 단둘이, 방해받지 않고.”

“그렇다면 알겠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청소는 다른 놈들을 시키거나 마법을 쓰고 방에서 물어봐도 되지 않는가. 그러나 볼라디는 수긍했다. 이한은 때때로 고집을 부릴 때가 있지만, 이한 본인이 그렇게까지 원하는 것이라면, 또 자신이 들어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친구는 그런 거니까.

그래서 볼라디는 치우는 내내 이한에게 혈마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심지어는 청소가 모두 끝나고 휴게실에 다른 학생들이 들어올 때까지도. 이한은 차마 볼라디의 강의를 멈출 수도, 힘든 내색을 보일 수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신난 녀석은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다른 학생들로 휴게실이 붐비기 시작하자, 볼라디가 일어섰다.

“갈까.”

“음?”

“네가 방해받는 건 싫으니 단둘이 있고 싶다 했잖나? 개인실로 들어가지.”

“아, 그랬지……. 그래, 알겠다.”

“네가 원한 건 내 방에 있으니, 이번엔 내 방으로 오도록, 이한.”


“설마 쟤네 둘 사귄대?”

“그런 소문 못 들었는데.”

“지금까진 숨기고 있다가 이제 공개 연애를 하기로 한 건가?”

“갑자기?”

“그게 맞다고 해도 소문내면 배그렉이랑 워다나즈가 우릴 죽일걸?”

“이 이야기가 푸른 용의 탑 밖으로 퍼지면 우린 정말 다 죽는다.”

“그래. 해골 교장이 살려내는 족족 다시 죽일 거야.”

그렇게 푸른 용의 탑은 침묵을 지켰다.


볼라디 방에 들어온 이한은 의외의 사실에 살짝 놀랐다. 아주 삭막할 거라고 생각했던 방이 약간의 활기를 갖추고 있었다. 아티팩트를 제작하는지 설계도와 관련 서적을 정리한 책장, 책의 초안을 쓰는지 잉크가 군데군데 번진 노트, 시약 때문에 색이 군데군데 변한 서랍.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이 아니라 침대에서 자는군?’

“그래서 이 인공 혈액은……,”

“그런데 볼라디. 궁금한 게 있는데 무례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런 것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만, 절대 그런 의도가 없,”

“괜찮다. 친구니까.”

“그, 혹시, 음. 너는 뱀파이어잖나.”

“그렇다. 피를 섭취하는 부분을 묻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침대……, 를 쓰나?”

“? 멀쩡한 침대를 두고 왜 바닥에서 자겠나?”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으윽. 뱀파이어는 관을 쓰지 않느냐는 거였다.”

“관에 누우면 사방이 막혀 수면 중 기습에 대응하기 불편하더군. 침대가 낫다고 판단되었다.”

“아하.”

“궁금증이 풀린 것 같으니 다시 설명하자면, 이 인공 혈액을 만들 때는 시전자 본인의 피보다 타인의 피를 섞는 것이 좋다.”

‘이 녀석에겐 무례랄 것도 없겠군. 그럼 다른 것도 물어봐도 되려나? 평소에 궁금했던 것이…….’

“이한. 듣고 있나?”

“물론이지. 그런데 피가 필수로 들어가야 한다면 시전자 본인의 혈액을 섞는 편이 낫지 않나? 감응력도 그편이 더 나을 텐데, 어째서 타인의 피가 낫지?”

“본인의 피보다 타인의 피가 더 달잖나. 본인 것은 역하,”

설명하던 볼라디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실수를 깨달았는지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본인의 피로 만드는 것이 낫겠군. 나의 착오였다.”

“종족 특성이었나. 이해했다.”

“이해해 주어 고맙군.”

“또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 그럼 너는 누구의 피로 만들었지?”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어 일단은 나의 피를 섞었다.”

“그럼 내 피를 섞어보는 것은 어떤가? 타인의 피로도 실험해 볼 수 있다면 감응과 통제력 부분에서 얼마나 차이 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마법의 완성도도 높아지겠지.”

“음. 그럼 실례하지.”

말을 마친 볼라디가 망설임 없이 이한을 들어 침대에 앉히고, 망토와 조끼를 벗긴 뒤, 넥타이와 셔츠 윗부분을 풀어내어 목 언저리의 맨 살결을 더듬는다.

‘잠시만.’

다음 차례로 서랍에서 공병과 빳빳한 종이를 꺼내어 병 입구에 종이를 덮고 팽팽하게 묶어두었다.

‘이거 불길한데.’

준비가 끝난 뱀파이어는 목을 드러낸 인간의 위로 올라와 이한의 뺨과 어깨를 잡아 젖혔다.

‘예상이 맞았잖아!’

이한이 볼라디의 가슴을 다급하게 밀어냈다.

“잠깐, 잠깐! 피만 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빼려고 하잖나.”

“아니, 이건, 음. 섭취……에 가까운 행위잖나!”

“걱정 마라. 죽이지 않는다. 뱀파이어에게 흡혈 당하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도 낭설이니 염려 말도록.”

“잠깐, 잠깐, 잠깐. 치유실에 채혈기가 있을 거다. 그걸로 빼도 충분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네 체질상 피에도 마력이 많이 함유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이해됐나?”

“그러니까 동일한 조건으로 실험하려면 마력이 거의 없는 피, 일반적인 마력을 가진 마법사의 피가 필요하단 소리지. 네 흡혈은 그걸 위한 장치이고.”

“정확하다. 있을지 모를 마력만 제거하겠다. 아, 생각처럼 말끔히 토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조금은 내가 마실 수도 있겠어. 괜찮나?”

“그런 건 얼마든지 괜찮지.”

“그럼 마저 실례하겠다.”

이한이 볼라디의 시원한 손에 얼굴을 기대고 어깨를 맡겼다. 곧이어 살과 근육을 뚫고 혈관에 긴 송곳니 두 개가 박히자, 피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생각보다 빠르진 않군. 예전에 헌혈할 때나 느껴보던 감각인데.’ 피가 뽑혀 나갈 때마다 이질적인 감각에, 찢긴 살갗의 고통에 움찔거린다.

볼라디의 눈이 붉게 타오른다. 뜨거운 살과 피. 꿈틀대는 혈관. 아, 이건 피식자의 목덜미. 이성을 놓고 마음껏 들이키고 싶은 본능을 죽이며 천천히, 조금씩 피를 빨아들인다. 이한의 움직임이 혈마법을 준비하느라 어제 잡아먹은 토끼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말랑하고 뜨거워.

엉겨있던 두 사람이 떨어진다. 볼라디가 준비해 둔 병을 들어 종이에 송곳니를 꽂아 넣었다. 이한의 피가 병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한은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쥐고 그 모습을 감상한다. 목에서 빠져나간 피가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는 왠지 모를 민망함, 하지만 굳이 내 앞에서 토해내는 것이니 봐도 괜찮지 않나 하는 뻔뻔함, 처음 보는 채혈법이 궁금한 연구자의 호기심. 그 모든 것을 쥐고 이한은 볼라디의 모습을 이렇게 평했다.

‘독사의 독을 채취하는 것 같군.’

마셨던 피가 거의 빠져나갔는지 줄줄 흐르던 것이 방울져 떨어진다. 흡혈한 시간에 비해 마신 피의 양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볼라디는 그쯤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병을 내려두고 곧바로 재료를 꺼내 시약을 만들었다.

“됐다. 시험해 볼까.”

“하지만 볼라디, 이미 밤이 되었다.”

“그렇군, 그런데?”

“밤 산책도 좋지만, 도중에 전투를 하면 교장 선생님이 징벌방에 넣어버리지 않을까.”

“탈출하면 되잖나.”

“하지만 시간이 소요될 테고, 내일 오전 강의에 못 들어간다.”

“아침이 오기 전에 탈출하면 되지 않나? 뭐가 문제지?”

“밤에 잠을 못 자면 공부에 지장이 생길 거다! 차라리 지금 자고 아침 일찍 시험하는 게 낫겠군. 누워라.”

저렇게 전투에 눈이 돌아간 볼라디는 누가 말려도 들어 처먹질 않는다. 답답해진 이한은 책상 앞에 서 있던 볼라디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불까지 꺼 버렸다. 졸지에 눕혀진 볼라디는 어리둥절했지만, 친구가 그렇다니 같이 누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주변이 고요해지자 이한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미쳤나? 남의 방에서 방 주인을 끌어안고 불까지 끈 침대에 같이 누워버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이한 워다나즈! 이한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자니 볼라디가 따라 나와 역시 전투를 하고 싶었나 보군. 하고 끌고 나갈 모습이 선명해 가만히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그냥 잠만 자면 되는 거 아닌가. 잠만!

“이한.”

“……. 무슨 일이지?”

“피 냄새가 나는데.”

“응? 아, 피가 아직 안 멎었나?”

볼라디가 돌아누워 이한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붉은 빛으로 번뜩였다.

“치료는 네가 필요하겠군, 이한.”

붉은 눈동자가 이한의 목덜미를 향했다. 말캉한 혓바닥이 이한의 목덜미를 쓸어올렸다. 피부에 흘렀던 핏자국이 전부 지워지자, 옷을 물었다. 핏기가 없어질 때까지 물고 빨아들였다.

볼라디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보다 붉어진 눈동자가 이한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긴장감에 이한의 목울대가 크게 덜컥였다.

“이한.”

“어, 어?”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아닌가.”

“뭐? 아니다.”

“그렇군. 인간은 원래 심장이 그리 빨리 뛰는 거였나. 친한 인간이 없어 몰랐군.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아니, 너와 별 차이가 없을 텐데.”

이한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볼라디 말이 맞았다. 왜 이렇게 빨리 뛰지? 누구랑 같이 누웠다고 이러나? 흡혈 때문에 긴장했나?

볼라디도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한보다 확실히 느린 자신의 심장 박동에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역시 이한이 더 빠르군. 그가 친구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느껴봐라. 내 심장이 더 느리지 않나.”

“그래, 응. 그렇군. 그런데 네 눈이 평소보다 붉어 보인다, 볼라디. 불을 껐는데도 보일 지경이야.”

얼떨떨한 이한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어두운 방을 살폈다. 그중에서 눈에 가장 먼저 밟히는 것이라면 역시 볼라디의 붉은 눈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피를 마셔서 그럴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건 처음이군. 아까 보니 뱀파이어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보이던데. 물어볼 것이 있나, 이한.”

아무런 말이나 던졌음에도 대충을 모르는 이 뱀파이어 친구는 성실히 대답해 준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예의를 신경 쓰지 말고 질문해도 된다고까지 말해주지 않았나. 연구자의 기질을 누르지 못한 이한은 호기심에 굴복해 결국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말았다.

“고맙군. 그럼 몇 가지 더 물어보겠다. 아까 본인의 피는 역하다고 한 것 같은데, 타인의 피라고 무조건 단 것인가? 그런 건 아닐 것 같아서. 왜, 다들 취향이라는 게 있잖나. 너는 어떻지?”

“……. 나는, 피를 마셔본 경험이 어릴 때를 제외하곤 드물어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없을 것 같군.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조합해 보자면, 보통은 깨끗한 피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건강한 사람의 피를. 끈적거리거나 탁한 피는 가끔 즐기기엔 괜찮지만, 주식으로 삼기엔 너무 자극적이라더군.”

질문을 허용해 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해 준다고는 안 한 것 같은데. 너무나 성실한 친구의 모습에 무언가 더 질문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 이한이 기억을 더듬었다.

볼라디가 불쑥 말을 덧붙였다.

“아, 네 피는 달았다. 맛있더군.”

‘아니, 잠시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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