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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지? - 上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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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마법은 쓰레기다.”

강의실에서 나오던 볼라디가 불쑥 말을 꺼냈다. 또 시작이군. 쿠는 고개를 저었고, 이한은 볼라디의 옆구리를 쳤다.

“왜 그러지?”

“네가 강의 시작 후 몇 시간 만에 그 말을 하는지 내기했거든. 내가 졌어.”

“쿠, 헛소리 마라. 볼라디 너도 말을 좀 가려서 하는 게 어떤가.”

“왜지?”

“그야 교수님의 분야를 무시하다니, 시비 거는 행동이잖나.”

“무시가 아니다. 느낀 그대로 평했을 뿐.”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결투까지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설마 교수님이 학생에게 결투를 신청하진 않으시겠지만…….”

“음.”

볼라디가 고민했다.

“그렇다면 주의하지.”

쿠는 감탄하며 이한에게 조용히 박수를 쳐 주었다.

“난 정말 네가 존경스럽다, 이한!”

“?”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넌 대체 왜 환상 마법 강의를 듣는 거야? 이한이랑 나는 환상 마법에 관심이 있다지만 너는 아니잖아.”

“그래, 볼라디. 환상 마법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강의를 듣는 건 시간 낭비 아닌가?”

“완전한 전투 마법의 형을 완성하려면 필요하다.”

“응? 한 가지 마법만 단련해도 그쪽으로 뛰어나다면 완전한 전투 마법을 완성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쓰는 그 혈마법, 굉장하던데.”

“혈마법?”

“아, 응. 얼마 전에 볼라디가 책을 한 권 썼어.”

“〈기초 혈마법과 그 응용에 대하여〉. 관심 있나, 이한.”

이한이 혈마법에 관심이 있었나. 볼라디는 쿠의 말을 가로챘다. 친구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주고 공부하는 것이 진정한 친구의 도리. 더군다나 이한은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전 학파의 수업을 함께 수강하는 것이고.

키르민 쿠는 환상마법사가 목표인지 환상 마법의 심화 수업을 주로 듣고 있지만, 이한과 볼라디는 달랐다. 그들은 모든 강의를 수강했다. 그렇기에 받은 과제도 언제나 같았고, 공부하는 시간도 거의 비슷했다. 보통은 학년 수석인 이한이 이론 공부를 도와줄 때가 많고-물론 볼라디는 되도록 묻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편이다- 볼라디 자신은 전투 훈련을 돕는 식으로 서로의 공부를 도와갔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이론마저도 도와줄 수 있을 때 아닌가. 볼라디는 기뻤다.

“읽어보겠나. 가르쳐주겠다.”

“어……. 준다면 고맙게 받으마…. 아, 쿠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군, 볼라디.”

이한이 급히 말을 돌렸다. 볼라디는 다 좋은데, 아니, 다 좋지는 않다. 사회성이 극히 부족한데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도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단점은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 하나만 꼽자면, 볼라디는 전투에 미쳤다. 이 녀석은 피를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닌 데 왜 이리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생각에 잠겼던 볼라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중마법 수련을 통한 완전한 전투 마법의 형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나와 이한의 목표다.”

너무 어이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지금의 이한이 바로 그 짝이다. 내 목표가? 대체 언제부터? 이한이 홀로 혼란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쿠의 질문과 볼라디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환상 마법을 듣는 거야? 전투에 적용시켜 보려고?”

“더해서 환상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쉽게 찾기 위해.”

“그럼 다른 학파의 강의를 듣는 것도…….”

“그렇다. 모든 마법을 알고 있다면 수만, 수억 가지의 응용법이 나올뿐더러 상대의 공격을 파훼하기도 쉬워지지. 너도 알고 있잖나, 쿠.”

“그래. 환상 마법을 해지하려면 환상 마법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잠깐, 잠깐. 키르민. 즐겁게 대화하는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그런데 우린 다음 강의가 있어 가 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소리냐, 이한. 강의는,”

“교수님이 좀 더 일찍 오라고 부르셨어. 그러면 먼저 가 보겠다. 이따 보자, 쿠!”

“어, 어어, 그래. 이따 저녁에 탑에서 보자.”


이한은 어리둥절한 쿠를 내버려 두고 볼라디의 손목을 끌어왔다. 본관 뒤편의 인적 드문 산책로. 아직도 어이없음이 가시지 않은 이한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중마법 수련을 통한 완전한 전투 마법의 형을 완성하는 것’이라니. 그게 네 목표인가?”

“너의 목표이기도 하지 않나.”

“아니, 아니야! 볼라디, 난 너와 다르다. 나는 너처럼 전투 마법에 큰 뜻이 있지 않다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한은 입을 딱 다물었다. 이렇게 진지한 친구 앞에서 어떻게 관료로 취직해 안정적인 직장을 갖거나 떼돈을 벌어 탱자탱자 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모습을 오해한 볼라디가 입을 열었다.

“부정할 필요 없다. 지금 네 의식은 전투마법사의 길에 거부감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봐라, 이한.”

둘 사이의 발밑에 창의 형태를 갖춘 전기가 내리꽂혔다. 가까스로 피한 이한은 아주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볼라디를 노려보았다. 저놈의 광기는 잠잠해지려야 잠잠해질 수가 없구나! 생각하는 와중에도 전투에 익숙해진 손은 수옥탄 여러 개를 띄워 회전시키고 있었다. 볼라디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길은 전투 마법에 있어. 날 믿어라. 친구로서의 조언이다. 너도 그리 생각했기에 여러 학파의 강의를 수강하는 것 아니었나.”

“전혀 아니다. 오해하지 말도록. 그건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 오해를 풀고…,”

“의식이 부정했지만, 무의식이 너를 전투 마법으로 이끌었군. 게다가 너는 예지 마법에도 적성이 있지 않나. 네가 아무리 부정한들 너는 올바른 길을 고른 거다, 이한.”

‘환장하겠군.’

볼라디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녀석. 원인과 이유는 잘 따지지 않는다. 대화를 포기하고 수옥탄을 날리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이걸 던져서 볼라디에게 이겨도 큰일이고, 애초에 이길 자신도 없으며, 실패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위험하다. 볼라디는 명실상부 3학년 최고의 전투가니까.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볼라디에게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법 실력이야 학년 수석인 이한이 더 뛰어나지만, 전투력을 따지면 볼라디를 따라올 자가 없다. 저 녀석은 학파의 모든 분야를 심화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완벽히 다지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려는 녀석이니까. 볼라디의 장점은 유연한 생각. 이한의 장점은 막대한 마력.

볼라디 배그렉이 품에서 물약을 꺼내어 마셨다. 평소에 마시는 마력 회복 물약과는 다른 붉은색 약. 이한은 불길함에 급히 몸을 굴려 피했다. 볼라디의 눈이 여느 때와는 달리 새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미친 흡혈귀가 지팡이를 짧게 휘두르자 붉은 선이 이한이 있던 곳을 가르고 지나갔다. 땅이 두 갈래로 나뉜 모습에 이한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볼라디 배그렉!”

해골 교장이 오는 건 아니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볼라디의 마법을 겨우 막아내던 이한은 공격이 잠잠해진 것을 느끼고 예지 마법을 시전했다. 습격을 준비 중인데 섣불리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 이 모습을 볼라디가 보았다면 ‘역시 전투 마법사가 되려고 했던 거’라고 착각하며 좋아했겠지만, 아직 어린 뱀파이어는 완성된 지 얼마 안 된 혈마법을 과도하게 많이 시전해 마력 탈진이 왔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진 못했다. 친구의 쓰러진 모습을 예지하고 놀란 이한은 급히 뛰어가 풀숲에 늘어진 뱀파이어 친구를 안아 들었다. 다행히 볼라디는 쓰러졌을 뿐 기절한 게 아니었기에 의식은 남아있었으나,

“연습 되지 않은 마법을… 이렇게 과도하게 쓰다니. 내 실책이군.”

“입 다물어라, 배그렉.”

“훈련 후의 복기는 중요하다.”

“내버려 두고 가는 수가 있으니 닥치도록.”

“음.”

“…….”

“화난 건가?”

“…….”

“왜지?”

“……! 하아…….”

“이유를 모르겠군. 알려줄 수 있겠나.”

그 덕분에 이한의 속을 박박 긁고 말았다. 왜겠냐, 이 교수 같은 놈아! 아, 이건 너무 심했나. 하지만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일단 해보라며 과제를-그러니까 공격을- 내주는 것이 교수 같은 짓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한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볼라디, 일어날 수 있겠나. 치유실에 가야 할 것 같다만.”

“필요 없다. 마력만 회복되면 되겠군.”

볼라디의 말 앞에는 ‘뱀파이어는 치유가’라는 말이 들어갔어야 했지만, 그의 판단하에 깔끔하게 생략해 버렸고, 그 덕에 이한은 겨우 가라앉힌 화가 다시 치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화가 나면 이성적인 부분이 약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한은 볼라디를 들고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데려갔다. 체격 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볼라디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들고 있을 때 등에 닿았던 감촉으로 보아하니 살은 없고 전부 근육이던 것 같은데. 흰 호랑이 탑 놈들보다 이 녀석의 몸이 훨씬 더 단련된 것 아닌가? 자신보다 배는 무겁게 느껴진 친구를 끌고 오느라 진이 쭉 빠진 이한은 볼라디를 제 침대 한쪽에 눕혀놓고 자신도 그 옆에 철퍽 엎어졌다.

“여긴 왜 온 거지?”

“내 방이다. 네 녀석이 치유실 가기 싫다고 우기는 바람에 들고 왔지. 가기 싫다면 내가 치료해 주마. 내상은 없나?”

“필요 없다, 이한.”

볼라디는 어리둥절했다. 들려 오는 도중에 낙상하여 생긴 부상은 다 나아 버렸는데 어딜 더 치료한단 말인가?

“치료받기 싫어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한번 살피긴 해야지. 너 그 마법 쓰느라 높은 곳에 떠 있다가 뚝 떨어진 건 기억도 안 나나? 최소한 멍은 들었을 테니 그것만 봐주겠다.”

정말 필요 없음에도 우겨대는 이한에 볼라디는 아주 미세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망토와 베스트를 벗고,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볼라디의 창백한 상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상처를 살피려던 이한은 당황했다. ‘왜……, 상처가 없지?’ 이한의 시선을 이해한 볼라디가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을 벼려 제 배를 푹 찔렀다. 깊게 팬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이한이 경악하기도 잠시, 볼라디의 상처는 금세 수복되어 흘러나왔던 흐린 핏자국 외에는 멀쩡해졌다.

“필요 없다. 이해했나, 이한.”

“……. 알겠다.”

‘미친놈.’

이것이 제 침대에서의 첫 감상이었다.


3차 연성 허락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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