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지 않을 소재는 윤슬 아래로 흘리고

스핀 백업

창고 by 최쑝

사람 많네. 요네르는 이름난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달카드 가문, 모라디 가문, 유명한 상인의 자제까지. 역시 에인로가드구나. 이런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이다니. 지금은 이름 없는 이들도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할 거다. 에인로가드를 나온 이들 중에 유명하지 않은 이는 없으니까. 물론 나쁜 의미로도. 그나저나 가이난도는 어디 간거야. 금발을 찾아 눈을 굴렸다.

”으악! 아파, 아프다고!“

”아프라고 하는 거다.“

”나 황자야!“

”난 마령관...지금은 아니지. 요네르! 오랜만이네.”

“저를 아시나요?”

가이난도의 귀를 쭈욱 늘리던 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데. 누가 보면 절친한 사이인 줄 알겠다.

”요네르 메이킨, 꿈은 공방을 차리는 거 맞지?“

차가운 인상의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에 요네르는 제 머리를 두드렸다. 누구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기억력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기에 요네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구지? 메이킨 가문과 거래하는 상단의 자식? 파티에서 마주친 귀족 소년? 수수께끼의 소년은 머쓱한 얼굴로 손을 거두고서 인사했다.

”미안하다. 반가움이 앞섰어. 나는 이한 워다나즈야.“

”워다나즈?“

”그래. 그보다 내 뒤로 오도록 해.“

워다나즈 출신이라 저를 소개한 이는 가이난도를 뒤쪽으로 던졌다. 요네르는 이한의 말대로 움직였다. 어째서일까. 멋대로 움직이는 몸에 뒤늦게 이한을 바라봤다. 그와 이한 사이에는 그 어떠한 안면이 없다. 그런데 왜 이리 친근하게 느껴지지. 이한은 복잡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살짝 웃어주고서 저들끼리 떠드는 학생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내 뒤로 와라!“

”너가 뭔데?“

"어디서 명령질이야."

”그런 반응 오랜만이군.“

이한의 주변으로 번개가 모여들었다. 굉음과 함께 눈을 찌르는 빛에 학생들이 뒷걸음질 쳤다. 이런 과격했나. 아직 에인로가드를 겪지 않은 이들에게는 너무하긴 하지. 마법을 해제하고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뒤로 오지 않으면 죽이겠다. 참고로 나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다.”

말까지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염동력으로 던졌다. 꿋꿋하게 버티는 황녀의 손에 초콜렛을 쥐어 주고 뒤로 보냈다.

“아, 너희들 간식 있으면 죄다 입에 쑤셔 넣어라. 후회하지 말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마력에 경고했다. 뒤쪽에 있는 녀석들에게 방어 마법을 둘러주고서 제 몸을 점검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그렸는지 당신은 모를겁니다.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학생들은 제 앞을 가로막는 벽에 비명을 질러댔다.

저 녀석 마법 범죄자인거 아니야? 워다나즈가라더니 역시 미친놈이잖아! 학창 시절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반응이네. 이한은 그리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살인적인 미소에 친구들이 몸을 움츠리며 벽 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그런 반응은 나도 상처인데.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귀를 헤집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공중에 해골이 떠올랐다.

-무쇠...너희 왜 그러고 있냐.

입학식부터 저리 칼 같이 서있다니! 말도 안돼! 한명을 필두로 진형을 갖춘 이들에 경악했다. 대체 누가 에인로가드에 대해 떠들고 다닌 거야. 오수는 이 양떼의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하하하.”

앞에 있던 이가 웃었다. 실성하듯이 웃어대던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볼을 타고 끝도 없이 흘러댔다. 그 반응에오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광인이냐?

“건강하시네요. 짜증나게시리.”

이한은 고개를 저어 눈물을 털어냈다. 젠장! 눈물이 나오다니. 친구들을 봤을 때 잠잠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고장난 눈물샘은 억지로 틀어막았다. 팔팔한 해골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스승은 건강해 보였다. ...리치가 건강할 수 있나. 삐딱하게 서서 친구들을 힐끔 바라봤다. 미친놈이라고 수근거리고 있네, 배은망덕한 자식들.

-너 워다나즈 놈이구나.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녀석은 그 가문밖에 없지.

“맞아요, 교장 선생님. 그리고 이제.”

손 위로 원소들을 불러모았다. 암흑 원소로 시야를 얽매였다. 통하지 않겠지만 괜찮아.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몸에 새겼던 마법을 일제히 퍼뜨렸다. 공간을 채우던 마력들을 흡수하여 교장을 끌어내렸다. 강대한 해골이 부서지며 녹색 가루가세상을 밝혔다.

신입생이 대마법을 펼칠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오수가 흔들렸다. 빈틈에 마력을 집어넣어 잡아당겼다. 고고한 뼛가루 사이를 유영하며 중심에 번개를 내리꽂았다. 손을 가득 메운 탄내와 함께 오수에게 강제로 육신이 덧씌워졌다. 굳게 다물린 입술, 경직된 눈매, 우스운 얼굴에 웃음이 났다. 숨이 멎을 때는 해맑게 웃었으면서 지금은 그런 표정을 짓네. 웃음 아래로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쳤으면서. 눈을 한번 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대 방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놀란 그를 두고 주머니에서 너클을 꺼냈다. 양손에 차고서 손목을 한번 돌렸다.

“이 꽉 깨무세요. 이빨 나가기 싫으면.”

여기는 임플란트도 없으니까. 그가 하나하나 직접 부여 마법을 새긴 너클이다. 잘못 맞으면 뼈 부러지는 걸로 안 끝난다. 손을 높게 들어 휘둘렀다. 그러나 오수의 턱에 닿기도 전에 기세가 늦추어졌다. 혀를 짧게 찼다.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리 허망하게 막히다니.

잠시. 이게 뭔.

대마법이 파훼되었다. 주먹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끼긱거리는 소리에 주먹이 비명을 질렀다. 역시 급조한 거라 오래 못버티는군. 여즉 인간의 현상을 취한 오수에 꿍얼거렸다.

“맞아 주지도 않네.”

“너 대체 뭐냐.”

“당신의 연인 희망자?”

“뭐?”

“고대에는 프러포즈 과격하게 했다면서요.”

당신은 고대 사람이니까 맞춰봤습니다. 싫었나요. 장난스러운 말에 오수는 혀를 찼다. 역시 워다나즈로군. 360도로 돌아버린 놈이 입학했어. 제 앞에 그려지는 고생길에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안녕하세요.”

“안...너 누구야!”

디레트는 낯선 이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어두운 기운이 풍기는 흑마법 강의실에 저가 모르는 이가 서 있다니. 교장이 보낸 하수인인가. 개학식날 밀수를 했기에 디레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들킨 건가? 첫날부터 징벌방행이라니. 밀려들 과제에 벌써부터 아찔해졌다.

“어제 입학한 신입생이요.”

“뭐?”

“디레트 선배, 유크벨티레 선배 어딨나요?”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신입생이 이 야밤에 학교를 돌아다닐리가 없잖아!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하수인이네!

“안 믿기겠죠. 근데 선배는 믿으셔야 해요.”

당신도 시간을 농락한 공범이니까. 이한은 감춰지지 않은 살기에 웃으며 디레트의 지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지금의 디레트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한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괜히 공격해서 적개심을 키울이유는 없기에.

“디레트?"

유크벨티레가 타이밍 좋게 디레트를 찾아왔다. 이한은 한걸음 물러나며 손뼉을 쳤다. 디레트는 유크벨티레를 향해 도망가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으나 이한이 빨랐다.

“세상 좀 구합시다.”

“뭐?”

“저 연애도 해야 하고 바빠요. 하여튼 좀 도와주십쇼.”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저 마력 많습니다.”

세상 구하자니까 왜 그래야 하냐고 묻다니. 이 선배는 역시 소버두스였다. 이한은 유크벨티레에게 너클을 건넸다. 그가 직접 새긴 것들이다. 조합부터 마법식까지, 모두 새로 만들어낸 녀석은 유크벨티레의 흥미를 끌기 충분할 거다. 반짝거리는 눈을 보아하니 성공이군.

“디레트 선배는...교만공 잡아다 드릴게요.”

“뭘, 뭘 잡아 온다고?”

“교만공이요. 지금은 바빠서 무리고 여름 방학에 데려오죠.”

뭐라는거야! 신입생이라 주장하는 하수인은 정신이 이상한가 보다. 교만공을 무슨 과일 따오듯 데려오겠다 한다. 교만공이 뒤뜰에 사는 강아지도 아니고 대체! 디레트가 입을 벌리고 있자 유크벨티레가 친절히 닫아주었다.

“우리가 뭘 하면 되나.”

“제가 책 몇 권 드릴테니까 그거부터 익혀오세요.”

소버두스의 장점, 자신에게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하면 군말하지 않는다. 따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아니, 잠시만 난 아직 도와준다고.”

“흑마법 학파 후배가 도와달라고 하면 당연히 도와주실 거잖아요.“

”아니, 너 아직도 신입생이라고 주장하는 거야? 이 너클부터가!“

이한은 디레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선배, 이런말 하기 싫지만 선배는 제 발로 4+1학년을 가게 됩니다. 제가 1을 없애드릴게요.”

“뭐, 뭐?”

당황하는 디레트에 책을 쥐여주고 손을 흔들었다.

”그럼 그거 다음주까지 익혀오는걸로 하죠! 전 이만 연애하러 갈게요!“

”잠시만, 야!! 5학년이라니 그딴 저주를 하고 도와달라 하면!!“

외침을 무시하고서 문을 닫았다. 연애 사업을 위해서라면 동료의 불만 정도는 무시해야 한다.


“어찌 들어왔지.“

”문 열고 들어왔죠.“

”마법이 걸려있었을 텐데.“

”그 정도야 당연히 해체했죠. 당신 마법을 본 세월이 얼마인데.“

”일주일 전에 입학한 놈이 뭐라는 거야!”

당당하게 집무실에 앉아있는 놈을 향해 외쳤다. 소파에서 서류들을 뒤적이는 이한에 골머리가 아팠다. 1학년이 풀 만한마법이 아니었다. 6학년들도 끙끙거리는 수준의 것들인데 저 놈은 대체.

”사랑하면 단번에 알 수가 있대요. 일주일이면 차고 넘치죠.“

안 그래요? 이한이 키득거리며 서류를 넘겼다. 집무실을 뚫은 녀석이 에인로가드 운영계획서 같은 쓰레기를 보다니. 넘쳐나는 보물들을 두고 굳이 서류를 보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가주놈은 널 어찌 키운건지.“

”에이, 가주님은 바빠서 자주 보지도 못 했는데요. 절 키운 사람은...아무래도 미친 교수들이죠.“

댁 포함해서. 서류들 사이에 가르시아와 볼라디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 무제 타이틀을 떼지 못한 배그렉의 성의 없는 계획서를 잿가루로 만들고서 오수에게 물었다.

“고백 안 받아줘요?”

“쯧, 너 같은 놈이랑 어찌 사귀냐.”

별 미친놈 다 보네.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하는 사랑 고백에 놀아나줄 생각은 없었다. 오수는 서류들로 시선을 옮긴 이한을 관찰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 검 어디서 났냐.”

“어제 나가는 길에 반마법주의자 조지고 오면서 가져왔죠.”

“외출을 했다고?”

저게 무슨 소리인가. 1학년생이 외출이라니! 가르시아 교수가 쓰러진 반마법주의자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깔끔한 실력에 누군지 추적하려 했는데 그 범인이 자신이란다. 경악한 오수와 달리 이한은 태연하게 말했다.

“네.”

“어떻게?”

“알려드려요? 음, 그냥 말해드릴 순 없고 ‘이한’이라고 부르시면 알려드릴게요.”

“이한.”

짧은 소리였다. 바람에 날려 사라진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제 이름을 담은 목소리를 음미했다. 느긋한 태도에 오수가 재촉했다.

”이제 말해라.“

”말할 리가 없잖아요. 하하!“

순진한 말을 하시네, 에인로가드 교장이! 그렇게 굴었다간 에인로가드에 다람쥐처럼 숨겨두신 창고 제가 다 털어버릴 겁니다. 이한은 그리 외치고서 집무실 벽을 뚫고 도망쳤다. 오수는 바람이 들어오는 구멍을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욕설이 담긴 고함이 산맥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제가 할게요.”

솥 앞에서 닭을 손질했다. 자연스러운 행동에 선배들이 수군거렸다. 선배의 안내도 없이 마을에 당도한 의문의 후배님이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6학년의 것과 같아 누구도 제지를 하지 못했다.

“저거 진짜 후배 맞아? 1학년이 어떻게”

당근과 감자가 먹음직스럽게 잘려지고 있었다. 풍덩풍덩 솥에 들어가서 따근따근해지는 모습에 다들 입을 닫았다. 크림스프의 달달한 냄새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야야, 그냥 먹고 뒤지자. 해골 새끼가 부활시켜 주겠지.”

독버섯도 먹는 마당에 뭔들 입에 못 넣겠냐. 교장 노릇하면서 학생들을 굶겼는데 지금은 먹이고 있네. 이한은 허겁지겁수프를 마시는 선배들을 두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건물 별론데.”

염동력으로 건물을 띄웠다. 걸려진 마법들을 조각내고서 제 취향대로 건물들을 조립했다. 하는 김에 나무 덩쿨도 없애고안에 창고와 침실도 만들었다. 앞으로 작당 모의는 여기서 하면 되겠군. 주변에 납치할 인재들도 많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니 다레트 선배가 수프 그릇을 핥고 있었다. 이한은 그릇에 빵과 과자를 넣어주었다. 노예 1호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 아직 디레트 선배 학생이지. 재조립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디레트 선배 쓰세요.”

“어...? 고마워.”

대체 뭐 하는 후배지. 모르툼 교수가 데려온 것을 보면 1학년은 맞는데. 빵을 오물거리며 건물들을 부수는 후배를 관찰했다. 저러다가 2대 에인로가드 교장 하는 거 아니야? 저 정도 재능과 일처리라면 가능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이한은교장의 숨겨진 후계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수가 빡치게 하면 학생들한테 먹을 거 주러 오는 거 아니냐며 제발 둘이 싸우라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이한은 집무실에 있는 도자기나 다름없었다. 없으면 서운할 지경이었다. 오수는 연구 계획서들 위로 빨간 메모를 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보시면 아무리 저라도 부끄러운데요.”

-부끄러우면 나가라, 빌어먹을 놈아.

투닥거리기도 잠시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게를 잡는 이한에 오수는 무슨 개소리가 나올지 설렜다, 정말. 이번에는 어떤 말로 자신의 혈압을 올릴까?

“예산 타올까요?”

생각보다 평범한... 아니, 1학년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되는 주제였지만!

버려진 계획서들을 흔들며 말하는 그에 코웃음 쳤다. 사랑 고백보다 더 돌아버린 말이로군.

-택도 없는 말 하지 말고 기숙사로 가라!

“일 도와줘서 좋으면서.”

윙크를 보내는 미친놈에 오수는 서류를 던졌다. 어디 어린 것이 아양을 부려! 서류들을 염동력으로 받아 책상 앞에 정리하는 모습이 얄미웠다.

-수업 들으러 가!

징벌방에 가두어도 5분 후에 복도를 당당히 걸어 다녔다. 대체 가주 놈은 뭘 키운 거야. 세상을 전복하려는 속셈인가. 수업도 예지 마법을 사용해서 최소한으로 듣고 다녔다. 예지 마법으로 그딴 짓 하지 말라고!

-넌 왜 그렇게 미친 거냐?

“네. 전 미쳤습니다. 당신에게 미쳤다구요.”

넥타이를 거칠게 푸는 시늉을 하며 제 앞으로 다가왔다. 책상 앞에 걸터앉아 눈을 찡그리는 녀석에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에게서 이런 반응을 끌어내다니! 악마 공작도 성공하지 못한 대업이다.

“생각보다 더 싸구려 소설 같네요.”

자신이 말하고서도 별로였는지 다리를 꼬고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오수는 싸구려 소설에 저를 끌어들이지 말라 투덜거렸다. 어차피 당신과 나는 이미 주인공인데요. 턱을 꾀고서 본심을 내뱉었다.

“당신한테 한번 말해보고 싶었어요. 이런 고백.”

우스꽝스럽고 같잖은 고백 말이에요. 눈물보다는 웃음만 나오는 그런 거.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많아요. 당신은 저의손을 잡고 이미 유행 지난 말들을 모두 받아내어야 한답니다. 그게 당신이 감당해야 할 벌이기에.

오수는 저를 아련하게 쳐다보는 이한에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일까. 360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척 하는 워다나즈는 종종 저런 표정을 지었다. 끝나버린 이야기를 쥐고 떼를 쓰는 아이 같은 얼굴. 그 아래에 깔린 비원이 저를 울렁이게 했다.

이한은 조용한 오수를 보다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우울한 기억만 떠오르네. 제 손을 채우던 빛무리들이 눈 앞을아른거렸다. 주먹을 쥐었다 피며 주제를 돌렸다.

“예산 타드리면 뭐 해주실래요?”

-너가 타올 수 있겠냐.

오수는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는 그의 의지에 답했다. 아직은 건드리지 말자. 한번 만지면 모든 것이 깨질 것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타오면 그날부터 1일 어때요?”

깨져도 될 거 같네. 저 워다나즈가에서 가장 미친 자식은 쉬지 않고 개소리를 지껄여댄다. 그가 감춘 것이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쳐서 다시는 제 앞에 서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법 사고가 일어나는 에인로가드지만 산맥을 덮고 마도 방벽에 마력이 스미는 일은 잘 없었다. 자신의발 아래에서 존재감을 내비치는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영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개수작을 부려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런 짓을 할 녀석은 한명이었다.

-워다나즈.

“...안녕하세요.”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항상 제가 보이면 몸을 날려 오던 녀석이었는데. 그의 떨떠름한 반응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학생은 이런 반응을 보여야지!

-무슨 마법 연구 중이냐?

“당신을 유혹하는 마법이요”

강적이다. 바로 짖을 줄은 몰랐는데. 정색하고서 답했다.

-개소리하지 마라.

“재앙을 없앨 거에요. 아직은 약하니까 가능합니다.”

한꺼풀 벗겨졌다. 그늘진 눈에 형형한 살기가 올라왔다. 꽁꽁 감춰둔 속내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재앙?

“관여하지 마세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선을 그었다. 갑자기 제 앞에 그어진 선에 어이가 없었다. 저는 멋대로 넘나들면서.

-마도 방벽의 수호자로.

“그 직책 제가 가져갈테니까 제발, 그냥 얌전히 계세요. 학생들이나 괴롭히러 가요.”

제 말을 끊은 녀석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일까. 5서클 마법도 손가락 하나로 사용하는 녀석이었다. 소세계 구현 정도는 하품하면서 했다.

어린 놈의 정신 사이로 잔상이 흘러나왔다. 재빨리 감추었지만 이미 새어나온 것까지 수습하지는 못했다. 오수는 먼지 쌓인 파편을 읽어내렸다.

세상이 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을 가득 채운 비탄 아래에 잠겨 엉망인 손만 내려보았다.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도, 공간도, 사상도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비명을 지르는 세계에 그만이 오롯했다. 아닌가. 고개를 들어 고고하게 빛나는 오수를 담았다. 엉망이네, 우리 둘.

소세계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녹슨 왕관이 머리를 조였다. 그 아래로 핏물이 떨어졌다. 제가 흘리는 것이 눈물인지 혈액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한은 조각난 세상을 잡으려 했으나 그를 비웃으며 바람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오수, 우리가 마지막이에요.”

이 뒤에 남겨진 이들은 많았다. 허나 저 재앙을 상대할 위력은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버티기 뿐. 오수와 자신이최후의 보루였다. 어깨가 짓눌렸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쉽게 올리는구나.”

“누구나 그럴걸요.”

저 광경을 본다면. 깨어진 노을 사이로 허기진 재앙이 쏟아져 내렸다. 땅을, 나무를, 생각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며 악착같이 덤벼드는 것들을 쳐냈다. 진득하게 남은 녀석들을 거칠게 떼어냈다. 가빠지는 숨과 달리 마력은넘쳐났다. 오수에게 파도를 넘겼다. 자신보다 효율적으로 해일을 일으키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말 안 했지.”

이리 갑자기 밤이 찾아오다니. 떠오르기 시작하는 만월에 감정이 들끓었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볼라디의 조언을 되새겼다. 서늘한 손이 저를 뒤로 끌었다.

“정신 차려라.”

“...네. 죄송합니다.”

만월이 찢기며 붉은 눈동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신의 낫이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오수는 멍해진 이한을 안았다. 그의 눈을 가리고서 귓가에 새겼다.

“10초만 세거라, 제자야.”

10초, 그 마법 같은 숫자가 이한의 뇌를 잠재웠다. 제 스승은, 대마법사는 저 정체 모를 이형의 존재도 해치울 거다. 그리고 돌아와 그에게 말하겠지. 간만에 재미있는 상대였다고. 마력이 흘러갔다.

10, 9, 8, 7, 6, 5, 4, 3, 2, 1. 숨 한번 내뱉으면 흐르는 시간인데도 길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이어서 그럴까.

푸르른 실로 동여매진 세상의 틈이 보였다. 배를 채우던 재앙은 사라지고 서늘한 달빛만이 폐허를 비추고 있었다. 반딧불이? 초록색 빛 덩어리가 작게 일었다. 안에 담긴 마력이 익숙했다.

땅을 주름 잡으며 움직였다. 아닐 것이다. 이게 그의 흔적일 리가 없다. 마지막을 쉬이 논하지 말라 한 이가 종막을 장식하다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스승님! 오수!”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들리지 않는 대답을 재촉하며 빛덩어리들을 그러모았다.

“야!!”

“...예의는 어디에 버리고 온 거냐, 이한.”

“댁은 하체를, 씨발.”

“스승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

사라지려는 빛들을 긁어 그의 아래에 붙였다. 허공으로 흩어지려고 하는 그의 웃음에 욕설을 짓씹었다. 어째서야. 10초면된다며, 왜 어긴 거야.

“이한, 잘 들어라. 이제 너가 마령관이자 마도 방벽의 주인이다.”

“...닥쳐요.”

“유언 정도는 들어주거라.“

“어떻게든 살려낼 거니까 조용히 해요.”

희미해진 손이 볼을 괴롭혔다. 떨리는 눈동자에 오수의 밝은 미소가 채워졌다. 웃지 않았으면, 그렇게 개운하게 가버리면. 나는 끝 모를 생을 이 무거운 감정을 안고 살아야 하잖아.

“이 세상을 사랑해라, 이한.”

나의 제자야. 모든 것을 욕망하고 끌어안아라. 그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말고. 너가 사랑하지 않는 세계라면나의 희생은 무용지물이 되니까. 나를 위하여 세상을 사랑하렴.

“...당신이 없는 세계를 어떻게.”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오수, 댁이 원하는 형태는 아닐 텐데요.”

“상관없다. 나는 결과만 보니까.”

“그랬죠. 과정이라는 건 쓰잘데기 없는 놈이죠.”

그의 지론을 가슴에  새기며 사라지는 그의 이마에 작별 인사를 했다. 이건 당신의 결말이 아닐 겁니다. 이런 세상을 제가사랑할 리가 없잖아요. 욕심 많은 스승 아래에는 그보다 탐욕스러운 제자가 자랐답니다.


대마법이 세상을 밝혔다. 새벽의 음울함 위로 청음이 드리워졌다. 이한은 첨탑 위에서 떨어지는 유리 조각들 사이로 손을집어넣었다. 꾸물거리는 검은 물체가 손을 가득 채웠다.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무시하고서 녀석의 신체를 헤집었다. 붉은 눈동자를 뽑아내어 삼켰다.

청아한 마력 사이로 탁한 기운이 퍼져나가다가 사라졌다. 여물지 않은 재앙은 잔물결에 휩쓸렸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한은 메마른 눈을 하고서 조각난 푸르름을 메꾸었다. 선배들을 굴려 만든 축음기에서 나온 노래가 마법진을 지워나갔다. 마지막 음표가 빈공간을 채웠다. 이한은 아슬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때요.”

“뭐가 말이냐.”

오수는 제 기척을 눈치채고서도 마법을 이어나간 이한에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가 삼킨 것은 씨앗이다. 일찍 처리하지 못했다면 세상을 어지럽혔을 종류의 씨앗.

“오늘 바람도 시원하고 하늘도 화창하잖아요.”

축음기에서 다른 노래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왈츠가 구름 위를 노닐었다. 이한은 음표 위를 지나 오수의 손을 맞잡았다. 비극으로 가득 찼던 이야기들을 이제 잠재울 겁니다. 쓰이지 않을 소재는 윤슬 아래로 흘리고서.

“꽃들도 활짝 피어있는데다가 지금 여긴 우리 둘뿐이죠.”

오수는 이한이 숨긴 세계가 그려졌다. 이 엇나간 제자가 한 기행들이 무엇인지. 과정까지는 명확히  모르겠으나 결과는알 수 있었다.

“제 꼴이 엉망이긴 하지만. 괜찮지 않나요?”

이 날을 위해 폐인처럼 살았다. 2학기를 통으로 쓴 마법이다. 시간을 돌리기 전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나 시전하는데에 부족한 것이 많았다. 선배들과 친구들을 채찍질하여 간신히 끝마쳤다. 이한은 제 코에 박힌 휴지 뭉텅이를 뽑아내고 머리를쓸어넘겼다. 멋드러진 모습으로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연하의 고백은 엉성한 법이잖아. 귀엽게 봐달라고요, 연상씨.

“오늘을 1일로 삼는 거.”

오수는 이한의 엉망인 옷을 내려보았다. 제 의견 따위 없는 엔딩이었다. 딱지가 진 입술에 제 것을 대었다. 잔뜩 굳은 그에게 입맞추며 왈츠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고백은 내가 할 테니까 몸이나 나아라.”

이 세상의 편집자를 화내게 할 수는 없지. 싸구려 소설 안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제멋대로 되지 않는 세상은 그를 즐겁게 할테니까. 다행히도 엉성한 연하는 왈츠를 잘 추었다. 그가 다른 것도 잘해야 할텐데.

카테고리
#기타
추가태그
#마마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