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유료

죽음의 문턱에서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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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워다나즈.  제국 역사상 최악의 마법 범죄자. 지혜를 원한다는 이유로 눈을 버린 미치광이. 네놈의 마법에 휘말려 죽어간 제국민들이 얼마인지 알고 있으며, 네놈이 제국에 입힌 피해가 얼마인지 알고 있느냐!

워다나즈가 코웃음 쳤다. 검은 안대 위에 수놓아진 금빛 마법진이 오른눈을 대신하여 번쩍 빛났다. 미미르의 샘이여, 그대 역시 어리석군. 이깟 눈 하나는 마법으로 대신할 수 있단다.

“나의 마법으로 살아난 제국민이 5,463,289,327명. 내가 제국을 위해 일한 값을 금화로 환산하면 61,831,645,984개는 되겠군. 보아라. 제국에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건축물이 있는지. 내 마력이 닿지 않은 아티팩트가 있는지. 내 지혜가 필요 없는 마법이 있는지. 가소롭구나. 마음만 먹으면 나는 이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

네가 간과한 사실이 있지. 워다나즈, 너는 에인로가드 출신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고나달테스. 본론을 꺼내라.”

협상이다, 워다나즈. 지금의 너를 만들어 준 스승을 잊지는 않았겠지.

에인로가드의 문이 열리고 데스나이트 하나가 누군가의 목덜미를 쥐어 끌고 나왔다. 결계를 사이에 두고 고나달테스와 대치 중이던 워다나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마법으로 꾸며낸 것이 아닌, 그의 회복력으로도 치유되지 않은, 흉터와 핏자국. 온몸 구석구석 채워진 마력 억제 구속구.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받고 괴롭혀진 그의 몸. 엉망으로 망가진 볼라디 배그렉이 무릎 꿇었다.

“오수 고나달테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스승의 얼굴을 기어이 읽어낸 이한이 으르렁거렸다. 노기를 가릴 생각도 없는지 등 뒤로 시커먼 구름이 모여들고 하늘이 번쩍였다.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거센 바람에 나무가 뽑혀 나가고 곳곳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번지지만 그건 이한의 알 바가 아니다.

기회다. 고나달테스가 몰래 손짓하자 배그렉의 몸에서 모든 장치가 떨어져 나가고 상처가 말끔히 치유되었다. 볼라디 배그렉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지팡이를 쥐고 이한에게 달려들었다. 제거해야 한다. 사랑하는, 하나뿐인 제자지만, 제거해야만 한다.


볼라디 배그렉.

그는 최고의 전투가다. 불사에 가까운 몸.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 계획에 필요하다면 죽음의 문턱을 밟기라도 할 각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가까운 동료 또는 친구였어도 적으로 판단되었다면 가차 없이 그와 대적하고 마침내는 심장에 검을 박아넣을 수 있는 비정함.

그는 이한 워다나즈의 스승이다. 사실 에인로가드의 모든 교수가 이한의 스승이지만, 볼라디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무제無弟 교수의 유일무이한 제자.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관계, 서로의 전투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계. 이한에게도 그가 특별하지 않을 리 없다.

이것이 볼라디에게 전면전을 맡긴 이유이다. 이한의 공격 패턴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으며, 이한과의 관계를 누구보다, 심지어는 이한보다도 빠르게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배그렉의 레이피어가 워다나즈의 뺨을 갈랐다. 금색 눈동자가 놀란 듯 잠시 학생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곧 배신감에 서늘히 가라앉는다. 이한이 반격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공방攻防은 조용하다. 대화도 영창도 없는 무언의 전투다. 볼라디와 워다나즈가 대립하는 하늘은 오로지 마법이 만들어 내는 소음만이 가득하다. 땅이 무너져 꿈틀거린다. 하늘이 거칠게 포효한다.

배그렉이 팔을 걷는다. 언젠가 본 적 있는 마법진이 팔뚝에 새겨져 있다. 워다나즈는 그 마법진의 정체를 안다. 공격이 추가로 날아온다. 한 눈을 잃은 마법사는 이런 것이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지팡이를 거칠게 휘둘러 배그렉의 등에 화염 덩어리를 꽂아버린다. 뱀파이어 마법사의 베스트가 불타 사라진다.

배그렉을 후방 지원하기 위해 모인 교수진은 분주하다. 두 사람의 전투에 피해 본 민간인들을 치료하고, 배그렉의 마력이 떨어지지 않게 물약을 만들고, 각종 마법 시전에 필요한 시약을 제조한다. 환상으로 워다나즈의 감각을 뒤흔들고 저주로 마력을 깎아본다. 온갖 소환수가 동원되고 무기가 제작되었지만 볼라디가 쓰는 것은 둘에게 익숙한 레이피어 한 자루와 그의 지팡이 하나뿐이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안하다. 싸움에 휘말린 민간인들, 학교의 학생들, 심지어는 교수들까지. 볼라디가 승리하는 것이 나은지, 워다나즈가 승리하는 것이 나은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검을 맞댄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밤낮없이 이어진 싸움에 모두가 지쳤다. 워다나즈도, 배그렉도.

배그렉이 먼저 빈틈을 보인다. 워다나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뱀파이어의 심장에 깊숙이 검을 찔러넣으려는 순간, 배그렉이 먼저 파고들어 이한의 목을 노린다.

전투가 멈춘다. 모두가 한숨을 내쉰다. 배그렉이 워다나즈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지상으로 내려온 두 마법사가 대화한다. 그들을 제외한 인원에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지쳐서, 어쩌면 그래서 목소리가 작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중에 누군가 소리 차단 마법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함정을 주의하라 말했을 텐데.”

“이제 절 죽이실 건가요.”

“유언이 있나.”

“글쎄. 글쎄요, 교수님.”

“마지막 인사나 하지.”

“좋습니다. 안아주시겠어요.”

“그래, 이한.”

“그래요, 볼라디.”

“…….”

“…….”

“이제 끝내도 되겠나.”

“아뇨, 조금만……. 역시 더 살고 싶긴 하네요.”

“유언인가.”

“……. 네. 그렇다고 하죠.”

“네가 그립겠지. 내가 너를 기억하마.”

“답지 않으시네요. 준비됐습니다.”

“그래. 조금……, 졸릴 거다.”

붉은색 눈동자가 불타오른다. 두 사람의 옷은 사흘간의 전투로 이미 넝마가 되었으므로 벗기거나 찢을 필요가 없다. 볼라디가 이한의 흉쇄에 얼굴을 파묻고 송곳니를 박아넣는다. 이한은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눈이 감긴다. 볼라디는 이한이 잠들지 못하게 끊임없이 근육을 헤집어 고통을 선사한다.

흡혈을 마친 볼라디의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가 입을 닦으려는 듯 손목을 입가로 가져간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거세게 물어뜯어 이한의 입에 물린다.

죽어가던 이한의 목 뒤로 볼라디의 피가 넘어간다. 이성을 잃은 이한이 볼라디의 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빠져나간 인간의 피가 뱀파이어의 피로 대체된다. 송곳니가 자란다. 금빛 눈이 붉게 변한다. 볼라디가 헤집은 상처가 빠르게 치유된다. 기력을 되찾는다. 살아난다.

“제자의 길을 이해해 주는 것도 스승의 몫이겠지. 워다나즈. 내가 함께 가겠다.”


볼라디와 이한의 흡혈은 뮤지컬 「마마돈크라이」의 설정을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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