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배그렉 교수님께.
사망 소재 주의
배그렉 교수님께.
잘 지내시나요, 교수님. 저는 지금 여행을 왔습니다. 교수님이 좋아하시던 찻잎이 나는 곳입니다. 여기는 햇살이 참 맑습니다. 비 오는 날이 적어 산책하기에도 좋고요.
지금은 드물게도 비가 오는 중이라 실내에서 차를 마시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에 찻잎을 동봉해 보낼 테니 교수님도 드셔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차보다 커피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커피를 찾을 특별한 이유는 없으니까요. 교수님이 좋아하시던 차를 다시 마셔보는 것도 좋겠죠.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를 마시다 보니 그날의 강의실이 떠오릅니다. 기억하시나요, 교수님? 교수님께서 너무 큰 몬스터를 데려오시는 바람에 야외 강의가 되어 버린 날 말입니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지만, 훈련을 마치고 나서 바로 비가 온 날은 흔하지 않죠. 그날, 교수님과 저는 쫄딱 젖어서 강의실로 돌아왔고요. 증발 속성을 배워둬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축축하게 젖은 신발이 금방 마르다니. 정말 사소하고 보잘것없지만, 그때 저는 마법의 중요성을 정말 깊게 체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습니다. 다시 돌아오자면, 교수님은 덜덜 떠는 저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여주셨죠. 세상에. 저는 제가 뜨거운 커피보다 차를 반가워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커피보다 그 차가 더 맛있었거든요. 제가 차를 잘 못 우리는 건지, 교수님이 차를 잘 우리시는 건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때 너무 추웠기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죠.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데, 교수님은 그때 훈련이 중단되어 못마땅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즐거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조용한 빗소리와 따스한 커피, 여유 있는 시간. 저는 그런 날을 좋아하니까요. 물론 커피가 아니라 차였지만, 그래서 덜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때 교수님과 함께했던 티타임은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아, 비가 멈췄습니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더니, 소나기였나 봅니다. 편지는 이만 줄입니다. 편지지를 꺼낼 때 비가 오는 동안만 쓰기로 마음먹었거든요. 곧 다음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추억에 젖은 이한 워다나즈가.
P.S. 제가 돌아갔을 때 찻잎이 남아있으면 교수님이 직접 우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우릴 땐 그 맛이 잘 안 나와서요.
스승님께.
전에 부친 편지를 기억하시지요. 혹시 그 편지를 다른 교수님들과 함께 읽어보셨나요? 돌아온 답장을 읽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편지가 조금 늦어졌는데,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 원래는 곧바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교장 선생님의 편지에서 멀리 간 김에 좀 더 돌아보고 오라는 조언을 읽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편지는 꾸준히 부치겠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돌아오라 하시면 곧장 돌아갈 테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아, 찻잎은 잘 받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보존 마법을 걸어두긴 했는데, 병이 깨지거나 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을까 봐요. 아쉽지만 남은 찻잎으로 함께 티타임을 가지자는 추신은 지켜지지 못하겠습니다. 제국 전역을 돌아보려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대신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번 찻잎을 보낼 테니 그것으로 티타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곳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기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그 아래 위치한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절벽 위로는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넓은 꽃밭이 보입니다. 이곳 주민에게 물어보니 여기는 꽃차를 재배한다는군요. 찻잔에 띄워진 마른 꽃잎이 제법 아기자기하고 귀엽습니다. 꽃차라고 해서 꿀이 들어간 단 차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단 씁쓸하더군요. 교수님은 어떠신가요. 이미 드셔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처음이니까요. 예상과 다른 차를 마시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과 차를 마실 때 나눌 이야기가 늘어나는 것 같아서 기분도 썩 괜찮고요.
교수님은 이런 풍경과 감상에 별로 관심이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전투 마법사에겐 휴식도 훈련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셨지요. 가끔 이런 예쁜 풍경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도 좋은 휴식이 될 것 같아서요. 이곳의 풍경을 담은 엽서 몇 장을 꽃잎과 함께 편지에 동봉하겠습니다. 교수님도 저와 같은 풍경을 직접 보실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쉬운 마음에 이곳의 풍경을 최대한 비슷하게 담은 엽서를 골랐습니다.
차를 다 마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여기에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다음 여행지에 도착하면 다시 편지를 쓰겠습니다.
아쉬움을 담아, 당신의 제자가.
P.S. 물어보니 제가 마신 꽃을 판답니다. 엽서와 함께 보냅니다. 제가 차를 마시며 편지를 쓴 것처럼 교수님도 차를 마시며 편지를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배그렉 교수님, 교수님 편지에서 다른 분을 먼저 언급하는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장 선생님. 편지 좀 그만 읽으세요. 따로 보내드렸잖습니까. 설마 교수님 차도 뺏어 드시는 건 아니시죠? 가르시아 교수님도 그만 읽으시고요. 라그린데 교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그렉 교수님 편지를 왜 모두가 공유하는 겁니까? 저는 제정신입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전투 마법사시면서 대체 왜 편지를 뺏기고 다니십니까? 몸이 아직 편찮으신가요? 이 편지는 뺏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 남부 해안가에 와 있습니다. 학생 때 산고리아 꽃을 찾으러 왔던 곳 말입니다. 그때 우레걸음 교수님이 휴가 시간을 주셔서 휴식을 취할 겸 카페에 들렀었는데, 아직도 그 카페가 남아있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카페에 앉아 초콜릿케이크와 커피를 즐기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차를 마실까도 했지만 모처럼 예전의 카페에 왔으니, 그때의 메뉴를 그대로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교수님, 여기서 씨 서펜트를 사냥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 교수님께서 수옥탄에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 해 주셨죠. 아시겠지만 〈워다나즈의 수옥탄〉은 지금도 유용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아, 교수님이 혈마법을 쓰신 일도요. 저는 그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씨 서펜트를 사냥한 것도, 이아놉이라는 마법 범죄자를 체포한 것도. 모두요. 사실 저는 언젠가 교수님을 한 번쯤은 이겨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제 목표 중 하나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날 이후 저는 제 목표 하나를 지워버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멋있었습니다. 믿음직스럽기도 했고요.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케이크가 달았나 봅니다. 커피를 벌써 다 마셔버렸지, 뭡니까. 아쉽지만 오늘은 펜을 내려놓겠습니다. 더 쓰다간 추억에 완전히 젖어 여행을 그만둬 버릴 것 같거든요. 다음 편지에는 제 안부를 더 적어 보내겠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학생이.
P.S. 교장 선생님께. 이제 그만 배그렉 교수님께 편지 돌려주세요. 다 읽으셨습니다. 가르시아 교수님도요. 라그린데 교수님도.
이번 편지는 짧게 씁니다. 죄송합니다.
안부를 더 적어 보내겠다 했는데 그 말은 다음 편지로 미루겠습니다.
저는 지금 제국 동부에 와 있습니다. 반마법주의자들이 모여있는 걸 여기 와서야 알았네요. 교수님이 계셨다면 든든했을 텐데요. 편지가 피에 젖어 있어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곧 전투가 시작되어서요.
반드시 다음 편지를 보내드릴 워다나즈.
걱정하셨을 볼라디 교수님께.
저번 편지가 제대로 갔을지 걱정입니다. 글자는 제대로 알아보셨을지도요. 편지가 늦어져서 우려하셨을 텐데, 저는 무사합니다. 반마법주의자들을 상당히 많이 소탕했습니다. 제국의 반마법주의자를 절반은 없앤 것 같아요. 교수님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모라디 가문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차는 홍차와 잼을 준비했습니다. 최근의 편지에는 찻잎이나 엽서를 동봉하지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작은 잼 한 병을 함께 보냅니다. 홍차와 함께 드셔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색다른 맛이 나 꽤나 재미있습니다.
약속했던 안부를 적어 보자면, 염려하셨을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제 상태가 썩 좋지는 못합니다. 옆구리에 흉터가 하나 남을 예정이고,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반마법 주의자들이 준비를 하긴 아주 단단히 한 모양입니다. 원래 저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제가 그들을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노린 놈들을 전부 소탕한 대신 발목 하나와 옆구리의 흉터라면 아주 싸게 먹혔지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여긴 안전합니다.
이곳에 있자니 모라디와 더르규, 앙라고가 자주 찾아옵니다. 교수님도 기억하시는 이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에인로가드 시절 제 동기들입니다. 흰 호랑이 탑 애들이죠. 제 1학년 때의 〈기초 마법 전투의 반복적 학습〉 출석부 맨 앞 장을 찾아보면 함께 적혀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전투 마법에 관심이 있는 건 교수님도 잘 아시는 사실이잖습니까.
교수님의 첫 수업이 기억납니다. 영성석을 계속해서 돌리던 그 수업 말입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수업이 다 있나’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의 강의가 있어 제가 그렇게 빠르게 마법을 습득할 수 있었지 싶습니다. 교수님이 저를 위해 많이 노력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힘든 부분도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강한 마법을 구현할 수 없었겠죠.
차는 다 마셨는데 잼이 조금 남았습니다. 교수님은 신중한 분배를 하셔서 딱 맞게 드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지에선 옆구리에 흉터가 정말 남았는지, 다행스럽게도 사라졌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함을 담아, 이한이.
P.S.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답장 하나 없는 매정한 스승님께.
교수님, 답장 좀 주시지요.
편지가 몇 개나 왔는데 그중에 교수님 것이 한 장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편지 한 통 쓰는 게 그리 어려우십니까.
예. 저 속 좁습니다. 오늘 편지는 그만 쓰겠습니다. 도저히 쓸 마음이 안 들어서요.
답장을 바라는 제자 드림.
“이한 학생이 걱정이에요.”
나도 그렇소. 배그렉 교수가 죽은 지 한참 지났는데 언제까지 저럴 건지……. 섣불리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콜록. 시간 마법으로 되살려낼 순 없소?”
“그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이 있었겠어요.”
“차라리 흑마법으로 부활시키겠다는 말이 낫겠구먼.”
“……, 생명 부여는 안 되나?”
“되겠어?”
“워다나즈의 새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
“…….”
“…….”
다들 뭐라고 말 좀 해 보게.
“답장?”
“정신적 문제가 상당해 보이는데….”
누구 배그렉 교수 필체 흉내 낼 수 있는 사람 있소?
“워다나즈가 1학년 때 쓰던 오두막 있는데. 거기 배그렉 교수가 준 책 있을걸?”
그러니까 비블레, 자네 말은 그거 가지고 써 보자?
“응. 안 돼?”
“안 됩니다. 그렇게 했다간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맞아요. 이한에겐 배그렉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인정이 필요하다고요.”
교수님께.
일주일 전의 편지는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이제 몸도 다 나았으니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옆구리 상황을 알려드리자면, 흉터가 남긴 했으나 깊진 않습니다. 흐릿해서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을 겁니다. 덧붙여서 발목은 깔끔하게 나았습니다.
교수님. 여기는 그랑덴 시입니다. 저는 지금 에인로가드로 가고 있습니다. 곧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장 출발했는데, 내쫓진 않으실 거죠. 약속한 찻잎 한 병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용서를 구하는 워다나즈.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
가르시아 교수, 진정하시오. 무슨 일이길래?
“이한이 배그렉 교수님을 뵈러 온대요! 편지에는 그랑덴 시라고 적혀있으니 곧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해골 맙소사! 큰일이군!
이한 워다나즈가 에인로가드에 도착했다. 이한은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에인로가드의 결계를 살짝 두드려 고나달테스를 불렀다. 원래 남의 집에 도착하면 문을 두드리는 게 예의 아닌가.
오수 고나달테스는 황당했다. 그 이한이 돌아온 것도 놀라운데 결계를 안 두드린 것도 아니고, 부순 것도 아니고, 그냥 건드리기만 하다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한숨을 쉬며 정문에 나타난 고나달테스는 한번 더 황당해야만 했다.
“교장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너 그게 다 뭐냐?
“배그렉 교수님이랑 티타임 가지기로 했습니다. 편지 다 돌려보셔서 아는 거 아니셨습니까?”
……. 배그렉 교수 출장 갔다.
“다친 건 다 나으신 겁니까? 그리고 교수님 에인로가드에 계신 거 다 아니까 거짓말 마십쇼.”
어, 얼추…. 갔다 돌아온 걸 내가 깜빡했구나.
리치의 두개골 맙소사! 당황한 고나달테스는 최악의 수를 뒀다. 하지만 그에게도 변명은 있다. 고나달테스는 스승과 사별한 제자를 달래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상담 쪽의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 건 가르시아 교수나 디레트 교수 같은 사람이 어울리지, 고나달테스 같은 리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다.
“초대 좀 해 주시죠, 마령관 님. 계속 세워두실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들어와라. 보아하니 잠시 들린 건 아니고 꽤 오래 있을 것 같은데, 지낼 곳은 있느냐?
“배그렉 교수님 공방에서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 용서해 주시겠죠? 배그렉 교수님이 그렇게 속 좁은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래도 혹시 거절하시면 교장실에서 좀 머무르겠습니다.”
아니, 야. 누구 마음대로?
“제 마음대로요?”
뻔뻔하기가 네 스승을 똑 닮았다.
“고나달테스라는 분 말씀이십니까?”
고나달테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묘하게 열받는 화법도 아주 그대로구나. 아, 가르시아 교수! 해골 교장이 가르시아 교수에게 전음으로 말을 걸었다.
가르시아 교수! 내가 실수한 것 같소! 워다나즈가 배그렉 교수와 티타임을 가진다길래 당황해서 출장 갔다고 해버렸지 뭐요.
가르시아가 뜨악한 표정으로 해골 교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지.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교장 선생님이 만들어 둔 쓰레기를 치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으므로! 가르시아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한에게 다가갔다.
“이한, 학생이 아니죠, 이제. 잘 지냈어요?”
“편지 돌려보신 거 다 압니다. 흉터는 거의 희미하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하하. 그것 때문에 물어본 건 아니고요…. 여행을 너무 급하게 마무리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렇진 않습니다. 슬슬 마무리하려고 하기도 했고, 교수님이 뵙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가요……. 참. 알카시스 교수님은 만나봤나요? 이한 학생이 돌아오면 한번 봐야겠다고 하시던데요.”
“저 지금 막 도착한 참입니다, 교수님……. 그럼 배그렉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뵈러 가겠습니다. 교수님은 여전히 지하실에 계십니까?”
“아, 잠시만요, 이한. 알카시스 교수님부터 뵙고 가요.”
“하지만 배그렉 교수님이,”
“알카시스 교수님부터요. 교수님 바쁜 거 알잖아요. 배그렉 교수님은 계속 거기 계실 거예요.”
치유 마법사들이 바쁘긴 상당히 바쁘지. 배그렉 교수님은 상대적으로 덜 바쁘시니까. 이한은 결국 가르시아 교수를 따라나섰다. 라그린데 교수는 이한 워다나즈가 에인로가드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규관에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몸에는 큰 문제가 없을 테니 상처만 가볍게 봐주고, 정신이 가장 큰 문제로군. 배그렉 교수가 죽은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노크 소리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가르시아 교수와 이한 워다나즈의 모습이 보였다. 라그린데 교수는 준비해 둔 의자를 가리켰다. 얇은 쿠션이 깔린 의자에 앉은 이한이 라그린데 교수의 마탑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교수님도 참 변한 게 없으시군.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네 녀석 때문에 신경 쓰느라 피곤했다.”
“가르시아 교수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상처는 이미 다 나았습니다. 걱정은 감사합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지만……. 그것도 봐야겠구나. 셔츠 걷어 봐라.”
이한은 순순히 셔츠를 걷어 올렸다. 입었던 상처는 흉터로 남았으나, 편지에 쓴 그대로 멀리서 보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흐릿했다. 라그린데 교수가 외상을 살피고 내상을 확인했다. 정말 문제는 없군. 정신만 치료하면 괜찮아질 텐데. 작게 한숨 쉬는 다크 엘프 마법사에게 이한이 물었다.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배그렉 교수님께는 너무 늦지 않게 인사드리고 싶거든요.”
“워다나즈.”
“예, 교수님.”
“이거 먹고 가라.”
“이게 뭡니까?”
“심신 안정의 물약.”
“오, 감사합니다.”
“……. 너무 충격받지 말고.”
“하하. 교수님도 참. 제가 충격받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교수님. 이한 학생을 저대로 보내도 되나요?”
“그렇다고 강제로 묶어둘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죠…….”
“물약에 다른 것도 섞었으니 괜찮을 거다.”
“이상한 거 섞은 건 아니시죠?”
“충격 완화의 물약 섞었어.”
“또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죠?”
“저 녀석의 폭주는 위험하니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
“배그렉 교수님, 저 왔습니다. 사실 학교에는 더 일찍 도착했는데, 라그린데 교수님이 급하게 불러서 좀 늦었습니다. 대신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찻잎과 당근 케이크를 가져왔으니 이 정도는 너그러이 눈감아주십시오.”
“여전히 학생은 적으신가요. 저는 후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교수님께 배워야 할 것도 아직 많고요. 이 영성석 구슬은 오랜만이네요. 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오, 교수님. 이것 보세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완벽하고 빠르지 않습니까? 하하. 하긴, 너무 기초적이었죠. 일단 청소부터 하고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강의실에 먼지가 너무 많이 쌓인 것 같군요. 출장을 좀 오래 다녀오셨나 봅니다.”
“몸은 다 나으셨습니까? 그때 교수님 돌아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생각해 보니 교수님은 뱀파이어라 그리 쉽게 돌아가시지도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교수님.”
“아직 주무십니까?”
에인로가드의 지하 1층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는 뱀파이어의 시신이 한 구 놓여있다고 하고, 어느 미친 마법사가 일 년에 한 번 그곳을 들려 티타임을 가진다고도 한다. 몰래 들어가려던 학생 몇몇이 있었으나 전부 실패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계단의 절반쯤 내려갔을 때부터 방향감각이 이상해지는데, 그때부터 10분 정도를 헤매다 보면 계단을 내려가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 위치에 도착한다고 한다. 정교한 환상 마법이 몇 겹으로 걸려 있어 마법의 구성도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고.
에인로가드에는 한 달에 한 번 편지가 온다. 수신인은 지하 1층의 볼라디 배그렉 교수.
에인로가드에 볼라디 배그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그렉 교수님께.
잘 지내시나요, 교수님. 저는 지금 여행을 왔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하는 제자가.
P.S. 당신을 살려낼 방법을 찾아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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