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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이한] 첫키스

서투르고 어설퍼도 상대방이 너라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 연성내기 승자들에게 드립니다. 가이이한 (둘이 안 사귐)

적폐캐붕날조 多

에인로가드 3학년 전용 휴게실. 이한이 휴게실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고 있었다. 옆에는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미 이한은 알고 있던 내용들이라 이한에게는 필요 없는 서적들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한이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고민하느냐. 그건 바로 다음 주에 있을 기말고사 때문이었다. 에인로가드는 학년이 오르면 오를 수록 시험문제의 난이도와 같이 배워야 하는 분야들이 점차 넓어지는데, 흑마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한은 특유의 마력과 재능으로 인해 3-4학년 수준의 흑마법에 대해서는 더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지식들을 누군가에게 알기 쉽게 알려주는 건 결이 달랐다. 이한은 중간고사 때 조금 처참했던 가이난도의 성적을 떠올렸다. 이대로 가이난도가 낙제로 인해 징벌방으로 끌려간다면, 겨울방학 이후 크라하 님을 뵐 명목이 없었다. 이한이 가이난도의 어머니에게 받았던 금화 주머니를 떠올렸다. 친구면서 왜 가이난도의 공부를 도와주지 못했냐고 하실 성정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용돈까지 주셨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한이 3학년 수준의 흑마법에 대한 책들을 다시 펼쳤다. 가이난도는 흑마법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으니, 자신이 옆에서 붙들고 알려준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였다. …뭣하면 예지 마법으로 시험에 대한 단편적인 미래를 예지하는 것도 좋겠지. 이한이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색색의 돌을 떠올렸다.

“이한~!”

이한이 다른 노트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마법서의 문장을 쉽게 풀어쓰고 있을 때, 휴게실에 가이난도가 들어왔다. 이한, 이한! 해맑게 이한을 부르면서 쪼르르 이한이 앉아 있는 책상의 맞은 편으로 달려갔다. 이한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책들을 전부 옆으로 치우고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그대로 앉았다. 귀와 꼬리가 있었다면 귀는 연신 쫑긋이며 이한의 말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을 거였고, 꼬리는 계속 빙빙 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한이 전생에 알고 있던 ‘골드 리트리버’를 떠올리고는 가볍게 웃었다.

“부탁한 건?”

“응, 바실리스크한테 밥도 잘 주고…, 그리폰한테 이한이 당분간 늦게 온다고도 말해주고 왔어!”

벤도졸 교수님도 만났는데 화내시기 전에 후다닥 달려왔어. 잘했지? 가이난도가 칭찬을 바라는 듯이 상체를 살짝 이한의 앞으로 빼내었다. 이한이 필사를 위해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이윽고 이한은 자신의 손바닥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닿는 걸 느끼며 가볍게 두어 번 토닥이듯 쓰다듬었다. 학년이 벌써 3학년이고, 이제 곧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데 자신의 친구는 어째 철이 들질 않았다.

‘그래도 뭐,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니까.’

성격이 밝으면 좋은 거지. 에인로가드에서 볼 수 없는 해맑은 미소라, 가이난도가 에인로가드의 악독함에 물들어 더는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한이 가이난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내었다. 가이난도는 아쉽다는 듯 이한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묘하게 시무룩해보이는 것이 안쓰럽게 보일 만도 했으나, 이한은 그 모습에 더 칭찬을 해주거나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럼 공부하자.”

“에엑…….”

“낙제해서 징벌방에 가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가이난도가 질색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나, 이한이 부탁해준 것도 잘 하고 왔는데 오늘만 같이 놀아주면 안 돼? 가이난도가 이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공부는 딱히 하고 싶진 않았다. 같이 놀 시간도 부족한데 공부로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낙제, 를…. 할…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응. 가이난도는 이렇게 놀아도 자신이 낙제하지 않을 거라고 근거없는 확신을 품었다. 이한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에 자신감이 차오르는 걸 보고선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이대로 가다간 낙제야.”

“낙제까진 안 할 걸!”

“낙제야.”

“낙제까지는….”

“낙제라고.”

“으, 응…….”

가이난도가 단호한 이한의 말에 쭈그러들었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 같자, 이한이 우선 책 한 권과 노트 한 권을 펴서 가이난도의 앞에 밀어주었다. 그러나 가이난도는 원본이 되는 마법서가 아니라 이한의 필체임이 확실한 글씨가 빼곡히 적힌 노트에만 시선을 두었다. 와, 이한은 역시 글씨도 단정하다! 내 글씨는 조금 못생겼는데. 사실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악필이었지만 가이난도는 당당했다.

이한은 가이난도가 읽으라는 글자는 안 읽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딴 생각하지 말고 한 문장씩 읽어. 마력은 걱정하지 말고. 회복 물약도 있으니까.”

“물약…. 이한이 만든 거야?”

“그래.”

어느 부분에서 의욕을 얻은 건지, 가이난도는 자세를 고쳐 앉아 책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치 다 끝나면 초코칩 쿠키도 줄게. 아까 구워놨어. 이한의 잔잔한 목소리에 가이난도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우렁차게 답했다. 응!

이한은 책을 느리더라도 읽고 있는 가이난도를 보며 책상 위에서 턱을 괴었다. 당장 다음 주가 기말고사인데. 가이난도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친다고 해서 성적이 괜찮을까? 일단 알아두면 좋은 흑마법 지식부터 알려주고 있긴 한데…. 이한이 고민했다. 가이난도는 끙끙거리며 원본이 되는 책보단, 원본이 되는 책의 내용을 쉽게 풀어 쓴 이한의 노트를 더 많이 읽고 있었다. 애초에 마법서 중 몇몇은 저자의 취향이나 필력에 따라 문장이 난해한 경우가 많았다.

‘역시 예지 마법으로 시험문제를 훔쳐보는 수밖에 없나….’

다른 학생들이라면 하다가 쓰러지고 기절하고, 생명에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사안을 이한은 가볍게 생각했다. 아무리 시도해도 예지 마법의 대가가 이한 자신의 마력인 이상, 이한은 하든 말든 큰 차이가 없었다. 시도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은 거고, 잘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거고. 이한이 자신의 로브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색색의 돌을 꺼내어 가장 기초적인 예지 마법을 시도했다.

“색색의 돌이여.”

“음…. 어, 이한?”

“음, …색색의 돌이여!”

이한이 생뚱맞은 이미지로 인해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가이난도는 자신의 앞에서 갑자기 색색의 돌을 꺼내 예지 마법을 시도하는 이한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색색의 돌이여, □□를 보여주십시오.」 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입에 담아야 하는데…. 이한은 과감하게 뒤의 말을 생략했다. 색색의 돌이여, 다음 주에 있을 흑마법 학파의 기말고사를 알려주십시오. 라고 대놓고 말을 한다면 가이난도가 공부를 안 하려고 할 것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마법이 성공할 정도로 이한의 실력은 1학년 때보다 상당히 성장한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가이난도는 왜 이한이 예지 마법을 쓰는 건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난 신경쓰지 말고. 예지 마법 시험에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으응…. 알았어!”

가이난도는 예지 마법 강의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한은 자신의 목소리로 인해 자꾸만 가이난도가 집중을 하지 못하자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시도하고 나머지는 방에 들어가서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책장을 넘기는 가이난도의 손가락이 멈칫멈칫, 멈추는 것이 이한의 시야에 너무 잘 보였다.

“색색의 돌이여.”

그리고 이번에 멈칫, 멈추는 건 이한이었다. 돌을 던진 자세 그대로 이한이 굳었다. 잠깐 스쳐지나간 미래의 잔상이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한? 가이난도가 이한의 이상한 반응에 의아해하며 이한을 불렀지만, 이한은 답을 하지 않았다. 1~2분이 지난 후에서야 이한이 천천히 돌들을 주웠다. 돌을 손에 쥐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 일련의 과정이 물흐르듯 깔끔했다. 이한의 표정 또한 언제 멈칫했냐는 듯 태연했고, 언제나의 진지한 표정이었다.

색색의 돌을 주머니에 넣고 이한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난 이만 들어가볼 테니까 공부 다 하면 이거 먹어.”

“어엉…? 응? 무슨 일 있어?”

“혹시나 마법 연습하다가 마력 부족하면 여기, 이거 뚜껑 열어서 마시면 돼.”

“응…. 근데 무슨 일 있어? 뭐 이상한 예지라도 본 거야?”

이한이 가이난도의 물음에 살짝 굳었다. 이상한, 이상한 건…. 아니었지. 그래. 위험한 미래를 본 것도 아니었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미래를 본 것도 아니었다. 의연한 표정을 유지하던 이한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니. 할 일이 있었던 걸 깜빡 잊어서.”

이렇게만 말해도 가이난도는 자신의 말을 믿을 거였다. 이한은 가이난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양심이 찔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니었고…. 이한이 마저 가이난도의 옆에 마력 회복의 물약까지 놔준 후에 자리를 떠났다. 가이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한이 보라고 한 책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초코칩 쿠키를 뜯을 거였고, 쿠키를 다 먹은 후에는 공부를 안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한은 오늘만 봐주기로 했다. 내일. …내일 모레. ……사흘 뒤에, ……. 어쨌건 방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주문을 외우면 원하는 미래를 보게 될 테니, 흑마법 학파의 시험이 있기 전에 날 잡아서 알려주면 되겠지. 이한이 그렇게 생각했다.

…미래는 피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예지를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그 예지가 싫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한이 개인실에서 땅이 꺼져가라 한숨을 쉬었다. 난데없이 닥친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이한~! 나 시험 되게 잘 보고 왔어!”

가이난도가 깡충깡충 뛰는 듯이 이한에게 달려왔다. 이한은 진즉 흑마법 강의의 기말고사를 치른 지 오래여서 가이난도가 시험을 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은 예지 마법으로 흑마법 학파의 기말고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그리고 클럽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얻었고, 그것을 토대로 가이난도에게 족집게 강의를 펼쳤다. 그 결과를 지금 가이난도의 행동이 보여주고 있었다. 잘 보고 왔다며, 알려준 것들이 나왔다며. 신기하다는 듯, 역시 이한은 똑똑하구나! 하며 가이난도가 이한에게 달라붙었다.

덩치도 자라서 자신과 비슷한 놈이 매달리는데, 이한은 한 번도 가이난도가 무겁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1학년이나 2학년 초에는 무겁다고 느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가이난도가 이한을 배려한 건지, 아님 그냥 힘을 푼 건지, 그냥 생각 없이 매달리는 건지에 대해서 이한은 알 수 없었다. 이한은 자신의 왼쪽에 달라붙은 가이난도가 무겁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아서 그냥 놔두었다.

“잘 보고 왔다니 다행이네.”

“응…. 근데 이한,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 해 봐.”

가이난도가 머뭇거리며 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이난도가 늘 동그랗게 뜨거나 해맑게 뜨던 눈의 눈꺼풀을 살며시 내려깔자 어쩐지 처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실제로 조심히 물어보는 목소리는 누가 들으면 이한이 가이난도를 괴롭혔냐며 오해할 정도로 서글픈 느낌이 묻어나왔다.

“나…. 나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냥, 그때 이후로 잘 안 만나주고…. 자리도 피하고…. 마법 알려줄 때도 되게 딱딱했고…. 가이난도가 며칠동안 느꼈던 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냈다. 나 피하는 것 같길래…. 혹시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려구……. 가이난도가 웅얼거렸다. 이한이 당황하며 가이난도를 바라보았다. 음, 너무 티가 났나? 이한이 가이난도가 매달리지 않은 반대편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에 달라붙은 가이난도를 슬그머니 떼어냈다. 가이난도가 이한이 떼어내는 대로 물러났다.

…우선,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럼 나 왜 피해?”

“피한 적….”

“피했잖아.”

…그래, 미안해.”

가이난도는 이한이 떼어내는 대로 물러났지만, 이한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한이 문득 주위의 풍경과 자신과 가이난도의 자세를 살펴보았다. 미래를 바꿀 거라면 여기서 말을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그러면 미래는 바뀌겠지만…. 이한이 가이난도의 눈을 마주보았다. 여름철에서나 볼 법한 맑고 생기 넘치는 녹빛이 보였다. 비록 지금은 서러움에 일렁이고 있었지만, 이한은 저 눈에 깃든 여름이 웃을 때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깨닫는 것은 언제나 갑작스러웠다.

이한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이 말 한 마디로 인해서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학창 생활의 전체에 영향을 줄 거였다. 그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이한은 자신이 본 미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내가 아무래도.”

“응…?”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피했어. 서운했다면 미안하다. 이한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에 공부를 옆에서 가르쳐주기로 한 날, 어떤 장면이 보였어. 기초적인 예지 마법이라 이미지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우리 둘이 입을 맞추고 있더라. 그래서 당황스러워서 그때 자리를 떴는데…. 이한의 말이 이어질 수록 가이난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어…? 응? 짧은 말만 계속 내뱉던 가이난도가 눈을 깜빡깜빡, 빠르게 깜빡였다. 예상하지도 못한 것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한의 말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며 이한을 바라보던 가이난도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대답했다.

“…진짜?”

“그래.”

“정말…?”

“응.”

가이난도의 눈에서는 서러움이 어느새 가라앉아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가이난도는 우물쭈물 말을 머뭇거렸다. 이한은 가이난도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말을 한 거였으나 가이난도가 그리 기뻐보이지 않자 속으로 당황했다. 아닌가. 얘는 그냥 날 친구로만 좋아하는 건가? 괜히 말했나. 이한이 속으로 어떻게 하면 가이난도의 기억을 날릴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 마법을 떠오르고 있을 때즈음…. 가이난도가 자신이 잡고 있던 이한의 왼쪽 손목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아까 예지로…봤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럼…, 지금 해 봐도 돼?”

“…….”

이한이 가이난도를 살짝 어이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가이난도는 그런 이한의 눈빛을 받고도 헤헤, 멋쩍게 웃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나도…. 이한 좋아하는데.”

“…….”

“안 돼…?”

예지로 봤다고 했잖아. 그게 지금이면 안 되는 거야? 가이난도의 물음에 이한이 시선을 살짝 옆으로 비껴두었다. 아, 아까 자신이 예지에 대해 말할 때 그게 오늘이라고 말을 안 했던가? 안 했던 것 같기도…. 그럼에도 이한이 본 예지는 이한이 미래를 바꿀 생각과 의지가 없어서 그런지, 그대로 실현되려고 하고 있었다. 이한이 잠시 가이난도의 옆으로 비껴둔 시선을 움직여 힐끗, 가이난도를 바라보았다. 가이난도가 언제 서러움과 서글픔을 느꼈냐는 듯 살짝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한이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가이난도의 입술이 이한의 입술 위에 닿아왔다. 정말 해도 되는 걸까? 이한이 허락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꿈만 같았다. 가이난도는 사실 자신이 이한을 좋아하는 감정이 단순한 우정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같은 푸른 용의 탑 친구들에게는 이한을 볼 때와 같은 기분이나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늘 같이 있고 싶고, 늘 닿고 싶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어주면 그걸로도 충분히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건 오로지 이한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느릿하게 닿았던 입술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서로의 숨결이 낯설고 부끄러워서 가이난도가 금새 고개를 뒤로 물린 탓이었다. 이한은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멀어지자 그제야 눈을 떴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잔뜩 붉어졌지만 실룩이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가이난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이한….”

“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하면…안 될까?”

그렇게 말하는 가이난도의 목소리는 수줍은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는 더 잘해보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이한은 어쩐지 기꺼워지려는 자신의 기분을 구태여 억누르지 않은 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핫….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조금 즐거웠다. 며칠동안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래, 좋아.”

자신의 대답에 배시시 웃는 가이난도의 모습도, 뒤이어 다시 느껴지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도. 어디서 본 건지 들은 건지, 혹은 읽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입술 사이로 들어오려는 혀도, 긴장인 건지 잡힌 손목 쪽에서 느껴지는 떨고 있는 손도. 그냥, 이한은 전부 마냥 좋게만 느껴졌다. 신기하기도 하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같다는 걸 받아들이자마자 심란하던 게 전부 감쪽같이 사라졌어. 이한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스스로 고개를 뒤로 물리며 입을 떼어낸 가이난도를 보며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이 맞닿자 짜기라도 한듯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첫 입맞춤이었으나 둘 다 이런 쪽에는 경험이 없어서 엉망이었다. 입맞춤이라기에는 그저 어디서 알게 된 지식을 한 번 흉내라도 내보려는 듯 시도한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서투르고 어설퍼도, 상대가 너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뭐든 좋을 거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이한은 반짝반짝, 시원하고 싱그러운 여름이 애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다 피식 웃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시험 잘 봤다고 했으니 특별히 초콜릿 케이크 만들어 줄게.”

“앗, 진짜?!”

“내가 언제 거짓말 한 적 있던가?”

“으음……. 아니!”

가이난도는 자신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이한의 화려한 언변들을 떠올렸지만, 해맑게 웃으며 이한이 바라는 대로 대답했다. 이한은 가이난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으나, 오늘은 넘어가주기로 했다. 초콜릿 케이크라는 말에 저리 기뻐하는데 안 만들어 줄 수가 없지 않나. 조금 귀엽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흠. 뭐,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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