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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이한]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 붙잡는다.

極夜 by Ashb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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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붕캐해! !!!!!!!, 적폐, 날조날조날조날조! ! !원작 설정 붕괴 있을 수 있음 !!!!!!!

*오수 고나달테스 X 이한 워다나즈 (4학년) (안 사귐!)

*1036화 이후 스포가 있으니, 오래 묵히고 계신 분들은 이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이한이 거짓말 탐지를 위해 오수에게 시약을 먹임, 오수, 알면서도 먹어줌

*캐붕캐해! !!!!!!!, 적폐, 날조날조날조날조! ! ! !!!!!!!!!!!!!!!!!!!!!

푸른 용의 탑, 4학년 휴게실. 이제 4학년이 되어 어엿한 한 명의 마법사가 된 학생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끗힐끗, 흘겨보거나 아예 대놓고 바라보거나. 푸른 용의 탑 4학년생들이 보고 있는 건 어느 한 학생이 다른 학생과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입학할 때보다 더 체구가 커진 이한과 가이난도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똑같이 자라났다고 해도 체격은 이한이 더 큰 편이었기에, 얼핏 보면 이한이 가이난도를 추궁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한이 가만히 가이난도를 바라보다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가이난도.”

“…응!”

“흑암관에 있던 검푸른색에 금빛이 도는 시약병, 네가 깨트렸어?”

그 질문에 가이난도가 잠시 어깨를 움찔 떨었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잠시 옆으로 데구르르 구르다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그러다, 그 눈동자에 억울함이 깃들었다. 무언가 변명이라도 할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이한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입을 여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한이 팔짱을 끼며 가이난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한이 말한 검푸른색 시약병은 이한이 필요로 인해 만든 시약이었다. 흑마법에 대한 연구에 쓰일 시약이었으니 흑암관에서 모르툼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보고자 갖고 갔던 거였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시약병은 복구도 시도하지 못할 정도로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마법에 사용하려고 만든 시약은 그렇게 흑암관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시약으로 바뀌었다.

‘쯧,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닐 걸 그랬군.’

그 시약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던 이한이 작게 후회했다. 다시 만드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나 투자한 재료를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것에 조금 뼈가 아팠다. 아무리 지금 자금을 마련할 수단이 충분하다고 해도…, 이번에 만든 시약은 큰 마음을 먹고 재료를 투자한 것이었다. 차갑게 깨진 채로 발견되었던 그 광경을 떠올리자니 눈앞에 사용한 재료들의 이름과 시세가 저절로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시가 보였다. 어차피 금방 다녀올 거였고, 흑암관에는 학생들이 많이 오가는 편이 아니었으니 책상 위에 두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잠시 그 시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와 제작 순서를 머릿속으로 다시금 떠올리던 이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긋나긋, 조금 부드럽고 너그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잠시 끼고 있었던 팔짱도 다시 푼 채로.

“네게 책임을 묻기 위해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려는 것도 아니야. 다만 그 시약이 인간의 신체에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혹시 모를 부작용을 대비해야할 수도 있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쓰는 시약이면 졸업 연구에 쓰이는 시약 아니야? 2, 3학년 때 쓰이는 시약도 아니고, 다시 준비해야 하면 빠듯할 텐데….’ ‘이한은 예전부터 가이난도에게는 좀 유했잖아.’ ‘그런데 이한은 졸업 안 하지 않아? 5학년 올라가잖아.’ ‘그거 이한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이한이 들었다면 기함을 토해냈을 말을 하며 소곤거렸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의 시약을 가이난도가 깨트린 것이 맞다고 확정지은 듯했다. 어깨를 움츠러트린 모습이나,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한은 입을 열기 시작한 가이난도에게 집중한 탓에, 이한이 5학년으로 진학할 거라고 당연한 듯이 말하는 학생들의 말은 듣지 못했다.

“…내가 깨트리진 않았어!”

이내 가이난도가 외쳤다. 이한이 가이난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럼 누가 깨트렸는지 알고 있어?”

“…….”

가이난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이난도는 억울함과 아주 작은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2학년이나 3학년 초였다면 다른 학생들과의 의리보다 이한과의 의리를 골랐을 텐데, 4학년 2학기인 지금은 가이난도에게도 꽤 괜찮은 인연이라는 게 생겼다. 이한이 알면 보복하러 가는 거 아니야…? 가이난도가 속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한의 시약병을 깨트린 건 흰 호랑이탑의 라파드엘이었으니까. 기사 가문에, 초반에는 흑마법을 싫어했으나…, 흑마법을 좋아하게 된 학생. 티격태격 싸우거나 다투며 던전에 같이 오가는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 가이난도는 라파드엘의 생사를 아주 조금 걱정했다. 물론 그 결정에는 라파드엘이 이한의 시약을 깨트리게 된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본인의 잘못도 있긴 하였으니, 그에 대한 미약한 양심의 가책의 결과의 영향도 있긴 하겠지만.

“—그랄이 깨트렸어.”

그러나 이한을 속이는 건 할 수 없었다. 가이난도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라파드엘의 이름을 꺼냈다. 이한은 잠시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의 말을 뒷받쳐주는 근거도, 증인과 증언도 없었음에도 가이난도의 말을 믿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랄에게 가봐야겠군. 근데, 그랄이 깨트렸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뭐 됐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연구할 때 막히면 물어보고. 이한은 그리 말하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가이난도에게 더 묻지 않고 순순히 수긍하는 이한의 모습에 누구 한 명은 의문을 품을 법도 했으나, 아무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모두가 이한이 라파드엘 그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내기를 시작하거나 짧게 대화를 나눴다.

가이난도는 이한을 속일 수 없었다. 가이난도에게는 다른 친구들과의 의리보다 이한과의 의리가 더 중요했으므로, 어차피 금방 사실만을 말했을 테지만, 그런 이유와는 결이 달랐다. 이한과의 의리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간 금방 들킬 테니 못한다는 것이 맞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한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누가 거짓말을 내뱉으면 귀신같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없어도, 누가봐도 그럴듯한 거짓말이어도 이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이나 아티팩트를 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된지 이제 몇 개월. 이한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가지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한 워다나즈는 마법이 없어도 사람의 말의 진위를 가릴 수 있다」, 고.


물론 그 소문은 잘못된 소문이었다.

이한은 그 소문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긴 했다. 그러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요네르가 이한에게 물어봤으니까. 다만 정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소문으로 인해 이한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사기를 치려는 에인로가드의 사람들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한 워다나즈에게 사기를 치려는 사람은 애초에 별로 되지 않았으나, 여기는 약한 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에인로가드였다. 늘 거짓말을 함으로서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대화를 유도하는 곳! 그런 곳에서 안 그래도 바쁜 이한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구별하는 시간이 사라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이득이었다.

‘굳이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면서 쓸데없는 기력을 소모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만으로도 편해지지.’

다만 단점이 있다면,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는 점…정도인가. 이한은 잠시 눈을 감고서 가볍게 눈을 문질렀다. 눈이 뻑뻑한 느낌이 지구였다면 인공 눈물을 두어 방울 떨어트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시약병을 깨트린 라파드엘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이한이 잠시 한숨을 쉬었다. 혹시 모를 문제가 있나 자세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었다.

애초부터 그 시약은 언데드에게 사용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든 시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어떻게 작용할지는 이한도 몰랐다. …언데드 즉사 물약이라던지, 언데드에게 상태이상을 부여하는 물약에 쓰이는 강력한 시약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어떤 언데드용 물약은 언데드에게만 효과를 보는 반면, 어떠한 물약은 분명 언데드에게 쓰이는 것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을 겪게 만들었다. 모든 물약이 인간에게 무해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니…, 이한이 직접 확인하러 가는 건 당연했다. 이한의 시약을 깨트려먹은 건 깨트린 사람의 잘못이었으나 시약을 만든 건 이한이었으므로, 문제가 발생할 시 빠른 대처가 가능한 것도 이한이었으니까.

“일반 언데드용이었다면 모를까….”

이한이 눈가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그래, 일반 언데드용이었다면 급하게 상태를 확인해보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지…. 이한이 상정한 언데드가 ‘일반’ 언데드가 아니라서, 그로 인해 들어간 시약이나 마력량까지 보통의 물약과는 달라서,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이한도 몰랐기 때문에 이한이 가이난도나 라파드엘에게까지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평균에서 벗어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발생시킨다. 시약을 만들 때 사용된 것들이 전부 무해하다 입증된 것들이어도, 사용법이 달라지거나 손질법에 차이가 생긴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흐음. ‘일반 언데드용’이라니,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거냐?

“…아, 교장 선생님.”

지나가던 해골 교장이 이한이 짧게 내뱉은 혼잣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오수가 커다란 두개골에 맞는 커다란 녹색 안광으로 이한을 흘겨봤다. 할 것이 많은 거로 아는데,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또 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게 이한의 혼잣말을 들은 오수의 개인적인 감상평이었다.

개인적인 느낌이 ‘또 무언가를 하려나보지.’로 끝나더라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오수는 작은 호기심을 품었다. 워다나즈는 1학년 때부터 다른 학생들과는 궤를 달리했으니 졸업 과제를 준비해야할 시기에 개인적으로, 홀로 준비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또한 할 수 있는 마법의 범위 또한 일반 학생들과는 달리 무수히 많은 편이었기에 사고를 친다면 사고의 스케일도 달라졌다. 그러므로 에인로가드의 예산을 위해서라면, 오수는 이한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거나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저놈은 본인이 예산을 깎아먹는다면 알아서 채워와 뻔뻔히 굴 놈이긴 한데….’

저 녀석은 황궁에 갈 때마다 그 화술로 관료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오는 녀석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5학년을 앞둔 지금도 이한에게 안 넘어간 관료들이 없었다. 그러나 깎은 예산을 되찾아 오는 건 되찾아 오는 거고. 애초에 이한은 오수의 후계자이자 수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이한이 사고를 친다면 그 책임은 막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오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또 고위 마법을 해골의 표정을 만드는 것에 쓰는 거냐며 속으로 어이없어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한 번 저 스승의 말에 넘어가면 대화의 주도를 되찾기가 어려워졌다. 그게 바로 연륜이라는 건지…. 아무튼.

오수는 이한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자 대충 뼈로 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거야 굳이 예의를 차릴 것도 없었으니 대충대충 넘어가자는 의미였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건물을 부술 거면 하나만 부숴라.

“…예? 갑자기 건물 부수는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영지 안에서라면 누가 다치든 죽진 않으니 걱정은 말고.

“대화의 흐름을 못 따라가겠는데요, 교장 선생님.”

황당한 표정을 한 채 이한이 오수를 바라봤다. 대체 저 스승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흘러가고 있단 말인가? 자신이 건물을 부수긴 왜 부수나. 부수기라도 했다간 마법으로 알아서 복구하라고 하거나, 방학 때 또 귀족들 저택을 들려야 할 거고, 황궁에도 가게 될 거고…. 자신을 끌고 가실 것이 뻔한데! 안 그래도 자신에게 외부 의뢰를 맡기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이한은 가능하면 효율적인 동선과 계획으로 방학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사고를 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한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쏘아보내자, 오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서는 아둔한 제자를 보는 스승의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봤다. 딱딱하고 매끄러운 뼈로 된 손을 이한이 잘 볼 수 있도록 한 다음, 오수가 손가락 하나하나씩 접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일반 언데드용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건, 지금 하고 있는 게 흑마법 쪽이라는 것일 테고.

“…그렇죠.”

―헌데 말의 맥락을 보자면 대상은 보편적인 수준의 언데드가 아님이 분명한데.

“…예.”

―그 이전에 1학년 때부터 구울의 왕을 쓰러트린 전적을 참고하고, 그간 네가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면 네 안에서 ‘일반’의 기준이 높아졌을 테니.

“그건 좀 억측이시지 않나….”

―적어도 네가 하고자 하는 건 구울의 왕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언데드에게 사용할 마법이나 시약을 준비 중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 정도 언데드를 소환하거나 제압하거나, 실험에 이용하려는 것 전부 규모가 크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 내가 네게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느냐. 오수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한은…. 들어보니 정말 당연하고 합리성이 넘치는 추론이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오수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사용할 언데드는 구울의 왕보다 격이 높았다. 정말로, 스승이 말한 것은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이한은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런 반론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오수는 그런 이한의 반응을 보며 그것 보라며,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며 이한을 약올렸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입을 열어 운을 뗐다.

―그러고보니.

“…예에.”

―특이한 소문이 돌던데.

이한이 눈을 끔뻑이며 오수를 바라봤다. 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오수가 말한 ‘특이한 소문’에 대한 건 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요긴하게 써먹는 중인 마법으로 인한 오해를 말하고 계신 것만 같았다. 음, 이걸 알려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한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즈음, 오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커다란 해골이 다가오는 것이 공포스러울 법도 했으나 이한은 뒷걸음질 한두 번만 치고 말았다.

―그럼 내가 말하는 것도 구분할 수 있느냐?

“…….”

아주 커다란 녹색 안광이 이한을 비췄다. 이한이 느끼기에 언뜻, 조금 즐거워 보이는 것만도 같았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느낀 사람의 눈빛이라고 해야하나…그랬다. 다만, 만약 오수가 이한이 자신의 거짓도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한은 손수 그 기대를 꺾어야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에게 거짓을 고할 순 없었다. 비록 그동안 이한이 오수에게 한 거짓말만 센다고 해도 두 손을 훌쩍 넘어간다고 해도.

이한이 침묵했다. 이한의 눈이 잠시 오수의 옆을 비껴나가는 듯 싶더니, 오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 정리가 끝난 듯이 이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수의 질문에 답했다.

“지금은 힘듭니다.”

―호오. 지금은?

“예…. 그보다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흠.

오수는 이한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뼈로 된 손을 자신의 턱 언저리에 얹으며, 이한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관찰하거나 확인해보려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이한이 잠시 긴장하며 오수가 빙빙 도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이한은 자신에게 상시로 시전되고 있는 마법이 오수에게 읽힐까 속으로 걱정했다. 이한이 아무리 마법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고, 마력 감지가 뛰어나고, 마법에 대해서 사고회로가 빠르게 돌아간다고 한들 제국의 마령관 앞에서는 방금 막 지팡이를 든 마법사일 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련한 대마법사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흔적을 들키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운…….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참 희한한 소문이 생겼구나.

어, 어려운…일일 텐데?

―하긴. 너는 대부분의 경우 눈치가 빠르고 상대방의 속내를 읽는 것에 능숙했으니…. 어리숙한 동기나 후배 녀석들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 정도야 간단한 일이겠지.

“…그렇죠. 덕분에 아주 편합니다.”

―사람은 신빙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소문은 사실일 거라고 믿으니 말이다. 그 소문 덕에 대화의 주도를 쉽게 가져갈 수 있다는 건 큰 이점이지.

오호라. 그러면 그 소문을 수도까지 퍼트린다면…. 오수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자신을 써먹으려 하는 것 같은 오수의 모습에 이한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런 소문으로 대화의 주도를 갖고 오려고 하지 않아도, 귀족들이나 기사들, 상인들, 관료들은 자신에게 예의있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한의 생각이었으므로, 이한은 스승의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것에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어차피 예산이나 연구 후원금에 대해서는 한 번 가면 만족하실 만큼 갖고 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자고로 이용할 수 있는 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법이지. 뭐, 그런데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이번은 넘어가마.

오수가 작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누가 들어도 상당히 성격 나빠보이는 웃음소리였다. 묘하게 두개골의 안와 안에 있는 녹색 안광이 접히고, 휘어지며 웃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이한은 해골 모습으로 개구지게 웃고 있는 그의 스승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애초에 이한이 개인적인 연구를 시작하려는 것도, 마법 하나를 연구해보려다가 상시로 마법이 시전되게 된 것은 전부 저 대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냥 문득 저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져서. 저 사람이 했던 말의 진위가 궁금해져서, 그때 왜 그렇게 말을 한 건지, 왜 그런 표정, 어조로, 왜 그렇게….

‘네가….’

조금은 오래된 그날. 이한의 스승이 본체인 오수만 남게 되었던 날 이후로 조금 더 지났던 어느 날.

‘그러지 않길 바랐다.’

이한은 눈앞에서 장난스레 웃는 해골의 위로 그날의 잔상을 덧씌웠다. 새하얀 백골 위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즐거운 듯 휜 녹색 안광의 위로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신록의 눈을. 마법으로 강제로 휘어 올린 입꼬리로는 일직선으로 굳게 닫혀있던 그 입매를.

이윽고 이한의 시선은 잔상의 너머로는 오수의 영혼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세상의 법칙을 속이기 위해 리치들은 모두 자신의 영혼을 성물함에 보관하기 때문에, 이한은 오수의 영혼을 제대로 관찰할 수는 없었다. 이한의 수준으로는 미약하게 남아있는 영혼의 흔적만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한은 그 흔적이나마 시야에 두었다. 애초에 해골 모습의 오수는 크기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위화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한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시야 한 구석에 그 희미한 흔적을 볼 수 있도록 해둔 채로, 이한이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안 바쁘신가봅니다? 며칠은 안 보이셔서 바쁘신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학교 안을 한 번 돌아다닐 시간은 난다. 무쇠대가리들이 하는 모습이나 좀 구경하고 다시 가야지. 그리고 하나뿐인 후계자가 혹여나 사고를 치고 있진 않나, 보러 와야하지 않겠느냐?

네 녀석이 워낙 많은 사고를 치고 다녔어야지. 오수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한은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무엇이든지 간에 이한에게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또 궁금한 것은 저 말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에 대한 것. 이한은 시야 한 켠에 둔 오수의 미약한 영혼의 흔적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한이 연구 중이었던 건 상대방의 영혼을 통찰하고 분석해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 신체적 변화로 참과 거짓을 가려내기에는 대상이 언제든지 마법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한은,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위해 마법의 수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육체와 영혼은 긴밀한 상관관계가 존재했으므로 그것에 집중하면 영혼의 변화만으로 상대방의 말을 가려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계속 타인의 영혼을 꿰뚫어봐야 하며, 미세한 변화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까지 고려해도 이한이 하고자 하는 건 오고닌의 비전 마법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이 이 마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 건 순전히 마법을 사용할 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오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마법이 통하지 않을 대상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했기 때문에, 마법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작은 실수가 발생했고, 그런데 그것을 바로 잡아줄 스승의 부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마법 연구의 부작용이 존재하는 한 이한은 타인의 영혼이 그냥 보였다.

‘그래도 부작용을 없애고 개량하려고 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건….’

그렇다는 건 오수의 영혼을 똑바로 바라보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이한이 원하는 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할 것은 많고 이번 학기에 남은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이 상태 그대로 학교 밖으로 나갔다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그대로 보게 될 텐데, 그랬다간 지금보다 더 한 현기증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오수에게 비밀리에 먹일 시약이 필요했다. 상대방의 영혼의 반응을 좀 더 잘 이끌 수 있도록 하는 시약이 필요했다. 자신의 현재 수준으로는 원하는 것을 이루기에는 불가능해보이니, 다른 것의 도움이라도 받아야했다.

“저를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언제 자의로 사고를 치고 다녔습니까?”

이한이 그렇게까지 준비하려는 이유는 사실 별 것 없었다.

이한은 자신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해골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누구보다 오만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마법사. 고대부터 살아온 살아있는 역사의 산증인. 온갖 전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제국의 마령관…. 그에 비해 자신은 저 사람에 비하면 아직 살아온지 얼마 안 된 갓 태어난 마법사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더냐? 자의든 고의든, 네가 사고를 몰고 다닌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지.

살아온 세월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만큼 저 대마법사는 속내를 감추는 것에 능숙할 테니, 자신에게 진실인 것처럼 거짓을 말하는 것을 자신은 구별할 수 없을 터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한이 불만스럽게 오수를 바라봤다. 그에 오수는 코웃음을 치며 커다란 뼈로 된 손을 이한의 머리 위에 얹었다. 폭, 하는 느낌과 함께 이한의 머리카락이 조금 눌렸다. 뼈로 된 손이 이한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엉키고 있음에도 이한은 오수가 자신을 쓰다듬는 손에 담긴 힘이 그렇게 세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러니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데스 나이트들에게 언질해둘 테니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가만히 있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해야할 게 많지 않느냐? 4학년이나 됐으니 3학년 때보다 더 바쁘면 바빴지, 한가하진 않을 텐데.

오수는 이한의 대꾸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윽고 이한의 앞머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가르마가 있었던 건지 없었던 건지 구별도 못 할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고서야 오수가 이한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한이 오수를 어이없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무래도 거울을 보면서 정리해야 정돈이 될 것만 같았다….

이한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수가 작게 소리내어 짧게 웃었다. 제딴에는 본인이 덤덤하게 있는 줄 알겠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할 거다. 오수는 괜스레 이한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눌러 밀더니,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에인로가드의 교장직은 하루라도 안 바쁜 날이 없었다. 책임질 것들이 많은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조금 멀리 이동했을까. 오수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까지 대화를 나눴던 곳에서는 아직도 이한이 서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을 조금이라도 정돈하고 이동할 생각인지, 그 손이 아주 바쁘게도 움직였다. 자신이 본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문득, 오수는 생각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바쁜 것이 조금은 아쉽다고.


“이한, 요즘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요네르가 이한의 낯빛을 보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누가 보면 걸어다니는 언데드인 줄 알겠어. 흡혈귀도 아니야. 언데드가 맞아. 단호한 친구의 말에 이한이 조금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졌다. 이한의 눈에는 선명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뚜렷한 요네르의 영혼이 보였다. 예전보다 더 영혼의 형태가 선명해지고, 존재감이 강해졌다. 요네르의 영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영혼들이 그렇게 보였다. 마법의 부작용, …마법이 좀 더 심해진 거였다.

on/off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확실한 단점이었다. 부작용이라고 해봤자 그것 뿐이었으니까. 이한이 연구하면서 세운 가설로는, 자신의 마력 감지 수준과 영혼 인지의 수준이 타인에 비해 지나치게 월등해 생긴 일이었다. 시약을 해골 교장에게 먹인 그 순간부터 기회는 없어질 테니 준비를 확실히 해야했다. 이한이 아는 오수 고나달테스는 자신의 마법 저항력이나 영혼에 생긴 변화를 인지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과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면 말해. 도와줄게.”

“맞아, 이한. 네게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서라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널 도울 거다.”

요네르의 말에 아산까지 말을 얹었다. 근처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바쁜 와중에도 도우겠다고 말할 정도로…. 지금 내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거지, 지금? 이한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과제들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자신이 힘든 건 전부 개인적으로 하는 마법 때문이니까. 친구들이 돕겠다고 해도 그리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거였다. 애초에 개인적인 일에 친구들의 시간을 뺏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다.

“과제 때문에 이런 건 아니니 걱정 마라.”

“그러면 교장 선생님 때문인가?”

“역시 투서를 더 넣었어야 했나?”

“그런데 요즘 교장 선생님 좀 조용하지 않아?”

이한의 말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너도나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뭘 꾸미고 계시길래 이렇게 조용하지?’‘누가 1학년들 상황 몰래 보고 와봐. 1학년들이 괴롭힘 받고 있는 거 아니야?’‘그런데 우리에게 올 관심이 1학년에게 갔다는 건…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그건 그래.’ 누가 봐도 에인로가드 학생임을 알 수 있을 법한 대화들이 들렸다. 일단 우리만 아니면 되잖아? 누군가 말한 말에 다른 학생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자주 후배들을 챙겼던 이한만이 속으로 이 광경에 아득해질 뿐이었다. 시간만 나면 은근 후배들을 챙기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요네르도 친구들의 인성에 조금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난 정말 괜찮으니 해야할 과제들이나 마무리 잘하도록. 졸업은 해야하잖나.”

아니면 유급하고 1년 더 학교에 남아있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한의 말에 모두가 정색했다. 몇몇은 끔찍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소리라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4학년 휴게실에 공허히 울려퍼졌다…. 모두 제대로 과제를 마무리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 같자 이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과제를 열심히 끝낼 테니, 적어도 유급할 친구들은 없겠군.

이한의 말에 자신의 과제 수준을 떠올린 학생들 몇몇이 급한 발걸음으로 휴게실을 벗어났다. 자신이 하고 있는 과제물의 완성도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한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런 학교에 더 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오수의 괴롭힘은 학년이 높으면 높을 수록 더 강도가 강해졌고, 그에 학생들이 해골 교장에게 더 깊은 원한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졸업을 앞둔 마지막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4학년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중간고사 이후 몇 주까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졸업하고도 남겠지 싶었는데, 막상 끝이 다가오니 자신의 과제물들이 하나같이 뒤떨어져보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자신감이 넘치고 오만했던 학생들도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만약, 기준에 미달하여 졸업에 실패라도 한다면…. 해골 교장이 어떻게 놀려먹고 괴롭힐지 상상도 하기 싫었던 탓이었다. 극소수의 5학년으로 올라가려는 학생들도 그랬다. 무엇이든 기준 미달이면 졸업이든 진학이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대부분의 학생들의 상황이지, 이한의 상황은 아니었다. 이한은 그런 착각에 과제게 매달리는 편이 아니었다. 애당초 이미 졸업 기준을 훌쩍 뛰어넘은지 오래라…. 그냥 평소처럼 지냈다. 주변의 4학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외부 의뢰를 뛰어 돈을 벌어오고 연구에 탕진을 해도, 이한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다만 점점 피곤해졌을 뿐이다. 눈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서서히 피곤해져만 가던 눈은 기말고사를 앞두고 이한에게 막대한 피로감을 안겼다. 이한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아니긴 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교수들에게 듣기론 이미 너는 기말은 다 끝냈다고 들었는데.”

이한이 잠시 눈을 감고 근처 복도 벽에 서 있었을 때, 이한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곧게 뻗어진 흰 손가락이 이한의 눈밑을 쓸었다. 그에 이한이 눈을 떠보면, 눈앞에는 그 누구의 외모와 비교해도 결코 꿇리지 않을 외모가 거기 있었다. 조각상처럼 각이 지고 선명한 이목구비의 소유자가 이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한이 고개를 들어 오수를 마주봤다. 그러자 이한은 인간 모습의 오수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을 부분에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매우 차분하고, 잔잔한 호수처럼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느낌의 무언가였다. 저것이 교장 선생님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한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이 뻑뻑해서 그런지 한두 번 깜빡인 걸로는 눈이 쉽게 편해지지 않았다.

결국 이한이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했으나 수려한 손이 그것을 제지했다.

“이번 학기가 끝나고 졸업식 전에 일정이 있으면 비워두라 언질을 해두려 왔거늘, 이것 참….”

“…아, 일정 말입니까?”

“그래.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저택에 들리라고 할 생각이었지.”

오수가 이한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눈꺼풀 위를 아주 약하게 문질렀다. 눈꺼풀 위를 천천히 문지르던 손이 이내 눈가 근처로 향했다. 근육을 풀어주듯 꾹, 꾹 눌러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두 눈이 감긴 것도 있고…, 교장 선생님이 자신의 눈을 문질러주기도 해서 그런지 눈이 간만에 편안해져서 그런지, 이한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았다. 오수의 손끝이 이한의 속눈썹을 쓸고 지나가도 잠시 움찔거렸을 뿐, 이한은 딱히 오수의 행동을 제재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헌데 이렇게 맥이 없어 보여서야. 내 수하들이 제자 괴롭히는 못된 스승이라고 뒤에서 욕이나 먹겠구나.”

“뭐…. 겨울 방학 때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다. 어차피 넌 5학년으로의 진학이 확정된 상태 아니더냐. 학생으로서 마지막 휴일을 즐기게 해 줘야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됐습니다.”

5학년 진학을 결심한 건 본인이긴 한데, 어째 교장 선생님에게 다시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는군. 이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다른 사람들은 거부하는 길을 혼자 가겠다고 결심해도, 주위에서 너 이거 한다며? 하고 물어보면 괜스레 짜증이 나는 법이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럴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해도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 휴일이라니 무슨 표현이 그런가? 마치 5학년이 되면 쉬는 시간이라곤 하루도 없을 것…처럼…. 이한은 문득 6학년까지 모든 과정을 밟고 흑마법 학파 조교가 된 그의 까마귀 수인 선배를 떠올렸다가…생각을 그만두었다.

이한이 눈을 뜨려고 눈꺼풀을 올리자, 오수가 이한의 눈가에 자신의 손을 덮어 가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에 닿아 간지럽거나 거슬릴 텐데도 오수는 개의치 않았다. 이한은 자신의 스승이 지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그가 바라는 대로 다시금 눈을 감았다. 어차피…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해골 교장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고 한들 곧장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방학이 시작되면 학교에서 바로 저택으로 갈 테니 그때까지는 좀 쉬고 있어라.”

“일단…알겠습니다.”

“다른 교수들에게도 말해놓으마. 심부름 같은 자잘한 거 시키지 말라고. 네 녀석이 피곤해서 반 죽어가면 황제폐하께 투서가 가니까 말이다. 그러면 난 대체 제자를 어떻게 돌보고 있냐고 폐하께 잔소리를 듣겠지. 소식을 들은 조우린 전하도 온갖 불만을 토해내면서 에인로가드로 달려오려고 하시겠지. 난 황제 폐하의 잔소리를 듣고, 조우린 전하가 못 오도록 막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할 테고 말이다.”

알겠느냐? 네 상태에 따라 내 일정이 달라진다는 소리다. 오수가 작게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은 어쩐지 교장 선생님과 자신의 거리가 멀 텐데도 불구하고, 그 작은 소리를 들었다. 신경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법한 아주 작은 웃음소리였다. 한 번 그리 인지하니…. 억측이겠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만. 왜인지 자신과 해골 교장의 얼굴이 가까이 붙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어쩐지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한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들을 가리고 있는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느껴지는 건 작은 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래. 이번에만 특별히 도와줄 테니, 쉬고 있으란 말 잊고 있지 말고.”

오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한은 자신의 기감에 무엇인가가 잡히는 것을 느꼈다. 낯익은 마력이 자신을 가볍게 감싸고 사라졌다. 교장 선생님이 자신에게 마법을 건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무슨 마법인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강화 마법인가? 아니면 치유 마법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사고를 치지 않게 상황을 늘 볼 수 있게끔 하는 무슨 감시 마법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지만 그런 마법들의 특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력의 흐름만이 일순간 느껴지다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수의 마력이 짧게 이한을 훑고 지나가자, 오수는 그제야 이한의 눈에서 자신의 손을 떼내었다.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눈꺼풀이 연신 깜빡거리며 특유의 금빛의 눈동자를 세상에 내보였다 가렸다를 반복했다. 이한이 아침에 비하면 훨 나아진 상태에, 교장 선생님이 무언가를 했구나 정도만 알아챘다.

“방학을 앞두기 전까지는 바빠서 잘 못 올 거다. 그러니 볼 일이 있다면 데스 나이트들에게 말해놓으면 돼.”

“…? 예에. 그런데…유독 올해 들어서 많이 바빠지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한은 오수에게 질문을 하고서야 무언가 달라진 걸 깨달았다. 아까까지는 보였던 흐릿한 영혼의 잔상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까 전과 지금의 차이점이라곤 오수가 이한에게 건 마법…같은 무언가 뿐이었으니, 교장 선생님이 자신이 마법 때문에 피곤한 걸 눈치채셨구나. 싶을 뿐이었다. 마법을 눈치챘다면 마법의 종류도 눈치채셨을까. 궁금하지는 않으실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이한은 아주 잠시 오수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오수는 이한이 자신의 눈치를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이한이 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잘생긴 낯이 살짝 찌푸려지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오수에게서 답이 흘러나왔다.

“다 훗날을 위해서지. 사고뭉치인 제자 키우기도 쉽지 않구나.”

“예? 혹시 저 말고 다른 제자 들이셨습니까?”

“…? 요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 거지?”

“…?”

“…?”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수가 먼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의 말을 오해해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거늘…. 하여간. 이 녀석이 엉뚱한 곳으로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걸 잠시 간과했다.

오수가 피식 웃더니 이한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표현으로는 때렸다가 맞으나, 막상 맞은 이한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점에서 때렸다고 봐야 하는지는 불분명했다.

“내가 왜 다른 제자를 들여야 하느냐? 네가 있는데.”

“딱밤은 왜 때리십니까? 아프잖습니까.”

“어쭈. 안 아픈 걸 내가 훤히 알고 있는데 지금 거짓말을 해?”

“때리신 건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아프죠.”

“허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뻔뻔해지는구나. 됐다. 바쁜 이유는, 악신숭배자나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걸 내가 직접 돕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누구가 밖에 나가기만 하면 주렁주렁 달고 오는 것들 말이다.”

그 대답에 이한이 꾀병을 부리기 위해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었다. 오수의 말이 가르키는 의미는 간단했다. 자신이 외부 의뢰를 나갈 때마다 자꾸 무언가와 엮이고 오니, 위험해지지 않게…. 미리 닦아놓고 왔다는 뜻일 터였다. 앞서 말한 문장이 이 추측에 근거가 되어주었다.

여기서 이한의 스승이 말하는 악신숭배자나 범죄자들은 보통 조무래기가 아닐 터였다. 오수 고나달테스가 직접 나설 만큼의 어느 정도 악명이 자자한 놈들일 터였다. 물론 어느 정도의 수준 높은 놈들은 이제 이한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한은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이한은 늘 안전을 추구했던 터라…. 오수의 말에 작은 감사함을 느꼈다.

작은 감사함인 이유는, 오수가 진즉에 그렇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좀 예전부터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다면 시련을 넘어 시련을 겪을 일도 없었을 거고…. 자신의 학교 생활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았을까? 이한은 잠시 자신이 겪어온 모든 사건들을 회고했다. 떠오르는 몇몇 사건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꿔놓을 정도로 강렬한 사건들이었다. 가령, 명예욕 분신과의 만남이라던지, 초상화 젊은 왕자 스승님과의 만남이라던지, 피를 제물로 받는 악신숭배자들과의 만남, 악신숭배자들과의 만남, 범죄자들과의 만남………. 끝없이 찾아오는 시련들과의 만남…………. ……그 모든 일 이전에, 교장 선생님이 지금처럼 자신이 그러한 사건들을 겪지 않도록 막아두었더라면….

오수는 불만스럽게 꿍얼거리는 이한의 말에 미미하게 웃었다. 이한은 그 웃음에서…. …착잡함을 찾아볼 수 있었다. 금새 흩어져 사라져버리고 만 감정이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인상에 남게 된 감정이었다. 그가 착잡함을 느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한이 의아함을 느낄 찰나. 오수가 다시 손을 들어 이한이 문지르고 있던 이마를 본인이 문질러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보기 좋게 빚어진 입술이 달싹이며 열렸다.

“그럴 걸 그랬구나.”

“…….”

“헌데, 그래도 덕분에 마법 실력은 일취월장하지 않았느냐. 원래 고행 끝에 손에 거머쥐게 되는 보상은 달지.”

이한의 이마를 문지르던 손은 이내 이한의 앞머리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흐트러졌다. 이한은 생각도 못한 그답지 못한 답변에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장난스레 ‘그래도 덕분에 마법은 늘었잖아?’하는 농담에 짜증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어조와 말만 들으면 얄밉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에 툭 내뱉은 것이 정말로 진심을 담은 듯한 답인 것 같아서.

아주 조금 그 말 속에…후회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아서, 이한은 짜증을 낼 수 없었다.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죠.”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낸 대답이라곤 억지로 꾸며낸 듯한 긍정적인 답변 한 줄이었다. 이한은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그것들을 모아 생각하자면, 그건…. 그의 스승의 약한 면모였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다만 어째서 그가 그렇게 생각을 바꾸었는지는, 어째서 자신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길 결심한 것인지는, 이한은 도무지 추측할 수 없었다. 감조차 오지 않았다.

둘 사이에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오수는 미미하게 웃고만 있었고, 이한은 속이 복잡해진 상태였다. 둘 중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이한의 이마가 슬슬 붉게 물들었을 즈음…. 오수가 운을 뗐다.

“워다나즈.”

“…예.”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 알고 있느냐?”

그렇게 운을 떼며 꺼내어진 질문은 앞서 나눈 대화와 동떨어진 질문이었다. 뜬금없는 오수의 물음에 이한이 어리둥절하게 오수를 쳐다봤다. 오수는 미미하게 짓던 옅은 웃음은 어디로 팔아치운 건지, 한 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려 누가 봐도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수가 허리를 숙여 이한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조금 즐기고 있는 기색이 오수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한은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질문의 저의를 생각해보다…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오수가 만족한 사람처럼 눈매를 곱게 휘며 곱상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알고 있으면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진 않겠으나…. 대신 돌이킬 수 없게 만들 테니 말이다.”

오수가 이한에게서 다시금 거리를 둔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오수는 이만 가봐야 한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저벅거리는 구둣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사라져갔다. 이한은 오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수가 말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수가 잠시나마 보인 그답지 않던 모습 때문에 이한은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수의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해보려고 해도 찰나의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이 어디서 본 듯한 표정이었다는 걸 대화가 끝난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에인로가드의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가문에서 나온 마차가 있는 친구들은 마차에 탑승하며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고, 마차가 없는 친구들은 서로의 목적지가 같은 친구들끼리 모여 필로네 마을로 향했다. 그런 친구들은 마을에 있는 마차를 대여하거나 말을 빌려 집으로 돌아갈 터였다. 이한은 자신의 스승이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으므로, 미리 가문에 편지를 보내 가문에서 마차를 보내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이한, 편지할게.”

“한 번 시간나면 저택에 놀러와! 예전보다 더 나아진 저택을 구경시켜줄 테니까!”

“그래, 그래. 답할 수 있으면 답장을 보낼 테니 편지 보내고 싶은 사람은 편하게 보내라. 저택 구경은…. 일정이 빈다면 먼저 연락하도록 하지.”

이한은 친구들 한 명 한 명 인사해주며 배웅하고 있었다. 몇몇 학생은 이한에게 왜 가문의 마차가 오지 않느냐고 물어봤으나, 이한은 단지 늦게 올 뿐이라며 둘러댔다. 여기서 자신이 곧바로 스승의 저택으로 간다는 걸 말했다간 그의 스승이 고달파질 거라는 걸 마법을 쓰지 않고도 예지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수가 대화하는 도중 황제의 부름에 시달려 자리를 비우는 것을 이한은 바라지 않았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이한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에인로가드를 벗어났다. 정문을 가득 채우던 인파가 전부 빠지니 조금 휑한 것 같기도 했다. 이한이 주위를 둘러보다 몸을 돌려 에인로가드 건물을 바라보았다. 4년이나 보고 지낸 건물이었다. 아마도, 4년동안…. 눈에 보이는 부분의 3분의 2는 부숴졌다가 새로 지어졌을 거였다.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정말로 다사다난하고,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래, 에인로가드에서의 좀 고생이 많긴 하였으나 나쁘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음을 이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한이 혼자 정문에서 서서 생각에 잠겼을 무렵. 뼈로만 이루어진 언데드형 말들이 이끄는 마차가 에인로가드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녹색의 겉면과 어두운 흑단 계열의 나무에 은으로 장식을 한, 고풍스러우면서도 누가 보아도 오수의 마차일 것 같은 디자인의 마차였다. 마차는 이한의 앞에 멈추더니, 마차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거기에 가만히 서서 뭐하느냐? 가자꾸나.”

“뭘 하긴요, 교장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죠. 너무 늦게 오신 거 아닙니까?”

“졸업식 전에 한 번만 마법으로 뒤통수를 때려보겠다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지. 죄다 우스운 꼴로 돌려보내느라 좀 늦었다. 많이 기다렸느냐?”

“많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보다…. 그러면 졸업식 때 좀 난리겠군요.”

“난리는 무슨. 날뛰려다 제압당하면 징벌방에 가둬질 거라는 걸 알 테니 좀 사리겠지.”

머리가 있다면. 오수가 심드렁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이한은 오수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4년동안 눈앞의 해골 교장의 성격을 가장 잘 파악했을 테니 설마 졸업식에까지 난동을 피우지는 않을 거였다. 이한은…. 자신의 친구들을 믿었다. 훗날, 차갑게 식은 눈으로 페르쿤트라와 함께 심층 징벌방으로 면회를 하러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이한은 눈앞의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무덤덤한 표정은 시선을 바깥에 두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짙푸른 비단으로 지어진 고급스러운 제국식 옷은 새로 지은 건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디자인이었다. 녹빛이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크라바트의 재질 또한 쉬이 볼 수 없는 고급품의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한은 새삼스레 눈앞의 사람이 제국에서 두 번째로 명예가 드높은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럴 때면 이한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존재들의 낯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훗날을 맡기고 승천한 명예욕의 분신과, 이제 혼자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격려하며 사라진 젊은 왕자의 초상화 같은 것들을. 그들은 눈앞의 사람의 과거이면서 이 사람이 한때는 누구보다 인간적이었음을 알려주는 증표였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무언가를 갈망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을 거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던 잔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그 후에 떠오른 것은, 그렇다면 지금의 오수 고나달테스라는 존재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오수 고나달테스의 일대기>라는 위인전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긴 삶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언뜻보자면 다 타고 남은 재로 이루어지진 않았나, 싶기도 하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목표를 정립해 나아가고자 하는 현자의 모습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무슨 생각이든 당사자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으니 이한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지만서도.

‘…아. 다시 보인다.’

그렇게 적막 속에서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오수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을 즈음. 이한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골 교장을 마주했을 때 보았던 그 흐릿한 영혼의 잔상이었다. 오수가 이한에게 해두었던 일시적 조치의 효력이 끝난 건지, 아니면 이한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했기 때문에 오수가 한 조치로 인해 끝난 마법의 효과가 다시금 떠오른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이한에게 있어서는 타이밍 좋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법을 다시 시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테니까. 이한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오수의 시선을 끌었다.

“저택에 도착하면 말입니다.”

“도착하면?”

“대화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대화를 하고 싶길래.”

“그냥….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오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이한을 바라봤다. 턱을 괸 상태 그대로 이한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나른히 웃음을 짓더니 소리내 웃었다. 하하, 웃은 오수가 턱을 괸 손을 내리며 자세를 바로했다. 이한과 마주보며 이번에는 팔짱을 낀 오수는 그대로 이한의 눈을 지그시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웃음기가 조금 가신 낯에는 옅은 미소만이 머물고 있었다.

“워다나즈.”

“예.”

“전에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 말에 이한은 조금 된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오수는 올해 정말로 바빴으므로, 마지막으로 이한이 오수와 만난 날은 시간이 꽤 된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한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나 특정 인물들에 대한 기억들은 유독 오래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 특정 인물 중에는 당연히…오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한은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 오수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을 알고 있느냐는 물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에게 내보인 연약한 감정의 파편 하나.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순간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야 오수가 보인 의외의 모습으로 인해 제대로 생각하진 못했으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오수의 말의 의미를 이한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일종의 경고의 의미였을 거였다. 더이상 궁금해하지 말라는, 알고자 시도하지 말라는 의미였을 터였다.

‘아셨구나. 언제부터 아신 거지?’

그러나 그게 이제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오수에게는 조금 아쉽게도 이한은 은근 고집이 강한 편이었다. 겉으로는 순순히 수긍하고 타인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반항아의 기질이 충분했다. 이미 저택에 가면 차를 대접한다고 하면서 오수에게 먹일 시약도 전부 완성해놓았다. 그리고…. 이한은 본인을 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이미 오수가 이한에게 보인 모습들에 대해 이번에 물어보지 않고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다시 들추고 말 것이라고.

그러니 이한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수가 다시금 그때 그 말을 언급하는 걸 보자면, 이 이상 나아가도 후회 없겠냐는 뜻도 있을 거였다. 이한은, 자신은 지금 당장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오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압니다.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느냐? 네가 그렇다니, 뭐.”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한은 오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유추하느라 말이 잠시 없었고, 오수는 본인이 먼저 무언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한 또한 어차피 대화를 주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대화야 저택에 도착하면 오래토록 하게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마법사의 예감은 예지와도 같았기 때문에…이한은 자신의 예감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신경쓰기로 했다.

그 이후로 마차가 두어 번 공간을 접어 달려나갔다. 방음이 좋은 편인지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매우 희미했는데, 만약 오수와 이한이 서로 대화 중이었다면 그런 작고 미세한 소음 쯤은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라 이한은 생각했다. 그만큼 마차 안은 매우 고요했다. 정말로 작은 소리에 집중하다보면…스스로가 내쉬는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오수의 신체는 오수가 마법으로 만든 것에 가까웠기에, 그런 살아있는 신체의 활동으로 인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차의 도착지는 그랑덴 시에 있는 오수의 저택이 아니라 수도에 있는 오수의 저택이었다. 하긴…. 겨울 방학이 올 때마다 교장 선생님이 하셔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여기로 오는 게 맞긴 하겠군. 이한이 알아서 자신의 의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문으로 갈 때도 여기가 더 편할 거였다. 거리상으로 워다나즈 가문과 가까운 곳은 수도였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이한이 오수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 대화하면서 마실 차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네가? 하인을 시켜도 될 텐데.”

“선물 받은 찻잎이 있습니다. 이럴 때 써야죠.”

“흐음…. 그래, 그러면 부탁하마. 다과는 저택 내에 있으니 취향에 맞는 걸로 고르고."

마차에서 내려 지팡이로 땅을 짚어 선 오수는 누구보다 귀족적인 모습이었다. 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한의 말에 동조해주자, 이한이 그럼 먼저 들어가겠다며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오수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차를 이끌던 마부 역을 맡은 데스 나이트가 오수의 옆에서 안 들어가시냐고 물어봤지만, 오수는 ‘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니 기다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라고만 말한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마저 마차를 보관하러 자리를 옮기니 저택 문앞에 있는 건 오수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오수가 느릿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정도나 기다려줬으니 해보고 싶은 걸 시도할 수 있을 시간은 충분했을 거였다. 오수는 모르툼 교수에게서 캐물어본 정보들을 토대로, 이한에게서 느껴졌던 마법의 흔적들을 토대로 이한이 자신에게 무언가 시도를 할 거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실된 문답을 그의 제자가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스승된 자로서 받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오수가 이한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이 저택은 오수의 것이었으므로, 저택 내에서 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쯤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어디 하인에게서 위치를 듣고 간 건가? 실외 정원에 있군. 오수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지금 실외 정원이 관리가 된 상태인지 따위를 떠올렸다. 아마 자신들이 오기 전에 하수인 몇몇이 관리를 해놓았을 거였다. 늘 그랬듯이.

오수는 고요한 저택의 복도를 혼자 걸어갔다. 이는 사실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오수가 이 저택에 손님을 들이는 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한과 같은 경우 아니면 그는 늘 저택에 혼자 있었다. 질 좋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의 끝이 바닥에 닿으며 경쾌한 소리를 자아냈다. 실외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는 오수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지팡이 소리만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오수가 실외정원에 도착했다.

“아, 오셨습니까?”

“실외 정원은 용케 찾아왔구나? 알려준 적 없는 것 같다만.”

“데스 나이트 한 분이 올해 실외 정원은 자신 있게 꾸몄다며 말씀해주셔서요.”

“아. 그놈…. 정원 꾸미는 걸 은근 좋아하긴 했었지.”

오수가 이한이 앉아있는 티 테이블 맞은 편에 착석했다. 그것을 본 이한이 자연스럽게 오수 몫의 찻잔을 내밀었다. 찻잔에는 이미 찻물이 가득했는데, 추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온도를 유지 중이었다. 위에 아른거리며 만들어지는 김이 나 아직 따뜻해요를 주장하고 있었다. 홍차류의 찻잎이었던 건지 찻물이 조금 붉은 기가 돌았다. 오수가 문득 이한을 바라보자, 이한은 자신의 찻잔에 따뜻한 우유를 조금 섞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면 마실만 하더냐?”

“나름 괜찮습니다. 제 입맛에는 맞기도 하고요.”

실외 정원은 대체적으로 하얬다. 최근 수도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눈이 쌓여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데스 나이트는 이를 이용해서 눈을 전부 치우기보단 조경에 활용한 듯 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아래에 옅은 채도의 작은 겨울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쌓여있는 눈의 결정들이 빛에 제각기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으나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인 풍경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모를까….

티 테이블의 중앙에는 이한이 본인의 입맛에 맞게 갖고 온 다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입에 먹기 편한 조각 케이크 몇 조각, 동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약과나 전병 몇 개. 애초에 둘 다 단 것을 지나칠 정도로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오수는 미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니, 지금 준비된 것들은 대부분 이한의 입 속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런데 하고자 하셨던 일들은 모두 끝내고 오신 겁니까?”

이한이 눈을 살짝 내리깔며 시선을 자신의 찻잔에 두었다. 우유가 섞여 조금 혼탁해진 찻물은 이한의 움직임대로 수면에 작은 파문이 생겼다. 이한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한 모금을 먼저 마신 건지, 이한이 보고 있는 오수의 영혼은 마차에서 보던 것보다 조금 더 선명해져있었다. 완전한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저 정도가 시약으로 만들 수 있는 변화의 최대치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네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수는 이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그락거리며 마시고 있던 찻잔을 찻그릇 위에 얹어놓았다. 이미 찻잔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절반 이상 사라진 상태였다. 이한은 오수의 말에 조금 투덜거리는 투로 답했다. 그러면서 가운데 그릇에 놓아놓은 작은 조각 케이크를 포크로 살짝 찔러 입에 가져다 넣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조금…. 달았다.

“제가 뭘 염려했다고.”

“네게 할애할 시간은 충분하다못해 넘치니, 대화할 시간은 충분할 거라고 말하는 거다. 제자야.”

오수가 작게 웃어보인 뒤 손을 들어 마력을 운용했다. 티 테이블에 놓여진 찻주전자가 저절로 허공에 뜨더니, 오수 앞에 있는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따뜻한 김이 서리는 홍차가 다시금 오수의 찻잔에 가득 차올랐다. 지금 다시 보니 붉은 기가 도는 찻잔에는 아주 작은 금빛 알갱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오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저항력이 낮아지고,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성물함에서부터의 외부 자극이 느껴졌다. 자신의 영혼을 관찰하면서까지 기어코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 물어보겠다는 당돌한 제자의 행동에, 오수는 기꺼움을 느꼈다. 이한이 자신을 궁금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수는 이한이 끝까지 묻지 않았으면 했다. 그럼에도 그와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지금 이 상황에서 기꺼움을 느끼고 마는 건.

그건 그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단순히, 이한 워다나즈가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오수는 자신의 제자가 자신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것을 그대로 바라본다. 결좋은 흑발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습마저 시야에 담았다. 곧은 손가락에는 4년 내내 검술을 수련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에인로가드에서 이한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배그렉 교수 아니면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을 터였다. 마법 실력은 또 어떤가? 이미 교수급을 뛰어넘어 교수들은 이한이 에인로가드 교수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재다능하고 다정한 학생이 이한이었다.

‘그래, 워다나즈는 학생이지.’

그러나 학생은 어디까지나 학생일 뿐이었다. 오수는 잠시 내려두었던 찻잔을 들어 이한이 준비한 찻물을 다시금 들이켰다. 시약 준비하는 것에 꽤 많은 공을 들인 모양인지…. 차의 맛이나 색의 변화는 없었다. 이한의 마력이 너무 순도가 높아 생기고 만 마력 결정 같은 것만 제외한다면, 무색무취의 시약이었다.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면 자신이 대충 거짓말로 답 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 것까지 준비했다. 참 웃긴 일이었다.

오수는 그렇게 이한이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이한과의 진솔한 대화를, 오수는 바라지 않기는 하였으나 바라기도 하였다. 이한의 성격 상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이한 본인도 거짓을 할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수도 이한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있었다.

오수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수가 눈치채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 건지. 이한은 잠시 머뭇거리다 먼저 대화의 운을 떼었다.

“저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는. 대화를 시작하려고 해도 막상 하려고 하니 긴장이라도 한 모양이다. 이한이 목이라도 메이는지 자신의 찻잔에 있는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오수는 그저 계속 보고만 있었다. 여유롭게 이한이 만들어둔 차를 즐기면서, 가만히 이한과 눈을 마주하면서.

이한이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는지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날 왜…그렇게 말씀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날?”

“…교장 선생님의 젊은 시절 초상화가 사라지고 나서, 그 이후에 있던 대화 있잖습니까.”

“아아.”

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때는 이한이 3학년이 된 무렵이었다. 어찌나 나쁜 인연을 몰고 다니는 건지 악신숭배자들이 이한을 노리고, 범죄자들도 이한을 노리던 때였다. 가만히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오수가 그날 대화를 회상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이 구현된 그 초상화는 자신이 이한에게 있어 이제 걸림돌이 된다는 걸 깨닫자마자 이한의 곁을 떠났다. 제자의 곁에 남아 제자를 돌보려는 것보다는, 제자의 성장을 더 우선시한 모습이었다. 오수는 명예욕 분신의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이한의 곁을 떠날 때 그 장소에 있었기에 알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잔재답게 현재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목표를 이한에게 심어주고 떠났다. 그리고 워다나즈는….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어본 오수는 다시 이한을 바라봤다. 아무리 제국에서 15세가 성인이라고 해도, 이제 4년이나 지나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앳된 티를 찾아보자면 찾을 수 있었다. 오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지.”

“…무슨 말입니까?”

“올 한 해는 어땠느냐?”

“예?”

“굳이 학교 안의 생활뿐만 아니라, 전부 통틀어서 묻는 거다.”

뜬금없는 오수의 질문에 이한이 당황했다. 갑자기 올 한 해가 어땠는지 여쭤보신다고…? 그게 그 대화랑 연관성이 있는 건가? 이한의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당황스러움은 한순간이었다. 이한의 명석한 두뇌는 이내 그럴 듯한 기억들을 이한에게 알려주었다. 가령, 오수가 올해 바빴던 이유라던지. 오수가 이한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따위의 기억들을.

‘네가…그러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너는 그냥 아직 어린 마법사일 뿐이다. 그러니 네가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날 하늘은 참 맑았는데, 날이 좋은 것에 비해 자신은 책임감에 짓눌리기 직전이었다. 지금와 생각해보자면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느꼈던 것 같았다. 명예욕 스승이 승천한 후와 비슷하게 그랬다. 명예욕 스승과 똑같이 자신의 초상화 스승은 비슷한 걸 부탁하고 떠났다. 과거의 존재가 현재의 존재를 방해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어쩌면 젊은 왕자의 초상화는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이한 자신이 그에게 과한 의지를 하고 있었다는 걸. 이한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영향을 받았고…많은 격려를 받았다.

그렇게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보다 더 나은 마법사가 되어 자신을 떠나간 스승들의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이한은 부단히 노력했었다. 자신의 안위를 챙기긴 하였으나 대의나 타인을 위해서면 못 이기는 척 후순위로 둔다던지. 그러면서 이한은 외부 의뢰의 비중을 위험한 것 위주로 고르기 시작했다. 범죄자 소탕, 날뛰는 마수들을 처리하고, 던전을 탐색해 위험도를 체크하고, 악신숭배자들을 추격해 제국 기사단에게 넘기거나 토벌하고….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면 위험하지 않고 할만 하다고 생각하여 고른 것들이었다. 2학년 때와는 달리 그때는 교수들도 이한을 따라가지 않았었다.

이한이 내내 신경쓰던 대화는 오수가 이한이 의뢰를 끝내고 돌아온 이후에 이루어진 대화였다.

‘설마하니…. 그것들이 네게 자신들의 염원을 맡겼다고 해서 그걸 진심으로 이뤄줄 것이라 다짐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교장 선생님.’

‘그래서 명예욕 분신이 그렇게 떠났을 때도 네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 누가 그런 허무맹랭한 염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네가 그것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던 것을 그냥 넘기지 말 걸 그랬어. 그렇게 말하던 오수를 이한은 냉정하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이한은 그들의 이상이 그릇된 것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사상에 동화되며 영향을 적잖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수의 말에 반발심을 느꼈었다. 오수가 이한이 달고 온 자잘한 상처와 방치해둔 저주 따위를 손수 해결해주며 말하기 전까지는.

‘이런 건 왜 가만히 두고 다니느냐? 보기 안 좋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사소한 것들 아닙니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방치하는 건 좋지 않지.’

‘신경이라도 쓰이십니까?’

그때 자신의 질문에는 조금의 날이 서 있었다는 걸 이한은 안다. 오수도 스승이라 여기고 있긴 했지만, 자신에게 큰 지혜와 지식을 준 스승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누가 존경스러운 스승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한은 교장인 오수를 고를 자신이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자신에게 날이 선 제자를 바라보면서 오수는 조용히 이한에게 상처가 났던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이한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그였고, 이한은 이한이었다. 앞으로도 이한이 오수를 완벽하게 이해할 일은 오지 않을 거였다.

‘그래.’

‘…….’

‘더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내가 너를 망치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안하지는 않다. 이제 네 녀석이 바깥에서 다치고 돌아오면 내 속은 뒤집히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냥 네가 다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난 그렇게 될 거다. 오수가 그리 말하며 이한의 상처가, 사소한 저주 따위가 달라붙어 있던 곳을 손으로 느리게 쓸었다. 이한은…. 그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사실, 오수가 왜 저렇게 말을 했는지도 이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러니까 이제 외부 의뢰는 자제해라. 나가도 몸 조심하고. 데스 나이트들에게 네 의뢰는 검수하라고 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왜?

그 의문 하나 때문에 이한이 지금 이렇게까지 준비하며 티타임을 마련한 거였다. 이한은 스승이 제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 쯤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오수가 이한을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지도 몰랐다. 이한이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누군가는 그 해골 교장이? 하며 질색을 하더라도 뒤이어 그게 무슨 문제냐며 되물을 것이다.

그야 당연히, 타인이 듣기에는 이상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정말 편했습니다. 나가면 갑자기 악신숭배자가 날뛰면서 나타나지 않았고, 범죄자들도 수가 줄어 거의 보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그리고…. 언질을 해주신 덕분에 마지막까지 여유로웠습니다. 교수님들께 말하겠다 말씀하시기 전에도 좀 한가했던 것 같은데 이미 그때도 말을 해두신 겁니까?”

“그랬지.”

“…감사합니다.”

“알면 됐다.”

오수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한은 그런 오수를 살펴봤다. 심드렁한 해골 교장 특유의 표정이 있긴 했는데, 언뜻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이한은 문득 교장 선생님이 그냥 이 시간을 즐기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한이 생각하기에 오수는 시약을 마셨고, 그것이 분명 오수에게 영향을 주었기에 이한이 오수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시는 것이…. 그냥 넘기시려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어울려주겠다는 뜻이거나.

‘아무래도…그냥 어울려주시겠다는 것 같지.’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이한은 괜스레 자신이 갖다 놓은 다과를 계속해서 주워먹었다. 달달한 것이 입에 들어오니 좀 정신이 번뜩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한이 속으로 후회했다. 더 갖고 올 걸….

오수는 이한이 하는 행동들을 바라보다 아예 손으로 다과 그릇을 이한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다시 턱을 괴며 이한을 빤히 바라보곤, 놀리는 듯한 어투로 이한에게 말을 건넸다. 말하는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웃음기가 역력했다.

“더 갖고 오라고 해주랴?”

“…괜찮습니다.”

“그래, 일단 말은 해두마. 잘 먹으니 보기 좋구나.”

…이한은 오수를 잠시 노려보려다가 말았다. 힐끔거리거나 은근히 시선을 옆에 비껴나가기만 했는데, 오수를 노려보려면 이한이 오수의 눈을 바라봐야만 했다. 이한은 사실 지금의 오수가 낯설었다. 학교에서는 그 이후로는 안 그러셨으면서. 왜 하필 이때 눈빛이….

“아무튼, 내가 그걸 물어본 이유는.”

“예에….”

“네가 평범한 학생의 생활을 지내길 바랐다.”

“…저는 학생인데.”

“다른 에인로가드 학생 놈들과 네가 똑같으냐?”

“…그건, 음.”

오수의 말에 이한은 답할 수 없었다. 똑같냐고 하면 같은 에인로가드의 학생이 맞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수가 뜻한 의미는 그게 아닐 거였다.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자신의 다른 점은…. 너무 많았다. 같은 계열로 묶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마령관의 후계자」, 「고대 대마법사의 진전을 이은 마법사」, 「용의 계약자」…. 그것들이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였다. 사실상 제국에서 이러한 호칭들은 자신을 뜻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이미 밖으로 나가면, 의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에인로가드 학생이어서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한이 쌓아온 업적을 보고 의뢰를 넣는 사람들이었다. 이한이 설령 이제 더이상 에인로가드 학생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이한에게 의뢰를 넣을 거였다.

이한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오수는 그것 보라는 듯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네 재능은 일반 마법사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재능을 뒷받혀줄 마력도 누구보다 강대하다. 네가 조금만 더 마법을 수련하고, 경험을 쌓아 노련한 마법사가 되면 제국에서 너를 위협할 존재는 몇 없어질 테지.”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저를 제자로 받으신 거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런데 지금 평범한 학생의 생활을 하길 바랐다고 하시는 건 조금….”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냐?”

“아무래도, 예.”

오수는 이한의 반응에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전부 본인의 과오인가, 업보인가 싶기도 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아둔한 자신의 후계자가 말을 이해해줄까, 자신의 뜻을 알아채줄까 고민이 되었다. 잠시 팔짱을 낀 채 곰곰히 생각하던 오수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한의 의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 후계자와 제자가 된 순간부터 네게 평범한 학창 시절은 없어진 것이 맞다. 인정하마. 내 적은 많고, 내 명예와 업적은 제국에서 모르는 자가 없지.”

“그렇죠.”

“그러나 그게, 네가….”

“…?”

“…네가 다른 사람들과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워다나즈. 너도 그냥 학생에 불과해.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러길 바라지 않았고, 않는다고.”

오수는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이상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계의 모든 고통과 상처, 저주와 같은 것을 없애겠다는 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 명이서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시당초 그건 그런 류의 이상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없애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니…. 이 얼마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상이란 말인가. 마법사는 오만해야 한다고 말하는 오수여도 이제 그런 이상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한 사상을 필멸자가 품고 계속 달려나가다간, 끝내 스스로 파본인은 파멸이라 생각하지 않는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였다. 그것은 당자사인 오수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수는 이한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존재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길은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길이다. 걸어갈 필요가 없는 길이다.

“내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바라는 것이야 뻔하지. 그 시절의 나는 누구보다 이타적이고, 대의를 위한 목표를 세웠었다. 그게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옳지 않는 것일 리가 없지. 그러나, 그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달려가는 건 잘못된 것이 맞다.”

덤덤히 말을 이어나가는 오수의 모습은 에인로가드에서 학생들이나 괴롭히는 괴팍한 교장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려도 무방한 대마법사의 분위기였다. 이한은 오수가 명예욕이 바라던 것과 젊은 왕자의 초상화가 바라던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단정지은 것에 조금 반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꺼내거나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오수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경험을 토대로 한 결과물이었을 테니까. 그것은 올바른 이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자는 그것을 모르는 자와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적당한 업적과 명예를 얻는 것은 나도 바라는 일이다. 제자의 성취가 높아지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겠느냐?”

“…….”

“내가 네가 평범한 학생의 생활을 겪어보길 바라게 된 건, 네가 그것들의 헛된 이상에 동화되어 부담감에 눌리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결국 자신의 이상은 이루어지기 힘들며,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것이라 깨달은 오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세상에는 적당한 고통이 필요했지, 과한 고통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대륙의 인간들은 서로를 증오하며 뜯어먹기에 바빴고…. 그에 오수가 고뇌하며 고른 건 하나였다. 아예 완벽한 통치자를 위에 올려놓자고. 그리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인재들을 키워, 대륙 위에 계속해서 피어오를 고통을 가라앉히자고.

작금의 제국과 에인로가드가 오수가 선택한 새로운 방향성 그 자체였다. 허무맹랭한 비현실적인 이상은 접어두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을 새로이 품었다.

“사실 그러한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건 자신이 타인과는 다르다는 인지를 해야지만 가능하다. 왜인줄 아느냐?”

“…음. 나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입니까?”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감이라 해야 더 정확하겠구나. 다른 인간들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저들은 못하겠으나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오만함으로 인해 생겨난 이상이지. 저들이 가엾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이타심을 가질 수 있었을 거였고.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이어도, 결국 그들 또한 자신이 구원할 존재 중 일부이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누구보다 오만했고,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다. 누구보다 울부짖는 대륙을 보며 통탄스러웠으며 누구보다 보다 더 나은 세계가 되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그런 이상을 품을 수 있었다고, 오수는 이한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네가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 세계를 위한다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 나아가는 선구자가 되길 바라지 않아. 대의를 품은 것들은 전부 자신을 일부 포기하거나 전부 포기해야하지. 잘 듣거라, 이한.”

“…예.”

“난 네가 그저 이한 워다나즈로서 살아가길 바라고 있다. 네게 따라붙을 칭호는 그저 마령관의 후계자 정도면 충분해.”

이한은 오수가 자신을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수가 말한 말들을 속으로 곱씹어보느라 바빴다. 이한이 만약, 오수의 입장에서…. 오수와 비슷한 일을 겪어온 사람이라면. 그래, 자신도 자신의 제자가 자신이 겪어온 일을 고스란히 겪기를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고통밖에 없는 길이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자신에게 독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수의 말이 끝나고, 그의 말을 곱씹는 것도 끝내자 이한은 다시금 자신의 볼 수 없는 스승들을 떠올렸다. 만약 그들이 지금의 오수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그들도 본체와 같은 의견이었을까? 그러다 이한이 고개를 들어 오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확신했다. 그 두 분은 오수와 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고 해도…. 행동은 다를 것이라고.

그래. 저게 어떻게 제자를 보는 스승의 눈이란 말인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 이해했습니다.”

“오. 정말이냐?”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시죠.”

“그래, 그래. 정말로 이해했다면 길게 말해준 보람이 있구나.”

오수는 이한을 바라보고, 이한은 오수를 바라본다. 이한은 자신의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적대를 구별할 수 있으면 어지간하면 호감도 구별할 수 있어서…. 이한은 오수의 시선 속에 담긴 염려를 읽었다. 이한을 걱정하는 감정을 피울 수 있게 만든 감정의 근원을 읽었다. 애정, 혹은 애착. 어느 쪽이든 애愛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상대방이 무사하길 바라는 감정은 애초에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수가 갖고 있는 건 이한의 보지 못하는 두 스승이 이한을 바라보던 것과는 결을 달리했다. 보다 더 순수하고, 더 깊은 무언가다.

물론 저것이 언제부터 해골 교장의 안에서 피어난 것인지는 이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오수 본인조차 정확한 시기를 헤아릴 수 없을 거였다. 다만 이한은, 여전히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는 오수의 영혼을 보며 지금 그가 한 말들은 모두 진심이겠거니 생각했다. 이한이 직접 보고 모아온 사례들을 보자면 거짓을 말하는 영혼의 반응은 조금 더 격동적이고 분위기가 어둡게 침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한은 자신의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세계에 태어나면서 가족으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에게서 받는 애정이 아닌, 완전히 타인에게서 받는 애정이란…조금 묘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답할 수 있는 건 답해주마.”

이한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본 것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오랜 세월의 지혜가 쌓인 녹색의 눈에는 단 한 사람만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분명, 학교에서는 저런 눈을 본 기억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숨기고 다니셨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그렇게 능숙하게 숨길 수가 있나? 그게 가능하니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건가? 이한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막상 질문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이한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래는, 이한은 그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다시, 좀 더 세세하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의 오수의 표정은 지금과 사뭇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후회와 걱정이 조금 더 많이 녹아들었던 낯이었다. 지금처럼 즐거움과 애정을 한껏 담은 낯이 아니라.

이한은 지금 자신의 질문이 일종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어보느냐, 묻지 않느냐. 만약 묻지 않는다면 오수는 오늘 보여준 모습을 다시는 이한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한이 시약까지 만들어가며 지금의 자리를, 분위기를 만든 이유는 전부 ‘당신이 보여주었던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하다’였으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의 질문은 결국 저걸 내포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수가 더이상 헷갈리지도 못하게끔 먼저 답을 내보였으니, 이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졌다. 저 애정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교장 선생님께서는.”

그러나 본래 애정이라는 것은 탐하고 탐하여도 계속해서 갈구하게 되는 중독성이 강한 무형의 마약과도 같아서….

“저를 좋아하십니까?”

적어도 이한이 그걸 거부할 일은 없었다.

이한의 질문을 받은 오수는 잠시 침묵했다. 오수의 눈이 이한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답을 이미 반 확신한 표정, 그런데 조금 긴장이 된 듯이 힘이 들어간 듯한 어깨. 이미 이한 앞에 놓인 접시에는 다과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찻주전자에 든 내용물 또한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였다. 오수가 턱을 괴며 이한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글쎄.”

오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애정에 약한 이한이 자신이 가진 본인을 향한 감정을 확인한다면, 확인하게 된 순간부터 이한은 애정을 눈으로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못 본 척, 모르는 척 눈 감을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오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날, 그 대화로 자신이 이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각한 오수는 그 이후로 이한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산 인외의 감정이 필멸자에게 좋게 작용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제자에게 영향을 끼칠 거라 오수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름 경고도 해주었다. 더 들추고 싶냐고. 단순히 호기심으로 그러는 것이라면, 알게 된 이후에는 다신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선택하라고. 그러나 이한은 오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애정에 약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스승이라 여겼던 이들이 두 번이나 자신의 곁을 떠난 것으로 인해 마음이 힘들어서, 그때의 감정의 편린조차 무의식적으로 기껍게 여긴 건지….

“네가 안전하길 바라고. 마법을 수련한다면 언제든 사고를 수습할 수 있도록 내 시야 범위 안에서만 했으면 하며.”

“…….”

“네 안위가 보장된다는 전제 하에 하고 싶은 것을 어지간하면 전부 지지해주고 싶구나. 무엇보다….”

아, 최소한으로나마 유지되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군. 오수가 이한의 표정을 보며 유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편하게 웃었으면 한다.”

“그….”

“이렇게 바라게 된 이유가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라면, 그래. 나는 너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한은 입술만 연신 달짝였다. 뭐라 말을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막상 본인에게서 직접 듣는 확답을 들으니,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싫은 건 또 아니었다. 싫은 건 아닌데…. 근데, 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이한의 표정이 꽤 우습게 일그러졌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구별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을 인지하고 수습할 여력도 없었다. 이한에게는…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못난 스승은 그런 제자의 사정을 대충이나마 눈치채고 있으면서 이한이 제정신을 금방 차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좋아한다, 이한 워다나즈.”

결정타였다…….

이한은 결국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복잡미묘하면서도 결코 싫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다고 하기에는 분위기와 당장의 감정에 휩쓸려 답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한은 우선…. 아무런 말이나 내뱉기로 했다.

“…여태껏 어떻게 숨기고 계셨습니까?”

“네 녀석이 이렇게 제정신을 못 차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숨긴 거지. 네 스승의 넓은 아량에 감탄해도 좋다.”

“그으…예.”

평소 같았으면 이상한 소리하지 말라며 했을 텐데, 간단하게 대꾸하는 걸로 끝내는 걸 보니 아직도 정신적인 충격이 있나보군. 오수는 이한의 반응을 보며 그냥 즐겼다. 이한은 눈에 보이는 오수의 영혼이 알려주는 참과 거짓에…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저 사람, 자신이 마신 시약의 종류를 알고 그냥 계속 진실만 내뱉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는 모습이 또, 상당히 얄미웠는데…이한은 도저히 그 얼굴에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진 않겠으나…. 대신 돌이킬 수 없게 만들 테니 말이다.’

어째서 지금 그 말이 귓가에 맴도는 건지. 이한은 겨울에, 심지어 실외 정원에 있었음에도 어쩐지 낯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그런 말을 대놓고 들으면 낯부끄러워 당황할 거였다. 이한은 장담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싫으냐?”

“그건, 그.”

“싫을 수도 있지.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니 신경쓰지 말아라.”

“예에…….”

오수는 이한의 반응을 보며 하하, 소리내 웃었다. 손을 가볍게 휘둘러 아공간에서 찻잎과 찻주전자, 그리고 가볍게 먹기 좋은 디저트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찻주전자에 담고, 찻잎을 찻주전자 안에 있는 채망에 넣어 불 마법을 응용한 것으로 차를 우려냈다. 순식간에 다시 정리가 된 티테이블에 이한은 오수가 마법으로 따라주는 차를 얌전히 받아마셨다.

“난 분명 두 번은 말렸다, 이한.”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시네요….”

“이름으로 부르고 싶으니 부르지.”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예전부터 어른의 말은 유의깊게 들어서 나쁠 건 없다더니…. …그래도 그렇게 싫지는 않아서 상관 없나. 이한은 자신이 준비한 차와는 다른 맛의 차를 호록호록 마시면서 오수의 시선을 피했다. 손으로 오수가 꺼낸 다과를 집어 오독오독 잘만 베어먹기도 했다.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교장 선생님도 딱히…대답을 바라진 않으시는 것 같고. 이한에게 있어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오수가 이한에게 대답을 바라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된 이상 이한을 꼬실 자신이 100%였기 때문이었지만, 이한은 그걸 알지 못했다. 오수가 자신을 겨울 방학 내내 온갖 사유를 들어서 저택에 묶어둘 거라는 것도, 이 유치한 리치의 사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행동들을 미래의 자신이 전부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지금의 이한은…전혀 알지 못했다.

정말 모르는 게 약이었다는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글을 안 쓴지 너무 오래되어서 손도 풀 겸….

단편을 써봤습니다.

정주행도 해서 제대로 캐해 잡아야 하는데 11만원 장르를 언제 다시 정주행을 하죠…?

아득해져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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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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