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유료

카타르시스

살인, 전투, 흡혈 소재 주의

주절주절 by Ζu
43
1
0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쪽이 혼자만 아니었더라면 차라리 전쟁에 가까울 것이다. 볼라디 배그렉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즐거워한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혈향이 그의 코를 간지럽힌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훔쳐 핥는다. 엘프 혼혈이었나. 그가 생각한다. 그 엘프. 차림으로 보면 그리 낮은 위치는 아니었을 텐데. 영양이 부족해 밍밍한 피라. 교란을 위한 옷차림인지, 적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은지 확인이 필요하다.

볼라디 배그렉이 바닥에 쓰러진 적 하나를 집어 든다. 숨이 아직 붙어있군.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기계적 움직임이 이어진다. 옷차림을 확인하고, 마법의 흔적을 살핀다. 목 아래쪽에 구멍 두 개가 뚫린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다. 뱀파이어는 더운 숨을 내뱉는다. 아, 비리다. 폐허의 땅 위에 살아남은 뱀파이어가 생존자의 숨통을 끊는다.

피에는 온갖 정보가 담겨있다. 영양 상태부터 당시의 기분까지 모든 것이.

두려움? 원치 않은 전투였나. 겁에 질렸다.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군. 이 일대의 곡식이 씨가 말랐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죽어 나자빠진 적군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적진을 파악한다. 오늘의 전투를 복기하기 위해, 내일의 전투를 위해. 그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난다. 적의 규모가 상당히 줄었다. 변수만 없다면 내일 안으로 소탕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피에서 느껴진 희망의 감정이 의아하다. 지원군이라도 불렀나. 그들의 실력이 이 무리와 비슷하다면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볼라디 배그렉은 노련한 전투마법사인 만큼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혹시나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 팔 전체에 마법진을 축장시켰다. 마력 회복 물약을 품에 잔뜩 넣어둔다. 잘 때조차도 지팡이를 쥐고 긴장을 놓지 않는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에 볼라디가 눈을 떴다. 적군인가. 투명 마법을 건 그가 기척을 지우고 몸을 숨겼다.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일곱 명. 아니, 여덟 명. 멍청한 놈이 일곱 추가되었고 조금 까다로운 놈이 하나 합류했다. 시신을 수습 중인가. 남은 적군의 반이 나와 그들과 폐허를 돌아다닌다.

짧으면 반 시간, 길면 두 시간 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기습할 모양이군. 일방적인 학살은 재미없지. 볼라디 배그렉이 웃었다. 귀에 달린 귀걸이가 조용히 흔들린다. 허리에 레이피어 한 자루를 차고 품에는 물약들을 넣은 그가 임시로 세운 천막에서 빠져나갔다.

한 시간 뒤, 볼라디의 예상대로 하나의 무리가 그의 천막을 습격했다. 멍청한 놈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던 배그렉이 자신의 분신과 싸우는 그들을 비웃었다. 천막이 무너지고 그의 분신이 마법을 흩뿌리자, 놈들이 스크롤을 찢어 악마를 소환했다. 지켜보던 배그렉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저건 좀 흥미롭군.

분신은 분신인 만큼 본체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회복력이 느리고 마법의 시전 속도가 살짝 떨어졌지만, 놈들은 저 빌어먹을 뱀파이어가 드디어 지쳤다고 생각할 뿐, 의심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실력자가 왔는데 몸은 풀어줘야겠지. 배그렉이 분신을 떨어뜨렸다. 놈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마력 억제 수갑을 채우고, 은탄으로 심장을 관통시켰다. 드디어 싸움이 끝났다는 생각에 놈들이 잔뜩 방심하자 볼라디 배그렉은 위력을 뺀 마력탄을 쏘았다. 무리 중 일부가 쓰러지고, 일부가 비틀거렸다.

“속임수다!”

둔감하군. 사라진 분신을 보고서야 알아채다니. 배그렉은 혀를 차며 모습을 드러냈다. 분신에게 은탄을 쏜 놈이 허둥대며 급하게 총을 겨눴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가까이 접근하면 오히려 저격이 어렵지.

볼라디 배그렉의 전투는 충분히 멀리서 감상하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그를 상대하는 적들은 죽을 맛이겠으나. 레이피어를 파트너 삼아 휘두르고, 비명을 음악 삼아 박자에 맞춰 마법을 시전했다. 위로 솟구치는 피는 붉은 분수와도 같았으며 급소를 노리고 반짝이는 마법이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았다.

새벽에 봐 두었던 놈이 혼자 남자 배그렉은 공격을 멈췄다. 그에게 반격해 볼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겁에 질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실망한 배그렉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나를 몰랐나.”

“…….”

“전투를 많이 겪은 손이군.”

“…….”

“내가 두려운가?”

“…….”

“이럴 거면 왜 전투에 참여했지? 내가 널 살려둔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따분하군. 무기를 줍도록. 날 공격해라.”

귓가에 속삭이던 배그렉이 뒤로 물러나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상대가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총을 주워 배그렉을 겨눴다. 차가운 인상의 뱀파이어는 몸을 틀어 어깨에 은탄을 맞아주었다. 심장을 저격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상처가 회복되기 전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은 조금 불편할 터. 그래서 배그렉은 근접전을 택했다. 상처 입은 불리한 상황에서 마법 없이 주먹과 발을 내지르는 육탄전. 간만에 무료함이 가시고 상쾌해지는 듯했으나 저격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회복했던 상대가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아, 지루하다.

질려버린 볼라디는 망설임 없이 놈의 목을 찔러 생명을 빼앗았다.

떠오르는 해가 눈 부시다. 북동부에 반마법주의자 무리가 나타났다 했나. 좋아. 이번엔 그쪽으로 가지. 그들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군.

손에 묻은 피를 핥아 마시던 배그렉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언제나 이 권태가 해소되길 바란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