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유료

워다나즈.

사망 소재 주의.

주절주절 by Ζ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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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 친애하는 배그렉 교수님께.


전쟁이 일어났다. 제국에서는 드문 일이다.


오수 고나달테스와 볼라디 배그렉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내년 초여름까진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워다나즈는.

“출정 전날 강의를 마치고 기말고사 대체 시험을 보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따라오려고 하면 막아주십시오.”

……. 알겠소. 미리 알면 훼방 놓을지도 모르니 출전 전날까진 숨기고 계시오.

“알겠습니다.”


볼라디의 마지막 강의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시험뿐이었으므로, 볼라디 교수는 강의실을 나서려는 이한을 불러세웠다.

“워다나즈. 잠시 기다려라.”

“예?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아니. 내 강의는 이번 강의가 마지막이다. 기말고사를 못 보게 되었으니 미리 시험을 봐야겠군. 준비.”

“예?”

이한은 당황스러웠지만 지팡이를 겨누고 볼라디 교수의 공격을 열심히 막아냈다. 출전 준비로-이한은 전혀 몰랐지만- 한층 더 매서워진 공격 때문에 이한은 거의 죽을 맛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온갖 원소 화살들과 쉴 새 없이 뒤틀리는 공간. 겨우 시험을 끝낸 이한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가지에 A+를 기록해 준 볼라디 교수가 이한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올해도 가르칠 수 있어 즐거웠다. 내년에 보지.”

“예? 교수님, 저 내년엔 졸업,”

“서북부에 전쟁이 발발해 출전하게 되었다. 강의는 걱정할 것 없다. 교장 선생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쳤으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 싶지만, 규모를 보아하니 빨라야 내년 초여름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군. 출정은 내일 오전 9시다. 따라오지 말도록.”

“교수님!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전날 통보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미리 말했다면 따라오려고 할 것 같아서. 아닌가?”

“그래도 작별할 시간은 주셔야지요! 너무하십니다!”

“알겠다. 대신 내일까진 함께 있지.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겠다. 다음이 잉걸델 교수 강의지.”

“출정을 미룰 수는 없습니까?”

“없다.”

“……. 알겠습니다. 가시죠.”

잉걸델 교수는 이한과 동행한 뱀파이어 교수를 보고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볼라디 교수의 징집은 저번 교직원 회의에서 듣기도 했고, 자신도 의수와 의족이 아니었더라면 징집 대상에 해당했으니까.

배그렉 교수는 강의가 진행되는 내내 말이 없었다.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워다나즈를 빤히 바라볼 뿐, 다른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무리 워다나즈만 보고 있다 해도 다른 교수가 강의에 참관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지젤과 더르규에게 질문을 살짝 떠밀었다. 저렇게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 워다나즈에게 무언가를 묻기란 언제나 겁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모라디. 물어봐도 될 것 같나?”

“……. 아니.”

두 학생은 잉걸델 교수에게 물어보기로 빠르게 이야기를 마쳤다.

“아, 배그렉 교수님은 내일 학교를 나가실 겁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은 알고 있겠지요? 거기 징집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인 만큼 함께 계시려는 것 같군요.”

그리고 빠르게 납득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간다. 당장 본인들도 잉걸델 교수님이 내일 교수직을 내려놓는다고 하면 충격받을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을 강의실에 데리고 다니고, 저런 더러운 표정으로 활보하진 않을 것 같지만……, 이한은 볼라디 교수님의 유일한 제자니까.

지젤과 더르규는 같은 탑 학생들의 입을 막았다. 오늘과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워다나즈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배그렉 교수는 정말 워다나즈의 모든 일정을 함께 소화했다.

학생들은 모두가 부담스러워했지만, 말을 할 수 없었고, 교수들은 배그렉 교수의 징집을 알고 있었기에 이한을 이해했다.

워다나즈가 강의실에 들어가다 말고 몸을 휙 돌려 배그렉 교수를 바라보았다.

“안 가시면 안 됩니까?”

“명령이다.”

“황실로 투서를 보낼 겁니다.”

“황제께서 판단하신 일이지.”

“그럼 따라가겠습니다.”

“허락하지 않겠다.”

“제가 멋대로 가는 것까진 막으실 수 없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했다.”

강의실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워다나즈는 입술을 꽉 물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돌아서 자리에 앉았다.

시공간 마법 수업을 위해 들어온 가르시아 교수는 기다리는 사람이 둘이란 것을 보고 놀랐다가 한 사람의 정체를 깨닫고 납득했다. 그리고 칠판에 글씨를 쓰고 도로 나가버렸다.

휴강

“교수님, 잠시 여기에서 기다리십시오. 교수님! 가르시아 교수님!”

이한은 가르시아를 쫓아 나갔다. 왜 하필 오늘 휴강이란 말인가? 공부를 하며 상념을 몰아내기에도 부족할 판에.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켰다.

“이한 학생, 배그렉 교수님께 돌아가 보세요. 내일 출정이시잖아요. 지금 안 보면 그동안 그리울 텐데, 괜찮겠어요?”

“……. 교수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서요.”

떠밀리다시피 강의실로 돌아온 이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배그렉 교수의 곁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볼라디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워다나즈. 다시 말하지만 따라오지 마라.”

“안 갑니다.”

“음.”

“정말 안 갑니다.”

“매주 월요일, 에인로가드로 편지하지. 답장해라.”

“……. 예.”

“아, 그리고 내일 아침 9시 전까지 정문으로 나오도록.”

“교수님.”

“…….”

“무사히 다녀오셔야 합니다.”

“죽지 않겠다. 밤이 늦었군. 그만 들어가지.”


그날 이한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불안감에 잠들 수 없어 뒤척이다 일어나 책을 펼치고, 다시 눕고, 마법진을 살펴보길 반복하다 보니 날이 밝아버렸다. 이한은 벌떡 일어났다. 한숨도 못 잔 덕분에 좀 피곤하긴 했어도 밤을 새우는 일이라면 시험 기간에 숱하게 해 온 일이라 자신 있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옷의 주름을 깔끔하게 펴고, 신발에 광을 낸 이한은 거울을 보고 잠시 머쓱해졌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올해 교수님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인데, 이럴 수도 있지.

‘9시 출정이라 하셨지. 두 시간이나 일찍 나온 건 역시 너무했나?’

오전 7시. 정문으로 나온 이한이 볼라디 배그렉을 기다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역시 조금 뒤에 나와야겠군. 도로 들어가 복장을 다시 점검하려던 이한의 눈에 볼라디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은 볼라디 배그렉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사지로 가신다는데 기분이 좋겠습니까.”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워다나즈, 손을 내밀어 보도록.”

그게 걱정하는 제자 앞에서 할 말인가? 살짝 화가 날 뻔했지만 떠나야 한다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망설이던 이한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볼라디의 손에는 팔찌 하나가 들려있었다. 출전 준비로 상처투성이인 손이 마법 연습으로 생채기 난 손을 잡아 올렸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손목에 조심히 팔찌를 채워주었다. 팔찌는 이한의 손목에 딱 맞는 두께와 길이를 가져 착용하기 불편하지도 않았다.

‘뱀파이어면서 안 어울리게 은팔찌를 만드셨네. 이 보석은 루비 같군?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티팩트 같은데, 설마 교수님이 직접 만드셨나?’

“차폐와 방어 마법이 깃든 아티팩트다. 그동안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하지만, 네가 도전을 꺼리는 성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이게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할 소리던가? 조금 전 억지로 삼켰던 감정이 뱃속에서 뜨겁게 끓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한이 고개를 숙이고 팔찌를 감쌌다.

“교수님.”

“그래, 워다나즈.”

“기다리겠습니다.”

“짐을 가지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가겠나.”

“……. 예.”

배그렉 교수의 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마력 회복 물약과 인공 혈액 약병이 부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한이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배그렉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차림이었다. 장갑과 부츠는 그대로였으나 흰 셔츠와 베스트 대신 검은색 방검 셔츠가 무광택의 두꺼운 가죽 바지와 어우러져 상당히 다른 느낌을 냈다.

망토를 들고나온 배그렉은 무기를 두르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엔 익숙한 레이피어와 지팡이가 부러질 것을 대비해 챙긴 서브 지팡이 하나가 매달렸다. 어깨와 허리에 대각선으로 착용한 벨트에는 단도 몇 자루가 꽂혀 있었다. 갖가지 시약을 몸 이곳저곳에 숨긴 배그렉이 물약과 약병이 든 가방을 허리에 밀착시켰다.

마지막으로 방어 아티팩트 망토를 두른 배그렉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배웅할 건가.”

“배웅하겠습니다.”

이한의 어깨를 두드린 배그렉이 강의실을 나서고 이한이 그 뒤를 따랐다.

8시 40분. 몇몇 교수들이 나와 배그렉과 인사를 나누었다. 사교성 없는 볼라디 배그렉이었기 때문에 인사는 짧게 끝났다. 배그렉이 워다나즈를 찾았다.

“워다나즈. 되도록 모험에 뛰어들지 말고 에인로가드 안에 있도록.”

“안 뛰어듭니다. 교수님이나 멀쩡히 다녀오십시오.”

이한이 항변했지만 배그렉은 무시했다.

“부탁드립니다, 고나달테스 님.”

그러겠소. 무사히 돌아오시오.

“다녀와, 볼라디.”

“배그렉 교수님, 무사하세요.”

“예.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뱀파이어 마법사는 에인로가드를 떠났다.


이한은 갑자기 비어버린 강의 시간이 어색했다.

‘배그렉 교수님은 그렇게 쉽게 죽을 마법사가 아니지. 절대. 그렇지.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전투 강의 훈련을 위해 지하 1층 배그렉 교수의 강의실로 향하던 이한이 걱정을 그만두기로 했다. 배그렉 교수님의 강의가 중단되어 비어버린 시간은 그대로 전투 마법 강의 시간으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월요일마다 편지를 받아 답장을 쓰고, 강의 하나가 자습으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이한의 생활은 배그렉 교수가 출전하기 전과 놀랄 만큼 똑같았다.


워다나즈.

전장에 도착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아직 위험한 일을 저지르진 않았나. 얌전히 있도록.

배그렉.

워다나즈.

에인로가드 밖으로 나가는 일은 당분간 자제해라. 적이 몇 이탈했다. 단순 탈영이 아닌 도시로의 습격 같으니 고나달테스에게 알리도록.

배그렉.

워다나즈.

다른 강의는 잘 따라가고 있나. 배운 내용을 적어 답신하면 그것들을 연계한 전투 마법을 알려주겠다. 서면으로 강의를 대체하지.

배그렉.


볼라디의 짤막한 안부 글에선 전투 상황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다행히 글 외에도 단서가 되는 것이 있었는데, 종이의 상태부터 핏자국, 필체 등이 그런 것이었다.

초반의 글씨체는 배그렉 교수의 저서와 같은 수준의 필체였다면 후반으로 올수록 다급하게 흘려 쓴 듯한 글씨가 되어갔고, 종이의 끄트머리가 구겨지거나 찢긴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핏자국은……, 편지에 묻은 것이 적의 피인지 교수님의 피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지만, 글씨체가 뭉개지면 뭉개질수록 핏자국이 더욱 많아지는 것으로 봐서는 좋지 않은 징조라고 생각되었다.

이한은 볼라디의 편지에 적힌 내용을 성실히 따르고 있었다. 강의 내용을 담은 답장도 꼬박꼬박 적어 보내고, 교장에게 알리라는 것도 바로 알렸다. 심지어 에인로가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자제할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후배들까지 단속할 지경이었다.

배그렉은 편지에 자신의 안부를 조금씩이나마 담아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 대한 내용은 사라지고 대체 강의록만 적혀오기 시작했다. 이한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배그렉 교수의 성격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편도 아니시고, 할 말이 다 떨어지셨으면 강의록만 적어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피에 젖은 편지 받아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저번에 피로 푹 젖은 편지를 받고 걱정되는 바람에 교장에게 가져갔더니 뭐라 그랬던가. 이거 배그렉 교수 피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경악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런 것으로 걱정하는 것은 아마추어 같은 일이지.

진정이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한은 침착해지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겨울이 되고, 이한이 피 묻은 편지에 정말 익숙해지기 시작할 즈음 배그렉의 편지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배그렉 교수는 글을 쓰다 일어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글자의 선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데, 요즘 오는 편지는 자꾸 쓰다 말고 다시 이어 쓴 것처럼 뚝뚝 끊겨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잉크가 과하게 튄 흔적도 보이고, 쓰던 단어를 지운 자국도 많이 보였다.

이한은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문제가 생겼을까 싶은 이한은 편지를 들고 교장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 배그렉 교수님의 편지가 이상합니다.”

그거 배그렉 교수 피 아니라니……?

“글씨가 이상한 겁니다.”

잠깐만. 이리 줘 봐라.

고나달테스는 배그렉의 편지를 뺏다시피 가져갔다. 그가 놀란 이유는 편지에 묻어있는 피 때문이었다.

이 뱀파이어는 피 흘리며 싸울 마법사가 절대 아닌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고나달테스는 워다나즈 몰래 데스 나이트들을 지원군으로 보낸 뒤, 이한을 안심시켰다.

적들이 마지막 발악 중인가 보다. 바빠지니 편지를 쭉 이어쓰기 힘든 거지. 너무 걱정 마라. 초여름에 돌아온다고 했잖느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말입니다……. 교수님이 돌아가시는 꿈을 꾸기도 하고.”

너 대체 무슨 개꿈을 꾼 거냐? 배그렉 교수가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아니니 안심하라니까. 아니, 그것보다 너는 이 와중에도 배그렉 교수에게 배우고 싶은 거냐? 글씨보다 내용이 더 놀랍다.

“아니, 교수님이 먼저 제안하신 겁니다.”

가서 여기 적힌 마법이나 익혀라. 걱정할 시간에 익혔으면 벌써 다 익혔겠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마법에 미친 것도 아닌데. 억울해진 이한은 투덜거리다 편지를 들여다보고 다시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렇게 빨리 쫓아낼 이유가 있나?


“크라어 교수님, 혹시 내년 초여름 일을 예지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 정도는 네 마법으로도 충분하지 않냐……?”

파셀레트 교수는 다른 인격들을 불렀다. 예지 마법이 틀릴 경우 다른 인격의 핑계를 대기 위해서였다.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라그린데 교수님, 뱀파이어를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상처 입은 뱀파이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알카시스 교수는 황당했다. 반불사의 몸이 상처 입으려면 당장 죽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어야 하는데, 그런 상처는 치료가 불가했다.

“우레걸음 교수님, 신체 회복의 물약은 꼭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텃밭……,”

“배그렉 교수가 죽을 지경이면 그냥 만들어 주지 협박해야 만들어 주겠냐!”

우레걸음 교수는 걱정이 됐다. 상처 입은 뱀파이어가 물약을 먹고 회복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봄이 왔다. 배그렉 교수님 때문만은 아니지만 5학년으로 진학도 했다.

곧 있으면 배그렉 교수가 돌아올 것이다. 이한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다며 조금이나마 안심했다. 이 고통스러운 에인로가드 생활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무언가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일 아니던가.

그리고 편지가 왔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이한.

볼라디 배그렉.

떨리는 필체에 피로 푹 젖은 편지지. 아니, 종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 교수님의 망토 끝부분을 찢어 겨우 써낸 글씨.

편지를 받은 이한은 몹시 놀라 고나달테스를 찾았다.

“교장 선생님! 교수님께 편지가 왔는데 이상합니다!”

왜! 왜! 무슨 일이냐!

고나달테스도 배그렉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데스 나이트도 보낸 것이었고.

이한은 떨리는 손으로 볼라디 교수의 망토 자락을 건네주었다.

…….

“배그렉 교수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전투가 길어진 것뿐이죠?”

…….

“교장 선생님?”

워다나즈.

“…….”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다. 배그렉 교수를 데려올 테니 여기 있어라.

“싫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안 된다. 배그렉 교수가 여기 있으라 했던 말 잊었냐!

“그래도 같이 갈 겁니다. 제 마력이 있으면 찾기도 더 쉽겠죠.”

가르시아 교수! 워다나즈 잡고 있으시오!

“제 교수님입니다! 제가 그분의 유일한 제자라고요!”

“이한 학생, 진정해요!”

워다나즈! 네가 이럴수록 늦어진다!

“배그렉 교수님이 주고 가신 아티팩트도 있으니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같이 갑니다!”

하……. 그럼 내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말거라.

“…….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소. 배그렉 교수만 찾아올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에인로가드 전체에 강력한 방어 마법을 건 고나달테스는 공간 마법을 이용해 전장에 도착했다.

볼라디 교수의 마력을 추적해 보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고나달테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사의 마력 추적이 불가능한 상황은 두 가지. 이미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거나.

고나달테스는 후자이길 바라며 이한의 마력을 빌려 전장을 완전히 덮어버릴 규모의 마법을 펼쳤다.

καταμανθάνω…….

번쩍이는 마력이 제국 서북부를 쓸고 지나갔다.

고나달테스가 녹빛의 눈을 빛냈다.

찾았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전신에 새 피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심장을 뚫어버리는 것.

물론 구멍이 나지 않거나 작은 크기의 구멍이 났다면 뱀파이어는 상처를 금방 수복해 버린다. 죽이기 위해서는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계속 헤집고 있거나, 수복하는 것보다 빠르게 피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커다란 구멍을 뚫어야 했다.


“교수님?”

고나달테스의 마법과 이한의 마력으로 찾은 볼라디 배그렉은 심장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다행히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평소였다면 긋는 순간 나아 버리던 피부의 사소한 외상도 치유되지 않았고, 심장도 뚫린 상태에서 나아지질 않았다.

분노가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핏발 선 눈으로 상처를 노려보던 이한의 몸에서 마력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고나달테스의 마법 안에서 이한의 마력이 폭주했다. 전쟁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날뛰는 마력에 맞아 죽어갔다. 생명력을 빼앗긴 풀이 시들고 전사자의 육신이 빠르게 흙으로 돌아갔다.

고나달테스는 에인로가드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한의 마력이 자신의 마법 밖을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이한의 마력을 느낀 볼라디가 한눈을 떴다. 목 안쪽에 쇳조각을 넣어둔 것처럼 갈라지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한은 볼라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워다나즈?”

이한이 일시적으로 폭주를 멈췄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세요? 에인로가드로 돌아갑시다! 교장 선생님!”

“새, 로운 강의는. …, 시작 못 하, 겠군. 가르칠 수……, 있어, 즐거웠다.”

“교수님? 교수님!”

볼라디의 눈이 다시 감겼다. 뱀파이어 마법사는 원래 차가운 편이었기 때문에 죽었는지 기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한은 서둘러 치유를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 사이, 고나달테스가 서둘러 공간을 에인로가드로 옮겼다. 고나달테스와 이한, 볼라디가 도착한 그곳에는 교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를 위해 나와 있던 알카시스 교수와 물약을 만들던 우레걸음 교수가 동작을 멈췄다. 불사의 몸을 가진 배그렉 교수가, 최고의 전투 마법사이던 그 배그렉 교수가 설마 죽어버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뼈가 붙고 근육이 자라나라. 새 피가 공급되고 살이 차올라라. 하하. 왜 안 되지. 교수님. 배그렉 교수님. 배우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

마력의 폭주가 시작될 것을 염려한 고나달테스는 이한에게 마법을 씌워두었다. 반구형의 결계가 이한과 볼라디를 덮었지만, 이한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주문만 외웠다.

이한이 볼라디의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이한은 볼라디의 시신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교장 선생님. 배그렉 교수님이 주무십니다. 마탑으로 모셔야겠습니다.”

뱀파이어의 시신을 안아 든 이한은 조금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폭주를 걱정하는 교수들이 위험하다 판단되면 바로 제지할 생각으로 따라갔다.

“교수님.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초여름에 오신다 했는데 아직 봄입니다. 저기 보세요. 봄꽃이 아직 피어있잖습니까. 중간고사는 생각해 오셨습니까? 교수님 강의 시간은 비워두었으니 그 시간 그대로 강의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주무시는 거 처음 봅니다.”

들뜬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걸던 이한은 배그렉 교수의 마탑, 그러니까 지하 1층의 강의실 옆방에 도착해서야 말을 멈추었다. 작년 여름, 배그렉 교수의 출정 준비를 도우면서 알게 된 곳이다.

아무 망설임 없이 방에 들어간 이한은 배그렉 교수의 침대 위에 그의 시신을 내려놓고 잠자는 듯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라그린데 교수님? 배그렉 교수님이 좀 다치신 것 같습니다. 치료해 주십시오. 우레걸음 교수님. 치유 물약과 마력 회복 물약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럼 저는 다음 강의를 들으러 가 보겠습니다. 교수님을 부탁드립니다.”

등을 돌리지도 않고 일정한 톤으로 이야기하던 이한이 휙 나가버렸다.

배그렉 교수의 마탑에 남은 교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결론은 하나다.

이한 워다나즈가 미쳤다.


배그렉 교수가 좋아하는 찻잎을 구해다 배그렉이 깨어나면 함께 티타임을 가져 보는 건 어떻겠냐.

고나달테스는 이한에게 여행을 제안했고,

“좋습니다. 대신 교수님이 일어나시면 바로 연락해 주셔야 합니다.”

이한은 고나달테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행을 떠난 이한은 매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에인로가드의 볼라디 배그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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