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9

준비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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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보세요. 저를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모른다니까."

"잉잉! 왜 모른대요?!"

신해량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서지혁이 발로 소파를 팡팡 차며 앙탈을 부렸다. 덩치를 생각 못한 투정에 소파가 지진 난 듯 흔들렸지만, 연하의 남자친구가 찡얼거리든 말든 오랜만에 대바늘을 잡은 신해량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기껏 허벅지를 차지하고 붙어 누웠는데도 관심을 받지 못한 서지혁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제 눈앞에 달랑거리고 있는 양말 파츠를 노려보았다.

부지런히 놀리는 손에서 한 땀 한 땀 만들어지고 있는 양말은 죄가 없었지만,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신해량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서지혁의 눈에는 꼭 양말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제 애인의 얼굴을 가리며 시야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눈길을 독차지 하고 있다니. 양말이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그래봤자 넌 내 발에 신겨질 운명이라고. 아주 엉망진창으로 구멍이 나도록 신어주마.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십쇼. 언제부터인데요? 해저기지에 있을 때죠? 둘이서 영화 봤을 때? 아니면 북카페에서 같이 책 읽었을 때? 그것도 아니면 운동하면서 서로 자세 봐줄 때? 아! 수업할 때다. 그쵸? 아닌가? 그럼 제 방에서 ……악!!"

주절대는 서지혁의 얼굴 위로 대바늘이 꽂힌 양말이 떨어졌다. 이놈의 양말에 자아가 있나? 주인 닮아서 독심술을 해서 나한테 미리 복수를 한 건가? 별안간 벌어진 양말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방심하고 있던 서지혁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눈을 꼭 감고 엄살을 떨고 있으니 커다란 손이 덤덤하게 서지혁의 얼굴을 덮은 양말을 걷어냈다. 슬쩍 눈을 떠 보니 가만히 내려다보는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표정에 서지혁이 배신감을 느끼며 입을 떡 벌렸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더 아프다더니. 양말이 아니라 신해량의 기습이었나?

"이런 미친! 일부러 이런 거죠? 일부러 그랬죠?!"

"실수야."

"실수는 무슨! 당신 뜨개질하는 걸 내가 몇 년을 봤는데, 한 번도 떨어뜨린 적 없었잖아요!"

"그야 그동안은 방해꾼이 없었으니까. 네가 그러고 있어서 팔을 더 높이 들고 있어야 했어. 그러다가 힘이 빠진 거야. 벌써 두 시간째잖아."

"그게 뭐가 무겁다고 두 시간 들고 있었다고 팔에 힘이 빠집니까? 총은 며칠을 들고 있어도 힘 안 빠지더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네가 해봐. 의식적으로 팔을 더 높이 들고 뜨개질하는 게 더 힘들어."

"안 해요!"

얼굴에 나 삐졌다고 대문짝만하게 써둔 주제에 서지혁은 신해량의 다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서지혁을 내려다보던 신해량은 몸을 살짝 숙이고 팔을 뻗어 들고 있던 뜨개질 거리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나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큰 손으로 불만 가득한 서지혁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아니 이 인간이 진짜! 열받은 서지혁이 혀를 낼룸 내밀어 제 얼굴을 가린 손을 핥았고, 신해량은 곧바로 손바닥을 서지혁의 얼굴에 비벼 닦았다. 결국 참지 못한 서지혁이 고개를 저어 손을 떨쳐내고는 몸을 벌떡 일으켜 눈높이가 비슷해진 신해량을 씩씩대며 노려보았다.

서지혁이 입을 열고 불만을 속사포처럼 쏘아대려는 순간, 예상했다는 듯 신해량의 입술이 서지혁의 입을 막았다. 뜬금없는 타이밍의 입막음에 서지혁이 처음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그다음은 잘못을 해놓고 사과도 없이 겨우 뽀뽀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태도에 대한 분노였다. 뭐? 뽀뽀? 지금 장난하나. 겨우 그런 걸로 내 마음을 풀어 보겠다고?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인 줄 알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딱 붙은 두 입술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지혁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화가 나도 연인의 입맞춤을 밀어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애정 표현을 거부당한다면 아무리 신해량이라 해도 의기소침해져 애정을 의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민망함에 그 이후의 스킨십에도 소극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인에게 그렇게 무정하게 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암, 그럼. 서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신해량의 허리를 더듬거리며 안았다. 겨우 뽀뽀 한 번에 화가 다 풀려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고 단지 연하의 귀엽고 섹시하고 잘생긴 쾌남 남자친구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신해량을 위한 거였다. 그런 것치곤 신해량을 잡아먹을 듯이 오물거리는 입술의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었지만.

"배 안 고파?"

"저야 당신 사랑을 배터지게 먹고 있어서 늘 배가 부르죠."

겨우 입맞춤 한 번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린 서지혁이 헤실거리며 신해량의 품에 안겼다. 신해량은 한껏 몸을 구기며 자신의 가슴팍에 비비적거리는 머리통을 안고 토닥였다. 강아지처럼 안겨 오는 서지혁을 보며 픽 웃은 신해량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언제부터 좋아했는지가 그렇게 궁금해?"

"당연하죠."

"너도 모른다며."

"그야 저는 너무 오래 전이기도 하고……. 정신 차려 보니 그러고 있었던 거라.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었구요."

"그래?"

"예. 그러니까 잘 생각 좀 해보세요. 당신도 저를 막 짝사랑하고 그랬던 거죠? 저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몰래 사귀는 상상도 하고 야한 짓도 해보고. 그쵸?"

신해량의 품에서 고개를 든 서지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기대감 가득 찬 두 눈을 마주 바라보던 신해량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엥? 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

"거짓말이죠? 왜요? 어떻게 그래요? 부끄러워서 말 안 하는 거죠?"

눈을 동그랗게 뜬 서지혁이 해대는 질문 공격에도 여전히 미소만 짓던 신해량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 뭐냐구요! 애매한 반응에 결국 속이 터진 서지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신해량은 낮은 웃음소리만 내며 웃을 뿐 별말이 없었다.

"속 터지게 하지 말고 자세히 설명 좀 해달라구요."

"언제부터인지 모른다고 했잖아."

"예.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언제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요?"

드디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군 같은 표정을 지은 신해량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너 퇴사한 날."

"예? 아니. 진짜요?"

"그래."

"허."

할말을 잃은 서지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태 아무런 자각도 없다가 내가 고백하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 이 말이지?

"기껏 저 좋아하는 거 알게 됐는데 저는 도망가겠다고 하니 속이 깨나 터졌겠네요."

"알긴 아는군."

"일찍 좀 알지 그랬어요? 몇 년을 붙어살았는데 그걸 이제야 알아요?"

"그러게."

"아니. 영혼 없는 대답 그만하시구요.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데요? 저 태운 헬기 보면서 눈물이라도 좀 흘리셨나? 자면서 제 꿈이라도 꿨어요? 지혁이한테 더 잘해줄걸 하면서 후회도 했습니까?"

"안 했어."

"에라이!"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 이미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니. 혼자 참 편했구만. 아니. 진짜 나만 바보 멍청이 된 거 아냐? 머리가 돌아갈수록 억울해서 좀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바로 지난 달에 해버린 짓이 있는 서지혁은 불만으로 튀어나온 입술을 얌전히 집어 넣었다. 서지혁의 생각 회로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신해량도 피식거리며 웃다 놓아둔 대바늘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이 가만히 있으면 심심한가. 얄미운 양말의 귀환에 넣어둔 입술이 다시 삐죽 튀어나온 서지혁이 신해량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투덜거렸다.

"그게 재밌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기 좋아."

"어이가 없네. 남친 옆에 두고 아무 생각 없고 싶습니까? 매너가 왜 그래요? 저는 잡은 물고기다 이거죠?"

"잡은 물고기한테 양말 좀 신겨주겠다는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지?"

"양말이야 저 잡아두기 전에도 떠줬잖아요. 그 양말에 쏟는 시간과 정성 반만이라도 저한테 써보세요."

"너한테 써봤자 양말 한 짝도 안 나오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죠."

"그럼 기분 좋게 해봐."

이렇게 나올 거면서 꼭 그런다니까. 서지혁은 자신 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늘 저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시선을 마주하다 입꼬리를 씰룩 올려 웃었다. 일단 얄미워 죽겠는 양말과 대바늘을 빼앗아 저 멀리 치워두고 신해량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기분 좋게 해준다고 했더니 순순히 자빠지는 꼴이란. 소파에 누워 서지혁을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신해량 특유의 고고한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여간 참 상전이 따로 없으시지. 이미 7년을 그의 밑에서 구른 탓에 그런 태도는 익숙했다.

제 행동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듯한 오만한 눈빛에도 서지혁은 주저 없이 그의 몸을 덮듯이 끌어안았다.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서지혁은 이마를 덮은 까만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고정되지 않은 힘 없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도로 내려오긴 했지만 서지혁은 개의치 않고 시원하게 잘생긴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코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질간질했고 달달한 샴푸향이 사랑스러웠다.

이마와 눈두덩이, 코끝까지 입술 도장을 찍은 뒤 눈을 맞추니 게슴츠레하게 반쯤 가라앉은 시선이 따라붙는다. 덕분에 더 또렷하게 보이는 쌍꺼풀 선과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이 눈에 띄었다. 그 아래에 얌전히 자리한 깊고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최종 종착지인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을 겹쳤다. 서지혁의 입맞춤에 기다렸다는 듯이 신해량이 입을 더욱 벌려왔다. 서지혁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 신해량의 상의를 들어 올리며 가슴께를 더듬기 시작했고 신해량의 손은 위를 향해 서지혁의 뒤통수를 쓸듯이 끌어당겼다. 익숙한 개 취급에 어울려주기로 한 서지혁은 신해량의 입술을 거칠게 핥아 누르며 옷 안쪽의 맨살을 주물렀다. 탄탄하고도 말랑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신해량의 손도 쉬지 않았다. 서지혁의 머리통을 당기며 더욱 가까이 붙이더니 짧은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다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잡기도 했다. 이 인간이 내 머리털을 다 뽑으려 이러나. 덜컥 겁이 난 서지혁은 신해량의 주의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손에 힘도 안 들어갈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서지혁은 두툼한 몸을 더듬던 한쪽 손을 거두어 신해량의 턱을 감싸 쥐었다. 하관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신해량의 입을 더 벌린 다음 고개를 꺾어 좁아터진 입 안쪽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곧바로 서지혁의 목덜미를 집어 당겼다. 진짜 본격적으로 개 취급이시네. 목 가죽이 주욱 늘어나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지만 서지혁은 멈추지 않고 입 속에 얌전히 누워있던 신해량의 혀를 건드렸다. 제 영역까지 마음대로 밀고 들어온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응징하듯 신해량의 혀가 서지혁의 혀를 쳐내며 밀어댔지만 그럴수록 더 자극이 된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축축하고 깊은 곳에서 물기 머금은 혀가 거칠게 닿을수록 서지혁은 머리끝에서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난리를 쳐봐야 기분만 더 좋은데.

자극적인 키스를 하며 깨달은 것이 있는데, 왜 동물들이 새끼 목덜미를 무는 것인지 알 것 같다는 거였다. 목 가죽이 다 늘어날지언정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살면서 목덜미 잡혀본 경험은 없는 것인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 신해량은 여전히 서지혁의 목 가죽을 놓아주지 않고 있지만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안 아프거든요.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더니 숨 쉬는 게 버거워 보여 살짝 몸을 일으켰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해량이 서지혁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신해량은 입 속에 찬 타액을 꿀꺽 삼키고는 붉어진 입술을 벌려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아주 사람 죽일 눈빛이네. 좋으면서 매번 왜 저렇게 내숭을 떠는 건지. 신해량이 정말 싫었으면 가차 없이 자신을 집어 던져버렸을 거라는 것을 아는 서지혁은 오히려 당당했다.

"기분 좋게 하랬지 개처럼 굴어도 된다곤 안 했을 텐데."

"제가 개처럼 구는 게 좋은 거 아니었어요? 그런 취향인 줄 알았는데."

"그런 취향 없어."

거짓말. 맨날 내 머리 쓰다듬고 강아지 닮았다고 했으면서. 자기 취향도 모르는 멍청이 아냐? 이러니 내가 고백해서야 자기 마음을 알게 된 거겠지. 꼭 한 번씩 이렇게 바보 같은 소릴 한다니까. 쯧쯧. 하여간 나 아니면 이 인간이 이렇게 바보 같은 걸 누가 알아주겠어?

"그래서 싫어요?"

"……."

이거 봐. 싫다곤 못하면서.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노려보는 신해량에게 서지혁이 낄낄 웃으면서 치댔다. 그 조차도 밀어내지 못하는 신해량이 결국 서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참 물러터졌다니까.

이러니 내가 버릇이 나빠지지.


"필요한 거 미리 다 챙겨두고 없는 건 메모해둬."

"대충 챙겨두긴 했습니다. 여권이랑 신분증, 지갑, 핸드폰만 잘 챙기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거기서 사도 되고 여차하면 대한도 가서 훔쳐 오죠 뭐."

서지혁의 방 한복판에 커다란 캐리어가 펼쳐졌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하와이 여행을 위한 짐을 챙기기 위해 서지혁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가장 부피가 큰 옷부터 깔끔하게 개어 넣고 속옷을 정리하고 있으니 미리 짐을 다 챙겨둔 신해량이 서지혁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신해량은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서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 흥미를 잃은 것인지 침대 옆 협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탠드 조명 옆에 A5 크기 정도 되는 앨범이 놓여 있었는데, 커버를 열어보니 신해량의 화보 사진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앨범을 몇 장 넘겨보던 신해량은 자신의 사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흥미를 잃었는지 마지막 페이지만 확인해보고 다시 협탁 위에 놓아두었다.

꽤 심심해 보이는 신해량을 보며 낄낄 웃은 서지혁이 협탁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그러자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 손에 들린 수첩을 따라 움직였다. 수첩과 볼펜이 캐리어 안쪽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본 신해량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뭐야?"

"이거요? 아. 어……. 제 서랍 위를 채워줄 추억 정도?"

"추억?"

서지혁의 애매한 대답에 신해량의 시선이 다시 서랍을 향했다. 서랍을 채운다면서 왜 그걸 빼서 캐리어에 넣은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몇 초 지나자 신해량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모양인지 또 다른 질문이 서지혁을 향했다.

"일기 같은 건가."

"비슷해요."

또 애매한 대답에 신해량의 표정이 뚱해졌다. 저 양반은 자기가 저런 표정 짓는 거 죽어도 모르겠지. 자각 없는 귀여운 짓에 득을 보는 건 서지혁뿐이었다. 기분 좋은 서지혁은 패드와 잡동사니 몇 개를 더 챙기고는 바닥에 앉아 신해량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서지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당신한테 세 칸짜리 서랍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십쇼."

"서랍?"

"예. 그 서랍에는 기억을 담을 수 있어요.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억, 잊고 싶을 만큼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이요. 이 기억을 서랍 속에 정리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심리테스트 같은 거야?"

"저랑 똑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정답은 없으니까 편히 생각해 보십쇼."

서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신해량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서지혁은 옷장에서 작은 가방도 하나 꺼내와 지갑과 여권을 챙겨 넣었다. 또 뭘 챙겨야 하더라. 벌써 반 넘게 찬 캐리어 가방을 노려보고 있으니 생각을 끝낸 것인지 신해량의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그냥 칸마다 종류별로 정리할 거 같은데."

"오. 첫 번째 서랍엔 행복한 기억, 두 번째 서랍엔 보통의 기억, 세 번째 서랍에 슬픈 기억. 뭐 이렇게요?"

"응."

"저도 그렇게 답했었는데! 당신도 종류별로 물건을 정리하는 타입이네요."

"그게 심리테스트 결과야?"

"아니라니까요. 또 똑같은 소릴 하네."

신해량이라면 엄청 특별하고 기발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했던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서지혁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이래야 인간적이지. 서지혁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으니 신해량이 발로 서지혁의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 당장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세 번째 서랍을 열 때 마음이 힘들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추천받았거든요."

서지혁은 상담을 받았던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서랍에 세 가지 기억을 모두 넣어 정리하는 것. 좋은 기억을 가장 위쪽에 쌓아두어 어떤 서랍을 열더라도 행복한 기억이 먼저 보이게 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서지혁의 설명을 듣던 신해량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도 그 위에 좋은 추억을 계속 쌓아 올리는 거죠. 그럼 어느 서랍을 열더라도 마음이 아프진 않겠죠. 저한테는 그게 수첩입니다. 좋은 일만 기록하고 있거든요."

"응. 좋은 방법이네."

"그쵸? 그럼 당신도 이렇게 정리해볼래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신해량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 왜? 서지혁이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신해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울 전용 서랍을 그대로 둔다구요? 그 서랍을 열 때마다 슬플 텐데요?"

"슬퍼하면 왜 안 되는 거지?"

"예?"

어……. 그건 예상 못한 질문인데. 그야, 슬픈 건 좋지 않은 감정이니까. 이왕이면 행복하게 더 좋지 않나? 서지혁이 혼란스러운 듯 입을 뗐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침대에서 내려와 서지혁의 앞에 앉아 펼쳐진 캐리어를 닫았다.

"난 슬프고 싶을 때 슬플 거야. 행복하고 싶을 때 행복할 거고. 그걸 섞어 두고 싶진 않아. 슬프다고 해서 모두 좋지 않은 기억인 것도 아니야. 그중에서도 분명 소중한 게 있으니까."

신해량의 대답을 들은 서지혁은 입을 잠시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또한 맞는 이야기였다. 서지혁은 상담사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사람들에겐 제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죠.' 어떤 서랍을 열어도 아파하지 않는 사람에겐 필요 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강하고 건강한 거 같아요."

"너도 그래."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처럼 그러지 못하거든요."

"굳이 그래야 할 필요도 없지. 너는 너한테 잘 맞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정답은 없는 거라며."

"그렇죠. 저는 ……당분간은 좋은 것만 보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하자."

신해량은 몸을 일으켜 서지혁의 캐리어를 벽 쪽에 밀어둔 다음 여전히 바닥에 앉아있는 서지혁의 보송한 갈색 머리통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려 웃은 서지혁이 손을 뻗자 신해량이 서지혁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다. 다시 시선의 높이가 비슷해지자 서지혁이 신해량을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고, 그 꼴을 마주한 그의 남자친구는 기꺼이 붕어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서지혁은 침대에 앉아 신해량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신해량이 침대에 앉자 서지혁은 몸을 뒤로 내던지듯 누웠다. 침대에 누워 앉아 있는 신해량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침대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신해량이 서지혁에게 사주었던 '의사가 범인이다' 책이었다.

"이건 읽어봤어?"

"아직 덜 읽었어요. 맨날 당신이랑 붙어서 쪽쪽 대느라."

"아까 뜨개질할 때 방해하지 말고 책이나 읽지 그랬어."

"방해요? 애교나 애정 표현이 아니구요? 너무너무 서운하다 진짜. 양말 털실 날리는 것도 참아가며 누워 있었더니. 남자친구 얼굴에 양말이랑 대바늘을 집어 던지질 않나."

"그건 실수라고 했잖아."

"예이예이 그러시겠죠."

서지혁의 비아냥에 신해량이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차라리 쌍욕을 하지. 세상 모든 것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 보는 눈이 저를 향하니 서지혁은 괜히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눈을 슬쩍 옆으로 굴렸다. 왜 이건 사귀어도 바뀌질 않는 건지. 하여간 내 유전자에 악성 백신을 심어둔 게 틀림 없다니까.

"그래서 아직 누가 범인인지는 모른다는 거지?"

"예엡."

"소원이 별로 간절하진 않은 모양이군."

"그러는 당신은 좀 간절한가 보네요?"

소원 같은 건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양반이 내기를 신경 쓰고 있었다니. 뭔가 바라는 게 있나 싶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니 신해량이 뭘 보냐는 듯이 쳐다본다. 애인이 쳐다보는데 왜 보냐니. 질 수 없어서 이번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노려봤는데 신해량은 신경도 안 쓰고 책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대체 저 인간은 독심술을 어떻게 하는 거지? 뭘 어떻게 쳐다봐도 저 재수 없는 얼굴과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게 없는데. 속은 모르겠고 더럽게 잘생기기만 해서 은근히 더 열받았다.

"진짜 소원이 있어요?"

"글쎄. 말하라면 못할 건 없지."

"뭔데요? 말해봐요."

"내기에 이긴 사람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게으름피운 덕분에 흐지부지됐지만."

"아니. 고작 며칠 지났다고 그래요? 그래도 반은 읽었거든요?! 그럼 뭐 지금 같이 읽어 보든가요."

서지혁의 억울한 말투에 신해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비행기에서 읽어. 어차피 그 시간에 할 것도 없잖아."

"뭐 그렇죠."

"그리고 또."

"또?"

멍청하게 되묻는 말투에 신해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어? ……저 재수 없는 미소는 불안한데. 7년을 구른 짬 빠가 위험을 감지한 게 느껴졌다. 저 작은 입술에서 또 어떤 미친 발언이 나오려나. 서지혁은 숨을 죽이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신해량은 눈을 살짝 올려 뜨고는 서지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신해량은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귀여웠지만 서지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침만 꼴깍 삼켰다.

"어떻게 가질 건데?"

"예……?"

이걸 어디서 들어봤더라? 무척이나 익숙한 질문에 서지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뭘…… 가진다는 건지. 내가 뭘 가지고 싶어 했더라……?

"……."

"……."

"……아. 하. ……씨이벌."

'……제가 감히 당신을 가지고 싶나 봅니다.'

서지혁 인생에 손꼽힐만한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 흑역사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감각을 느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서지혁의 얼굴과 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시발. 그 이야긴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이 인간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은 거지? 왜 그딴 것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뭐 어떻게 가져? 사귀면 이미 가진 거 아닌가? 내가 아직도 못 가졌다고 이 인간을??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건데?!!

서지혁의 내면의 절규마저 읽은 것인지 신해량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도 어딘가 낯익지 않나? 괜히 왼쪽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가린 서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왜 웃어요? 왜 웃는데요?! 왜 웃는 건데?!

데쟈뷰가 느껴지는 외침에도 신해량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 웃지 말라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서지혁이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이 시벌.

망할 인간.

내가 신해량 너 가지고 만다.

욕심을 부리게 만들었으면 당신이 책임도 져야지.

그건 서지혁의 다짐이자 복수였다.


다음화가 드디어 마지막화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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