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1
23년 7월 디페스타 배포본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표지는 펜로즈 삼각형의 전개도에서 가져왔답니다.
“선생, 진지하게 말하는데 다시 생각해봐.”
실제로는 문장의 절반 이상이 '으어우어어' 정도로 들렸지만, 심해의 유일한 치과의사인 박무현은 환자의 으어어 소리만 10년 넘게 들어 온 숙련된 치과의였으므로 되묻지 않고도 제대로 알아들었다. 오늘만 세 번째 듣는 소리기도 했고.
“아무리 사람이 급해도 씬 그 새끼는…….”
“네, 혀 움직이지 마세요.”
환자는 주먹 쥔 손을 허공에 흔들어가며 강하게 어필하려다가 그보다 더 맹렬하게 돌아가는 기구 소리에 주먹 대신 고래 인형을 다급히 쥐었다. 진료가 끝나고 충치와 함께 영혼이 갈려 나간 얼굴이 된 그는 하려던 말도 잊고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나갔지만, 뭐라고 하고 싶었는지는 이미 안다.
아무리 그래도 씬 그 새끼는 아니다. 다시 생각해라.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다. 혹시 그놈한테 약점 잡혔냐. 도박 빚이라도 졌냐. 기타 등등. 박무현은 이미 몇 번이고 들은 말들을 곱씹으며 빽빽하게 들어찬 예약 목록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오늘 아침이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빗발치듯 울리는 환자 예약 알림 소리에 오늘이 해저기지 구강검진의 날이었나, 중앙동 식당에서 특식으로 자갈 조림이라도 나왔나, 아니면 엔지니어 가팀 팀장의 주먹이 열 개로 늘었나……싶었는데.
다 틀렸다. 아니, 조금은 맞았다. 엔지니어 가팀 팀장과 관련 있다는 것만.
허둥지둥 출근해 맞이한 첫 환자는 아침부터 치과에 달려온 사람 같지 않게 흥분으로 잔뜩 고조된 얼굴로 박무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뜯어보며 외쳤다.
“당신이 씬해량 애인이야? 진짜로?”
내가, 신해량의……뭐?
이게 무슨 노을이 옆구리 터지는 소리란 말인가. 오래된 통역기를 탓하기엔 영어로도 그 단어가 확실히 들렸다. 영문 모를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자 급한 환자인 줄 알았던 사람은 ‘뭐야, 아니야? 이상하다. 분명…….’ 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박무현의 전신을 스윽 스캔하고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사라졌다.
그 한 명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다음도 자신의 치아 상태가 아니라 ‘그래서 네가 신해량과 사귀는 게 맞느냐’를 확인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두 번째 환자부터는 일단 체어에 눕혀놓고 스케일링이라도 해서 치실과 함께 돌려보냈다.
대부분은 체어에 눕기 전에 질문의 답을 포기하고 도망가려고 들었지만, 조금 전에 영혼이 갈린 채굴팀 남자처럼 몇몇 용감한 이들은 입을 벌린 상태에서도 꿋꿋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사귄다는 거야, 아니야?
당연히 아니다! 세상에, 입사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인데 사내연애라니?
게다가 신해량의 이름은 환자들에게 지겹게 들었어도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고, 복도나 식당에서 오며 가며 마주칠 때 인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잠깐 본 것으로도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목소리도 좋았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아는 게 없는데. 그런 사람과 무슨 연애란 말인가.
‘그렇게 잘생기면 그냥 스치기만 한 사람하고도 이렇게 소문이 나나? 고생하겠네.’
박무현은 구겨진 노을이를 주무르며 패드를 건드렸다. 반대로 신해량을 찾아가서 야 너 치과의사랑 사귄다며! 그 새낀 좀 아니야! 라고 하는 사람도 많을까? 그렇다면 지금쯤 신해량도 곤란해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만나서 얘기를 해보자.’
박무현의 손가락이 직원 목록에 떠 있는 신해량을 톡, 건드렸다.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해명하는 게 좋을지, 그냥 무시하고 노 코멘트로 내버려 두면 금방 가라앉을지. 소문의 다른 당사자이자 해저기지 생활 선배에게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업무가 끝난 늦은 저녁 백호동 38번 방을 찾아온 신해량은 박무현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좀 더 길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저희에 대해 헛소문 도는 거 들으셨나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신해량 팀장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이걸 어떻게 더 길게 설명하지? 박무현은 눈앞의 거대한 남성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신팀장님과 제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 말에 잘생긴 미간이 와락 구겨지더니 별안간 주위를 매섭게 돌아보았다. 신해량은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작은 방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단숨에 박무현에게 바짝 다가서서는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를 흘려 넣었다.
“……혹시 여기 도청기 같은 게 있습니까?”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황당함이 치솟았다. 도청기? 무슨 소리냐 대체. 놀라 동그래진 눈과 입을 내려다보던 신해량이 말을 이었다.
“무현 씨가 갑자기 저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셔서. 누가 듣고 있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나 싶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왜…….”
“잠깐, 잠깐만요. 뭐가 거짓말입니까?”
“?”
물음표는 내가 띄우고 싶다. 박무현은 이상한 소리만 하는 미남에게서 도망치듯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그럼 뭐, 저희가 사귀는 사이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렇게 덧붙이려던 차에 신해량이 멀어진 한 걸음을 도로 밟으며 말을 막았다.
“예.”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굳어있는 박무현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다.
“제가 당신 애인이잖습니까.”
사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 도 아니고 내가 당신 애인이다, 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주변에 일부러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는 6개월 전부터 제 거였습니다.”
그 ‘주변’에 나도 포함인가? 나한테는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보다……6개월? 신해량의 품에 안겨 입만 뻐끔거리던 박무현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가슴을 밀어냈다. 난 입사 2개월 차라니까!
난 여기에 온 지 2개월밖에 안 됐다. 당신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것도 2개월이 안 되는데 대체 무슨 소리냐. 열심히 반박했지만 돌아온 건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 안쪽을 더듬어 살피는 신해량의 거침없는 손길뿐이었다.
“……약 안 했습니다. 저 제정신이에요.”
팔뚝 안쪽의 말랑한 살을 남이 만지는 감각은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민망함에 박무현이 팔을 빼내려 하자, 신해량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도로 내려 조그만 단추까지 채워주고는 손을 뗐다.
“무현 씨가 해저기지에 온 건 2개월 전이 아니라 1년 2개월 전입니다. 첫날 가팀에서 누가 마중 나갔는지 기억하십니까?”
“강수정 씨가 도와주셨……. 아니, 1년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내 1년 어디 갔냐. 일주일이 후딱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1년이나 건너뛰길 바란 적은 없는데.
“지난 새벽에 누가 방을 찾아왔다거나 머리 쪽에 강한 충격을 받은 기억은 없으십니까.”
“전혀요. ……근데 왜 하필 새벽입니까?”
“자정 전까지는 제가 여기 같이 있었으니까요.”
“신해량 씨가 왜……아니, 아닙니다.”
박무현이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린 사이, 신해량은 자신의 패드를 꺼내 백호동 복도 CCTV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눈을 내리깐 잘생긴 얼굴이 마치 조각처럼 굳어서 매우 심각해 보였다.
박무현도 덩달아 눈썹 사이를 좁혔다. 저 사람이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진짜 내 1년 치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뇌에 무슨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 나이에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대한도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나.
불안을 물고 고민하던 중, 박무현의 패드가 새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며 주인을 불렀다. 발신인은 엔지니어 나팀의 팀장이었다.
“아, 사토 팀장……응?”
이게 뭐야…? 순간 떨리는 박무현의 숨소리에 신해량이 즉각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사토 그놈이 어떤 쓰레기 같은 메시지를 보냈기에? 설마 내게 맞은 것에 대한 복수로 무현 씨에게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만들어놓고 협박이나 조롱을 하는 거라면, 당장에…….
“교정? 교정이라니. 발치도 이미 했잖아? 맙소사. 이거 제가 발치한 건가요? 대체 언제? 문의 넣은 거 답이 아직 오지도 않아서 하려면 멀었구나 싶었는데!”
“…….”
나팀 팀장이 교정을 시작했으니 입 주위는 절대, 절대로 때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들은 게 언제였는지 물론 기억하고 있지만, 신해량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패드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돌려본 CCTV 영상이 마침 거의 끝나, 오늘 아침에 박무현이 노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잠든 박무현을 두고 나간 후 박무현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이 방에 접근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수상한 것이라고는…….
“……?”
화면 속 박무현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고래 인형을 보던 신해량이 침대 위에 놓인 노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눈의 자수를 손끝으로 쓸어보고, 힘주어 눌러보고…….
앞으로의 진행 일정에 대해 묻는 사토에게 내일 직접 보고 말해주겠다고 답장을 보내던 박무현은 살려달라고 부르는 듯한 간절한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피곤하게 구겨져 있던 노을이의 몸이 쉬지도 못하고 커다란 손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 애 데리고 왜 그러냐.
“노을이는 왜요?”
“……제가 꿰맨 곳이 없어졌습니다.”
“어……노을이가 터졌었나요?”
“예. 어젯밤에.”
치과에서도 아니고, 밤에 왜? 노을이 들고 베개 싸움이라도 했나? 그럼 내가 그때 너한테 맞아서 기억이 날아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박무현과 달리, 신해량의 미간 주름은 아까보다 더 깊어졌다.
어떠한 충격으로 인해 특정 기간의 기억을 잃을 수는 있다. 자신이 어제 연인의 목 언저리에 남겨놨던 흔적이 이렇게나 빨리,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솜이 밖으로 빠져나올 만큼 뜯어져서 실로 꿰맨 인형이 바늘 들어간 흔적조차 없는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거라면…….
신해량은 1년 넘게 치과에서 일한 것치고는 새것 같은 인형을 박무현의 손 위에 올려주며 몇 번이고 들여다본 얼굴을 다시 찬찬히 눈에 담았다.
“어쩌면 무현 씨가 맞은 걸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이 얼굴이 어제가 아니라 1년 전에 보았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정말 어제 베개 싸움을 한 거냐, 고 잠깐 오해를 했던 박무현은 신해량의 설명을 듣고는 그의 시선이 닿은 뺨을 슬쩍 문질렀다. 내가 정말로 노을이 하나 달랑 데리고 나도 모르게 시간 여행…같은 걸 한 거라면.
“……저도 제가 기억상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쪽이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상식에 상황을 끼워 맞추려고 하면 오히려 봐야 할 것을 못 볼 수 있습니다.”
연인이 기억을 잃은 것이든 과거에서 온 것이든 황당하긴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상황에도 신해량은 매우 침착해 보였다. 장난치지 말라고 화내거나 날 미친 사람 취급해도 억울하지만 할 말이 없을 텐데. 옆에 있는 사람이 침착한 덕분에 당황스럽기는 해도 끝없이 불안하지는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많이 놀라셨을 텐데. 고맙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게 고마워하실 일은 아닙니다.”
꾸벅 숙인 고개를 따라서 신해량이 얼굴을 가까이 기울이고는 작게 웃었다. 속눈썹의 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근접한 거리에서 듣기 좋은 소리를 내고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보였다. ‘그럼 우리 키스도 해 본 건가’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은 정말,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여기서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 예! ……예?”
그 입술이 눈앞에서 갑자기 움직이자 박무현은 깜짝 놀라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저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왜?
“아침에 일어나니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고 하셨는데, 혹시 내일 아침에 뭔가 또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
달라지는 방향이 하루짜리 깜짝 이벤트로 끝나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라면 좋겠지만, 또 기억을 한 움큼 잃거나 1년을 건너뛴다면. 그러면 정말 어떡하지? 긴장으로 노을이를 움켜쥔 박무현의 손 위로 신해량의 손이 주황색 꼬리를 톡 건드렸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신해량이 행운의 아이템이나 부적도 아니고, 옆에 두고 잔다고 해서 뭔가 일어날 일을 막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머뭇거리던 박무현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앉아있는 단단한 어깨에 닿았다. 여전히 침착한 선을 그리는 입매를 지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눈동자도.
이 남자 옆이라면 적어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안심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박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끼어 자게 된 노을이만 한껏 불만에 찬 표정으로 구겨졌다.
옆자리의 기척에 어색해하며 몇 번 뒤척이다 잠든 박무현의 옆에서 신해량은, 눈을 감는 대신 조용히 손목을 매만졌다. 단단히 매듭을 엮어낸 팔찌를 잠든 이의 한쪽 손목으로 옮겨놓고, 그 위를 커다란 손으로 덮었다.
이런다고 달라질 것이 달라지지 않는 일은 없겠지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또다시 놓쳐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신해량은 박무현의 생각과는 달리 그다지 침착하지 않은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옆자리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따라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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