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성장통4

여름 제철 청게 젹량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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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하얀 가슴팍이 코앞에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눈이 퉁퉁 부은 것인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만 살짝 들어서 보니 신해량도 잠들어 있었다. 서지혁의 등을 토닥여 주다가 그대로 잠이 든 것인지 서로를 끌어안은 듯한 자세였다. 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귓가에서는 신해량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은 처음이었다. 고된 훈련 기간에도 조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었는데.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신해량이 깰까 걱정돼 서지혁은 심호흡을 하며 심박수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약을 먹은 덕분인지 몸의 열도 내렸고 무릎도 더 아프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 신해량과 닿은 부분만 뜨거웠다. 좀 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이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의 뒤척임에도 그가 깰까 봐 숨을 죽이며 서지혁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춰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슬슬 잠도 깨고 시원한 공기에 정신이 드니 서지혁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울고불고하며 떼를 썼다. 죄 없는 그를 원망하고 착하고 여린 그의 성정을 이용해 고집부리고 무리한 요구를 해댔다. 신해량이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에 잠깐 들른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제 옆에 붙잡아두었다. 이기적이고 못난 모습만 보였다. 그 사실이 괴롭다가도 결국 신해량이 제 옆에 남아주었다는 사실에 서지혁은 은근함 승리감을 느꼈다. 혼자만의 유치한 싸움이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사람이니 오늘 하루만은…… 아니. 고작 몇 시간 동안 만큼은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아주 조금만 더. 잠시만 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든 척 신해량을 더 끌어안았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그가 깰까 조마조마했지만 신해량의 숨소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신해량에게 사랑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이렇게 그를 안을 수 있다면 세상을 가진 것 같을 텐데. 혼자만의 꿈을 꾸며 잠버릇처럼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제발 오랫동안 깨지 않기를. 조금 더 내 옆에 머물러 주기를. 그렇게 바라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신해량의 숨소리가 순간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깬 건가? 서지혁은 모르는 척 몸에 힘을 빼고 여전히 잠이 든 척을 했다. 서지혁을 안고 있던 신해량의 팔이 거둬졌다. 염치도 없이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신해량은 잠에서 깬 것인지 몸을 잠깐 뒤척였다. 핸드폰을 보는 건가? 잠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폰을 침대 위에 놓는 게 느껴졌다. 이제 가려는 건가? 강아영에게 연락이 왔나?

불안함에 몸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더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간다고 하면 이제 막 깨어난 척 인사를 해줘야 할까?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계속 자는 척을 하는 게…….

"……."

빠르게 돌아가던 서지혁의 머리가 순간 멈췄다. 신해량의 팔이 다시 서지혁을 끌어안았다. 얼굴이 더 가까워진 탓에 그의 입술이 머리 근처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좀 더 자려는 건가?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눈치도 없이 빠르게 뛰었다. 신해량이 알아챌까 무서웠지만 서지혁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영원히 그의 품에 머물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시간이 계속되길…….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서지혁은 숨을 죽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지혁은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성장통을 앓다가 정신이 나가 기절을 한 상태에서 달콤한 꿈이라도 꾼 걸까. 비어있는 옆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것이 놓여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일어나 확인해 보니 검은색 반팔티셔츠가 곱게 개어 있었다. 신해량이 벗어두고 간 티셔츠였다.

꿈이 아니었어.

서지혁은 까만 티셔츠를 손에 들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에어컨 바람에 잘 마른 티셔츠를 매만지고 있으니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위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간단한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깊게 잠든 거 같길래 안 깨웠어. 밥 챙겨먹고 아프면 약 먹어.]

"그냥 깨우지……."

서지혁은 유독 잠귀가 밝고 예민했다. 그래서 도대체 신해량이 어떻게 자신 모르게 사라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해량이 가는 줄도 모르고 편하게 잠들어 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면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만 늘어갔다.

그리고 다음 줄에 적힌 문장을 읽은 서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 내 글씨체 몰라?]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몇 번을 읽어보아도 어떤 의도로 적힌 글인지 유추되지 않았다. 글씨체를 모르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신해량의 글씨체는 그의 외모나 성격처럼 올곧고 깔끔했다. 모두가 함께 쓰는 롤링 페이퍼에 익명으로 적힌 글의 주인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모를 리가 없는데.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서지혁은 신해량의 티셔츠를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는 최근 들어 왜 이렇게 의미 모를 행동과 말만 하는 건지. 국어 시간에 배우는 뜻 모를 고전시가보다 더 해석하기 어려웠다. 원래 해석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그가 어려워진 걸까. 나는 당신을 더 잘 알고 싶은데. 그는 알고 싶을수록 더욱 알기 어려웠다.

마른 티셔츠에서는 이전에 맡았던 은은한 섬유 향수 냄새 같은 것이 났다. 포근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기분 좋았다. 신해량은 이런 향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강아영이 좋아하는 걸까.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의문이었다. 다만 서지혁은 그가 입고 있을 자신의 하얀 티셔츠를 떠올렸다. 그저 옷을 갈아입는 것을 깜빡한 것뿐이겠지만, 그로 인해 적어도 한 번은 나를 떠올려주겠지.

그런 기대를 하며 서지혁은 까만 티셔츠와 함께 서늘해진 무릎을 끌어안았다. 더 이상 아프지도 열이 나지도 않았다. 이 또한 그가 서지혁의 곁에 머무른 흔적이었다. 서지혁은 자신을 위해 더운 날에 땀을 흘리며 뛰어와 약을 챙겨주고 다정하게 달래주었던 신해량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든 줄 안 자신을 더욱 꼭 끌어안던 그의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글씨체를 모르냐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서지혁이 알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성장통이 끝났다.

휴일의 첫날, 신해량이 다녀간 후 거짓말처럼 성장통이 멈추었다. 단순히 약이 잘 드는 건가 했는데 다음날에도, 휴일의 마지막 날에도 더 이상 무릎이 아프거나 몸에 열이 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이 망할 성장이 끝난 것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성장통이 사라지면 그저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그리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통증을 핑계로 신해량에게 연락을 해볼까 했는데 휴일이 끝나도록 그와 연락 한 번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해량이 다녀가고 서지혁은 챙겨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메모의 의미에 대해 톡으로 물었다. 하지만 신해량은 '몰라.' 같은 짧은 답만 남기고 더 답을 해주지 않았다. 신해량의 성격상 다음 날이든 그다음 날이든 먼저 몸이 괜찮냐는 연락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서운하긴 했지만 서지혁은 신해량에게 용건 없이 먼저 연락을 할 용기도 없었다. 거짓말을 워낙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라 꾀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두 번째로는 부진한 실력에 대해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코치나 감독, 주장인 신해량까지도 서지혁의 슬럼프가 성장통 때문이라 여기고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며 오히려 서지혁을 다독였지만 서지혁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만약 성장통이 끝나고도 실력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내가 문제였다면? 이대로 뒤처지게 된다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게 무서웠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다가온 훈련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지혁은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열쇠를 챙겨 훈련장과 연결된 부실로 향했다.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훈련 시간 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새벽 시간이라 공기는 서늘했다. 초조한 마음을 안정시키려 상쾌한 새벽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폐를 꽉 채운 시원한 온도에 긴장감이 좀 누그러졌다.

서지혁은 빠른 걸음으로 부실 앞에 도착했다.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하려던 그때, 부실 안쪽에서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실과 이어져 있는 훈련장에서 나는 소리일 터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부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서지혁은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조심스럽게 부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가방을 내려두고 훈련장 쪽으로 향하는데 과녁 앞에 서 있는 익숙한 까만 뒤통수가 보였다. 또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었다. 분명 성장통은 멈췄을 텐데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그가 뒤를 돌았다. 신해량이었다.

"……어. 일찍 오셨네요?"

"그래."

짧게 대답을 하곤 신해량은 다시 과녁을 보며 총을 잡은 팔을 들어 올렸다. 총소리가 연달아 몇 번 들렸고, 그가 든 공기권총에서 나온 총알은 모두 과녁의 정중앙을 맞췄다. 서지혁은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신해량의 실력이야 원래도 뛰어났지만 날이 갈수록 더 안정적이었다. 교과서 같은 자세는 물론이고 마인드컨트롤 또한 수준급이라 라인 앞에서도 일정한 심박수를 유지했다. 그건 총을 잡은 지 이제 겨우 1년이 된 서지혁이 가장 어려워하는 거였다.

짧은 경력에 비하면 서지혁은 긴장도 거의 하지 않고 심박수도 일정하게 잘 유지했지만, 요즘 들어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서지혁은 아마도 그 원인일 사람을 가만히 쳐다봤다. 역시나 콩닥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신해량은 멀뚱히 서 있는 서지혁을 무표정하게 보고는 연습을 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서지혁은 간단히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라인 앞에 섰다.

"언제 오셨어요? 몰래 연습 좀 하려고 했더만……."

"얼마 안 됐어."

"왜 이렇게 일찍 온 겁니까? 한 시간이나 이른데요."

"열받는 일이 있어서 잠이 안 오던데."

"예? 무슨 일 있었습니까?"

"……."

평소 무슨 소리를 들어도 화내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서지혁이 놀라 쳐다봤더니 정작 신해량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알려주기 싫은 건가? ……강아영이랑 싸우기라도 했나?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지 대답을 하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아 서지혁은 조용히 총을 손에 들었다.

망할. 혼자 연습 좀 하려고 했는데. 괜히 긴장되잖아.

탕―

연습삼아 쏜 탄환이 과녁에 박혔다.

"아……."

성장통이 끝났음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가운데에서 멀리 찍힌 탄환의 흔적에 서지혁은 실망한 듯 탄식했다. 다시 심기일전을 하며 총을 들고 몇 번을 더 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고작 통증 하나 없어졌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돌아올 리는 없었다. 애초에 슬럼프는 통증이 원인도 아니었으니까. 망했다. 서지혁은 멍하니 엉망인 과녁을 바라보았다. ……쪽팔려.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서지혁."

"……옙."

그냥 모른 체 해주길 바랐는데. 신해량의 부름에 서지혁은 곧바로 총을 놓고 그의 앞에 섰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믿어주고 기다려줬는데. 내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챙겨준 사람이었는데. 그런 신해량의 앞에서 계속 못난 꼴만 보이게 되는 게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고개 들어봐."

"……."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망했겠지? 아직 몸이 안 좋다고 하면 믿어줄까? 아니, 거짓말인 걸 바로 알아차리고 더 한심해할 거야. 몸이 덜 풀려서 그런 거라고 기회를 더 달라고 해야 하나? 계속해서 더 나빠지기만 하면 어쩌지? 불안함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고개 들어. 나 봐."

"……아. 예."

난리가 난 서지혁의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것처럼 신해량은 서지혁의 두 뺨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얼굴을 감싼 커다란 손바닥이 따뜻했다.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혼란스러운 서지혁이 간신히 신해량과 시선을 맞췄다. 시야가 낯설었다. 신해량은 살짝 치켜 뜬 눈으로 서지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나 보다 더 커졌네."

"예?"

자신을 올려다보는 신해량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지혁이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처럼 서지혁은 신해량을 살짝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신해량 보다 더 큰 건가? 어리둥절한 서지혁의 표정에 신해량이 손을 거두었다.

"사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저격수 중에 누가 더 사격 실력이 좋을 거 같아?"

뜬금없는 질문에 서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뒷머리를 긁었다. 답지 않게 웬 유치한 질문이지?

"예? ……어. 글쎄요. 사용하는 총기도 다를 거고 환경이나 조건도 다 다를 텐데 정확하게 비교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경기하듯이 똑같은 거리의 과녁 앞에 세워두거나, 평등하게 전쟁터에 던져놓지 않는 이상."

"그렇지. 사격은 종목만 해도 공기권총, 공기소총, 산탄총 세 가지로 나뉘어 있잖아. 그런데 전쟁터에서 그런 총기 종류 구분에 의미가 있을까?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눈에 보이면 아무거나 주워서 쏴야 하잖아. 기본적으로 스포츠만 하던 사람은 전쟁터에서 바로 활약하긴 어려울 거야. 남들보다 유리하기야 하겠지만 실제 전쟁을 겪어본 사람만큼은 못하겠지."

"뭐 그렇죠? ……설마 주장 입대할 겁니까?"

서지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내가 전쟁터에 총 한 자루 쥔 채 던져지면 잘 살아남을 거 같아?"

"어……. 예. 선배 실력 좋잖아요."

"10m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고정 표적 좀 잘 맞췄다고 내가 움직이는 사람을 잘 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좀……."

"난 공기권총이라는 종목이 운동경기 중에서도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해. 실내경기라 양궁처럼 바람이나 날씨 영향을 받지도 않고 산탄총처럼 움직이는 물체를 맞춰야 하는 것도 아니지. 방해되는 거라고 해봤자 경기장 내 관객들 소리나 본인 긴장감뿐이야. 그래서 경력과 무관하게 같은 조건 속에서 경쟁할 수 있어."

"뭐……. 그렇긴 하죠. 그래서 저 같은 초짜들도 입문하기 괜찮은 종목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량은 자신의 공기권총의 상태를 한 번 살피더니 서지혁에게 건넸다. 떨떠름하게 신해량의 총을 받아서 든 서지혁은 그를 따라 총기를 점검하듯 살펴보았다.

"그래 맞아. 변수가 적으니 처음 하는 사람도 익숙해지기만 하면 실력이 많이 늘지. 다른 종목에 비해서 그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너 앉아서 총 쏴본 적 있어? 어떨 거 같아?"

"앉아서요? 그런 적은 없는데. 뭐……. 엉망진창 되지 않을까요?"

"왜?"

"그야……. 늘 서서 총을 쐈으니까요. 익숙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요."

"그럼 네가 한번 해봐. 내 총으로."

"예? 아니. 진짜입니까?"

놀란 서지혁을 뒤로하고 신해량은 부실에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라인 앞에 세워뒀다. 그리고는 서지혁을 보며 의자를 툭툭 치며 가리켰다. 미치겠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서지혁은 신해량의 뜻대로 의자에 앉아 신해량의 공기권총을 들고 과녁을 노려봤다. 총을 든 손이 어색한 각도로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개인 총기가 생긴 이후에는 남의 총을 잡아본 적이 없었는데. 서지혁은 신해량의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손잡이를 감싸 잡았다. 긴가민가한 서지혁이 평소보다 위에 있는 과녁을 가만히 바라보며 집중하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어?"

엉망으로 과녁을 빗겨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10점을 맞췄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기우인가 싶어 다시 몇 발을 더 쏴 보아도 거짓말처럼 가운데에 명중했다. 놀란 서지혁이 총을 내려두고 뒤를 돌아 신해량을 바라봤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 서지혁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신해량의 앞에 섰다.

"뭐예요? 뭡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앉아서 총쏘기에 재능이 있다는 걸? 그것도 남의 총으로……."

눈이 동그래진 서지혁이 환장하겠다는 듯이 묻자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너 처음 총 잡았을 때도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예? 아니. 뭐. 그러긴 했는데요……."

"애초에 넌 총을 익숙한 감각으로 쏘는 놈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왜 계속 익숙함을 찾아?"

"……어."

머리가 띵했다.

"너도 일 년 동안 해온 게 있으니 당연히 익숙하고 편한 감각이 생겼겠지. 그런데 지금 너한테는 그런 게 오히려 방해가 돼. 네 몸은 변했는데 이전의 감각으로 뭘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야. 앉아서 총을 쏘는 거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넌 그냥 재능 있는 놈이야. 흔히 말하는 천재 같은 거지. 네 윤리의식이나 도덕성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넌 전쟁통에 던져놔도 알아서 살아 돌아올 놈이야. 어떤 총을 줍든, 표적이 움직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야. 그러니까 여태 가지고 있던 걸 다 버려. 그런 건 너한텐 필요 없는 거잖아."

"……저 좀 과분한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요."

"과분할 거 없어. 네가 널 과소평가 하고 있었던 거겠지."

신해량은 서지혁 내려둔 자신의 총을 손에 쥐었다. 그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던 서지혁도 자신이 내려둔 제 총을 잡았다. 키에 비해 손이나 발의 성장은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티도 나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서지혁은 느낄 수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손잡이의 느낌, 손끝에 닿는 방아쇠의 감각이 미세하게 이전과 달랐다.

"주장도 그랬습니까? 성장통이 심했다면서요."

그 말에 신해량이 피식 웃고는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가 들리고 탄환은 서지혁이 맞추었던 자리를 그대로 저격했다.

"아니. 넌 나랑 달라. 그걸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이 이야기를 해줬겠지."

"주장은 어땠는데요?"

"나야 뭐……. 다시 몸에 익숙해지니까 괜찮던데."

"……저는 그게 더 어려울 거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주장이 더 천재 같아요."

"그래?"

신해량이 서지혁에게 고갯짓했다. 다시 한번 총을 쏴 보라는 뜻이었다.

서지혁이 10m 앞에 있는 표적을 보고 섰다. 점수를 표시하는 작은 원과 그 가장 가운데에 찍혀 있는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쥔 총의 감각이나 과녁을 바라보는 시야의 눈높이가 달라지더라도 목표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성장통을 앓는 내내 서지혁은 미세하게 틀어진 자극을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커버린 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을까.

'여태 가지고 있던 걸 다 버려. 그런 건 너한텐 필요 없는 거잖아.'

신해량의 조언을 떠올렸다. 18년의 인생을 살면서 서지혁은 익숙한 것에 매달린 적이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지루하거나 따분한 삶은 아니었다. 꿈도 목표도 없이 입학한 학교에서 신해량의 별거 아닌 말로 사격을 시작했다. 새로운 것에 뛰어드는 걸 언제 두려워했다고 과거로 돌아가려 했던 것인지. 최근 들어 답지 않은 짓만 골라서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서지혁은 익숙한 감각을 찾기 위해 엉성하게 잡고 있던 총을 고쳐잡았다. 이전의 시야에 맞추기 위해 구부정하게 있던 자세도 곧게 폈다. 생전 처음으로 총을 손에 쥐고 낯선 과녁 앞에 섰을 때가 떠올랐다. 확실한 것 하나 없었지만 두려울 것도 없었던 1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탕―

방아쇠를 당긴 손끝에서 탄환이 발사되는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크게 울린 총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서지혁은 오랜만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뒤늦게 확인한 과녁은 정확하게 한 가운데를 관통당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신해량 또한 서지혁을 바라보며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지혁은 손에 쥔 총을 놓아두고는 그대로 신해량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진심이 되어버린 걸까. 확실한 건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행인 점은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였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 보다 낮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해량 또한 자신을 끌어안은 서지혁의 등을 토닥였다.

"주장."

"왜."

"……강아영 누나랑 사귀어요?"

일정한 속도로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두근두근. 또 제어되지 않는 심장이 들킬까 걱정되었지만 애써 제어하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긴 시간 동안 살펴봐 주었다. 그 덕분인지 감독이나 코치, 심지어 서지혁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당연한 일을 숨긴다고 숨길 수 있을까. 이미 커진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서지혁은 조심스럽게 몸을 떼어내고 신해량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낯선 시선이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서지혁은 그런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귀는 게 아니야."

신해량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그동안 진작에 물어보지 않았을까.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눈치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신해량은 부실에서 강아영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강아영이 가지고 싶어 했던 스티커도 서지혁의 무릎에 붙여주었다. 아무리 후배가 아프다고 한들, 신해량은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깰 만큼 예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서지혁은 그동안 혼자만의 걱정과 불안을 합리화할 핑계를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먹구름이 낀 듯 흐렸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서지혁은 제 마음을 들키더라도 상관 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주장, 저 사실……."

"너 혼자 속 편하게 말하지 마."

"예?"

"열받는 일이 있다고 했잖아."

"네? 아니. 예?"

투덜거리며 말한 신해량이 서지혁을 밀어내고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어……? 이게 아닌데. 서지혁은 바보 같은 얼굴로 신해량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휴가 이후 신해량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다. 뭘 물어도 답도 안 해주고 오늘도 평소와 다르게 틱틱거리는 말투였다. 서지혁이 좌절한 꼴을 보곤 마음이 약해진 건지 다시 다정하게 굴긴 했지만……. 회복되자마자 다시 돌아설 줄이야. 열받는다는 게, 나한테 빡쳤다는 뜻이었던 건가? ……왜? 내가 그때 무슨 실수라도 했었나?

도무지 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훈련시간이 되자 감독과 코치, 부원들까지 모두 모였다. 부실 밖으로 나갔던 신해량도 그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겉만 보면 속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서지혁은 훈련 시간 내내 신해량의 눈치를 봐야 했다.

서지혁의 성장통과 슬럼프가 끝났다는 사실에 부원들은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었다. 서지혁의 시원한 저격에 환호한 부원들은 그를 끌고 와 부실 구석에 놓인 신장 측정기에 올렸다. 모든 부원이 부담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서지혁의 키가 측정되었고, 기판에 숫자가 뜨자마자 모두가 놀라며 감탄했다. 서지혁은 성장통을 앓는 동안 6cm나 자라 196cm가 되었다. 부원들은 서지혁이 주장인 신해량 보다 커졌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해량도 작게 웃었는데, 그는 서지혁과 눈이 마주치면 정색을 했다. ……미치겠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휴가 이후 첫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친 부원들은 재빨리 짐을 챙겨 기숙사나 집으로 향했고, 감독과 코치도 주장인 신해량과 훈련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사라졌다. 신해량이 훈련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동안 서지혁은 부실 소파에 멍하니 누워 그를 기다렸다.

"지혁아, 여기서 뭐 해? 기숙사 안 가?"

"……저 주장 기다리는데요."

"신해량? 왜? 쟤 오늘 기분 겁나 안 좋아 보이던데 왜 저래?"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훈련장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던 강아영이 소파에 누워있는 서지혁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강아영은 훈련장 쪽을 쳐다보다가 서지혁을 바라보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난 알겠다! 지혁아, 난 네 편이야."

"예? 뭐가요?"

"난 신해량이 맘고생을 좀 더 해도 된다고 생각해."

"예……?"

"신해량 꼴 좋다!"

강아영은 신해량이 들으라는 듯 훈련장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 말을 제대로 들은 모양인지 신해량이 훈련장에서 나와 뚱한 표정으로 강아영과 서지혁을 쳐다봤다.

"둘 다 안 가고 뭐해?"

"야! 신해량! 나랑 승빈이 버리고 홀랑 가더니 너 꼴이 아주 좋다?"

"시끄러워. 정신 사나우니까 집에나 가."

"바보 멍청이~ 지혁아, 절~대 받아주지 마. 알겠지? 그럼 난 간다!"

"예? 어……."

신해량을 향해 얄밉게 메롱을 한 강아영이 빠르게 부실 밖으로 튀어 나갔다. 신해량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멍청하게 누워 있는 서지혁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너도 빨리 가. 그 소파 최소 한 달은 아무도 청소 안 한 거 같던데."

"……아니. 그……. 주장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난 너랑 할 말 없어."

"예? 아니, 왜요?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서지혁이 벌떡 일어나 앉자 신해량은 대꾸도 하지 않고 훈련장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둔 에어컨 전원을 껐다.

"그럼 계속 여기 있든가."

"아니, 선배!"

신해량이 그대로 부실을 나갔다. 아니. 진짜 이렇게 가버린다고? 너무 어이가 없으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멍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모든 걱정과 고민거리를 직접 해결해주고선 또 다른 문제를 던져주다니. 황당함에 닫힌 부실을 멍하니 바라보다 소파에 다시 누워버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짐작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소파에 누워 부실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첫 오해가 시작된 그날이 떠올랐다. 신해량은 그때 강아영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귓속말을 했다고 해도 못 들을 거리가 아니었는데. 한숨을 푹 내시고 있으니 부실의 공기가 점점 후덥지근해졌다. 에어컨을 끄니 1분도 안 돼서 더워지는구나. 바깥 날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실내 스포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무엇을 놓친 거지? 서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은 유독 이상한 날이었다. 신해량은 평소와 달리 에어컨도 끄지 않고 부실을 나갔고, 강아영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부실 앞에서 몇 분을 서 있었다. 강아영은 날 보고 왜 그렇게 놀랐던 걸까.

더운 공기에 옷을 펄럭이며 몸을 뒤척이고 있으니 소파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나왔다. 한 달 동안 안 치웠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서지혁은 몸을 털며 일어나 소파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내가 아니면 다들 게을러터져서는. 서지혁은 등받이에 끼어 있는 볼펜 몇 개를 주워 서랍장 위 연필꽂이에 집어 넣었다. 쿠션 뒤에는 누군가 잃어버렸다던 이어폰 한쪽도 있었다. 뜬금없는 건전지와 책 한 권도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엉덩이 쿠션 쪽에 깔려있던 수첩도 하나 발견했다.

서지혁은 한숨을 쉬며 수첩을 넘겨 보았다. 종종 부원들이 감독이나 코치 몰래 수다를 떨기 위해 필담을 나누곤 했는데, 그때 사용한 수첩이었다. 수첩에는 온갖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어제 뭘 먹었는데 맛있었다거나 어디 식당이 끝내준다거나. 담임 선생님에 대한 욕이나 수행평가를 했냐는 소소한 질문 같은 것도 있었다.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운 악필로 쓰인 글씨도 있었고 가끔 신해량의 글씨도 보였다. 주로 부원들의 쓸데없는 질문에 짧게 답을 해준 거였다. 별소리를 다 적어놨다고 생각하며 넘겨보다 가장 최근에 적힌 메모를 발견하고 수첩을 넘기던 서지혁의 손이 멈추었다.

반듯하고 정갈한 익숙한 글씨체였다.

[여기 몰래 숨어 있는 놈]

짤막한 글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순간, 서지혁은 곧바로 부실을 박차고 나와 긴 복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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