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해저기지 출근일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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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수기지 AU 

※ 설정 날조 주의


  휴일 아침이 밝았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시간에 눈이 저절로 떠지기에 침대에서 조금 미적거리다가 일어나 씻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세탁물을 돌리고, 산책 겸 운동으로 대한도 인공해변 옆 산책로를 걷고, 집에 안부전화를 한 뒤에 요 며칠간 방치되고 있던 해저기지 가이드북 한국어판을 집어들었다. 

  내 구식 통역기가 서류번역이 되지 않아 서지혁이 한국어판 가이드북을 주고 갔었는데, 치과에서 진료가 없는 시간에 틈틈이 읽는 것만으로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퇴근하고 백호동 숙소에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매번 첫 챕터를 읽던 중에 잠들기 일쑤였다.

  직장인이 책을 읽는다는건 생각보다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오늘은 카페라도 가서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읽어봐야지. 가져다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양심상 첫 챕터는 넘겨야 할 것 아닌가.

  약간 이른 점심을 먹은 뒤 카페 붉은 산호로 향했다. 양손으로 따뜻한 머그컵을 감싸고 커피향을 음미하고 있자니 속세의 근심걱정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매장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가이드북의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북 2챕터의 중반쯤을 넘길 무렵에는 테이블이 점점 차더니 곧 카페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 옆 테이블에 한쌍의 남녀가 앉았는데, 이야기 도중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말이 빨라지더니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고, 현재 이혼했으며, 아이를 아내가 키우고 있는데, 남편이 술을 마시고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는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계속 앉아있다가는 내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가이드북의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독서를 중단하고 싶지 않아 어딘가 앉아 있을 곳을 찾으려니 중앙동의 또 다른 카페인 아굴라스 해류는 만석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백호동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도 마땅치 않다면 오늘은 배움을 쉬라는 하늘의 뜻으로 여겨야지.

  다행히 백호동 휴게실은 한산했다. 벽에 부착된 대형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고, TV 앞에 놓인 쇼파 위에 엔지니어 한 명이 드러누워 잠들어 있었다. 휴게실 가장자리에는 원형 테이블이 몆 개 놓여 있었는데, 직원 몇 명이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핸드폰을 만지거나 노트북을 펴놓고 인터넷 쇼핑을 하는 등 각자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으려고 보니 익숙한 옆모습이 보였다. 인사를 하면 방해가 될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뜨개질을 하던 신해량이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신해량씨. 오늘은 쉬시는 날인가요?"

  "예. 오늘은 휴가입니다."

  신해량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던 한국어판 해저기지 가이드북으로 향했다.

  "저희 팀원에게 받으신 겁니까."

  "네, 제가 영어판 가이드북을 읽기 힘들다고 하니 서지혁씨가 가져다주셨습니다."

  신해량의 표정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는데, 어쩐지 반색하는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티타임에서  몇 차례 대화를 하며 관찰해본 결과 그의 반응을 약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해량씨가 번역본을 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주석을 직접 다신건가요?"

  "예."

  "굉장히 공을 들이신 것 같던데요. 열심히 읽어보고 궁금한 부분을 여쭤보겠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을 신경써서 만든 것 같더라니, 눈을 빛내며 뿌듯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고보면 신해량은 평소에 말을 간결하게 하는 편인데, 주석에는 부연설명을 빽빽하게 적어놓은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말보다 글로 설명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타입인건지,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한해서 설명을 자세히 하는 편인건지는 잘 모르겠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요?"

  "예. 앉으십시오."

  "뜨개질을 하던 중이신 것 같은데, 이건 이번에 새로 구입하신 뜨개실인가요?"

  "맞습니다."

  그가 뜨고 있던 하늘색 양말을 보여주었는데, 뜨개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만듦새가 제법 좋아보였다. 

  "보통 솜씨가 아니신것 같은데요."

  "썩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 다른 실력자분들이 많습니다."

  "뜨개질은 초보자가 하기에 어려울까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뜨개질에 흥미를 보이자 신해량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봉투 안에서 여분의 대바늘과 민트색 실을 꺼냈다.

  "바늘에 이런 식으로 실을 걸어 고리를 만드는것을 코잡기라고 합니다."

  신해량이 실을 손가락에 삼각형으로 건 다음 대바늘의 끝을 찔러넣어 이리저리 돌리니 대바늘에 고리가 하나 생겼다. 그가 몇 번 시범을 보여주는 것을 본 다음 따라서 해보았는데, 내가 엉성하게 실을 잡고 어색하게 바늘을 놀리는 모습을 보다못한 신해량이 나섰다.

  "잠깐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네, 이게 참...... 생각만큼 손이 잘 안따라주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왼손을 쥐고 실 모양을 고쳐준 다음 대바늘을 쥔 내 오른손을 살짝 잡고 천천히 바늘을 순서대로 실에 걸어 돌렸다.

  갑자기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 테이블 맞은편의 벽거울을 쳐다보니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름모를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뜻모를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의미지. 신종 인종차별인가. 신해량이 딱히 그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나도 다시 코잡기에 집중했다.

  그가 가르쳐 준대로 몇번 반복하다보니 그럭저럭 혼자 코잡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기초적인 뜨개질 방법인 겉뜨기와 안뜨기를 배웠는데, 코잡기보다는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실을 당기실 때 힘을 비슷하게 유지하면 무늬를 균일하게 뜨실 수 있습니다."

  내가 겉뜨기와 안뜨기를 번갈아 한줄씩 하며 뜨개질을 하는 동안 신해량은 양말을 뜨고 있었는데, 어쩐지 내가 뜨고 있는 편물의 모양이 점점 넓어지면서 사다리꼴로 변해가고 있는것이 느껴졌다.

  "제 건 모양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어떡하죠?"

  내가 길을 잃은 양과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신해량이 각 줄에 사용된 코의 개수를 세어보더니 실을 몇 줄 풀어냈다. 풀어낸 실 모양이 울퉁불퉁해졌다.

  "새로운 단을 뜨실때마다 코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나서 그렇습니다. 한 줄을 끝내실 때 마커링을 끼워주시면 기억하기 쉬울 겁니다."

  그가 종이 봉투에서 동그란 귀걸이처럼 생긴 마커링을 꺼내어 한 줄이 끝나는 부분에 걸어주었다. 처음 보는 도구가 신기해서 마커링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말대로 한 줄이 끝날때마다 표식을 달아주니 그럭저럭 일정한 너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해량씨는 뜨개질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건가요?"

  "휴게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으니 팀원들이 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더군요. 다들 신경쓰여하는것 같아 취미 삼을 만한것을 찾다보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긴, 아무래도 신해량 같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으면 여러모로 신경쓰이긴 하겠지. 하고많은 취미들 중에 뜨개질을 선택한 것은 좀 의외였지만, 손재주가 좋으니 본인에게 잘 맞는 취미인 것 같았다. 취미 활동의 결과물을 실용적인 물건이나 작품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매력일 듯 했다.

  신해량의 도움을 받아 정사각형 모양의 티코스터를 하나 완성했다. 내가 초보자라 답답했을텐데도 신해량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만약 강의 평가를 줄 수 있었다면 아마 만점을 주지 않았을까.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내 환자들에게서 전해들은 치아 파괴범의 정체는 미궁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급기야 나는 신해량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인격을 분리하는데 성공하여 평소에는 근면성실한 산업 역군으로 지내다가 밤만 되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자들을 한명씩 손봐주고 다니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난데없이 나타난 수강생 때문에 예정에 없던 뜨개질 수업을 하고 난 신해량은 다시 양말뜨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북을 읽으러 왔다가 왠지모르게 뜨개질을 하게 된 나도 해저기지 가이드북을 다시 펼쳤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으니 나도 덩달아 집중이 잘 되었다.

  내가 가이드북의 300페이지 중 절반 정도까지 읽었을 무렵, 신해량은 양말 뜨개질의 마무리 부분만 남겨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목이 뻐근해져왔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신해량이 내가 만든 티코스터를 가져도 좋다고 하기에 방으로 들고 왔다. 소박한 솜씨의 첫 작품이었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출근할 때 챙겨가서 열심히 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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