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플라스크 밖의 사랑 1
박무현은 평범한 치과 의사다.
평범한 치과 의사가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렸냐고 하면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는 운명같은 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박무현은 심란한 표정으로 눈앞의 미남을 바라봤다. 그냥 미남이라는 말이 죄송할 정도의 미모는 진부한 표현으로 ‘미의 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찬양을 위해 언어중추가 활성화되는 감각과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감각을 동시에 겪으며 박무현은 간신히 한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관이 완벽하다. 다분히 치과 의사다운 감상이었다.
그의 뇌세포가 멍해진 정신을 되찾고 주접을 위한 스텝을 밟으려는 찰나, 눈앞의 미남에게서 또 한 번 정신을 앗아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해량입니다.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량무현] 플라스크 밖의 사랑
멍청한 친구들이 술 좀 걸치고 폐가 체험을 가겠다고 한다. 그 자리의 유일하게 취하지 않은 1인인 박무현으로서는 흥청망청 고주망태가 된 친구들이 갈 지 자로 도착하는 곳이 폐가가 아니라 황천일까 걱정이 되었다. 다 취했는데 누가 운전할 건데? 비아냥거리자 세 놈이 빤히 쳐다봤다. 제길. 너희 걸을 수는 있는 거냐, 이 손가락 몇 갠지 말해봐라,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해라, 어르고 달래자 저들끼리 쑥덕이더니 그럼 펜션으로 3차 가잔다. 박무현은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펜션에 던져놓는 게 낫겠다.
가는 길이 험해도 펜션이 다 그렇듯 외진 곳에 있구나 여겼을 뿐이다. 네비에 안 나와도 친구 지인이 알음알음 하는 곳이라 그렇다는 말을 믿었다. 가로등이 없어도 호젓한 분위기를 선호하시는구나, 그렇게 태연히 생각했다. 좀 특이하다 싶었지만 술에 꼴아버린 친구들을 믿었다. 꼼수를 부릴만큼 멀쩡할 리 없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예상 외로 그들은 박무현을 속일 정도의 뇌세포는 알콜 절임으로 만들지 않고 남겨두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펜션.”
퍼드덕! 뭔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팔뚝에 돋는 소름을 손으로 누르며 박무현은 눈앞의 건물을 바라봤다. 눈을 씻고 봐도 폐공장, 폐연구소, 폐병원 뭐 그런 종류지, 사람이 하룻밤 돈을 주고 숙박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돈을 받으면 모를까. 그리고 치과 의사는 대체로 돈 받고 폐건물에서 잘 만큼 궁한 직종은 아니다. 박무현이 말없이 노려보자 친구 한 놈이 눈치를 보며 실토했다.
“여기가 무슨···개인이 하는 연구소인가 뭔가 그랬는데, 주인이 실종되고 폐쇄됐대. 토지주랑 건물주가 달라서 뭐 골 아프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매각을 했는데 건물을 허물려고 할 때마다 사고가 나서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종된 주인이 좀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이거 사유지 침입이라는 거지?”
“아니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한데 이게...”
“야, 빨리 타. 멀쩡하게 말해서 술 다 깬 줄 알았네.”
박무현은 한 명을 끌고 가서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 뻗대는 한 명은 뒷좌석에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매줬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을 잡으러 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미치겠네.”
박무현의 짧은 감상이었다. 그리고 홀로 폐가 탐험에 나서게 된 계기다.
너희 여기 있어, 어디 가면 죽을 줄 알아! 하고 차에 태운 두 놈에게 윽박지른 뒤 잃어버린 한 놈을 찾으러 출발했다. 트렁크에서 손전등을 꺼내들고 닫힌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뒤를 돌아봤다. 차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고 뒤로 뻗은 숲의 나뭇가지는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뻗어있었다. 당장이라도 친구들을 불러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박무현은 다시 앞으로 향했다.
건물 안에는 깨진 유리, 소주병, 그릇, 무슨 오컬트 영화에나 나올 것처럼 생긴 인형과 알 수 없는 낙서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사람의 흔적이 있는 것이 더 불안했다. 이런 체험과 연이 없는 박무현이 보기에도 누군가 숨어있기 딱 좋아보였다. 귀신같은 게 무서운 게 아니다. 무서운 건 언제나 사람이지. 친구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도 될지 고민이 됐다. 손에 들고 있는 손전등도 불안했지만 어둠 속에서 걷다 깨진 유리에 크게 베일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건물의 측면으로 들어와서 한참 걸었으니 아마도 건물의 중앙 쯤으로 생각되는 곳에 계단이 있었다. 위로 가는 곳과 아래로 가는 곳. 박무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아래로 가길 선택했다. 술 취한 사람이 굴러 떨어졌을 경우, 응급조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하 몇 층까지 있을지, 어디까지 확인해보고 올라가야 할지 고민하며 지하 1층에 도착했을 때 별로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지하 2층으로 가는 철문이 잠겨있었다. 긴 쇠사슬과 자물쇠로 묶여있으니 친구는 위로 올라갔거나 1층 나머지 반쪽을 헤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올라가려는 찰나 발 밑에서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몸이 아래로 쏠린다 싶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박무현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손에 꼭 쥐고 있던 손전등으로 천장을 비췄다. 방금 자신이 떨어진 구멍이 보였다. 엉덩이와 손목이 얼얼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지만 꽤 높은 천장까지 기어올라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우선 다른 문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눈을 찌르는 불빛에 놀라 다시 확인하니 거울이었다.
내부는 반은 실험실같고 반은 수술실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은 둘 중 어느 쪽에도 걸맞지 않은 위생상태였다. 대부분의 집기가 먼지투성이였고, 타일로 된 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박무현이 떨어진 책상을 비롯한 어느 곳에도 종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아, 전 주인이 환경을 사랑했거나 모든 기록을 파쇄한 것 같았다. 꽤 넓은 방의 사면은 한 개 층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유일한 출입구가 밖에서 잠겨있었다. 이 문을 강제로 부수고 나가도 몇 개의 문을 더 부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박무현은 들어온 곳으로 나가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이 거지같은 폐건물을 나가자. 그리고 저-박무현은 한 번 욕을 삼켰다-친구들에게 금주령을 내리자. 안 지키기만 해봐라.
박무현은 티타늄 척추를 뽑아 친구들에게 채찍처럼 휘두르는 상상을 했다. 방 구석에 서있는 책장을 끌고 오는 동안 척추가 뽑힐 것 같았고, 고통에 비례해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커져갔기 때문이다. 양심이 있으면 니들이 나를 효도관광 보내야 해. 온천이나 마사지샵같은 곳으로! 니들 뒤치닥거리 하다가 내 허리가 휘고 있잖냐! 책장을 책상 위에 올릴 수 있을까? 올릴 수 있다 해도 밟고 올라가면 쓰러질 것 같았다. 이 건물 몇 년이나 방치된 거지? 나무가 다 삭은 거 아냐? 구석에 놓인 관짝같은 무언가를 끌고 오며 박무현은 결국 친구들에 대한 욕을 몇 마디 중얼댔고, 욕을 중얼댈 힘조차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그 관짝을 책상에 붙이고 그 위로 비스듬히 책장을 올릴 땐 밀어올리기 전에 일단 책상에 기대어 숨을 골라야 했다.
은색 관 위로 정사각형 모양의 다이얼 달린 냉장고 같은 것을 올려놓을 때 뭔가 눌린 듯한 달칵, 소리가 났지만 어둡고 처음 보는 기기들 중에서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효도관광이 아니라 배상금이나 벌금을 십시일반 하자고 해야겠다며 책장을 끌어올리고 마침내 그 위에 올라섰을 때 잘 하면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잘 하면. 박무현의 희망은 또 다시 아래로 쏠리는 기분과 함께 무너졌다.
쿠당탕! 큰 소리와 함께 혹사당한 엉덩이에 다시금 충격이 느껴졌다. 어디 깔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밟고 올라간 관이 반쯤 열려있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정체 모를 실험실 안에서 정체 모를 관짝 안의 정체 모를 물질이 아무 대비도 안 된 민간인 앞에 펼쳐져 있다고? 왼팔로 얼른 코와 입을 막고 손전등으로 관을 비췄다. 그쪽을 쳐다본 뒤에야 생각이 났다. 점막도 안되는 거 아닌가? 눈도 점막인데.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온 흰 손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잘못 봤나보네. 아니면 환각물질이거나.
“괜찮으십니까?”
환청도 들리는 걸 보니 후자인 모양이다. 여기 사람이 나랑 내 친구 말고 또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소스라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면서 누군가 이 건물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잖아!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