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플라스크 밖의 사랑 2

박무현이 이해한 내용은 이렇다.

눈앞의 신해량이란 이 남자는 이 연구소 전 주인의 실험체다. 다만 사람을 납치해다 인체 실험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배양해낸 호문쿨루스라는 모양이다. 박무현은 어떻게 이 실험이 걸리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첫 호문쿨루스 배양 성공 이후로 생명 윤리에 대한 담론이 거세게 오갔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그 첫 성공 이후로 호문쿨루스 실험은 금지되었다. 배양부터 전면 금지되고 관련 정보는 전부 폐기 및 기밀에 부쳐졌다. 박무현은 처음엔 여기가 정부의 숨겨진 기관이었나 했지만 이어지는 신해량의 설명을 들으며 그 가설은 갖다 버렸다.

“저는 사랑을 연구할 목적으로 배양되었습니다.”

“예···예?”

신해량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설명했다. 

“이 연구소의 주인은 연인과 헤어졌던 모양이더군요. 자세한 걸 말해주진 않았습니다만,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실험체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리만족을 원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실험은 실패했고, 마지막 남은 저까지 폐기하긴 껄끄러웠는지 보존장치 안에 봉한 채 사라졌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흘렀으면 장치의 연한이 다 해 죽을 뻔 했던 저를 구해주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미남을 보며 박무현이 한 생각은 두 가지였다. 저 미모를 빚어낸 게 미의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놀라움과, 어쩐지 끌고 올 때 더럽게 무겁더라니! 하는 깨달음이었다. 훌륭한 얼굴을 가진 미남은 이 안에서 운동이라도 했는지 훌륭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키도 박무현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다른 곳도. 그렇다. 관에서 나온 그는 헐벗고 있었다. 관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황급히 눈과 손전등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박무현은 윗옷을 벗어줘야 할지, 바지를 벗어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둘다 들어가지도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좌절했다. 좋아, 이제 전라의 남성을 데리고 여기를 탈출해 주정뱅이를 찾아야 한다는 거지. 정말 멋진 하루야. 

다행히 박무현이 눈과 조명을 돌린 사이 신해량은 파티션으로 다가가 가림막을 북 찢어내 토가처럼 둘렀다. 그리고 한쪽 구석의 타일을 들어올리더니 뭔가 주섬주섬 챙겼다. 

“이제 됐습니다. 올라가시죠.”

찢어진 천을 두르고 있는데도 그리스 신화 속 인물같다. 확실히 사랑을 연구하긴 했구나. 저 얼굴을 보면 사랑에 빠지지 않기도 힘들 거야. 그런데 올라갈 수 있었으면 내가 널 꺼냈겠냐. 그래도 굴러 떨어진 덕에 한 생명을 구했으니 다행은 다행이다. 순식간에 비현실의 구렁텅이에 빠진 박무현의 뇌가 제멋대로 생각을 뻗어냈다.다시 책장을 쌓아올릴 생각에 난감하고도 암담한 한숨을 쉬고 있자 신해량이 다가와 책장을 들었다. 박무현이 안간힘을 쓰던 것에 비해 너무 수월한 동작이었는데, 박무현은 애써 근육때문이 아니라 먼저 저 거구가 든 관을 끌고 와서 힘이 빠졌기 때문일 거라며 위안했다.

신해량은 박무현을 흘긋 보더니 도움을 받는 건 포기한 것 같았다. 두 번이나 굴러 떨어진 사람의 몰골이 영 좋아보이진 않았다. 요령 좋게 책장을 쌓고는 날쌔게 기어 올라가 천장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박무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바라만 봤다. 

“올라오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어난 박무현의 여러 불행 중 세 번 굴러 떨어지기는 추가되지 않았다. 신해량은 뻗은 박무현의 손 역시도 수월하게 잡아 끌어올렸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박무현은 자기가 빠져 나온 구멍을 돌아봤다. 저 지옥의 아가리 같은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갔다 나온 게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외모의 남자와 땀으로 푹 젖은 옷만이 저 무저갱 속에 찍먹당한 것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박무현은 신발을 벗어 남자에게 건넸다.

“바닥에 깨진 유리가 많습니다. 맨발로는 위험합니다.”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양말을 빌리겠습니다.”

박무현은 신해량의 커다란 발과 자신의 발을 비교해봤다. 그래, 키가 저 사이즈면 발도 저 정도는 돼야겠지. 하지만 폴리에스테르 한 겹으로는 깨진 소주병을 막을 수 없지 않을까. 

“그···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깨진 유리병이랑 창문도 있고, 녹슨 곳에 스치면 파상풍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뒤축을 구겨서라도 신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적어도 나는 폴리에스테르 한 겹과 파상풍 예방 주사라는 방어막이 있단다. 그 미치광이 연구자가 자신의 호문쿨루스에게 사랑을 주입했는진 모르겠지만 파상풍 주사까지 놔주었는진 확신하기 힘들잖아. 박무현은 다시 신발을 내밀며 생각했다. 신해량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더니 신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어찌저찌 구겨 슬리퍼처럼 신었다. 뒤꿈치가 아슬아슬한데. 어쩔 수 없지. 박무현이 앞을 비추자 신해량이 쪼그려 앉는 게 보였다.

“업히십시오.”

“예?”

“바닥에 위험한 것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양말만 신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까는 양말을 빌리겠다고 하지 않았냐. 신해량이 미간을 찌푸린 게, 내가 미덥지 않다는 뜻이었나보다. 박무현은 조금 갈등했다. 찢어진 천조각 하나만 걸친 초면의 남자에게 업히느냐, 깨진 소주병과 녹슨 잡동사니 위를 양말과 백신만 믿고 걸어가느냐. 심정적으론 후자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지성인 박무현은 결국 전자를 택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호문쿨루스에, 방금 생명 유지 장치에서 빠져나온 사람인데도, 평범하게 따뜻했다. 

“일행을 잃어버렸습니다. 친구인데, 아마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우측 출입구에 절 내려주시고 기다리시면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나 신해량은 그 말을 듣고 좌측으로 몸을 틀었다. 박무현은 조금 당황했다. 어어, 하는 사이 작은 신발을 구겨 신고도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1층 좌측 출입구에 도달했다. 친구는 잠긴 문고리를 한 손에 걸친 채 잠들어 있었다. 박무현의 손에서 흔들리는 손전등으로 안전한 곳을 파악한 신해량은 박무현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잠든 웬수가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 뒤, 구겨진 박무현의 신발은 그대로 신해량이 신고 잠든 녀석의 신발을 벗겨 박무현이 신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잠든 친구를 신해량이 둘러메었다. 다소 짐짝같아 보이는 형태였으나 이 개고생의 원흉을 보는 박무현의 눈에는 한 치의 동정도 없었다. 그저 따뜻한 물에 씻고 누워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정뱅이 셋을 태워보내고 호문쿨루스 하나의 거취까지 마련해야 하네? 저 꼴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게 둘 수 없으니 집에 데려가야 할 성 싶은데. 박무현은 당장 운전을 해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겨웠다. 이 사람, 운전은 못하나? 차로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다행히 남아있던 두 놈도 잠들어있었다. 이 숨바꼭질을 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박무현은 행복해하며 조수석의 주정뱅이를 끄집어냈다. 

“앞에 타세요.”

셋 다 뒷자리에 몰아넣고 신해량이 조수석에 탔다. 잠시 차가 기우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내부 조명에 더 자세하게 보이는 비현실적인 외모와 처참한 패션 상태에 박무현의 정신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이렇게 생긴 옷을 입고 내 차에.

“오늘은······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주무시겠어요? 혹시 가실 곳이 따로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 녀석들만 내려주고 갑시다. 신해량 씨도 피곤하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방금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에게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강제로 열어서 응급상황인데 말을 안 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박무현은 그냥 차 안에 웬수 덩어리들을 방치한 채 귀가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산을 내려갔다. 

찢어진 천을 대충 두른 사람을 내보이지 않자니 박무현 혼자 술에 꼴은 셋 모두를 이고 지고 올라가 동거인에게 인계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뒤, 주차장에서 자취방까지 신해량과 달리고 나니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박무현의 몸뚱어리도 꽐라와 진배없어졌다. 안심한 그는 간신히 손님에게 물을 대접하고, 화장실 안내를 하고, 손님용 토퍼와 담요를 내주고, 양치를 한 뒤 침대에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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