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제단과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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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구획별로 색색이 피어난 꽃의 달큰한 향내, 초목의 싸름한 풀향, 흐드러진 풍경이 망그러지는 착시가 일 정도로 화려한 시야. 재희는 검은 물이 솟구치는 분수와 그 아래 제단을 눈에 담았다. 분수도 제단도 꽃에 뒤덮여 거대한 토피어리 같았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노란 볕이 드리웠다. 

이번 회차의 김재희는 본 적 없는 풍경.

라피도포라를 짊어지고 계단을 오른 김재희는 영영 알지 못할 풍경이다.

준비 과정에서 전해들은 말과 무현에게서 흘러나온 단편적인 정보들로 상상한, 어쩌면 그가 닿았을 수도, 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광경 속에서 그는 그가 기어온 사천 개의 계단을 떠올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지난하고 끝없는 길을. 그가 원하던 그 사람인지 확신하지도 못하고, 이 계단이 언제쯤 끝나는지도 모른 채 차갑고 먼지 쌓인 길을 네 발로 기어 올라오던 시간을. 인류의 죄악 대신 식물 한 뿌리를 짊어지고 타인의 구원 따윈 내버려둔 채 골고다 언덕보다 높은 계단을 오르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메시아. 

고통과 눈물로 이어진 계단과 그보다 더 큰 불안 속에 오른 엘리베이터 안의 시간을 버티게 한 건 단 하나였다.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오직 그 희망만으로 마주한 예비 구원자는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자신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피력하던 신의 음성과 표정을 기억한다.

재희는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엉망으로 틀어지지 않은 의족이 걸음을 곧게 했다. 붉은 카펫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덮인 꽃이 발 아래서 뭉개졌다. 누가 봐도 그를 위해 예비된 길이 아니었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가 없었다. 제단 바로 앞까지 다가가 분수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꿈을 꾸었어요.”

무현의 눈썹이 살풋 찌푸려졌다. 다정한 그의 미간에 염려가 섞이는 게 보였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돌아가고 싶어요? 그가 묻는 시점은 영화관일 수도, 해저기지의 제단 앞일 수도 있겠다.

재희는 돌아가고 싶다.

그 영화관이 불 타기 단 5분만 전으로.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번엔 실수 없이 해낼 것이다. 눈을 떴을 때 형이 살아있고 자신의 사지가 멀쩡한 완벽한 결말을 위해 그는 기꺼이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커피 식겠어요.”

무현은 질문을 꺼내는 대신 커피잔을 재희 앞으로 슬쩍 밀었다. 재희 역시도 답하는 대신 잔을 쥐었다. 세 손가락에 전해져오는 저릿한 온도. 재희는 의지로 컵을 톡 건드렸다. 사기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재희는 이 온도가 그의 약지와 소지로 전달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처음부터 이 온기는 손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도. 

질답은 불필요했다. 둘은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치유의 진척 상황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재희가 미련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무현 역시 어느 밤의 한 자락을 쥐고 울고 있을테다. 대신 서툰 그루밍처럼 위로를 한 조각씩 건넸다. 재희가 쥐고 있는 커피잔과 무현의 소파 위에 놓인 무설탕 사탕 상자처럼. 재희의 시선이 무현의 의지를 바라보았다. 

“시럽 들었어요?”

“치과 의사에게 너무 큰 걸 바라시네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빙그레 웃는 무현의 얼굴은 커피 광고 모델처럼 편안해보였다. 절대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단 주제에 지난 과거의 그늘과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것만 같은 표정을 한 그가 얄미웠다. 돌아갈 수 있다면, 저 상처도.

“제 이 썩으면 무현 씨가 봐주실 거잖아요.”

“그러지 않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겠죠.”

실없는 실랑이가 두어번 이어지고 무현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늘도 재희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재희는 입술을 삐죽였다. 

“재미없는 이야기뿐인데요. 요즘은 너무 지루해요.”

“재희 씨도 재미 없는 제 얘기 들어주잖아요. 그리고 저는 재희 씨 얘기 재밌어요.”

이걸 재미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가? 무현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게 보였다. 그 상냥한 고뇌를 보며 재희는 일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재희가 사천 개의 계단은 너무 길고 힘들었으며, 당신은 나의 구원이자 희망이었으니 나를 건진 책임을 져달라 땡깡을 부리던 때였다. 

‘계단을 올라온 건 재희 씨지, 제가 아니예요. 재희 씨는 이미 스스로를 구한 거예요.’

그렇다 한들,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 없이 올라갔을 리가 없다. 라피도포라를 안기고 올라오라고 종용하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해저기지와 함께 가라앉았을 거다. 무현 씨는 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재희는 그저 사람으로서 사람을 구한 것이 고결함을 덜어낼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가 그리 말주변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재희 씨가 이런 저로 만족하세요.”

재희 씨는 도파민 디톡스가 필요해요, 라며 장난스레 웃어보이는 무현을 향해 재희도 미소를 돌려주었다. 여전히 돌아가고 싶다. 후회는 밤잠을 살라먹고 시시때때로 튀어나온다. 길을 걸을 때, 밥을 먹을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형이 좋아하던 반찬, 그날 보던 영화의 배우, 그 배우와 같은 머리색, 휠체어, 어둠, 가스렌지의 불꽃, 영화 대사의 어느 한 단어까지도. 온통 부러진 의족으로 돌투성이 비탈길을 걷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단 위의 구원자와 계단 위의 무현 씨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냐 하면, 재희도 이제는 선뜻 웃으며 앞에 있는 친구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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