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귀환 불능 지점

더 많은 귀환 불능 지점이 생길 거예요.

항공 여행을 또 할 줄은 몰랐다. 나도 무현 씨도 대한도에서의 인상 깊은 고생 끝에 평생 한국을 벗어나지 않기로 결심한 줄 알았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그 엄청난 고생은 희석될지언정 이제는 낡아버린 프런티어 정신은 잊지 못한 모양이다. 여전히 미지를 탐닉하고자 하는 걸 보면. 

소란스런 공항에서 무현 씨는 한눈에 띄었다. 돌아와서도 그는 종종 염색을 했다. 새치가 많이 섞인 머리는 탈색 없이 염색해도 그라데이션을 넣은 것처럼 예쁘게 자리잡았다. 오늘의 그는 이전처럼 하늘빛이다. 나는 다시 해외로 나가는 시점에 그 때처럼 하늘색으로 염색한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아 비죽이 웃었다. 용기의 표상이 필요할 정도로 두려우면서도 부딪치고 도전하는 사람. 질투를 닮은 열망이 속에서 끓었다. 저런 사람이라서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무현 씨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빠르게 다가가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재희 씨 늦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알람을 다섯 개 맞춰놨는데 다섯 번째 알람을 끄고 10분 뒤에 운 좋게 깼어요.”

거짓말이다. 새벽부터 뜬 눈으로 지새웠다.

잠이 든지 두어 시간 만에 반짝 눈이 뜨였다. 나는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이라도 된 것 같다고 헛웃음을 지었고, 내가 아직 어린이던 시절 새벽에 눈을 뜬 내 옆엔 같이 잠 못 이루는 형이 있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빈 원룸을 한 번 바라보곤 머리맡에 놔둔 의지를 끼웠다. 그리고 침대에 기대어둔 의족을 챙겼다. 실리콘 벨트를 무릎에 고정하면서 나는 최대한 오늘 일어날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늦지는 않겠다던가, 무현 씨의 관광 패션을 볼 수 있겠다거나, 라피도포라에게 물을 주고 가야겠다는 것들. 아직은 깜깜했고, 창으론 주광색 가로등 등불만이 흐리게 비쳐들었다. 

물은 아침에 주는 게 좋다고 했던가. 해가 뜨려면 몇 시간 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은 정말 싫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손 놓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게 초조하고 좀이 쑤셨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던 상관 없이 형과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결과를 통보받은 것처럼 그저 시간이 고지하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무현 씨를 만나며 조금은 참을 만하게 되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변하는 것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바심을 잊기 위해 라피도포라를 닦아주기로 했다. 책상 위에 개켜져 있는 손수건을 집어들고 세면대로 갔다. 무현 씨의 것이다. 어쩌다 이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갈색으로 얼룩져있는 걸 보면 우리 중 누군가가 커피를 엎었나 보다. 물에 적셔 라피도포라가 자리한 창가에 앉았다. 불 꺼진 방 안에서 가로등에 비친 식물은 검은 손을 쫙 편 조형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내가 쥐고 닦아주는 얇고 서늘한 손은 형의 손이었다가, 부모님의 손이었다가, 무현 씨의 손이 되었다. 오늘 일어날 일만 생각하기로 한 다짐은 어느 새 질척하게 녹아있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그 날의 영화관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 번, 그 날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가슴께의 거스러미를 느낀 건 그 때였다. 다시 한 번 그 날로 돌아가서 모든 게 ‘괜찮아’진다면. 그 때도 무현 씨를 만날 수 있을까?

모든 게 괜찮아져서, 모든 게 제대로 돌아와서 나는 무한교는커녕 사이비 종교엔 얼씬거리지도 않게 된다면? 일부러 내가 해저기지에 입사한다고 해도 무현 씨와 지금처럼 지낼 수 없게 된다면? 손에 쥔 손수건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바라봤다. 우리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위로와 공감을 나누는 얼룩이 되지 않는다면. 

......노력하겠지만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 함께 하기로 한 여행도 없던 일이 된다. 이 손수건을 받은 일도. 카페인을 나누며 시시콜콜한 신변 잡기를 공유하던 일도. 반복되는 고통을 술회하던 그의 먹먹한 목소리도. 나는 어둠 속에서 한없이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형이 살아 돌아오고, 내가 손가락과 두 다리를 잃지 않고, 해저기지에 나와 무현 씨 모두 입사해서, 붕괴 속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와 지금의 관계를 맺기까지. 나는 상상 속에서 해저기지가 붕괴되기 전에 무현 씨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가 데면데면한 친구 사이로 남기도 했고, 무현 씨가 해저기지 안에서 루프를 겪는 동안 죄책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왔다. 라피도포라의 녹색이 식별 가능하게 되고 조금 후에 가로등 불빛이 꺼졌다. 그러나 여명은 하얗게 남아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했다. 

나는 간신히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내 선택이 무엇이건,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손수건을 잘 빨아 의족 관리용 극세사 면포 옆에 널어두고 라피도포라에게 물을 주었다. 첫 차를 타고 공항 셔틀 타는 곳까지 가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무현 씨는 모닝콜이라도 할 걸 그랬다며 약간의 자책과 안도를 내뱉었다. 나는 그냥 웃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오늘부터는 모닝콜 해주세요. 저희 오늘부터 숙소 같이 쓰거든요?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하던 얼굴이 미소로 사르르 풀리는 게 좋았다. 좋다. 이 사람과 이 시간이. 

수속을 마치고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오를 때 무현 씨는 조금 긴장한 티가 났다. 

“같이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내가 속삭이자, 무현 씨는 약간 얼빠진 표정이었다가 마주 웃어보였다. 

이륙을 마치고 비행 고도에 오르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떤 우리는 지쳐 서로의 어깨에 기댔다. 바다 위를 지날 때면 내가 무현 씨의 손을 잡았고, 기체가 흔들릴 때면 무현 씨가 내 손을 잡았다. 나보다 훨씬 떨면서도 안심시켜주려는 그 온기를 붙들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익숙하고 안온해서 끔찍한 고통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당신은 나의 귀환 불능 지점이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