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3

제안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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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https://youtu.be/x3GETyhMtGQ


서지혁은 3층이라는 높이가 참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밖을 편하게 오고 가려면 1층이나 2층, 사생활 보호를 생각하면 7층 이상, 창밖으로 보이는 전망을 따지자면 15층 이상이 딱 좋았다. 3층은 뭐랄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바엔 계단을 사용하는 게 빠르지만 피곤한 날엔 걷는 게 귀찮아지는 위치였고, 마음 편히 거실에서 알몸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만큼 밖에서 안이 잘 보였고, 창밖으론 사람들 정수리나 주차된 자동차만 봐야 하는 애매한 높이였다.

물론, 이곳은 경우가 조금 다르긴 했다. 여기 사는 인간은 계단 3층은 무슨 30층도 단숨에 오를만한 체력을 가진 무쇠 같은 남자였고, 보아하니 유리창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코팅 처리가 되어있어 거실에서 흉기 같은 거시기를 덜렁대고 다녀도 남에게 들킬 일이 없었고, 낮은 층수 치고 밖에 보이는 풍경도 꽤 봐줄만했으니까.

그러니까, 서지혁이 3층이라는 높이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자신의 집도 아닌 옛 상사의 집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창밖을 내다보며 불만이 가득 부푼 입술을 삐죽이고 있냐면, ……2층만 되었어도 그냥 뛰어내렸을 텐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는데, 아무리 낙법으로 떨어져도 팔이나 다리 하나는 내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도망치는 데에 성공하면 차라리 당장의 희생을 감수할 텐데,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결국 옛 상사에게 잡히는 똑같은 엔딩만 반복되었다.

휘이이이잉. 세차게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옆에서 아래층을 뚫을 기세로 한숨만 내쉬고 있으니 설거지를 끝낸 신해량이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다가왔다. 뭐해? 뭐 합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성의 없이 대답하니 신해량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기청정기와 서지혁을 번갈아 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다고 담배냄새 안 빠져."

"……많이 납니까?"

"내 입에 든 게 1등급 한우 목살스테이크인지 네가 씹다 버린 담배꽁초인지 구분이 안 되던데."

"거, 하. ……그렇게 심하면 말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네가 기호식품 가지고 시비 걸지 말라며."

햐. 기억력도 참 좋으시지. 할 말이 없어서 머쓱하게 뒷목만 긁고 있으니, 신해량이 손 닦던 손수건을 접어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서지혁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서지혁의 시선이 향한 창밖을 같이 바라보았다. 냄새난다면서 왜 가까이 오십니까? 서지혁이 슬쩍 옆으로 피하며 양심도 없이 투덜대자 또 아무 말이 없다. 충분히 익숙한 무시에 서지혁도 그러든가 말든가 저 멀리 날아다니는 새 뒤꽁무니만 쳐다봤다. 새는 하늘을 훨훨 날다가 근처 커다란 나무의 가지 위에 사뿐히 앉았다. 저 새는 좋겠네. 옛 직장 상사 집에 잡혀가도 창문 열고 날아서 도망갈 수 있으니까.

"어휴, 똥을 싸네."

"?"

"아. 당신한테 한 말 아닙니다."

이름 모를 새의 배변활동을 목격한 서지혁은 기분이 더러워져 인상을 팍 썼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신해량에게 새가 똥을 싸서 그렇습니다. 대충 설명을 해주니 그렇냐는 듯 거기에 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왜 하필 3층입니까? 애매하게."

"뛰어내리려고."

"허."

준비된 듯한 대답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게 설명해 주세요. 길게."

이제 당신은 내 상사 아니라고 내도록 개기고 있는 옛 부하직원에게 자신이 입 아프게 설명을 해줄 의무가 있나 생각하는지, 서지혁을 잠시 노려보던 신해량이 자비를 베풀듯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무슨 일 생기면 뛰어내려서 도망가려고. 그게 제일 편하잖아."

"그 무슨 일이라는 게 화재, 테러, 재해나 재난 뭐 이런 겁니까?"

"그래."

서지혁은 이 사태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잘 알았다. 안 그래도 안전 과민증인 인간이 자기 목숨 보다 아끼는 팀원을 잃을 뻔했던 그날이 꽤나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신해량은 과거를 붙잡고 사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중 썩 좋지 않은 추억은 반복되지 않게 징그러울 만큼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집착증이나 편집증이라 불렀지만 서지혁은 그것을 신해량의 약한 부분이라 칭했다.

"제가 아까 시뮬레이션을 해봐서 아는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최소 골절입니다. 뛰어내릴 거면 1층이나 2층을 사셨어야죠."

"거긴 전경이 별로더군. 벌레도 잘 들어오고. 그리고 다치지 않고 뛰어내릴 수 있어. 낙하산 줄을 걸고 내려가면 돼."

"그놈의 낙하산 줄로 나중엔 아주 건물 사이도 뛰어다니겠습니다. 스파이더맨이 따로 없네요."

서지혁의 비아냥에 신해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또, 또. 뭐가 좋다고 이렇게 실실 웃고 있는지. 과하게 보기 좋은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서지혁이 삔또가 상한 듯 눈썹을 씰룩였다.

"그런데요. 제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절대 혼자 안 튈 거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제 너나 나나 누굴 보호할 의무 같은 건 없을 텐데. 손 닿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내가 히어로도 아니고 모두를 구할 수는 없지."

"제가 여기 꼭대기 층에 사는데 중간층에 불이 났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여기서 혼자 뛰어내릴 거야."

지체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거짓말이죠?"

"그래."

서지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손 닿지 않는 곳에 살고 싶은 겁니다.

멈출 줄 모르고 윙윙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옆에 한참을 서 있던 서지혁은 결국 신해량에게 옷과 칫솔을 빌렸다. 짝사랑 중인 상대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계속 끈덕지게 달라붙는 상대가 신경 쓰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집을 나가는 게 제일 베스트였지만 이 망할 짝사랑 상대는 서지혁을 쉽게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할 말이 있다는 밑밥은 다 깔아뒀으면서 당장 말할 생각은 없어 보여 잠시 생각도 정리할 겸 화장실로 튄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생각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고 그냥 샤워기를 입에다 대고 한참 동안 멍 때리며 가글만 했다.

깨끗하게 씻고 거실로 나오니 다시 태어난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신해량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어컨을 튼 듯 시원한 공기는 마음에 들었다.

오늘 처음 느끼는 긍정적인 기분에 서지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하, 여기 딱 TV가 있어야 하는데. 비어있는 벽면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자 신해량이 방에서 나왔다. 1초 전까지 이 세상이 조금은 아름다워 보였는데 신해량이 눈에 들어온 순간 다시 기분이 나락을 갔다. 서지혁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해량은 모델 워킹하듯 곧은 자세로 걸어와 서지혁의 옆에 앉았다.

"거, 소파도 넓은데 다른 데 앉으시죠?"

"왜?"

정말 순수한 의문이 담긴 표정에 서지혁은 헛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왜긴 왜야.

"당신 좋다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안 불편합니까?"

"안 불편해."

칼 같은 답이 튀어나와 서지혁이 허허허. 웃었다.

"예, 뭐. 하긴. 당신 좋다는 사람 한두 명도 아닌데 그런 거 신경 쓰면 못 살죠."

"……그런 게 아니라, 너라서 안 불편한 거야."

"저는 당신이 아주 불편했으면 좋겠는데요."

신해량이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안 어울리게 톡도 그만 좀 하시고요."

"네가 전화를 안 받았잖아."

"아…… 그건 당신 번호 차단해서 그렇습니다."

안 받은 게 아니라 전화가 안 온 겁니다. 서지혁은 죽고 싶냐고 말하는 듯한 신해량의 눈을 살살 피했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볼을 긁으며 말하니 신해량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도 톡은 그냥 뒀는데요. 내가 그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감사할 일이 많으면 좋죠. 대충 얼버무리며 말하니 신해량이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서지혁은 문득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굳이 일방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와서 혼자서만 느끼는 불편함을 참아가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만약 여길 오지 않았다면 신해량은 정말 서지혁을 찾기 위해 뒷조사를 했을까? 만약 어떻게든 찾아냈다고 해도 신해량이 서지혁에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냐고 주먹질을 했을까? 여기서 도망이라도 시도한다면 서지혁을 제압하며 막을까?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며 쌍욕이라도 할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서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아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서지혁이었다. 강압적으로 보이는 어조 뒤엔 항상 서지혁을 향한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신해량은 단 한 번도 서지혁의 잘못을 탓하며 욕을 하거나 체벌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내뱉는 협박은 늘 거짓말투성이였다. 서지혁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더라도, 신해량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서지혁이 이곳에서 신해량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서지혁의 의지였다.

신해량이라는 바닷속으로 뛰어든 건 다름 아닌 서지혁 본인이었다. 거센 파도에 휩쓸린 거라 탓하려 해도 이 더럽게 상냥한 바다는 고여있는 물처럼 잠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탓하라는 듯 누구보다 푸르고 청량한 바다 주제에 어두운 심해의 탈을 썼다. 그는 늘 이렇게 악역을 자처하며 서지혁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그래서 서지혁은 겁이 났다. 신해량이 또 자신을 위해 어떤 강압을 모방한 희생을 하려고 이러는 것인지 두려웠다.

"……그래서 도대체 할 말이 뭡니까? 뭘 알려주겠다는 건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신해량은 기다렸다는 듯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같이 살아."

"허."

상상도 못 했던 제안에 서지혁이 실성한 사람처럼 흐흐대며 웃었다. 그런 반응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신해량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서지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서지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같이 살자고 하면 바로 짐 싸 들고 튀어 들어올 만큼, 제 마음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미소를 띠며 말하던 서지혁의 입꼬리가 문장을 끝맺을 즘엔 완전히 내려가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나는 당신한테 바라는 게 단 하나도 없는데.

신해량은 다 좋은데, 서지혁을 그냥 놔두질 못했다. 그거 하나를 더럽게 못했다. 그는 서지혁을 책임지려했고, 바란 적 없는 희생은 늘 서지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더 못나지고 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지혁은 씁쓸함이 걸린 입꼬리를 끌어당겨 다시 미소 지었다.

"팀장님. 아니, 거……. 보십쇼. 당신을 7년을 봤는데 부를 이름이 없습니다. 이게 딱 우리 관계입니다. 뭐라 정의할 수도 없는 이름 없는 관계."

"이름이 필요한 거면 내가 지어볼게."

"저랑 포커라도 치시게요?"

"명목이 필요한 거라면 그렇게 해."

"……당신은 그냥 장난 같아도 나는 장난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릴 쉽게 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 네가 알려주면 되잖아."

"싫습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서지혁."

예. 하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한 느낌에 서지혁은 입만 벙긋댔다. 뜨거운 홍차를 식도에 바로 때려 넣은 것처럼 속이 뜨거웠다. 하 시발. 겨우 내뱉은 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값싼 욕설뿐이었다. 서지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시큰해진 눈동자를 식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네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나?"

"예. 그런 거 같은데요. 그게 아니면 뭔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딴 소릴 희망고문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왜 본인을 인질로 잡습니까? 저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는데요."

서지혁의 물음에 오늘 처음으로 표정에 금이 간 신해량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손으로 꾹 눌렀다. 신해량이 침묵하자 적막 속에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위이이잉.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고요마저 청소하려는 듯 세차게 돌아갔지만 이 숨통을 틀어막는 먹먹한 공기는 정화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지속되는 묵묵부답을 참지 못한 건 언제나 그렇듯 서지혁이었다. 서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던져둔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주제에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 보이는 남자를 힐끔 바라본 서지혁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저 좋아하십니까?"

"……."

듣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아무런 미동도, 대답도 없이 석상처럼 앉아있는 신해량을 보며 서지혁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일할 땐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꼭 이럴 땐 솔직했다. 예상했던 반응에 갈게요. 하고 짧게 인사를 하니 그제야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한다.

"기다려."

"저는 그럴 의무 없습니다. 당신은 할 말이 없으신 듯하고요."

"생각하고 있잖아."

"그 생각은 저 부르기 전에 하지 그러셨습니까."

살다 보니 서지혁이 신해량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날도 다 있었다. 지금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마른 세수를 한 신해량이 서지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은 잘 먹었습니다. 이참에 그쪽 업종으로 전향도 생각해 보시죠. 오픈 주방에서 얼굴만 슬쩍 보여줘도 손님이 줄을 설 거 같은데. 좋아하지도 않는 일 하면서 고생하지 말고요. 뭐든 혼자 다 짊어지지도 말고. 뭐가 잘못되면 남 탓도 좀 하고. 남 챙길 시간에 본인이나 더 챙기시고요."

"시끄러워."

"햐. 마지막이라고 진지하게 인생 조언 좀 해줬더니. 하여간 성질머리하곤. 예, 뭐 그럼 마음대로 사시든가요."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예?"

뜬금없는 대답에 서지혁은 잠시 이 대화에서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좋은 말 좀 해줬더니 잘라먹고 한다는 말이 자기한테 기회를 달란다. 무슨 기회? 차인 건 이쪽인데 구질구질한 건 저쪽이었다.

"혼자 고백하고 도망가면 내가 뭐가 돼.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아니면 네가 나한테 잘못을 했어? 누구 마음대로 마지막이래. 뭐? 직급을 빼면 남는 게 없어? 관계에 이름이 없어? 네 창의력이 부족한 걸 탓해. 남들은 뭐 대단한 거라도 남아서 사람을 만나는 줄 알아? 나한텐 네가 남았고 너한텐 내가 남았어. 나는 네가 평생 나를 그 애매한 호칭으로 불러대도 상관없어.

그리고 또 뭐? 내가 대충 알 거라 생각했다고? 나라고 뭐든 다 알고 있었을 거 같나? 아니. 몰랐어. 네가 통보하듯이 말한 그날에서야 알았지. 그리고 나선 갑자기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는데, 내가 그렇게 해줘야 하나?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너한테 빚이라도 졌어? 넌 이제 내 말 들을 의무가 없다고 했지. 나도 그딴 싸가지 없는 일방적인 태도 받아줄 의무 없어.

서지혁. 나를 사랑하는 게 겁나? 아니면 나를 잃을 게 무서운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먼저 떠날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그래서 선수쳐서 도망을 가는 건가? 그렇게 해서 달라지는 게 뭐지? 내가 먼저 도망가든 네가 먼저 도망가든 결과는 같은데 왜 뭘 하려는 시도도 안 해보고 달아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여간 빡이 친 게 아닌지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 같은 언사에 서지혁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말로도 폭행죄가 성립된다면 서지혁은 신해량을 사실 적시 폭행죄로 고소하고 싶어졌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에 입만 벙긋대고 있으니 대답하라는 듯 매서운 시선이 서지혁을 억눌렀다. 서지혁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짧은 비음을 내뱉었다.

"……햐. 무슨… 골이 다 울리네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손으로 눌러 막은 서지혁이 신해량의 말을 곱씹으며 눈썹을 휘었다.

"……질문에만 답을 하자면요. 반만 맞는데요. 당신 사랑하는 거? 예, 겁납니다. 다 말라비틀어져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감정이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몰라서 쪽팔리고 불안하고 짜증 납니다. 당신 잃는 거? 예, 무섭습니다. 그 원인이 내가 되는 게 제일 무서워요. 그리고 또 뭐였더라… 당신이 도망가는 거요? 그런 꼴 평생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저는 차라리 당신이 도망을 좀 갔으면 좋겠는데요. 저는 당신이 나 위한답시고 하기 싫은 짓 하며 억지로 붙어 있을까 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당신이랑 뭘 할 생각이 없어요. 도대체 제가 당신한테 무슨 기회를 줘야 합니까. 저는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게 더 모르겠는데요."

"……나한테도 네가 소중하니까."

"……."

"나도 널 잃는 게 무서워."

그리고 하기 싫은 짓 억지로 한 적 없어. 신해량이 덧붙이며 말했다. 기껏 식혔던 눈가가 다시 아려왔다. 지지 않으려 고개를 바짝 들고 신해량을 바라보던 서지혁이 패배를 선언하듯 고개를 떨궜다. 나는 평생 이 인간을 꺾을 수가 없겠구나. 서지혁은 코를 흥! 하고 한번 먹은 뒤 붉어진 눈을 손으로 비볐다.

"그래서… 나랑 뭐 하자는 겁니까?"

"딱 세 달만 살아. "

"여기서요?"

"그래."

"세 달을 살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나도 몰라. 정분이 나든 칼부림이 나든 어떻게든 끝은 보겠지. 아무것도 안 해보고는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나랑 뭐… 같이 있으면 정분이라도 나는지 관찰카메라 같은 사회 실험이라도 해보자는 말입니까? 여기가 무슨 애정촌이에요?"

"따지자면 그런 거지. 처음 보는 사람들도 가둬놓으니 서로 눈이 맞던데."

"그런 프로그램 본 적도 없으시잖아요."

"들은 적은 많아. 팀장 회의 때도 vod로 연애 프로그램을 띄워두고 떠들어대는 놈이 있었어."

"아, 그 걔. 이름이 뭐더라…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잠시 딴 데로 샌 흐름을 바로잡으려는 듯 서지혁이 눈알을 굴리며 대화 내용을 곱씹더니, 아! 하고 손뼉을 쳤다.

"그래, 이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저기요, 저랑 당신은 7년을 거의 갇힌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퇴근해도 바로 옆방에 직장 상사가 있는 삶을 이미 7년이나 살았다구요. 그 환경이랑 다를 게 없는데 또 실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당신 말대로 서로 모르는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가능한 겁니다. 이미 당신이나 저는 너무 오래 알고 지내서 서로 새로울 것도 없어요."

"새로울 게 왜 없지? 내가 요리 배운다는 거에도 놀란 놈이. 넌 몰라도 나한텐 모든 게 다른 상황이야. 다시 말하지만 안 해보고는 모르는 일이야."

"허…… 예, 뭐 노력이라도 해보겠다니까 감사하긴 한데요. 제 의사는요? 저는 딱히 당신이 저를 좋아하길 바란 적이 없는데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이랑 뭘 해볼 생각이 없어요. 그냥 털어내고 싶은 거지."

"그것도 삼 개월 뒤에 해."

"너무 무책임한데요. 같이 있다가 감당도 못할 만큼 당신이 좋아져서 제가 결혼 안 해주면 죽겠다고 자살쇼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것도 그때 생각하지."

"하…… 진짜."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어? 호텔이요. 짐 싸서 이번 주 안에 들어와. 진짜 그래야 합니까? 그렇게 하자.

차단도 풀고.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낸 신해량은 간다는 서지혁을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서지혁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이미 마음을 먹은 인간은 서지혁의 말을 들어 처먹는 것 같지 않았다. 꽤 만족스러워 보이는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견과류 한 봉지를 쥐여주며 배웅했고, 서지혁은 새똥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죽상이 돼서 고개를 꾸벅하고 거대한 수조 같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었지만 해가 여전히 쨍쨍했다. 햇빛을 막기 위해 겉옷을 입으려 봤더니 옷을 다시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지혁은 신해량 냄새가 나는 옷을 기분 나쁘다는 듯 펄럭이다 한숨을 쉬고 겉옷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벗어둔 옷도 챙겨오지 않았다.

그거 내가 제일 아끼는 옷인데.

팔자에도 없는 애정촌에 강제 입주 제안을 받은 서지혁은 뒤를 돌아 자신이 나온 건물을 노려봤다. 미래의 자신이 갇힐 감옥을 보는 수감자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확실하게 끝을 보려고 온 것인데, 그 끝을 세 달이나 연장당했다. 담배가 생각나 한 대 피우려 했는데 남의 옷에 담배냄새를 묻히고 싶진 않아서 견과류 봉지를 뜯어, 말린 라즈베리를 입에 넣었다. 상큼달달한 것이 입에 들어오니 기분이 좀 나아진 서지혁은 건물을 노려보는 것을 그만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예.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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