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1

퇴사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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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저기지 탈출 후 퇴사한 서지혁과 신해량의 이야기입니다.

해저기지가 어찌저찌 무너지지는 않고 대충 수습되었다는 얼렁뚱땅 설정입니다.

2023.06.04에 쓰기 시작해 원작 설정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제 : 도망가는 강아지를 잡아 키움. 강아지가 주인 말을 안 들음. 주인이 강아지를 통제함.

BGM : https://youtu.be/VX-TkEMQAuU


하루아침에 직장이 무너지고 인류가 무너지고 정신과 멘탈이 무너지고. 별의 별일을 다 겪어도 결국 시간은 흐르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퇴사 날이 오긴 왔다. 이미 오래전 방을 비워둔 덕분에 손에 든 건 명목상 챙긴 박스 하나. 서지혁은 뒤를 돌아 일주일 뒤 퇴사 예정인 제 상사를 바라보았다. 아, 더럽게 눈부시네. 이 시간에 이렇게 해가 강렬했던가. 후광처럼 솟아오른 햇빛에 눈을 잔뜩 찌푸리고 쳐다보니, 뭘 보냐는 듯한 눈이 그를 마주했다.

“표정이 왜 그래?”

“눈부셔서요. 뭐 햇빛도 조종할 줄 아십니까? 아주 태양도 배경 소품으로 써먹고 전지전능하시네요. 예전에 내다 버린 신께서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

“옙.”

신해량은 팀원들이 준비한 퇴사 기념 선물이 든 종이가방 몇 개를 건넸다. 서지혁이 종이가방 고리를 팔에 대충 끼운 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멀리서 날아오는 헬기가 점처럼 보였다.

“쉬는 동안 어디서 지낼 거야?”

“집 구하기 전까진 동생 집에서 며칠 지내려고 하는데… 고민입니다. 어차피 3개월 쉬고 또 어디 처박힐 거 그냥 호캉스 하면서 돈지랄이나 할까 봐요.”

“갈 곳 없으면 내 집에 가 있어. 계약한지 얼마 안 돼서 있는 건 없지만 먼지만 좀 털어내면 지낼만할 거야.”

이미 준비된 듯한 신해량의 반응에 서지혁이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싫습니다. 저 이제 당신 안 볼 겁니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서지혁의 폭탄선언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감으로 매일 서지혁에게 납량특집을 선사했던 그의 상사도 이번 깜짝 발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 표정이 퍽 마음에 드는지 서지혁은 이가 다 보이도록 씨익 웃어 보였다.

“……왜 안 보는데?”

“보기 싫어서요.”

평생 들어본 적 없었을 폭언에 보기 좋게 잘 생긴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잘 빚어진 고급 도자기에 거슬리는 금이 하나 생긴 것 같았는데, 서지혁은 자신이 만들어낸 작은 틈이 마음에 들었다. 저벅 저벅.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발소리가 거칠게 다가왔고. 터덜 터덜 터덜. 서지혁은 신해량이 좁힌 거리 이상으로 그에게 멀어졌다.

“언제까지 안 본다는 거야? 3개월 쉬는 동안?”

“영원히? 평생? 대충 그 사이? 다음 업무는 당신이랑 다른 팀으로 배정해 달라고 이미 연락 돌렸습니다.”

“언제 그랬는데?”

“어……. 내일?”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 소리가 짧게 들렸다. 이유가 뭐야? 대충 알 거라 생각하는데요. 몰라. 그럼 모르는 채 사십쇼. 장난해? 장난 아닌데요.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점처럼 보였던 헬기가 손가락 만하게 커졌다. 더럽게 안 오네. 중얼대던 서지혁이 셔츠 주머니에 꽂아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박스를 옆구리에 대충 끼우고 바람도 한 손으로 대충 막고 나머지 손으론 싸구려 터보 라이터로 대충 담뱃불을 붙였다. 불맛이 영 별로라, 아끼는 거 빌려줬더니 어디 불지르느라 잃어버리고 온 상대를 원망하듯 잠시 노려보았다. 그 상대의 기분도 영 마뜩잖은 듯 잘생긴 눈썹이 크게 휘었다.

“저 이제 당신 부하직원 아닙니다. 기호식품 가지고 시비 걸지 마십쇼.”

마지막이니 막 나가겠다는 옛 부하직원의 뻔뻔한 하극상을 지켜보던 신해량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이제 쫓겨날 직장도 없겠다, 서지혁은 보란 듯이 하늘에 담배연기를 퐁퐁 뿜어냈다.

“연락받아.”

“안 받을 겁니다.”

“서지혁.”

“그렇게 불러봤자 이제 안 무섭습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서지혁을 억누르듯 죄어왔다.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다. 이 인간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상사도 뭣도 아니다. 지나가던 덩치 좋고 온몸이 무기 같은 남자다. 어라? 이건 좀 무서운가. 지지 않겠다는 듯 같이 노려보던 눈을 도르륵 굴려 애꿎은 헬기만 쳐다봤다. 이놈의 헬기는 기어 오나 수혁이 이 새끼를 그냥 확. 7년을 구른 탓에 거의 유전자에 각인된 반응이 바로 따라나왔다.

“서로를 위해 묻어두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묻지 마십쇼. 저는 진짜 말하기 싫어요.”

“말해.”

도망갈 구멍이라도 없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바다뿐이다. 순천 물개라고 불리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물이라면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강이든 바다든 다 지긋지긋했다. 서지혁은 뒤끝이 긴 인간이었다. 썩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조각조차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물속에 처박혀 3년을 넘게 버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처럼, 서지혁은 연결된 조각들을 따로 떼어내 바라보질 못했다. 그래서 그와 연관되는 모든 것을 버리기로 했다. 거기엔 신해량도 포함이었다. 신해량은 그의 이름처럼 바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면, 같은 색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서요.”

인생에 마지막일 바다에 한탄하듯 고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접어두었던 감정이었지만 감히 무언가를 바란 적도 없었기에 미련도 없었다. 담담하게 내뱉은 무거운 감정이 씁쓸한 담배 연기와 함께 불어온 바람에 흩어졌다.

“당신은 좋은 상관이고 좋은 상사입니다. 그러니까 애영이나 저나 당신 뒤꽁무니만 7년을 따라다녔죠. 유능하고, 성실하고, 머리 안 아프게 대신 대가리도 굴려주고. 뭐, 대신 대가리만 굴렸습니까? 목숨까지 대신 걸어줬죠. 그게 더럽게 든든하고 더럽게 편했는데요. 이제 그냥 제 대가리 굴리면서 살라고요. 스트레스받아 뒤지는 한이 있어도 내 목숨은 나만 책임질 겁니다. 이제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안 맡겨요. 당신이 좋은 사람인 건 맞는데요, 그거 아십니까? ……지킬 게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주 좆같습니다.”

거기에 내가 포함이 된다면 더더욱이요.

두두두두두두.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근접한 헬기 바람에 담배 끝에 매달린 불씨들이 떨어져 나가듯 휘날렸다. 서지혁은 입에 문 담배를 뱉어내 담뱃재 홀더에 불을 비벼 끄고는 다시 주머니에 성의 없게 밀어 넣었다. 이제 착륙을 준비하는 헬기를 보며 서지혁은 후련한 듯 웃었고, 원래 말수가 적은 상사는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연락받아.”

한참을 침묵으로 유지하던 신해량이 앵무새처럼 말했다. 하여간 이 인간 성질 참 더러워. 서지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은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마지막은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오늘은 마지막 아니야. 연락받아.”

상사의 말이라면 뭐든 개처럼 구르던 서지혁이지만 신해량은 더 이상 서지혁의 상사가 아니었고, 서지혁은 그의 부하직원이 아니었다. 7년을 그의 밑에서 굴렀지만 직급의 의미가 사라진 지금 그를 부를 이름이 없었다. 그게 딱 그들의 관계 같았다. 억지로 묶여진 계약의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 그래서 서지혁은 신해량의 말을 들어줄 의무가 없었다.

서지혁이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신해량의 앞으로 걸어갔다. 훅 다가온 담배 냄새가 불쾌한 듯 신해량의 반듯한 미간이 주름지며 좁혀졌다. 이 정도 바람이면 냄새고 뭐고 남아있지도 않을 텐데, 하여간 개코가 따로 없다니까. 신해량은 코앞까지 다가온 서지혁을 밀어내지도, 그에게서 멀어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타인에게 다가갈 땐 칼같이 선을 지키면서, 정작 다가오는 사람에겐 선이 없는 듯 굴었다. 7년을 봐도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 서지혁이 비쳤다.

하지만 서지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어진 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꺾어 얼굴을 가까이했다. 헬기 바람에 팔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았다. 간질간질 하기도, 데일 듯 아주 뜨겁기도 했다. 살짝 치켜떠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코 닿을 거리에서 봐야 겨우 알 수 있는 작은 미동에 서지혁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춘 서지혁이 신해량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온 몸이 데인 대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참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다음엔 진짜 할 겁니다. 연락하지 마십쇼.”

그건 서지혁의 고백이자 경고이자 애원이었다.

선 같은 건 없었다. 없는 것인지 그저 봐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건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서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한도를 날듯이 떠났고, 일주일 뒤 신해량의 퇴사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퇴사했어.]

[정말 안 올 거야?]

"하 시발. 진짜. 존나. 이 미친 양반이 대체 왜 이러고 지랄이시지?"

까똑 까똑. 거하게 늦잠 자고 일어나 라면이나 후루룩 끓여먹은 뒤, 누워서 모바일 리듬게임이나 갈기며 시간을 멋지게 낭비하는 게 목표였던 휴일을 방해하는 알림음과 팝업창에 서지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 시발. 평소에 뭔 구구절절 먹먹문을 싸질러도 단답으로 일관하던 인간이 왜 안 어울리게 구질구질한 선톡질이지? 정말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처 들어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언컨대 서지혁은 신해량에게 고백할 생각이 죽어도 없었다. 아주 옛날에야 서지혁도 신해량을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고 귀가 붉어질 정도로 불타는 연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날 일이었다. 혼자 삭히고 묵힌 감정은 무뎌지고 닳아서 원본의 형태를 잃은지 오래였다. 이젠 그를 봐도 떨리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감정이었다.

서지혁은 문제의 그날을 떠올렸다. 깜깜할 정도로 깊은 바닷속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신해량을 기다렸던 그때. 몇 번이고 대책 없이 그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던 그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담배연기 대신 한숨만 푹 내쉬었던 그때.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해량을 이 바닷속에서 끌어올리고 싶다고 생각한 그때.

이미 다 말라비틀어져 잔잔해진 연못인 줄 알았던 감정이 돌멩이 하나론 물살이 일렁이지도 않는 커다란 호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때 말이다. 지나간 줄만 알았던 짝사랑의 연장선을 확인하고 아주 좆됐다고 생각할 무렵, 서지혁의 기분만큼이나 엉망이 된 신해량과 재회했다.

이제 와서 깨달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마음은 잔잔하고 평화로웠고 그게 연못이든 강이든 바다든 알 바가 아니었다. 서지혁은 물과의 인연을 끊기로 했으니까. 그럼에도 사랑을 입에 올린 건, 어……. 뭐랄까. 공격 같은 거였다. 고백공격, 그래 그거 말이다. 시꺼먼 남자 새끼가 뜬금없이 부담스러운 소리를 해대면 안녕 바이바이 사요나라 짜이찌엔 해줄 줄 알았다. 아니면 마음 접겠다는 사람한테 배려 차원으로라도 연락을 안 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이런 건, 서지혁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엔 그나마 이 인간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서지혁은 본인이 신해량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연락하면 키스 해 버리겠다는 별 미친 협박까지 했는데 대체 왜 이 지랄이세요?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답장해.]

아휴 시발. 이 양반이 이제 내 핸드폰에도 지 눈깔을 갖다 붙여놨나? 소름이 끼쳐서 핸드폰을 집어던지니 다시 까똑. 소리가 울린다. 여태 해저에 처박혀 퇴사 전 업무를 처리하느라 조용한 거였나. 퇴사하자마자 몰아치는 메시지에 서지혁은 문득 불안해졌다. 이 인간이 작정하고 사람 찾겠다고 난리 치면 나 정도는 반나절도 안 가서 잡힐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잡혀도 자의로 잡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의 손에 강제로 연행돼 봤자 좋은 꼴은 못 본다는 것을 서지혁은 아주 잘 알았다. 잡는 걸 포기해 주면 더욱 좋고. 서지혁은 내다 던진 핸드폰을 다시 주워와 게임을 끄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진짜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주말에 시간 돼?]

되겠냐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약속을 잡으려는 그의 태도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답답함에 소리를 한 번 더 빽 지른 서지혁이 핸드폰을 붙잡고 자판을 토독토독 쳤다.

[아뇨. 바쁩니다.]

[뭐 하는데?]

[게임합니다. 랭크 따야 하는데 계속 톡 해서 방해되니까 그만 좀 보내세요.]

[평일은?]

내가 당신을 이렇게 개무시하고 있으니까 포기 좀 하십쇼. 기운 빠지라고 한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안돼요.]

[그럼 언제 되는데?]

[100년 후에요.]

이번엔 성공했나? 거의 텀 없이 이어지던 핑퐁이 끊겼다. 서지혁은 휘파람을 휘익- 불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비비며 누웠다. 살면서 이 정도로 사람한테 무시나 외면을 당한 적은 아마 처음일 거다.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으니 반격하듯 메시지 음이 울렸다. 까톡.

[다음 주 수요일 오후 1시 oooo 오피스텔 3층 (지도링크)]

허허허허허허. 통보하듯 보낸 메시지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서지혁이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이 미친 싸이코패스 인간아!! 애꿎은 핸드폰을 향에 소리를 지른 후 자판을 찍어 눌렀다.

[안 가! 안 가! 안 갑니다!!!]

1은 사라졌지만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신해량의 무응답은 수긍이 아닌 무시였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지혁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이불을 팡팡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내가 시발 자존심이 있지.

죽어도 안 가.

안 간다고.

절대로 안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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