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6

일상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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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서지혁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책상 위에는 시집이 덩그러니 혼자 펼쳐져 있었는데, 정작 서지혁은 그 옆에 놓아둔 책갈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기어코 신해량의 방에서 훔쳐 온 꽃이 들어 있는 투명한 책갈피였다. 파란 장미 문진이 제일 탐이 났지만, 그걸 훔쳤다간 바로 응징을 당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 노란색, 주황색 꽃잎이 박힌 납작한 책갈피만 하나 가져왔다. 책갈피로 쓰기엔 조금 두꺼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서지혁은 개의치 않고 읽던 시집 사이에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 음, 마음에 들어. 흐뭇한 서지혁은 한층 뚱뚱해진 시집을 책장에 꽂아두었다. 기지개를 켜고 팔을 쭉 잡아당긴 서지혁은 책상 위에 장식해둔 뜨개 양말을 신은 강아지 인형을 톡 건드리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신해량이 상담을 받는 날이었다. 병원까지 데려다주겠다 했더니 그냥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이 돌아왔다. 자기는 매번 데려다줬으면서. 불만이야 있었지만 여태 지은 죄가 있어 반항을 할 수 없어서 서지혁은 신해량의 말처럼 집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씻고 운동방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시집까지 읽었지만 신해량이 없는 시간은 느리게만 갔다. 그가 없던 지난 한 달은 도대체 어떻게 보낸 건지.

소파에 앉아 뭘 하며 시간을 죽일지 고민하던 서지혁의 귀에 띵동- 하는 벨 소리가 들렸다. 뭘 시킨 적도 없는데 이 시간에 누구지? 인터폰으로 확인해 보니 모자를 쓴 남자였다. 누구세요? 경계 가득한 목소리로 물으니 등기입니다. 하는 대답이 들렸다. 웬 등기? 카드라도 새로 발급했나? 혹시나 해 비상용 나이프를 주머니에 숨기고 현관 안전고리를 걸고 문을 여니 문틈 사이로 갈색 서류 봉투가 불쑥 들어왔다.

"신해량씨 맞으세요?"

"예."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옙."

자연스럽게 집주인을 사칭한 서지혁은 남자가 내민 기계에 신해량의 이름을 갈겨썼다. 서지혁은 짧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문을 닫고 안전고리를 풀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나이프로 다시 제자리에 걸어둔 서지혁이 서류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등기 왔는데 이거 뭡니까?]

아직 연락이 안 온 걸 보니 상담이 평소보다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아 전화 대신 톡을 남겨두었다. 서지혁은 핸드폰을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신해량에게 온 등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발신자의 주소, 연락처가 정확하게 기재된 걸로 봐선 출처 모를 테러 물품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작정하고 속여 썼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서지혁이 한창 서류 봉투와 긴장감 넘치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니 던져둔 핸드폰 화면이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을 낚아채듯 잡은 서지혁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등기를 받았는데?'

"그거야 저는 모르죠. 당신 앞으로 왔는데요. 대충 만져보니 종이뭉치랑 책 느낌인데. 저 없는 사이에 또 어디 원한이라도 산 거 아니에요? 폭탄이 든 것 같지는 않다만."

'책? 어디서 온 건데?'

"발신인은 'IRMH'요. 검색해 보니까 에이전시, 스튜디오, 엔터테인먼트 뭐 별거 많이 하던데요. 저 몰래 데뷔라도 합니까? 유령회사인가 싶어서 봤더니 멀쩡히 건물도 잘 올라가 있었어요. 감 잡히는 게 있으세요? 열어봐도 괜찮은 겁니까? 아니면 내용물 감식 보낼까요?"

서지혁의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신해량이 입을 열었다.

'……아. 잡지일 거야. 열어봐도 돼.'

"잡지요?"

'전에 찍은 거 있잖아. 나도 잊고 있었어. 정식으로 발간되기 전에 사진이랑 같이 보내준다고 했어.'

"아. 그때 그거요?"

'그래.'

벌써 두 달 전인가. 자원입대 홍보 잡지겠군. 촬영 날이라 이쁘게 하고 가놓고 셀카 한 장 안 남겨온 인간이라 내심 속이 터졌는데 드디어 사진이 나왔구나. 군대에 배치되는 거라고 해서 국방부에서 날아올 줄 알았더니. 정부 쪽과 협력을 한 에이전시 측에서 잡지를 보내온 거였다.

"그럼 제가 먼저 봐도 돼요?"

'보면서 뭘 하려고?'

"와. 뭘 하긴 뭘 해요? 이상한 사람이네 진짜. 은근히 그런 거 기대하신다니까? 그걸 원해요? 이왕 할 거면 저는 사진 보단 실물 보고 하는 게 더 좋은데요?"

웃음기 가득한 서지혁의 말투에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여간 금욕적인 분위기 폴폴 풍기는 주제에 은근히 발랑 까졌다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이 인간 얼굴에 속고 있다니. 속이 터진다 터져.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예. 오른손 잘 씻고 볼게요. 좋은 구경거리 보고 싶으면 얼른 오셔야 할 걸요."

'별로 보고 싶진 않은데.'

"또 거짓말 하시네. 아무튼 안전 운전 하십쇼."

'그래.'

뚝. 전화가 끊기고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신해량의 이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서지혁이 서류 봉투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봉투 속에는 신해량의 말대로 평범한 잡지와 사진이 추가로 동봉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사진이 잡지 보다 더 두껍지? 의문을 가지고 꺼내 보니 딱 봐도 50장 정도 되는 사진이 뭉쳐 있었다. 아니, 뭐야 이게?

"와……. 미친."

사진의 두께에 대한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사진 뭉치의 첫 장을 보며 서지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안 그래도 잘생긴 인간을 온갖 방법으로 꾸며 놓으니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예술 아닌가?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사진을 넘기니 왜 이런 사진 뭉치를 동봉해준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잡지에 들어가는 사진은 고작 열 장도 안 될 텐데 고심해서 고르고 고르더라도 버려지는 사진이 아까웠겠지. B컷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데 잡지 촬영을 한다고 개인 사진을 이렇게 따로 넣어주는 게 일반적인 게 맞나? 이거 완전히 스튜디오 작가의 사심이 100% 정도 반영된 거 아닌가?

신해량은 앞머리를 완전히 넘기기도 하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 내리기도 하고, 반만 넘기기도 했다. 헤어마다 화장법이나 의상도 달랐는데,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상의를 반쯤 탈의한 사진도 있었다. 아니. 왜? 뭐? 자원입대를 이런 식으로 꼬셔도 되는 건가? 그냥 섹스어필 아니야? 남의 남자친구를 한창 불끈거릴 20대 초반 군인들의 딸감으로 쓰겠다는 거 아닌가? 감탄과 경악 그 사이 어디쯤의 반응을 하며 사진을 더 넘겨보니 다행히도 군복을 멀쩡하게 갖춰 입고 찍은 사진도 많았다. 이게 다행인 건가?

남자친구의 죽여주는 미모에 홀린 듯 사진을 다 넘겨본 서지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좀 아니지 않나? 내 건데. 나만 보고 싶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화보 촬영한다는 걸 뜯어 말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일방적으로 계약 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남의 얼굴을 이용하겠다니, 양심도 다 뒤졌지. 염치 없는 정부 놈들에 대한 분노에 이어 신해량의 사진을 불건전하게 소비할 얼굴 모를 어린 군인들에게 열받기 직전이었다.

내로남불 오지는 서지혁은 씩씩대며 잡지를 펼쳤다. 열받긴 하지만 모든 사진이 다 잘 나온 탓에 어떤 사진이 잡지에 들어갔을지 하나도 예상이 안 됐다. 설마 탈의한 사진을 넣어둔 건 아니겠지? 서지혁은 재입대해서 부대 내에 배치되는 모든 잡지를 다 사버리는 상상을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관심 없는 군 내의 복지나 시설 홍보 파트는 빠르게 건너뛰고 드디어 사람이 나오는 파트로 진입했다. 이 놈은 아니고. 이 놈도 아니고. 이런 놈도 모델을 하나? 내가 더 낫겠다. 이 놈도 아니고. 뭔 놈의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아! 찾았다!

"오. 오? 엥. 어……. 오……?"

신해량이 들어간 파트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군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사진이 달랑 세 장이 들어갔는데, 죄다 군모나 조명으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져 몸만 보이거나 얼굴은 실루엣만 보였다. 뭐야? 얼굴만 찍어둔 사진도 넘치더만. 얼떨떨한 기분으로 잡지를 노려보던 서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 페이지를 넘겨 모델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델 치고는 대부분 평범하게 생겼거나, 겉 꼬라지가 좀 괜찮아 보이는 느낌이 들면 신해량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반쯤 가려두었다. 대체 왜? 윗대가리 놈들이 드디어 군내 잡지가 얼마나 불건전하게 소비되고 있는지 눈치를 챈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잡지를 노려보고 있었더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며 신해량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소리를 듣자마자 현관 앞까지 뛰쳐나간 서지혁이 신해량의 가방을 들어주며 그를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응. 뭐 하고 있었어?"

"잡지 보고 있었죠. 아니. 근데. 얼굴이 다 가려져 있던데요? 뭡니까? 왜 가려요? 설명 들은 거 있어요?"

"촬영할 때 듣긴 했어. 얼굴은 거의 안 나올 거라고. 그래서 사진은 따로 보내주겠다던데."

"얼굴 다 가릴 거면 화장은 왜 해줬대요?"

"……나도 그게 의문이긴 했어. 그냥 해주던데. 얼굴 사진도 찍고."

사심이네. 사심 100% 아니, 200%가 분명하네. 자기들도 아까웠던 거야. 그러니까 얼굴은 들어가지도 않는데 얼굴만 확대해서 찍어둔 사진이 이렇게나 많지.

신해량이 씻으러 간 사이 서지혁은 핸드폰으로 이 사태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련 게시글이 몇 개 있었다. 약 2년 전부터 몸만 좋고 평범하게 생긴 모델만 자원입대 잡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보였는데, 그런데도 그 관행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이유가 뭔지 봤더니 잘생긴 모델을 보고 자격지심을 느끼는 남자들이 많단다. 허. 참나. 해저기지에 처박혀 있는 동안 물 밖에도 해파리 보다 못한 찌질이 새끼들이 증식했군. 그래도 나 때는 신해량이 모델을 해서 입소자가 늘었다고 들었는데. 이래서 사회가 어떻게 되려고. 쯧쯧.

혀를 차고 있으니 씻고 옷을 갈아입은 신해량이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지혁이 제 옆자리를 툭툭 치자 신해량이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신해량은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과 펼쳐진 잡지를 눈으로 훑다가 핸드폰을 붙잡고 혀를 차고 있던 서지혁에게 시선을 멈췄다.

"뭐 하는데?"

"제가 뭐 하는지 그렇게나 궁금하세요? 아까부터 계속 그것만 물으시네. 그냥 사회가 영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한탄이나 하고 있었죠. 사진 잘 나왔던데요? 보니까 56장 정도 있던데. 잡지엔 달랑 세 장 들어갔어요."

"그래?"

신해량은 자기가 나온 잡지나 사진에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하여간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바 아니다 이거지. 서지혁은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사진 몇 장을 골라서 신해량에게 굳이 보여주었다. 이 사진은 왼쪽 얼굴이 유독 이쁘게 잘 나왔고, 이 사진은 눈빛이 날카로운 게 꼴리고, 이 사진은 그냥 존나 꼴리고. 서지혁의 정성스러운 사진 설명을 듣던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진 필요 없죠? 제가 다 가집니다?"

"뭐에 쓰려고?"

"아니 전부터 계속 이러시네. 계속 뭘 바라는 거 같은데 똑바로 말씀하시죠? 뭐 어떻게 써드릴까요? 난 그냥 앨범이나 하나 사서 넣어두려고 했는데."

"그렇게 해."

대놓고 불건전한 대화 방향으로 유도한 주제에 새침하게 대답하기는. 어휴, 얄미워라. 서지혁은 신해량의 입술을 한번 콱 깨물고 사진을 챙겼다.

"점심은 뭐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랜만에 새콤하고 달콤한 비빔국수요. 삶은 계란 7개 올려서."

"알겠어. 만들어 줄 테니까 이거 치우고 있어. 계란은 3개만 먹어. 더 먹을 거면 노른자 빼."

"노른자 빼면 무슨 맛으로 먹어요? 됐습니다. 그냥 3개만 먹을게요."

서지혁이 투덜대며 입술을 삐죽이니 그 꼴을 본 신해량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서지혁의 불만 가득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헤헤. 그리고는 수고하라는 듯 서지혁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부엌으로 가 앞치마를 입었다. 입맞춤 한 번으로 너무나 쉽게 마음이 사르르 녹은 서지혁은 히죽거리며 잡지와 사진을 정리했다.


"햐. 역시 식탁이 있으니까 좋죠?"

"그렇네."

서지혁은 신해량이 만들어준 비빔국수를 먹다 말고 자신이 사 온 커다란 식탁을 붙잡고 히죽댔다. 신해량이 출장을 가기 전부터 생각을 해둔 거였는데 이제야 드디어 넓은 식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 번 제대로 먹으면 상다리를 다 부러뜨릴 기세로 음식을 차려 먹는 두 사람에게 바 테이블은 너무 좁았다. 그래서 그동안 간단하게 차려 먹을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거실의 커피 테이블에서 이것저것 먹었는데, 그게 불만이었던 서지혁은 부엌에 넓은 식탁을 놓게 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계란 한 알을 한 입에 넣고 뿌듯한 표정으로 우물거리고 있는 서지혁을 바라보던 신해량이 서지혁의 그릇에 오이를 추가로 더 올려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수영장 갈 거야? 괜찮겠어?"

"예. 까짓거. 한번 가보죠. 제 상태가 영 아니면 기절시켜서 병원으로 옮겨주세요."

"상담사한테 설명은 들었어. 땅에 앉거나 눕는 게 도움 된다더군. 규칙적이고 깊은 숨을 쉴 수 있게 유도하고 가능하다면 장소를 빠르게 벗어나는 게 좋다던데. 일단 넌 처방받은 약이 있으니까 급하지 않게 약물복용을 먼저 하는 편이 나아. 네가 패닉이 오면 잊을 수도 있겠지만 미리 말해두는 편이 서로 낫겠지. ……전문가와 동행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을 텐데."

"상담 길어진다 했더니 그걸 일일이 다 물어보고 오셨어요? 그래도 제 상태도 괜찮아 보이고 당신도 믿음직해 보이니 상담사가 안 말린 거 아니겠어요?"

"내가 어쭙잖게 굴었다간 네 상태가 더 안 좋아질 테니까. 아무튼, 문제 생기면 널 바로 둘러메고 바로 밖으로 나갈 거야. 그렇게 알아."

"예엡. 참 믿음직스럽네요."

오늘은 서지혁이 신해량을 따라 수영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수영장을 물개처럼 누볐던 서지혁은 오랜만에 신해량과 취미생활을 함께하고 싶었다. 신해량은 자신과 함께 수영장에 간다면 서지혁이 이전처럼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 이상, 서지혁은 자신의 불안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며 신해량을 설득했다. 신해량은 결국 허락을 해주었지만 그 후 심각한 표정으로 인터넷으로 불안장애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었는지 기어코 상담사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온 것이다. 하여간 참 치밀하다니까.

비빔국수를 싹싹 긁어먹은 두 사람은 소화를 시키기 위해 가볍게 몸을 풀었다. 특히 신해량은 서지혁의 몸을 마사지 하듯이 근육을 풀어주었다. 서지혁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해량의 권유로 잠시 명상 시간을 가진 서지혁은 한층 이완된 근육을 이리저리 당기며 스트레칭을 했다. 서로 상태를 체크해주며 간단한 운동을 하고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약을 챙겨 주었다. 서지혁이 항우울제를 물과 함께 삼킬 동안 신해량은 항불안제를 챙겨 복용 주의사항을 재차 읽고 가방에 넣었다.

수영장은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설렁설렁 걸어서 10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여기도 한 달 만이네. 신해량이 출장을 간 사이 몰래 한 번 온 게 마지막이었는데. 싱숭생숭한 기분에 서지혁은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으며 신해량에게 말을 걸었다.

"저 없이 여기 온 적 있으세요?"

"아니."

"어……. 그럼 한 달 동안 수영도 안 하고 사셨습니까?"

"그래."

"……."

미안해 뒤지겠네. 물에 들어가 있을 때 그렇게 행복해하던 양반이 한 달이나 코 앞에 있는 수영장에 안 갔다니. 그것도 모르고 나만 헬렐레 거리며 수영장을 다닌 건가. 잠시 넣어둔 죄책감이 휘몰아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서지혁의 반응을 눈치챈 듯한 신해량이 작게 웃으며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없으면 나도 별로 재미가 없어. 버디도 없잖아."

당장 반박할 거리가 10개는 떠오르는 변명이었지만 서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서지혁은 반론 대신 미소를 지으며 신해량의 튼실한 상체를 끌어안고 말랑한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밖에서 맨살이 닿으니까 엄청 간질간질하네.

"역시 그렇죠? 하여간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제가 오늘 신나게 놀아줄게요. 버디도 해주고."

"기대하지. 버디는 나중에 해."

으유. 왜 이렇게 귀엽게 구실까. 마음 같아서는 캐비넷을 벽 삼아 신해량을 기대두고 진한 키스를 나누다 타이트한 수영복을 죄다 벗겨놓고 물고 빨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여간 난 인내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혼자 성인 등급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서지혁이 실실 웃으니 신해량이 왜 웃냐는 듯 쳐다봤다. 서지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순수한 미소를 날려주니 신해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지혁의 약을 작은 방수 파우치에 넣었다.

가볍게 샤워를 한 두 사람은 천천히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넓게 탁 트인 수영장을 보니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혼자는 잘만 다녔는데, 역시 하루아침에 괜찮아지지는 않는구나. 신해량은 심호흡을 유도하고 괜찮다는 말로 서지혁을 다독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에 서지혁의 두근거리던 심장도 점차 안정됐다. 둘은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천천히 수영장 내부를 걸었다. 한 바퀴 걷는 동안 서지혁의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스마트 워치로 심박수를 확인하고 신해량은 서지혁의 호흡을 체크했다.

"괜찮아?"

"예. 같이 발이라도 담가 볼까요?"

"그래.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말해."

"예엡."

신해량은 길게 쭉 뻗은 수영장의 레일을 보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곳으로 서지혁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앉아 수영장 물에 무릎 바로 아래까지 담갔다. 신해량과 나란히 앉아 물에 발장구만 치고 있으니 계속해서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애도 아니고, 이러고 있는 게 웃겨서요. 서지혁의 말을 들은 신해량도 피식 웃었다. 푸른 수영장을 배경으로 하고 웃고 있는 신해량을 보고 있으니 소독약 냄새와 웅웅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찰방거리는 물이 시원했고 차가운 공기도 기분 좋았다.

서지혁은 기습적으로 신해량에게 물을 튀겼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별안간 봉변을 맞은 신해량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한 번 해보자는 건가 하는 표정을 마주하고 좆됐다고 생각하자마자 바로 물벼락이 날아왔다. 아야! 아니. 이거 물 맞아? 싸대기를 때린 거 같은데?

"어푸푸푸! 아니! 저는 귀엽게 물만 튀겼는데, 심하잖아요!"

"멀쩡하네."

"아오. 꼭 이렇게 속을 뒤집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신해량을 째려보던 서지혁이 물속을 잠시 보더니 그대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 꼴을 코앞에서 본 신해량이 놀라 눈을 크게 떴는데 그와 동시에 서지혁이 손을 뻗어 신해량을 잡아당겼다. 물보라가 치며 신해량도 물 속에 빠졌다. 두 사람은 물속에서 엉키듯 같이 굴렀는데, 정신을 차린 신해량이 서지혁을 다급하게 물 밖으로 꺼냈다.

"푸핫! 와하하하하! 놀랐죠? 놀랐죠? 놀랐……. 아니. 진짜 놀라셨네……."

"……놀랐잖아."

장난스럽게 웃던 서지혁이 신해량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장난 좀 친 건데 이렇게 놀랄 줄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고르고 있는 신해량의 얼굴을 마주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이렇게까지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신해량의 반응에 당황한 서지혁이 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 신해량을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닿으니 신해량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머리라도 박을까.

"……아니. 장난이었는데요……. 죄송해요. 안 그래도 신경 쓰고 계셨을 텐데."

"괜찮아."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요. 아. ……진짜 죄송해요."

"네가 괜찮으면 됐어."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신해량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 서지혁의 젖은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도 서지혁의 손목을 잡고 심박수를 확인하고 동공 상태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 뒤지겠네.

신해량은 서지혁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서지혁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지만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서지혁이 눈만 옆으로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 아파요!"

"멀쩡하네."

"예. 아주 참으로 멀쩡합니다. 멀쩡한 김에 한 바퀴 돌고 와도 됩니까?"

"괜찮겠어?"

"지금은 괜찮은데요. 다이빙까진 안 되더라도 그냥 수영은 될 거 같아요."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작은 파우치를 보며 생각하던 신해량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문제가 생기면 바로 물 밖으로 끄집어내 수영장 물과 함께 약을 먹일 것만 같았다. ……절대로 멀쩡해야겠군. 어쨌든 신해량은 서지혁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경기를 하듯이 바로 옆 레일에서 신해량도 함께 나란히 수영을 하기로 했다. 오. 이건 진짜 오랜만인데. 왠지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곧바로 서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천천히 해."

"……예엡."

두 사람은 레일 출발선에서 나란히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크롤 영법으로 수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옆으로 숨을 쉴 때마다 신해량이 보였다. 서로에게 속도를 맞추며 반 바퀴를 나아간 뒤, 몸을 돌려 벽을 힘껏 차 앞으로 튀어 나갔다. 신해량을 보니 호흡 긴 양반답게 잠수를 하며 수영을 하는 구간이 길었다. 그 덕분에 저항을 받지 않은 신해량이 좀 더 앞으로 나갔다. 엥? 나보고 천천히 하라며! 순간적으로 승부욕이 발동한 서지혁이 좀 더 빠른 속도로 팔로 물을 가르고 발로 물을 밀어냈다. 서지혁이 신해량을 추월하자, 신해량도 본격적으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미친 인간이? 사이 좋았던 산책이 올림픽 결승전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막판 스퍼트로 소갈비 뼈에서 살을 뜯어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던 서지혁이 레일의 벽을 쳤다.

"제가 이겼죠?!"

"무슨 소리지? 내가 이겼어."

"아니. 양심이 없으세요? 제가 이겼거든요? 제가 먼저 벽 쳤다구요."

"양심이 없는 건 너겠지. 내가 이겼어. 내가 벽을 친 게 먼저야."

"이 미친!"

터치패드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어디 심판이라도 고용해뒀어야 했는데! 서지혁과 신해량은 서로 자신이 이겼다며 우겨댔다. 서지혁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식으로 대결을 해보자고 우겨댔지만 신해량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서지혁의 심장 박동수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서지혁은 수영을 해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신해량은 단호했다. 전엔 수영을 해도 잘 가라앉혔잖아. 그건 또 그래서 수긍했다. 두 사람이 샤워를 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없는 무승부에 강제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엔 제대로 합시다. 심판도 세 명 세워둘 거예요."

"그렇게 해."

"그래도 많이 괜찮아졌죠?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거 같긴 하지만."

"시간 많으니까 걱정 마."

"얼씨구. 맨날 바쁘게 사시는 분이."

"너한테 쓸 시간은 많아."

"오……."

꼭 이런 식으로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니까. 할 말을 잃은 서지혁이 웃으며 제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가죽 스트랩이 손끝에 닿았다.

"이쁜데, 아까워요. 가죽이라 수영장이랑 목욕탕 갈 땐 갈아 끼워야 할 거 같은데요. 비싼 거 같더만."

"그대로 써도 돼. 애초에 소모품으로 쓰라고 준 거야."

"예? 왜요?"

"그래야 자주 선물하지."

"어……. 왜 자주 선물해야 합니까?"

"바꿔줄 때마다 네 신상 명세서 한 줄씩 더 추가하려고."

"미쳤습니까? 이게 무슨 개 인식표예요? 아주 당신 핸드폰 번호도 적지 그래요?"

"그럴 거야. 나중엔 네가 적고 싶은 것도 새기게 해줄게."

"이 도라이 진짜."

나란히 눅눅한 공기 속을 걷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샤워한 직후에도 더운 공기가 팔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멀지 않은 집으로 가는 길조차 즐거웠다. 9월임에도 여전히 후덥지근한 온도를 느끼며 걸어가던 두 사람은 오래 걸리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잠시만요."

오피스텔에 들어가려는 신해량을 서지혁이 불러세웠다. 건물 출입문을 열려던 신해량이 멈춰 서지혁을 돌아 보았다.

"왜?"

"벌써 들어가게요?"

"다른 할 거 있어? 저녁 먹기엔 이른데. 배고파?"

영 감을 못 잡는 상대를 보며 낄낄대며 웃던 서지혁이 신해량을 향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만히 쳐다보던 신해량이 서지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거짓말 탐지기가 작동하든 독심술이 작동하든 관심 없는 서지혁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민 손을 흔들었다.

"거. 신해량씨. 혹시 피곤하세요?"

"……아니."

"그럼 몸이 아프다거나 그런 건요?"

"괜찮아."

"다른 일정이나 할 일은요?"

"없어."

그럴 줄 알았지. 여전히 비싼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남자친구의 행동에 짧게 한탄한 서지혁이 노는 손으로 볼을 긁었다. 하여간 이럴 때만 참 둔해서는.

"그럼 나랑 데이트 할래요?"

"……."

그 말이 꽤 놀라웠던 모양인지 신해량은 입을 살짝 벌리고 서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귀엽게 왜 이런 거에 반응하는 거야? 신해량은 제 앞의 손과 서지혁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미소를 짓고 드디어 서지혁의 손을 잡았다.

"좋아."

"그럼……. 어억!"

예쁜 미소와 귀여운 대답에 헤실거리고 있던 서지혁이 그대로 신해량에 의해 오피스텔 건물 안까지 끌려들어 왔다. 아니. 데이트 하자니까? 왜 이래?

"옷은 갈아입고 나가자."

"아 진짜! 말로 좀 하라구요!"

하여간 참 쉽지 않은 양반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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