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 치즈 아니고 재희 (上~下)

육지au. 접촉사고 가해자x피해자

쨔무쨔무 by 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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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그거 아냐. 차 안에서는 가드레일 조금만 긁혀도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예를 들어 침대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쿵’이라고 한다면 차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콰드득’이나 ‘쿠우우웅’쯤 된다. 사실 소리는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시끄럽기만 할 뿐이니까 해롭지는 않지만 의외로 잊히지도 않는다. 나만 해도 아직 그 날을 떠올리면 허리가 반쯤 쪼개지는 것 같던 아픔이나 눈의 뜨거움 보다는 귀청이 나갈 것 처럼 커다랬던 파열음이 먼저 떠오르니까. 그리고 이 사고는 ‘쿠웅’이었다. 쿵은 아니지만, 쿠우우웅도 아닌 그냥 쿠웅.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접촉사고였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아주-경미한-접촉사고. 빠르게 뛰어대는 가슴께를 힘주어 내리누른채 크게 쉼호흡 했다. 이건 별일 아니야. 그 날과는 전혀 다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오른손을 들어 색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꽈악 쥐었다가 풀었다. 한심하게 굴지마, 박무현. 

그리고 문을 열고 내려서야 알았는데 이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서 연락처 교환만 하고 헤어지거나 그 자리에서 견적을 뽑고 지나갔어도 됐을 정도로 경미한 접촉사고. 하긴 고속도로도 아니었고 느릿하게 운전하던 중 뒤에서 무작정 박혔을 뿐이니까. 도무지 사고가 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눈이 와서 빙판길이었던 것도 아니고, 앞이 흐리게 보일 정도로 세찬 비가 쏟아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불쑥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만약 미친 음주운전자거나 해로운 졸음운전자가 상대라면 두번 다시 도로에 차를 끌고 나오는 일이 없게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도 그런 멍청한 사람에 의해서 인생이 망가져서는 안된다. 

‘잘 가던 차를 뒤에서 쳐놓고 나와보지도 않냐.’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 차로 다가가 운전석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선생님, 잠시 말씀 좀 나누시죠.” 

“…….” 

“선생님?”

“…….”

햇빛알러지라도 있는지 선팅을 짙게도 발라놔서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도 않았다. 똑똑. 저, 선생님? 설마 어디 잘못되기라도 한건가, 덜컥 겁이 날 무렵에야 지이잉 창문이 내려갔다. 

“그만 두드려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만지면 빨갛게 색이 배어나올 것 같은 머리색. 그 다음엔 귀를 덮을듯 올라온 손가락, 핸들에 매달리듯 엎어져있는 등이었다. 그리고 원망하는 것 처럼 올려다보는 눈. 에어백도 멀쩡했고 (당연하다.) 얼핏 보기에는 다친 곳도 없어보였는데 얼굴만 보면 8중 추돌사고라도 당한 사람 같아서 나까지 잠깐 굳었다. 자세히보니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있기까지 했다. 

“혹시 어디 다치셨습니까? 괜찮으신가요?”

“불나요?”

“예? 안납니다.”

“혹시 비명 지를 생각 있으세요?”

“…아뇨, 없습니다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지금이라도 119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가요?”

혹시나 싶어서 몰래 킁킁 냄새를 맡아봤지만 남자에게서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트러스 계열의 냄새만 향긋했다. 차량용 방향제인가? 안 어울리는데. 술을 마신 것도 아니라면 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어디에 머리를 심각하게 부딪히기라도 한건가 싶어서 권유해봤지만 고개만 젓는다. 여전히 핸들을 부표처럼 껴안은 채였다. 

“사람을 친 건 처음이에요.”

“그럼 지금까지는 주로 뭘 치셨습니까?”

“글쎄요…, 가로수라거나. 비쌌는데.”

“잘하셨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사람을 친건 아니었습니다. 자동차였죠. 수리는 받아야겠지만 생명에 지장이 올 정도도 아니고, 음주운전도 졸음운전도 아닌 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보험사에서 처리하게 두고 이만 진정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몸을 덜덜 떠십니까.”

“이건 추워서 그래요.”

“아, 추워서.”

여름 초입에 하기에는 지나치게 반박하기 쉬운 이유로군. 흘긋 시선을 던지니 여전히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검은색…. 찌그러진 차체를 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간신히 차 밖으로 끄집어내고 보니 화려한 하의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보니 의족이었다. 공들여 새긴 타투처럼 검은 금속을 타고 오르는 넝쿨이 눈을 찔렀다. 어쩌면 교통사고였을까. 저렇게 벌벌 떠는걸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나만 해도 순간적으로 눈 앞이 새까매졌으니까. 그래, 아마 이 사고가 조금만 더 크게 났거나 저 사람이 저렇게 굴지 않았으면 지금 이상한 눈길을 받고있는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긴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풀리더라고. 이목이 그쪽에 쏠리기 때문인가. 

“별일 아닙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요. 적어도 저는 멀쩡합니다. 불도 나지 않았고,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댈 사람도 없습니다. 저희 둘만 조용히 하면 되니까요.” 

“시끄러워요.”

“물 마실래요?”

“네.”

차로 돌아가서 나올 때 챙겨온 텀블러를 꺼내 건넸다. 커피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려보이는 사람한테 카페인을 먹일 수는 없으니까. 남자는 꿀꺽꿀꺽 한참을 고개를 젖히고 마셨다. 한 통을 비우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텅빈 텀블러를 다시 내게 넘기길래 받았는데, 남자가 아까보다 불손해진 얼굴로 말했다. 

“…보리차잖아요.”

“전날 끓여서 차갑게 식혀둔 겁니다. 여름에는 물을 자주 마셔줘야 하는데 맹물은 싫어서요.”

“안 어울려요. 달달한 걸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물이 아니라면 우유나 쥬스쪽이 더 좋았을텐데.”

그러냐. 한 통 다 비워놓고선 말도 많군. 그리고 단 걸 좋아하게 생긴건 어떻게 생긴거냐. 그러는 너야말로 독한 술이나 좋아할 것 처럼 생겼는데. 잘도 처음보는 사람한테 저런 말을 한다 싶었다. 그것도 사고를 친 상대한테.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벌써 출근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찍 다니는 습관이 있어 망정이지 꼼짝없이 지각을 할 뻔 했다. 

“예약환자가 있어서 지금은 오래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진정이 되신 것도 같으니, 연락처만 교환하고 일단 헤어지도록 할까요.”

“와아, 지금 제 번호 따시는 거에요?”

“……명함이 있으면 그걸로 주시죠. 저도 드리겠습니다.”

왜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하는지 모르겠다. 보리차에 이상한 게 들어있기라도 했나. 아까부터 애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은데. 물론 비맞은 짐승처럼 덜덜떨고있는 것도 마음 편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사람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장을 건네자 편지라도 받은 것 처럼 앞뒤로 돌려가면서 뜯어보는데 퍽 흥미진진하단 얼굴이라 잠깐 후회가 됐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보험사를 통해 연락했어야 했나. 

“오. 치과 의사. 저는 명함 같은 건 안들고 다녀서요. 휴대폰 주시면 찍어드릴게요.”

“예. 여기 있습니다.”

“배경화면은 직접 찍으신 거에요? 고양이.”

“…네, 치과 주변을 돌아다니는 길 고양인데 잘 따라서요.”

“이름이 뭐에요?”

“치즈요. 제가 지은 건 아니고 다들 그렇게 불러서.”

“그렇구나아. 귀엽네요.”

…그러고보니 분명히 다이얼키 화면을 띄워서 건넨 것 같은데, 왜 배경화면을 보고있지? 의아할 때 쯤 남자가 다 됐다며 다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미 잠겨있는 화면의 시간을 보니 이러다간 정말로 늦을 것 같아서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차에 올랐다. 그래서 나중에서야 알았다. 저 남자가 본인을 어떤 이름으로 저장해놨는지. 

*   *   *

[치즈] 안냥.

“……?”


[치즈] 바빠요?

[치즈] 그런가봐

“치즈…?”

챱챱.쳡쳡쳡.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신나게 비우고 있던 고양이가 자길 불렀냐며 고개를 퍼뜩 들어올리길래 얼른 손사레를 쳤다. 아냐, 많이 먹어. 방해해서 미안해. 내가 아는 치즈는 저 얌전하고 손 잘타는 고양이밖에 없는데, 치즈는 연락할 수단이 없다. 있더래도 문자를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아니, 뭐지? 스팸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잘못 연락이 왔다고 하기에는 상대가 아니라 내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였다. 근데 그 이름이 어떻게 치즈…?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짜 치즈와 모르는 치즈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데 띵, 새로운 문자가 화면을 밀어내며 도착했다. 

[치즈] 번호 따가놓고 방치 (˚ ˃̣̣̥⌓˂̣̣̥ ) ‧º

“……아.”

그제서야 치즈사칭범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침에 운전 이상하게 하던 사람. 하는 말도 행동도 묘한 구석이 있다 싶었지만 이름까지 이런식으로 저장해놨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저 이모티콘은 또 뭐지. 요즘 애들은 이런가? 모르겠다. 초등학생이라거나 내가 어린 사람들을 자주 만나긴 하는데, 이 잘 닦아야한다는 말 외에는 길게 해본 적이 없어서. 


[차주분이신가요?]

[치즈] 네에

치즈대신 차주라고 이름을 바꿔놓을까 했다가 어차피 곧 삭제하겠지 싶어서 그냥 놔뒀다. 보상은 따로 필요 없으니 서비스센터에 수리를 맡기고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했더니 알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필 그 주에 야간진료일과 세미나 일정까지 꽉꽉 들어차 있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을 때도 흔쾌히 그런건 상관없다고 했고. 조금 이상하긴 해도 영 이상한 사람까지는 아니구나. 그렇게 치즈라고 이름이 뜨는 사람과 몇번 문자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흘러 며칠 뒤.


[치즈] 저 아파서 병원에 왔어요

[헉. 역시 머리가 부딪히신건가요? 그날 안전벨트를 안 매셨던데,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어쩐지 애가 이상하더라. 


[치즈]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안보여요

[점심시간이라 그런거 아닐까요. 저도 뒤뜰에 나와있습니다.]

[치즈] 또 고양이보러 갔구나

고양이가 뒹굴고 있는 화단 앞쪽에 쭈그려앉아 허벅지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두드렸다. 며칠만에 이 시답잖은 연락에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처음에는 대뜸 음료수 사진을 보내더니 저는 이걸 좋아해요, 하길래 얘가 번호를 착각했나 싶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까 수리비를 얘기했던 문자는 한참 위로 올라가야 나오고 온통 쓸데없는 말풍선들만 가득했다. 오늘 비와요. 기상예보에는 그런 말 없던데요? 무릎아파요. ..어, 그러고보니 저도 허리가 아파요. 무현씨도 레이더 있어요? 네, 성능 좋습니다. 

미야악! 뒤뜰 풀숲을 뒹굴었다가 샥샥 단장을 했다가 다시 한바퀴 몸을 뒤집던 치즈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하악질을 시작했다. …나 아무것도 안했는데?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맨 손바닥 양쪽을 펴서 보여주고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뭐하세요? 무장한 테러리스트에게 덮쳐지는 척 하기?”

“엇?!”

소리나는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중심을 잃을 뻔 한걸 양 손목을 잡는걸로 간단하게 저지한 남자가 대단히 우스운 꼴을 봤다는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이건 테러리스트한테 육탄전 미인계쓰기.”

“왜 여기에 계십니까? 아파서 병원 간다면서요.”

“그래서 왔잖아요. 저 사랑니 났나봐요, 볼이 아파요.”

“네? 어디 봐요.”

“이런데서 갑자기 입을 벌려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무슨 파렴치한 요구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지 마시고요. 습관입니까?”

“귀염떨기에요.”

말을 말자. 병원을 간다기에 뒤늦게 후유증이라도 생긴건가 싶었더니만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그러고보니 처음 봤을 때 보다 볼이 조금 부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보통 여길 오나? 명함을 무슨 전단지 같은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약간 머쓱했지만 너는 내 차를 뒤에서 쳤으니 다른 치과에 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하악질을 했던 게 언제냐는듯 내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긴장을 풀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있는 치즈를 쳐다보다가 손목을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이거나 좀 놓으세요. 이상한 말 그만하시고요. 

“그런데 예약이 밀려있어서 바로는 못봐드려요. 그래서 잠깐 보쟀더니. 기다리기 싫으시면 다음에 오시던지 다른 곳 찾아보세요.”

“예약하고 왔는데요?”

“예? 그런 이름은 없었, 아.”

순간적으로 머릿속 예약리스트에서 ‘치즈’라는 이름을 찾다가 그게 진짜 이름일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자니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그러나 곧 재밌다는듯 눈을 둥글게 휜 남자가 보였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치즈야, 해줬겠는데…. 아쉬운데요.”

“아닙니다.”

“이름 한번을 안 물어보시더라니. 속으로 계속 치즈라고 불렀어요?”

“아니라고요.”

“그랬구나아…….”

건물 엘레베이터에 타 함께 치과로 올라가면서도 계속해서 뭐라뭐라 말해면서 얼굴을 들이밀길래 손바닥으로 밀어내다가 직원분과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머쓱해져서 황급히 손을 내려봤지만 웃으면서 ‘웬일로 친구분을 데리고 오셨네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친구 아닙니다만…. 단순한 접촉사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입니다. 그렇게 말할수도 없어서 아하하.. 하고 마주 웃으면서 예약차트를 띄웠다. 


[김재희 - 02:00]

김재희. 그렇군. 얌전히 앉아서 부를 때 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사람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저 남자의 이름이 김재희인 모양이었다. 재희. 그런 멀쩡한 이름을 두고 고양이 이름이나 뺏어 썼단 말이지. 손을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고 환자가 들어와도 좋다는 싸인을 보냈다. 곧 사랑니가 났다는 사람답지않게 싱글벙글 웃고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김재희가. 

 

“이쪽에 누우실게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머리가 아파요. 역시 안전벨트를 안 매서 그런가봐요.”

“사랑니가 난 것 같다고요. 자, 아- 해봅시다.”

“아하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사랑니가 맞았다. 발치해야 하는 것도 맞았고. 그래도 방향이나 매복 정도가 좋아서 얼마 걸리지도 않고 쉽게 빼낼 수 있겠단 계산이 섰다. 예상대로 쉬웠다. 발치보다 마취약을 놓고 기다리라는데 그 둔해졌을 입을 해서는 나불대는 걸 상대하는 게 더 성가셨을 정도였다. 

“무현씨.” 

“네.” 

“맨날 사람들을 눕혀놓으실텐데, 올려다보는 각도가 신경쓰이지는 않으세요?”

“안 쓰입니다.” 

“그렇구나. 괜찮긴해요. 사실 좀 웃길 줄 알았는데 그냥 예쁘네요.”

“선생님, 환자 얼굴 위에 덮을 천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합니다.” 

“제 눈 가리고 하실거에요?” 

…정말로. 끝나고 위생사 선생님 얼굴을 마주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

[치과 출입금지입니다.]

[김재희] 제가요? 왜요? (Ծ‸ Ծ)

[왜겠나요]

[김재희] 착하게 말 잘 들은 기억밖에 없는데요

[김재희] 아파도 인형 안고 열심히 참았고

[김재희] 선생님 예쁘다고 칭찬도 해줬는데

[예 잘하셨습니다 다음 진료는 없습니다]

[김재희] 너무해요 (˚ ˃̣̣̥⌓˂̣̣̥ ) ‧º

[김재희] 저는 무현씨가 제 이름 치즈라고 불러도 참았는데 

“내가 언제!”

* * *


바빠서 서비스 센터에 아직도 못갔다고 했더니 같이 가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쩐지 바가지를 쓸 것 같다나. 뒷 범퍼 고치러 가서 타이어 네쪽을 갈아오실 것 같아요. 일단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듣고보니 타이어 교체 주기는 언제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야 센터에 있는 전문가들이 더 잘 알지 않겠냐. 원래 모든건 전문가가 하는 말을 들어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 역시 필요하시죠? 제가 동행해드릴게요. 그랬던 게 며칠 전. 

“재희 씨는 수리 받으셨나요?”

“그냥 대충 손만 봤어요. 조금 까진 수준이라서.”

“예? 직접 하셨다는 뜻입니까?”

“네에. 차에 난 충치 고치는 일을 하거든요.”

조수석에 앉아서 부산스럽게 글로브박스를 열어 안에 넣어놨던 팸플릿이나 알콜스왑, 휴대용 티슈 같은 걸 뒤적거리던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렇다고 하지 그러셨어요. 그쪽으로 예약을 넣었을텐데. 했더니 새 손님 데려와봤자 인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너는 나한테 인센티브 챙겨주려고 우리 치과에서 사랑니 뽑았냐. 

사고 이후로 운전하는 게 무서워졌다고 데리러 와달라더니 남의 차 곳곳을 뒤지는 모습에서는 그런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글로브박스를 충분히 구경했는지 이제는 콘솔박스까지 들어올리길래 뭐 찾는 게 있냐, 물티슈라면 도어 밑에 꽂아뒀다 했더니 그런건 아니란다. 

“혼자 재미 좀 보고있을테니까 무현 씨는 운전이나 잘 하세요. 뒤에서 갑자기 들이박는 미친놈이 있으면 어떡해요?”

“글쎄요. 이런 도로에서 접촉사고를 내는 건 재희 씨 같은 사람이나 그럴테니 걱정이 안되는데.”

“오늘도 보리차 가져왔어요?”

“예? 예.”

“그럼 안되는데.”

뭐가 안된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히 숨겨야 할 것도 없어서 마음대로 뒤져보라고 내버려뒀다. 그 과정에서 안쪽에서 굴러다니던 무설탕캔디 3개와 언제 받았는지 기억이 안나는 명함 몇개가 재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캔디야 그렇다쳐도 버릴 명함은 왜 챙기냐고 남의 개인정보라서 못 주겠다고 했다가 실랑이를 했다. 살면서 그런 실랑이는 처음이었다.) 

“별거 없네요.”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재미있는 건 하나도 없다니까.”

“…애인은 차에 잘 안태우나봐요?”

“없으니까요?”

“아하.”

옆에서 재희가 룰루랄라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다보니 예약해뒀던 서비스 센터에 도착했다. 어쩐지 의사 친구를 옆에 끼고 병원에 온 기분이라 남자한테 미안했는데, 막상 내리고 보니까 센터 사람한테 더 미안해졌다. 팔짱을 끼고 센터사람이 내는 견적을 끝까지 다 듣고있다가 내가 그렇냐고 카드를 꺼낼때쯤 되니까 갑자기 웃는 얼굴로 줄줄줄줄 네가 한 말이 얼마나 틀렸고 수수료를 얼마나 더 붙였으며 불필요한 건 또 얼마나 많았는지 지적을 해댔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추가수수료가 붙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가 나중에는 이 상황 자체가 창피해졌다. 그 사람이 황망한 얼굴로 ‘그, 그렇죠. 되게 잘 아시네요…. 혹시 직업이, 아, 네…. 그런데 왜 여길…….’ 하길래 더. 

아무튼 덕분에 처음 결제하려던 것 보다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수리를 받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옆에서 빙글빙글 저 잘했죠? 착하죠? 완전 도움이 됐죠? 하고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다만 어쩐지 바가지를 썼을 때 보다 더 피곤한 기분이 되었을 뿐. 좋은게 좋은거겠지….

*   *   *

“무현쌤. 토요일에 진료예약이 들어왔는데, 한번 봐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네네. 같이 볼까요.”

조금 의아했지만 머리속으로 사전에 준비가 필요한 특이 케이스일 가능성들을 생각해보며 데스크로 걸어갔다. 그렇다기엔 말을 걸어온 직원분의 미묘하게 웃고있는 얼굴이 걸렸지만…. 그리고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틀어서 보여주는 모니터를 보자마자 멈칫했다.

[치즈 - 11:00]

“크, 큼. 그게, 전화로 예약을 주셨는데 성함이, 여러번 되물어봐도 맞다고 하셔서요…. 일단 그대로 예약을 하긴 했는데.”

“…….”

“지난번에 무현쌤 친구분 오시기도 했었고. 번호는 다르지만 혹시 짐작가는 구석이 있으실까 해서 여쭤봤는데. …흡.”

“…예…. 저 잠시 전화 한 통 하고 오겠습니다.”

“네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배웅해주는 눈에 웃음기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어서 더 그랬다. 차라리 안 참고 시원하게 비웃음 당했으면 이렇게까지 수치스럽지는 않았을텐데. 배려해주신다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게, 어쩐지, 더…….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최근 통화기록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두루루루, 두루루. 몇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연결음이 끊겼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온 기운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어라, 무현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새 제 목소리가 듣고싶어지기라도 했,]

“야, 이, 치즈가!!!!”

후두둑. 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몰래 숨어 담배를 피고있기라도 했는지 떨어진 라이터와 꽁초를 줍고있는 사람이 보였다. 얼굴이 익숙한, 간혹가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하곤 했던 다른 층 사람이었다. 휴대폰을 잠시 내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는데 그 사람은 어딘가 어색해보이는 얼굴로 마주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전화 너머 상대에게 다시 화를 내기 위해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픕, 크흐흑…, 으하하, 아.]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계십니까?”

그런데 이 인간이. 전화 받자마자 화를 냈으니 당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더니만 소리만 들어도 아주 배를 잡고 웃고있는 모양새다. 남의 직장에 대고 장난질을 쳐서 사람의 사회적 체면을 해쳐놓고 지금 웃음이 나오냐? 

[봤어요? 봤구나. 흡, 그래서 화가 나서 이 시간에 그렇게 전화를 다 준거구나. 그렇죠?]

“본인이 생각해도 내가 화를 낼만 했다고 시인하고 계시고.”

[너무너무 화가 나서 말투도 다시 딱딱해졌, 아. 어떡하지.]

“…….”

여기서 ‘어떡하냐’는 게 화나게 만들어서 어떡하지, 가 아니라 이 상황이 웃겨서 참을 수 없는데 어떡하지로 들리는 건 내 피해망상인가. 

[진짜 화났어요?]

“화났습니다.”

[예약 취소해버릴 거에요? 또 블랙리스트에 올릴 거에요? 그거 제 번호 아니고 같이 일하는 사람 번호인데.]

“누가 들으면 진짜로 내가 환자 예약도 거부하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겠네요. 실밥제거까지 잘 해드리고 보내드렸는데 멋대로 필요도 없는 예약을, 그것도 말도 안되는 이름으로 한 건 그쪽인데 말입니다.”

[이젠 그쪽이에요?]

얘는 왜 사람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데 싱글벙글이냐. 세상이 아주 재밌고 행복하냐? 

[아까는 치즈라더니.]

“예?”

[역시 기억 못할 줄 알았어.]

“…예?”

[그랬잖아요. 전화 받자마자 잔뜩 화난 목소리로 크게. 야 이 치즈가! 라고 했던 거 기억안나요?]

“상황이 불리하다고 거짓말을 쳐서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건 나쁜 버릇입니다.”

[저, 모든 통화가 녹음되게 설정해놔서요. 다음에 만났을 때 들려드릴게요. 아니지, 오늘 끝나고 치과 앞으로 찾아갈테니까 만나주실래요?]

네가 언제는 말하고 찾아왔냐. 이후로 일정이 있다고 돌려보내려고 해도 누구랑 만나냐고, 왜 만나냐고, 자기는 따라가면 안되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귀찮게 굴었으면서 싫다고 하면 안 올것 처럼 정중한 척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나저나 모든 통화 상시녹음이라니. 고객과도 자주 통화를 하는 모양이니 편의를 위해서겠지만 그럼 지금까지 나랑 통화했던 것도 나 저 휴대폰 안에 기록되어 있는건가. 이상한 말을 한 기억은 없지만 어쩐지 찜찜해졌다. 저 당당한 태도때문에 더. …내가 정말로 그랬다고? 진짜로? 

“아뇨. 오지 마세요.”

[저번에 가져갔던 케이크 또 사갈까요? 그 집 다른 케이크들도 다 맛있거든요.]

“아뇨, 오지 마세요.”

[무현 씨 단거 안좋아한다고 해놓고선 그 날 케이크 절반 넘게 먹었잖아요. 이번엔 아예 홀로 사갈까나.]

“그걸 누가 다 먹으라고…. 그리고 사람 성의가 있지 어떻게 한 입만 먹고 물리냐고 포크 째로 입 앞에 들이민 건 어느 누구였죠?”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었죠.]

“…….”

이게 … 이게, 대화가 맞나? 

그리고 그 날 재희는 커피와 홀 치즈케이크를 사와서 직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데스크를 맡는 직원분께 잘못했다고 사과하라는 내 말에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하다고, 토요일 예약은 취소하셔도 된다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밀어줬다. 덕분에 재미있는 친구분을 두셨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미묘한 얼굴로 웃는 수 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몹쓸 꼴을 보여드렸던 치위생사 선생님은 웃으면서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신 것 같다고, 1층에서 자주 기다리시던데 여름에 더우실텐데 올라와서 기다리라는 배려까지 해주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희는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얘가 이런 건실한 말도 할 수 있는 애였다니.) 뒤뜰에서 고양이랑 놀다보면 시간이 잘 가서 괜찮다면서 웃었다. 

“아, 어쩐지 퇴근시간때 갔을 때 치즈 물그릇이 채워져있다 싶었어요. 친구분이 채워주셨구나!”

“네. 덕분에 이제 저 봐도 하악질 안하고 인사해줘요.”

“고양이 좋아하시나봐요~”

“음, 그건 아닌데. 그렇다기 보다는 치즈를 좋아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고마운 일도 좀 있고.”

“아하하하, 역시 말하는 게 재미있으시다니까. 그래서 예약도 치즈로 하신 거에요?”

“네에. 이제는 제 또다른 이름 같달까. 벌써 그렇게 불러주시는 분도 있고…….”

아주, 누가 보면 여기 직원인 줄 알겠다. 자연스럽게 한 자리 차지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모르겠군. 그리고 대화를 할거면 눈 앞의 사람을 보지 왜 날 보고 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이 자리에서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녹음본이라도 꺼낼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랬더니 혼자 눈치채고는 눈에 웃음기를 아주 한가득 품는데 정말로 얄미웠다. (나중에 이 말을 했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자기가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하냐고 놀라는 척을 했다. 아깝긴 또 뭐가 아깝다는 건지)

“…기분이 참 좋아보이십니다?”

“네에에.”

“치즈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얘랑 저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그 부분을 잘 공략한거죠.”

설마 그 공통점이라는 게 이름은 아니겠지, 하는 눈으로 쳐다봤더니 또 특유의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있지만.”

있냐.

“여기서 하염없이 무현 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닮았죠. 그치~, 치즈야.”

미야앙.

“거봐요. 치즈도 그렇다고 하네요.”

미야악.

여기에 고양이가 몇 마리 있는지 모르겠군. 어쩐지 의기양양하단 표정을 짓고있는 둘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음이 나왔다. 

*   *   *



치즈가 사라졌다.

뒤뜰에 좋아하는 간식을 마구잡이로 뿌려도 보고, 평소보다 몇배는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흔적을 찾아보고, 동료 직원들에게도 물어가며 수소문 해봤지만 목격했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고양이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역동물이라 한번 제 영역이라 생각한 곳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던데. 어디에서 다른 고양이와 다투고 다친 건 아닐까. 설마 차에 치인 건 아니겠지. 운전을 하다가 간혹 마주쳤던, 로드킬을 당해 도로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불쌍한 것들이 떠올랐다. 묻어주기 위해 조심스레 들어올리면 무거운 것이 깔아뭉갠 자국이 납작해 마음이 미어지던. 

“치즈, 치즈야! 치즈!!”

지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보든 말든 큰 소리를 외치며 돌아다니는데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징징 울려댔다. 혹시 누군가 치즈를 발견해서 알려주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닐까. 황급히 꺼냈다.

[ 재희 🧀🐈 ]

“재희….”

분명히 김재희라고 저장해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바꿔놨는지 모르겠다. 샛노란 이모티콘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대며 치즈가 자주 뒹굴곤 했던 화단 근처로 가 걸터앉았다. 재희씨…. 저도 모르게 울적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 여상한 대답 대신에 우렁찬 울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미야옭!!! 미약!! 미야앙!!!]

“……치즈?”

[뭐야. 왜 다 죽어가는 목소리지?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방금 치즈. 치즈 목소리 아니었습니까? 혹시 재희 씨가 데리고 있어요!?”

[…네에. 아직 여보세요? 도 못들었고 물어본 질문에도 답 못들었지만 어차피 제가 다 지는 싸움이겠죠. 무현 씨가 저보다 삼천배는 궁금해하는 요 치즈색 고양이라면 제 옆에 있는 게 맞아요.]

휴대폰 너머에서 떨떠름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죠?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말해주세요, 네?”

[……자꾸 기분이 묘해지려고 하는데.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시면 저도 알려드릴게요.]

“네! 뭐든지요!”

[얘에요 저에요?]

“예?”

[참고로 답은 정해져있고 무현 씨는 대답만 하면 돼요. 얘가 좋아요, 제가 좋아요?]

“그야 치즈.”

[..네에 정답입니다~. 제가 너무너무 좋으셔서 꼭 굳이 먼저 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제 집에 오고 싶으시다는 거죠. 문자로 상품을 보내드릴테니 꼭 늦지 않게 수령하시길 바래요.]

 

그리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대신 문자로 주소 하나가 도착했다. 여기서 차로 30분은 가야하는 거리였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꽤 먼. 어차피 퇴근길이었기 때문에 챙겨온 옷과 가방을 들고 후다닥 차로 향했다. 

*   *   *

벨을 누르자 조금 시간이 걸린 뒤에 양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익숙한 색의 털뭉치를 한쪽 손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재희가 문을 열어주었다. 빨리 문을 닫으라고 성화길래 덩달아 후다닥 움직였다. 현관문이 닫히자 마자 들어올리고 있던 고양이를 재빠르게 내려놓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납득도 됐다. 치즈가 지금까지는 보여준 적 없던 빠른 속도로 총알처럼 쏘아지더니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 침대 밑이라거나 하여튼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겠지. 문을 오래 열어뒀다가 치즈가 저렇게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갈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치즈 건강했구나. 정말 다행이야….”

한계까지 부풀어있던 풍선이 빵 터진 것 처럼 운전을 해 여기까지 오면서도 내내 긴장해있던 몸에서 일시에 긴장감이 빠져나가 흐물흐물해졌다. 신발장에 그대로 주저앉을 기세로 쭈그려앉는데 위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까지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던 재희였다. 그래봤자 팔꿈치 아래까지 가리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상태라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집에 왔는데 다녀왔습니다 인사도 안하고 다른 거에 한눈 팔면 될까요, 안 될까요.”

“여긴 제가 사는 집도 아니고, 오늘 처음왔는데 다녀왔습니다를 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 잘하셨다는 건가요?”

“잘못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분명히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한건데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라진 익숙한 고양이 때문인지, 아니면 저기서 불퉁한 얼굴로 서 있는 익숙한 사람 때문인지 낯설거나 불편하지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는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긴장했었는데, 신기하게도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눈 앞에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들을 다 모아놓고 지키고 있어서 그런가? 

 예상대로 침대 밑 제일 구석까지 기어들어가있는 치즈는 조금 진정하도록 내버려두고 거실 쇼파에 털썩 앉았다. 그 상태로 차가운 오렌지 쥬스를 한모금 마셨다. 음료는 뭐 마시겠냐고 물어보길래 아무거나 달라고 했더니 재희가 내어준 거였다. 학부생 때 동기가 자판기에서 뽑아줬던 이후로 처음 마셔보는 것 같은데 혀 아래까지 끈적하게 아릴 정도로 달았다. 평소에 이런걸 먹고 사는 건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재희의 차트기록을 되짚어보며 그래도 치아 상태가 좋았던 걸 보면 양치습관이 좋은가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던 재희가 나를 불렀다. 

가보니까 그렇게 오래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테이블 위가 몇가지 요리들로 가득했다. 고기가 반 풀이 반인 것 같은 샐러드부터 치즈가 두껍게 올라간 그라탕, 술잔과 레몬까지. 대체 언제 이렇게 다 준비를 한 거지 싶어서 실은 이 뒤에 누가 오기라도 하는 거냐고 물었다가 비웃음만 샀다. 어쩐지 통화가 끊겼을 때 부터 지금까지 태도가 좀 불퉁한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대접은 성대했지만. 

“근데 저 술은 못 마십니다. 차를 가져와서요.”

“네에? 당연히 자고 가셔야죠.”

“그게 왜 당연하지.”

“그럼 여기까지 와놓고 딸랑 고양이 얼굴 한 번 보고 돌아가겠다고요? 진심이에요?”

당연히 아주 진심이었지만 왠지 그렇게 말했다간 높은 확률로 삐질 것 같아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갑자기 치즈는 왜 데려간 거에요? 갑자기 사라져서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 길고양이 함부로 덥석덥석 데려오면 안돼요. 애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서웠겠어요. 다시 돌려보냈을 때 다른 고양이들이 낯설다고 따돌릴 수도 있고.”

“제가 뭐 납치라도 해온 것 처럼 말씀하시는데, 먼저 전화한 게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죠? 퇴근 시간에 맞춰서 알려주려고 했더니 울 것 처럼 재희씨이 했으면서.”

“제가 언제요.”

“그리고 누가 돌려보낸대요? 쟤 이제 길고양이 아니에요. 오늘 동물병원 가서 제가 얼마를 쓰고 온지 들으시면 그런 말 못할걸요. 저 조그만 게 무슨 들어가는 돈은 외제차야. 그것도 부품 구하기 힘든 놈으로.” 

그러면서 잔에 초록색 허브까지 띄워서 밀어주는데 잠깐 고민하다가 한입 꿀꺽 마셨다. 굉장히 달 줄 알았는데 민트가 들어가서 그런지 상큼했다. 놀라서 눈을 반짝 떴더니 빤히 내쪽을 보던 재희가 씩 웃으면서 자기 몫의 잔을 들어올렸다. 짠. 

“무현 씨도 그랬잖아요. 길에서 생활하는 거 걱정되는데 키워본 경험도 없고 일때문에 계속 나가있느라 제대로 못 돌봐줄 것 같아서 데려가는 건 포기했다고. 그래도 매일 눈에 밟힌다고. 저는 근무시간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험이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얘한테 지붕있고 천적 없는 집 줄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데려왔어요.” 

처음 치즈를 데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럽기만 하고 왜 사람을 놀래키고 그러나 싶어 화까지 났었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재희의 말을 듣고있자니 가슴이 따듯한걸로 빠듯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서 잡고있다가 이렇게 다쳤다면서 팔 곳곳에 난 상처들을 보여주며 투덜거릴 땐 못참고 웃음이 터졌다. 재희는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이 나쁘다고, 어떻게 아프다는 사람을 보고 좋아할 수 있냐고 힐난했지만 결국엔 자기도 웃어버렸다. 미야악! 웨에에에옼!! 그러자 치즈가 자기를 이상한 곳으로 납치했으면서 너네끼리 뭐가 그렇게 재밌냐는듯이 울어댔다. 덕분에 우리는 한바탕 더 웃었다.

“어쩌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지?”

“저는 언제나 기특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재희 씨면서.”

그게 무슨 뜻인지 빨리 해명하라며 눈을 부릅뜨는 재희를 모른척 하고 그라탕을 떠먹었다. 맛있었다. 귀찮다고 집에서 라면도 제대로 안 끓여먹을 것 처럼 생겨서 그라탕이라니. 그런 생각을 했다가 처음 사고가 났을 때 단 걸 좋아하게 생겼다는 말에 그게 어떻게 생긴거냐고 속으로 반박하던 게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접촉사고로 엮여서는 어느새 집에 초대받아서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 받고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지. 솔직히 최근에는 둘이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 전에 혼자 어떻게 보냈는지가 기억이 안났다. 막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지나가던 일상들을 모조리 다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일상을 내어주면서까지 가까이 뒀던 사람이 있었나, 되짚어보게 될 정도로. 생전 처음보는 생물을 살피듯 새삼스레 재희를 보고있는데 눈썹 한쪽을 까딱인 재희가 불량하게 물었다.

“지금 저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별 생각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

“화 안낸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요.”

“뭐길래 사람 입 부터 막지? 일단 말해봐요.”

안돼요, 약속해야 말해줄 거에요. 속으로 제 욕했어요? 흠.. 어떨까. 그러는 사이에 빈 잔이 다시 채워졌다. 후 불면 날아갈 것 처럼 가벼운 대화들이 몇번이나 오갔다.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재고 따지기도 전에 생각한 것들을 솔직히 말하던 때로. 단지 눈 앞의 사람이 좋아서 ‘좋다’는 기분도 얼굴도 숨기기 힘들었던 그 때로. 

“얘는 혹시 친구가 없나.”

“허.”

“그래서 나 같은 아저씨랑 매일같이 놀아주는 건가….”

“와.”

화 안내겠다고 세 번이나 약속을 시켜놔서 그런가 길게 말은 못하면서 어이가 없어서 환장하겠다는 건 표현하고 싶은 모양인지 아주 말 한마디가 끝날 때 마다 아주 추임새처럼 탄식을 하고있었다. 그게 웃겨서 푸슬푸슬 웃었더니 눈을 땡그랗게 뜨고 노려보는데, 그래본 적은 없지만 치즈한테 간식을 줬다가 뺏으면 꼭 저런 얼굴을 할 것 같았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듯이 배신감과 짜증을 그렁그렁 매달고. 모르긴 몰라도 재희는 오늘 치즈한테 그런 눈초리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화내지 말라고 했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는 안했는데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생각했던 가설이 하나 더 있는데. 여기까지 듣고나면 이제 화 내도 돼요.”

“또 뭔데요.”

그랬더니 현관 앞에서 그랬던 것 처럼 팔짱을 끼고선 그게 뭐든 빨리 말해보라는 듯이 지긋이 쏘아봤다. 이런 말 하면 싫어할 것 같긴한데 그 모습마저 앵돌아진 고양이 같았다. 이게 처음부터 고양이 이름을 훔쳐다 저장해둔 재희 탓인지, 아니면 내일 모레면 서른이라는 애가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 내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몰래 쉼호흡을 한번 했다. 이 집에 왔을 때 부터, 아니 어쩌면 화단 벽돌단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던 그 날 부터. 그것도 아니면 훨씬 전 부터… 입 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하기 위해서. 

“나 좋아해요?” 

“…….”

“이제 마음대로 화 내도 되는데.” 

솔직히 부끄러웠지만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샐러드를 와삭와삭 씹었다. 이러다 이마에 구멍이 뚫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눈빛이 따가웠지만 꿋꿋하게 샐러드만 포크로 푹푹 찍어서 입으로 옮겼다. 통베이컨이 거의 깍둑설기로 들어간 샐러드는 씹을 때 마다 기름기가 배어나와서 맛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곳에서 이렇게 해먹는대도 똑같은 맛이 나오지는 않겠지. 그라탕도, 레몬이랑 허브가 들어간 이 술도 어딜가서도 못 먹어볼 거였다. 재희가 딱 한마디만 한다면. 예를들면 기분이 나쁘다던가-, 착각하지 말아달라던가. 

아마 내가 다섯살만 더 어렸더라면 더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우리가 만난지 반년이 채 안됐으니까. 좀 더 느긋하게 시간을 끌면서…, 좋은 모습도 더 보여주고. 네가 나를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잔뜩 수집해서 들이미는 거지. 너는 날 좋아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급증이 생긴건지 아니면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도박꾼 기질이라도 있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난 좋아해요.”

매일같이 남의 직장에 출석을 찍길래 근처에 사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던, 30분이 훌쩍 넘는 거리에 사는 너를. 비오는 날이면 신경이 쓰여 창 밖이나 내다보는 나를 미련하다고 욕하지 않고 주말에 고양이를 보러 가줬던 네가. 어디에서 가져오는 건지 바보같은 이모티콘이나 보내고, 조금만 방심하면 남의 휴대폰에 흔적을 만들어놓던 건방진 구석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볍게 넘겼던 말들에 다 애정이 담겨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이나 얻게하던 네가.

“응, 난 좋은데……, 재희 씨는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올리자 마자 아하하하, 웃어버렸다. 거기엔 새빨갛게 익은 얼굴의 재희가 있었다. 양 손으로 덮은 손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빨개져서는 푹 숙이고 있는 재희가. 맨날 그렇게 여유로운 척 사람을 놀려먹기만 하던 태도는 어디에 던져뒀는지 귀까지 발갛게 물들이고는 뭐라고 중얼중얼대길래 응? 하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뭐라고요? 하나도 안 들려요.”

“……비겁해요.”

“제가요?”

“네에…….”

아, 뽀뽀해주고 싶다. 

*   *   *

먀앍.

“치즈가 가지 말래요.”

“안돼요.”

미야아아.

“외롭대요. 아직 이 집에 적응도 안됐고, 어차피 내일도 주말이니까 더 있다 가라는데요.”

“…저 짧은 울음소리에 그렇게 많은 의미가 담겨있어요?”

“치즈들은 그래요.”

조금만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달라붙어서는 통 놔줄 생각을 안해서 토요일 절반을 침대에서 날렸건만, 아직도 성에 안 차는지 이제는 아예 팔 한쪽을 붙잡고는 질질 끌어당기는 게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던 치즈도 몇바퀴 시찰을 돌고 사료와 간식으로 양껏 배를 채운 뒤에는 저렇게 침대 한 자리를 차지하고선 야옹대고 있었다. 길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부터 당당하게 자길 쓰다듬으라고 발라당 넘어지던 치즈 답다면 다운 행보였다. 병원에서 미움을 샀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오래 봤기 때문인지 어째 집주인보다 나를 더 따랐는데, 정작 집주인은 그게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앞세워서는 삼십분째 저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애인과 귀여운 우리 애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매정하게 그냥 가버리실 건가요?”

먁! 

“치즈들을 버리고?”

먀아악!!

“…….”

치즈들은 또 뭐냐. 뻔뻔한 호칭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한숨이 나왔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싶어서. …어쩐지 직장에서 5분 거리 집을 두고 30분 넘는 출근길이 익숙해질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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