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괜찮지 않은 밤
204화 (M사 기준 203. 진압(5))를 보고 제가 괜찮지 않아서 후다닥 썼던 조각글이네요.
IF (탈출 후) / 204화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신해량은 턱을 젖히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침대를 공유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접촉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들리는 숨소리나 이마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치워주는 손길 같은 것. 혹은 다리에 다른 사람의 발이 걸린다거나, 가끔 몸 위로 다리나 손이 올라오기도 하는 것. 지금처럼 턱에 손이 와닿고 입술을 맞대는 것……아니, 정정한다. 이런 적은 없었다.
연인의 깜짝 스킨십에 놀라는 역할은 항상 상대에게 맡겨왔는데 오늘은 자신의 차례인가 보다. 하지만 턱을 젖혀서 입 안에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깍지 낀 손으로 누르려고 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최근엔 잘 부르지 않았던 호칭까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 선생님?
머리맡으로 팔을 뻗어 전등을 켜자마자 어둠 속에 흠뻑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는 땀으로, 눈 아래부터 턱까지는 눈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신해량은 질문을 하는 대신 일단 가슴에 얹어진 손 하나를 잡아다 자신의 목으로 이끌었다. 잘 자던 사람에게 대뜸 심폐소생술을 하는 사람을 향해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 전 괜찮습니다.
잡은 손가락을 귀 아래 경동맥이 뛰는 자리에 바로 대 주었지만 울상인 얼굴은 쉬이 마르지 않았다. 숨도 못 쉬고 있던 입이 더듬더듬 말을 토해냈다.
- 안, 안 뛰는 것 같은데.
- 뜁니다. 집중해보십시오.
눈을 뜨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살아있다는 증명이 충분히 될 테지만, 신해량은 다른 증거를 보라고 눈앞에 대고 흔드는 대신 묵묵히 박무현의 손에 목을 내어준 채 기다렸다. 떨고 있는 손끝이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맥을 제대로 느낄 때까지. 차갑게 식은 손이 자신의 체온과 비슷하게 데워질 때까지. 초점 없이 흔들리는 까맣고 파란 눈동자가 자신과 똑바로 시선을 맞출 수 있을 때까지.
동요하는 눈동자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신해량은, 박무현이 겪었을 일들을 짐작해본다.
평소처럼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놈들과 평소 본 적 없었던 놈들이 총을 들고 설치는 와중에 무너지기까지 하는 해저기지를 빠져나오는 길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삼천 미터 해저에서 벗어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버텨서 살아남았고, 일행 중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신체적 부상을 당한 사람은 다행히 없었지만, 전쟁이 남기는 상흔이 육체적인 것만이 아님을 신해량도 모르지 않았다.
시간은 꽤 지났지만 악몽은 몇 년이 지나든 사람의 발목을 잡아 그날 그 순간의 한복판으로 손쉽게 끌어내린다. 과거의 꿈을 꾸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 중에서도 흔하디 흔한 사례였다. 방금은 공격이 아니라 구조행위였지만……. 그렇다는 건, 가망 없는 심장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대신 심폐소생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일까.
자신이 동행하는 중에는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이 없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아마, 심장마비 같은 것보다는 총상이나 자상으로 쓰러진 자였을 터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피 흘리는 시신 앞에서 그의 눈을 가려주거나 어깨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줄 사람이 그때는 없었던 모양이다….
빠르지는 않아도 확실하게 뛰고 있는 울림이 손끝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면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박무현은 한숨과 미지근해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어 번 닦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신해량이 잠들기 전까지 보았던 얼굴로 돌아왔다.
- 미안합니다. 제가 방금…혹시 가슴 압박도 했나요? 뼈, 갈비뼈가 골절됐으면 어떡하지.
- 괜찮습니다.
- 괜찮…….
그것 또한 직접 만져서 확인할 수 있도록 아직 목에 대고 있는 손을 아래로 끌어오려는데, 박무현이 먼저 말끝을 흐리면서 손을 빼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다시 흔들리려는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심호흡까지 하는 것을 신해량은 가만히 기다렸다. 지친 눈동자가 다시 보이기까지 이번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이제 됐습니까.
- …예, 됐습니다.
박무현은 떨림이 조금씩 잦아드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시선으로만 신해량의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렇게 하면 근육 밑의 뼈가 들여다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 엑스레이라도 찍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체중을 실어 누르는 거니까 뼈에 금이 갔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어린 말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눈썹이 불만스러운 선을 그렸다. 순순히 그러겠노라 끄덕여주지 않고 덤덤히 저를 쳐다만 보는 이에게 잔소리라도 잔뜩 쏟아낼 듯한 기색이었지만, 땀에 젖어 엉킨 머리카락 밑에 가려져서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 저 보기보다 무겁습니다.
- 압니다. 제가 무현 씨 몸을 보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신의 무게에 대해 몇 마디 더 얹으려던 입이 순간 말문이 막혀 동그라미만 그리고 있는 사이에, 신해량이 작게 웃어 보였다.
- 그리고 아직 가슴 압박은 하기 전이었습니다.
- ……그냥 그렇게만 말씀하셔도 됐는데요.
박무현도 따라 웃다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자신이 어떤 악몽을 꾸었는지 더 캐묻지 않고 분위기를 돌리려는 시도를 그냥 고맙게 따르기로 했다. 비싼 돈 주고 불면증을 치료한 사람의 밤을 이 이상으로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해량 씨 심장이 좀 더 크게 뛰었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자면서도 들을 수 있게.
- 유감이군요. 심근은 제가 조절할 수 없는 근육이라.
- 조절할 수 있는 근육이어도 자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지요.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힘없이 웃던 입매가 마지막 말에 다시 굳어버리고 말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공간에서 다수를 상대로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남자의 마지막이. 남색 스웨트셔츠 아래 피의 색깔이. 자꾸 손이 미끄러져서 짚을 수 없던 맥박이. 1초에 두 번씩 눌렀던 가슴이. 그를 걷어차던 놈의 발이. 먹먹한 귀에도 선명하게 꽂히던 쾅 소리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정말 죽어버린 몸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순간이. 고작 그 정도의 말로도 불현듯 떠오르고 만 탓이다. 박무현은 눈앞에 살아있는 신해량을 한참, 아주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 예. 어떻게든 해서……열심히 삽시다. 당신도 나도.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은 박무현은 바다를 나온 이후 그가 가끔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끔 신해량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기도 한 빛의 얼굴을 하고서는 흐릿한 어둠을 가만히 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신해량의 시선이 문을 향해 걸어가는 자그마한 발소리 뒤로 따라붙었다.
- …안 주무십니까.
- 음, 바람 좀 쐬고 올까 해서요.
이대로 바로 다시 눕기에는 좀 무섭네요. 나이가 드니까 겁만 많아져서. 중얼거리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 박무현이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돌아보았다.
- 깨워서 미안합니다. 주무세요.
그러고 떠나간 문간에는 신해량이 이미 잠들기라도 한 양 가만가만히 속삭이는 소리만 남았다.
- 전 이제 괜찮습니다.
- …….
침대에 혼자 남은 신해량은 반쯤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흐트러진 베개만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방을 나섰다. 괜찮다는 말을 듣는 입장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참이었다.
두 명 분의 발소리 외에 불청객 없이 사방이 조용했다. 발 아래 바닥은 물기 하나 없이 말랐고, 바닷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람이 불고, 해가 곧 뜰 시각이었고. 살아있었지만. 괜찮지는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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