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2차
유료

[해량무현][유료발행] 시켜줘! 명예공청기

4월 디페스타 해무쁘띠존에 발간된 회지를 유료발행합니다.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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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저기지 if / 가이드버스

  • 2024년 4월 20일 디페스타 해무 쁘띠존에서 판매되었습니다.

  • 실물 회지는 5,000원에 판매되었으며, 유료발행은 가격을 약간 낮추어 판매합니다.

  • 약 34,000자 

  • 글리프 선발행 / ㅍㅌ 후발행합니다.


시켜줘!

명예공청기










1. 박무현은 허접 에스퍼다


상급 에스퍼로 각성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하는 세상이다.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이 ‘초능력’이라고 부르던 것들은 이젠 대중매체를 넘어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장바구니가 공중에 떠서 가거나, 한겨울에 반소매를 입은 사람을 봐도 이능이려니, 하며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박무현도 한 때 인생 역전을 상상한 적이 있다. 그건 반 세기 전의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는 꿈을 꾸는 것과 비슷했다. 무슨무슨 능력이 생기면… 무얼 하고… 어떻게 돈을 벌면… 따위의 상상을 누구나 했다. 그리고 한창 재활치료를 하던 10대 후반의 박무현에게도 각성열이 찾아왔다.

재활센터 바로 옆의 각성 진단센터에서 측정을 받았다. 간호사는 인바디처럼 생긴 기계로 박무현의 에스퍼 에너지를 재고 난 뒤 능력의 종류를 물었다. “순간이동이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순간이동에 530e면… 8급이네요. 진단 끝나셨고요, 옆에 안정실 쓰여있는 곳 가셔서 가이드 받고 가시면 됩니다.”

8급. 박무현이 진로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초능력이 다 무어냐. 공부해서 돈 잘 버는 직업 구해야지.



“뒤쪽은 개인정보보호 서약과 비밀 유지 서약서입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어, 에스퍼셨군요?”

영어의 쓰나미에서 허우적대던 박무현은 프리야 쿠마리의 말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8급입니다. 아무 짝에 쓸모없죠.”

“종류가?”

“순간이동입니다만… 한계 거리가 한 발짝 정도라서요.”

“아하.”

지금 방금 웃음 참았지.

“흠, 그래도 해저기지 생활하시면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능력을 사용하세요.”

“위협이요?”

“굳이 에스퍼 능력을 이야기하고 다니진 마시고요. 제 조언이 분명 언젠가 도움이 될 겁니다.”

황당한 소리였다. 위협이라니? 무슨 여기가 정글이라도 된다는 얘기인가? 직장에서 에스퍼 능력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위협이 발생한다면 신고하는게 옳지 않은가? 게다가 그의 에스퍼 능력으로는 고작 30cm 정도 순간이동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걸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위협이라면 그냥 달려서 도망치는 게 나았다. 에스퍼 능력을 사용한 뒤 후폭풍처럼 찾아오는 역통은 그야말로 고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무현에게 당장 중요한 건 눈앞의 영어 문장 덩어리였다. 의문 제기보다는 입사 절차가 앞섰다.



그리고… 대략 72시간 만에 박무현은 그 조언의 근거를 눈앞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퍼억! 사람이 얻어맞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빨이 비산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실제로는 처음이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이빨이 무슨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너무 놀라서 복도에서 선 채 꼼짝을 못했는데, 벌벌 떨리는 손에 쥔 머그잔 안에서 칫솔이(양치질 하고 오는 길이었다) 덩달아 진동하며 때대대대대대댕! 하며 소리를 냈다. 그 청아한 소리를 듣고 치던 놈과 맞던 놈이 동시에 박무현을 쳐다봤다. 너무 겁먹으면 헉 소리도 안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데 치던 놈이 맞던 놈을 버리곤 박무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박무현은 겁에 질린 나머지 온 힘을 다해 뒷걸음질 치다가 꼴사납게 주저앉고 말았다. 칫솔이 컵에서 솟구치더니 바닥에 퉁 튕겨 나갔다. 치던 놈이 멈칫 하곤 칫솔을 주워든 후 박무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새로 오신 치과 의사 선생님이십니까?”

“잘못했습니다! 네?”

뭐야? 눈 마주치고 보니 잘 생겼다. 하관의 생김새가 가히 세계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었다. 훤칠하니 잘생겨서 그런지 주변의 공기까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생 한국말?

“예?”

“네? 어, 어, 맞습니다. 치과의사입니다. 박무현입니다.”

“엔지니어 가팀 신해량입니다. 방금 보신 것은…” 미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일어나시죠.”

“아, 네.”

해저기지에 온 뒤 흐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들은 그 이름의 주인공이었다. 잘생겼다는 말은 없었잖아…. 박무현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상대방의… 신해량의 손을 얼른 잡았다. 신해량이 박무현을 쑥 당겨 일으켰다. 진짜 잘 생겼네. 청량함이 마치 비가 막 갠 직후의 맑은 공기 속에 있는 듯했다. 와, 나 얼빠였나?

“방금은…” 신해량은 뜸을 들였다.

“저 놈이 제 주먹에 와서 부딪쳤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박무현은 빠르게 정신을 잡았다.

“아니, 그래도….”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 있어도 사람을 치면….”

박무현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졸아들었다. 자꾸 말하다간 자신도 이 주먹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무현은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제일 급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거기, 그… 들으셨겠지만 제가 치과의사입니다. 이빨 잘 주워서 치과로 따라오십시오.”

“선생님.”

“제… 업무입니다.”

박무현은 소심하게 반항했다. 한 대 맞을 각오를 했는데, 미남은 묵묵히 박무현의 손을 놓아 주었다. 박무현은 얼른 꾸벅 목례를 하고 환자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뒤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 일만 10년을 했단 말야.

“치… 치과? 싫어!”

“지금 이빨이 빠지셨어요. 이빨 없이 사실 거예요?”

맞은 놈… 아니 환자도 치과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타입인 듯했다. 이빨이 빠졌다고 짚어주고 나서야 상대는 입안에서 혀를 굴려보더니 터덜터덜 이빨을 주워 돌아왔다.

“입에 물고 오세요. 혀 아래에 넣으시고, 삼키지 않게 조심하시고.”



신해량은 환자(데이브라고 했던 것 같다)가 치료를 다 받을 때까지 보호자인 양 박무현의 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치과에 오면 덜 무서울 줄 알았는데… 박무현은 어릴 적 갔던 동물원에서 들었던 호랑이 우는 소리를 떠올렸다. 그 호랑이와 한 우리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눈앞의 환자에 집중해야지. 박무현은 바삐 손을 놀려 긴급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빨리 발견해서 쓰시던 이빨을 그대로 썼어요. 고정된 상태 봐야 하니까 꾸준히 내원하셔야 합니다. 당분간 단단한 거 드시지 마시고요.”

박무현은 환자가 뭐라 웅얼거리는 것을 웃는 얼굴로 무시하며 멋대로 데… 뭐시기의 예약일을 잡아두었다. 안 오진 않을 것이다. 분명 멋대로 단단한 걸 드시다가 볼을 부여잡고 다시 오겠지. 임플란트… 혼자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환자를 보내고 사용한 기구를 정리하려 돌아오다가 신해량과 다시 마주쳤다. 아, 맞다….

“저,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그러고 보면 왜 따라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감시를 하려는 건가? 무엇을? 본인 험담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방금 나간 직원은 아시아인만 보면 시비를 걸곤 합니다. 우려가 되어 따라왔습니다.”

“어어, 네.”

“해저기지에는…” 청년이 말을 늘렸다. “이런 식으로 인사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해저기지는 이성적인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선생님께도 위협적인 일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거 네가 반쯤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 치과에 온 환자 중 절반은 네 이름을 찾던데. 박무현은 애써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셨던 일보다 더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신변에 위협을 느끼실 땐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제가 대답이 없으면 저희 팀의 서지혁이나 백애영에게 연락 주셔도 됩니다.”

“네? 어… 엔지니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해저기지 내에서 처벌 관련해서 겸직 같은 걸 하시는 건가요?”

“정식은 아닙니다.”

사적 제재를 한다는 소리 아니냐… 그 전에 엔지니어가 아니었냐고.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자 신해량이 재차 대답했다.

“물론 고장이 난 기자재가 있다거나 할 때도 연락 주십시오. 일정을 조율해서 방문해 드릴 겁니다.”

“아… 네….”

“업무가 끝나셨다면, 숙소까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제 숙소도 백호동에 있습니다.”

혹시 전부 주먹으로 패서 고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신해량이 불쑥 TMI를 뱉었다. 신기하네. 하긴, 양치질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거니까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 엄청나게 잘 생겼다. 공기가 다르다는 말은 이런 얘기였구나. 신해량과 함께 백호동으로 걸어가며 박무현은 어느 때인가 여름밤 바닷가에서 맡았던 것만 같은 고요하고도 맑은 기분에 휩싸였다. 신해량은 생각보다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박무현은 신참내기가 물어볼 만한 시설이나 생활 환경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엔지니어 팀장은 대답이 좀 짧긴 해도 질문에 대한 핵심은 곧잘 답해주었다.

어느새 다다른 제 숙소 앞에서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익숙한 공간에 돌아온 박무현은 문득 생각했다.

‘나… 반했나?’

뭔소리야. 차가운 이과 남성 박무현은 금세 제 생각을 부정했다. 미디어가 주입한 사랑의 방정식이 뇌에 어지간히도 스며들어있구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박무현은 보다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해저기지에 와서 놀란 것 중에는 폭력 사태와 치아파절 환자의 비율 말고도 건조함이 있었다. 해저기지는 물속에 있는데도 모든 공간이 대체로 건조했다. 박무현은… 습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인 열 명 중 두 명이 앓는다고 하는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였기 때문이다.

처음 치과에서 기자재 박스를 뜯으며 이 상자 안이 차라리 습도가 높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의 일터는 절대 그의 비염에 친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 치료를 할 땐 그야말로… 쾌적하다 못해 싱그러웠다. 양쪽 콧구멍이 동시에 호흡에 임하는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무슨 조화일까? 엔지니어 팀장이 개인적으로 들고 다니는 휴대용 가습기나 공기청정기 같은 게 있을 리는 없고… 혹시 밤에는 좀 습도가 올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아, 칫솔 딥블루에 두고 왔네… 박무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다시 막혀가는 코를 느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날 박무현은 오랜만에 병원 생활을 하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에스퍼 능력이 발현된 후, 박무현의 재활 치료 루틴에는 가이딩이 추가되었다. 주치의의 말로는 에스퍼 특성을 보유한 환자의 경우 가이딩을 진행하면 통한 에스퍼 에너지의 회복 과정에서 상처나 염증도 함께 회복되어 재활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이는 박무현의 재활 치료 기간을 상당히 단축해 주었다. 박무현은 그 시간을 꽤 좋아했는데, 힘들게 어딜 움직여야 하거나 고통이 동반되는 치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이딩 치료는 은행 창구처럼 한 뼘 정도 구멍이 있는 가림판 앞에 앉아서 20분정도 가이딩 치료사에게 팔꿈치를 내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과묵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친구들이 없어서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동생이나 조카가 생각난다며 귀여워하는 치료사도 있었다. 재활 운동을 하느라 잔뜩 소모된 체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가이딩 시간은 끝나 있곤 했다.

꿈속에서 박무현은 휠체어에 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북적이던 가이딩 치료실은 어쩐지 텅 비고 조용했다.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왔나? 박무현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나아갔다. 딱 한 군데,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얼른 그 앞에 나아간 박무현은 병원복 소매를 걷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너무 늦게 왔나요? 왜 아무도 안 계시죠.’

대답은 없었다. 내가 너무 늦어서 기다리느라 피곤하신가 봐. 치료사는 말없이 박무현의 팔꿈치를 잡았다. 박무현은 눈치를 보며 가이딩이 시작되길 기다렸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뭐지? 그 순간, 박무현은 가림판 너머의 치료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신해량이었다.

“흐억!”

박무현은 벽에 머리를 박고 잠에서 깼다.

미친, 신해량 꿈? 나 진짜 신해량한테 반했나? 아니, 그럴 리가…. 아침부터 혼란한 머릿속에서 박무현은 어느 순간 진실이 그를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아마 뇌는 아직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가이딩을 받으면서 느꼈던 감각을… 박무현은 어떤 상냥한 치료사가 해줬던 말을 떠올려냈다.

‘에스퍼와 가이드 간에 파장이 맞거나 정말 가이딩 등급이 높은 가이드의 경우는 이렇게 붙잡고 있지 않아도 가이드가 될 때가 있어요. 학생도 운이 좋으면 그런 가이드를 만날 거예요.’

박무현은 깨달았다. 꿈으로 반추할 정도로 달가웠던 곳. 아픔과 고통이 멀어지던 감각.

알고 있는 형태의 안온함.

가이딩이었어.

신해량이… 가이드였구나.





2. 사람을 공기청정기로 삼지 말자



가까이 있기만 해도 가이딩이 가능하다니, 신해량은 정말 뛰어난 가이드인가 보다. 등급이 얼마나 될까? 설마 1급은 아니겠지? 아니다, 1급쯤 되면 이미 정부에서 귀히 대한다고 했다. 그래도… 비록 내 등급이 낮아서 영향을 받기 쉽긴 하지만 그래도 2급은 되어야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신해량은 그러면 해저기지에서 가이드 활동도 하고 있는걸까?

정신 차려 보니 온종일 신해량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박무현은 제 가설에 맞추어 이런저런 검증 작업을 거쳤다. 똑같은 시간, 요일에 딥블루에 들어가 보았을 때 딱히 비염이 완화되는 기색은 없었다. 검증의 일환으로 박무현은 작은 습도계를 하나 구해서 늘 지니고 다녔다. 신해량과 마주친 날에도(상쾌했다) 연동 어플리케이션에 자동 기록된 습도는 일관되게 처참했다.

사실 신해량과의 폭력적인 첫 대면 이후 박무현은 꽤 자주 그날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나 루틴 같은 재채기를 하거나 식당에서 코가 막혀 슬픈 식사를 할 때 특히 그랬다. 평생 비염으로 큰 불편을 느꼈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사람이 있다가 없으니까 이렇게 간사했다.

아무튼 박무현은 확신했다. 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겪었던 일은 분명히 가이딩을 통한 종합 염증 치료였다.

검증이 완료되었다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박무현은 잠시 환경을 점검했다. 자신은 치과의사고… 신해량은 엔지니어다. 신해량이 치아 검진이나 치과 치료를 오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드물다는 뜻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한 번 실행을 결심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박무현은 검정고시를 거쳐 치대 졸업까지 이뤄낸 두뇌를 열심히 굴렸다. 그때 신해량이 분명….

‘위협적인 일이 발생할 때…’

시방 박무현 본인이 제일 위험한 사람이었다.

‘고장 난 기자재가….’

박무현은 핸드 피스를 째려보았다.


박무현은 염치불고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신해량에게 치댔다.

핸드 피스 하나가 고장 날 때마다 신해량에게 메시지를 보내 수리를 요청하고, 신해량의 근무 상태를 째려보다가 그것이 ‘휴식 중’으로 바뀌는 순간 백호동 앞에서 서성거렸다. 도움이 필요할 경우 언제든 부르라는 말은 예의상 한 말이었겠지만 의외로 신해량은 박무현이 무얼 요청할 때마다 부하 엔지니어를 보내는 일 없이 직접 수리를 하러 왔다. 딱히 살가운 대화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고 박무현의 스몰토크에 적당히 대답을 해 주다가 할 일이 끝나면 그럼 수고하십시오, 하고 돌아가 버리는 게 다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박무현의 삶의 질은 상승했다….

진짜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구나. 그의 능력을 몰래 부려 먹는 것 같아 조금 양심이 아팠지만 딱히 언급하지 않는 걸로 봐선 본인에게도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무조건적으로 요청에 달려오는 건 아니었고 신해량 본인이 바쁘거나 할 땐 일정 조율을 요청했다. 박무현은 나름 커피나 사탕 같은 것도 열심히 제공했다. 시원한 호흡을 제공하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러나 박무현의 작은 행복에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 신 팀장님이 퇴사하신다고요…?!”

박무현은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말도 없이 그럴 수 있어? 우리 친했잖아?! 안 친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박무현 혼자 마음속으로 친밀감을 잔뜩 쌓았을 뿐이었다… 박무현은 착잡한 마음으로 커피를 쫍 빨았다. 벌써 바닥을 드러낸 컵에서는 공기 빨아들이는 소리만 났다. 소식을 전해준 한국인 동료, 유금이가 박무현 쪽으로 휘낭시에 하나를 더 밀어줬다.

"그래서 요즘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현쌤 멘탈관리 좀 해 드리려고 왔어요. 바쁘실 것 같아서."

"제가요?"

소식을 요약해 보자면 신해량의 퇴사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엔지니어 팀 간의 불필요한 소요를 막기 위해 퇴사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길 예정이었는데, 고작 일주일을 남겨두고 엔지니어 총괄이라는 마이클 로아커인지 킨더초콜릿인지 하는 양반이 월간회의에서 "미스터 씬, 후임은 정해졌나? 아, 지난번에 리포트했다고? 내가 못 봤군." 같은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의가 끝난 뒤 약 1시간 동안 주먹질을 동반한 대거리가 세 번은 있었다고 했다.

"그게 어제 일이라 이제 거의 주먹질 파티, 주먹질 대잔치, 주먹질 블랙 프라이데이 이런 거 열렸을 줄 알았거든요."

듣고 보니 그렇다. 박무현이 겪어본 해저기지 특성상 그 정도로 난리가 났으면 딥블루는 이미 월드컵 한일전 열린 날 치킨집 만큼 불이 나야 정상이다.

"어… 그런데 요 며칠 응급 환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빵 드리고 바로 돌아가야 할 줄 알았는데 웬걸 한가하시네요."

"음… 다들 대화로 해결하신 게 아닐까요?"

유금이가 대답은 안 하고 웃었다.

일주일… 고작 일주일이라니… 너무 짧았다. 차라리 한 달 전에 미리 얘기해 줬다면 마음의 준비를 했을 텐데… 하긴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무현은 사실 제 마음이 무거운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목적을 감추고 신해량에게 접근해서 이득을 챙겨왔기 때문이다. 털어놓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성실한 엔지니어에게 당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려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런 경우 박무현은 정답을 알고 있다. 더 미루지 않는 것이다.

사과와 사랑니 발치는 미루지 않는 편이 좋다. 박무현은 결연하게 패드를 들고 신해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늦은 저녁 백호동 38호실의 도어벨이 울렸다. 신해량이 약속한 시각이었다. 박무현은 침대에서 노을이를 주물럭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분명 방금까지 심호흡하며 진정을 했는데 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사랑니 뽑으러 갈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업보니까… 박무현은 책상에 노을이를 대충 올려두고 문을 열었다. 업무를 막 끝내고 온 듯, 엔지니어복 차림인 신해량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헉, 지금까지 업무 보고 오신 겁니까?"

"안녕하십니까. 업무는 6시쯤 끝났고, 밥 먹으면서 리뷰 정도만 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도 고생하시네요."

"혹시 들어가서 해야 하는 이야기입니까?"

신해량이 방 안을 곁눈질했다. 박무현은 얼른 문밖으로 한 발짝 나왔다.

"아뇨, 금방 끝납니다. 어… 금방 아닐 수도 있지만…"

박무현의 뒤에서 슬라이딩 도어가 스르륵 닫혔다. 신해량이 가만히 박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박무현.

"저, 사실… 지금까지 신해량 팀장님께 제가 숨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분명 생각해 뒀는데,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지? 박무현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퇴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엿새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어… 휴, 그게, 사실…" 박무현은 심호흡했다.

"…제가, 신 팀장님을 이용했습니다."

"예?"

"제가 사실 에스퍼 능력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신 팀장님이 가이드시니까…"

박무현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신해량의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제가 가이드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네?"

"제게 가이드 적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희 팀원 중에도 없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정부 쪽의 극소수뿐입니다."

"어, 어, 그런가요?"

정말로? 해저기지에도 에스퍼가 많을 텐데 아무도 몰랐다고? 박무현의 당황과 상관없이 신해량의 표정은 험악해져만 갔다.

점점 겁이 났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상대는 물리력으로 해저기지를 휩쓸고 다니는 사람이다.

"어쩐지 자주 불러낸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게, 그것도 설명을…"

"무슨 속셈이었지?"

신해량의 양 팔이 문을 짚으며 박무현의 도주를 봉쇄했다. 박무현의 심장이 맹수를 만난 듯 뛰었다. 순수한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박무현은 겁에 질려 에스퍼 능력을 발휘했다.

신해량의 눈앞에서 박무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박무현은 50cm 뒤인 방문 안쪽으로 순간이동했다. 숨이 가빴다. 헐떡거리는 와중 문 너머에서 신해량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들렸다. 뭐지? 과호흡인가? 방의 아래위가 뒤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사이에 자신은 바닥에 있었는데, 벽인 것도 같았고, 천장인 것도 같았다.

“쿨럭, 헉.”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확실하진 않았다. 시야가 어둡고 입안이 찝찔했다.

더는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

자야 할 것 같아….




3. 가이드의 사정


해저기지는 온통 변수로 가득 찬 퍼즐 같은 곳이다. 그리고 그 변수의 대부분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몇 년간 해저기지에서 생존 게임을 해 온 신해량의 감상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입사한 치과의사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신해량을 곤란에 빠뜨렸다. 해저기지에 산적한 변수들과는 속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저기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는 너무나… 정상인인 데다, 이웃으로 두기에 기꺼운 타입이었다. 덕분에 백호동 복도에서 박무현과 처음 대면한 후, 신해량은 자신이 정상 시민을 대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사하면 한동안 사회화 기간이라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고민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언제든 불러도 괜찮다는 말을 한 뒤 치과의사 (“박무현이라고 합니다.”)는 정말로 자주 그를 불러냈다. 대개는 치료용 도구나 자잘한 수리를 요청했는데, 그렇게 불려 나가면 치과의사는 으레 어디서 받았다는 간식을 내밀거나(“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을 함부로 드시면 안 됩니다.” “어, 연구동의 김가영 씨가 준 건데요.” “그건 괜찮습니다.”) 커피 같은 음료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러면서 계속 말을 걸었는데, 사람이 두 명 이상 있을 때 발생하는 침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타입으로 보였다. 대화는 으레 바쁜 와중에 불러내어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되었고, 신해량은 점점 꽤 긴 답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박무현은 훌륭한 사회화 훈련 도우미였다. 그는 좋은 청자였고, 상냥했고, 이런저런 개인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반응도 솔직한 편이라 자신의 발화 수위를 가늠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상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그러나 유의할 만한 것은 아니라 여겼다. 거짓말로 무엇을 치장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물리적 갈등으로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 없는 대화 시간에 신해량은 저도 모르게 정을 붙였다.

도를 넘은 화를 내고 압박을 한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과했어.’

늘 부드럽던 박무현의 목소리로 듣는 ‘이용했다’ 라는 말은 유독 까끌했다. 치과의사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근거를 모를 배신감이 신해량을 부추겼다. 가이드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는 본능이 이성을 앞섰다. 자신조차도 오랜 시간 잊었던 비밀 아닌 비밀이었으므로. 겁에 질린 표정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신해량은 망설였다.

그리고 망설임과 동시에 박무현은 그의 눈앞에서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에스퍼였나.’

지나온 전장에서 무수히 보았던 광경을 오랜만에 목도했다. 순간이동 능력자는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였다. 등급이 높을수록 난이도는 올라간다. 환경에 따라 상대가 엄폐물 뒤나 지하, 상공으로 순간이동하는 경우는 특히 일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여기는 벽 너머에는 해수 뿐인 심해 3천 미터 아래의 해저기지이고, 상대는 훤히 뚫려 있는 복도에서 능력을 사용했다.

기민한 판단으로 양옆을 살피려는데 문 안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다. 불안감이 등을 타고 달렸다. 신해량은 다급히 팀장 권한으로 38호실의 문을 열었다. 몇 주간 담소를 나누었던 상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사이 흐른 코피가 박무현의 볼을 적시며 둥그렇게 고였다.

“선… 박무현 씨.”

신해량은 치과의사의 이름을 부르며 박무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에스퍼 에너지를 바닥날 정도로 사용한 건가?

‘…겨우 이 정도 거리를 이동한 것만으로?’

메딕을… 불러야 할 지도 모른다. 다행히 호흡은 있었다. 맥을 확인하기 위해 박무현의 경동맥을 짚는데, 얕은 맥박 너머로 어떠한 힘이 팔을 타고 신해량의 심장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놀라고 당황했지만 갈증과도 같은 간절한 느낌이 전해져 손을 뗄 수 없었다. 괴롭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마치 신경이나 힘줄을 잡아채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건, 아마도 정황상…

‘가이딩인가.’

가이딩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무현의 맥이 정상 범위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색도 나아졌고, 코피도 멎었다. 콧등을 눌러 지혈하려던 손이 갈 데 없이 흔들렸다. 박무현의 상태가 나아지며 아이가 손을 잡아끄는 듯한 감각도 점점 약해졌다. 가이딩을 받아 괴물같이 일어나는 에스퍼를 수없이 보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오히려 더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손이 좀 닿은 것 만으로 이 정도로 회복된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마치….

신해량은 박무현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침대로 그를 옮겼다. 얼굴에 묻은 피를 제외하면 이제 치과의사는 그냥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에스퍼 에너지가 고갈된 에스퍼의 끝은 늘 부상으로 인한 이탈이었다. 경험 많은 용병으로서, 그리고 일종의… 가해자로서, 신해량은 박무현의 상태를 해결해야 할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용병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때 그 녀석들이 가이딩을 어떻게 했더라.


박무현은 포근하고 푹신한 감각에 잠에서 깼다.

대학 시절 필수 전공 8시 강의를 잊고 늦잠을 잤을 때보다 더 푹 잔 기분이었다. 온몸이 개운하고 정신이 맑았다. 여기가 해저기지가 아니었다면 분명 새 소리 같은 게 창밖으로 들렸을 텐데. 박무현은 기분 좋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으악!!!”

그리고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정확히는, 튀어 오르고 싶었는데 신해량이 상의를 탈의한 채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푹신한 게 지금….

아니, 나는 또 왜 윗도리를 벗고 있어?! 맨살이 닿는 느낌이 갑자기 선명했다. 박무현이 바둥거리자, 신해량이 팔 한쪽을 들어 그를 풀어주었다. 입을 떡 벌리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박무현에게 신해량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니, 아니, 아니….”

박무현이 말을 더듬었다. 신해량이 아, 하고 덧붙였다.

“접촉 면적이 넓을수록 가이딩 효율이 높아졌던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선생님의 티셔츠를 벗겼습니다. 혹시 몰라 밤새 접촉을 유지했습니다.”

혹시 몰라? 가이딩? 단어가 산개하듯 흩어져선 박무현의 머리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맞다, 어제 신 팀장에게 이야기를…

박무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신해량이 소리 없이 한숨을 쉬곤 고개를 숙였다.

“어제 위협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과민하게 반응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신해량이 재차 사과했다. 박무현은 신해량의 정수리를 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꾹꾹 눌렀다. 젊은 친구에게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손윗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감정적인 대응은 늘 끝이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게다가… 잘못은 자신이 먼저 했다.

“…어차피 팀장님의 속이 상할 만한 것을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다른 것에 속이 상하신 것 같지만…”

“괜찮으시면, 어제 말씀해 주시려던 것을 듣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셨다면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드리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다시 마음을 먹으려니까 또 심장이 떨리긴 했다. 컵을 깬 여덟 살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제가 팀장님을 이용했습니다. 이건 말씀드렸었지요….”

“예.”

“제가 에스퍼 능력이 있다고도 말씀드렸고요.”

“예. 어제 순간이동 계열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 같았습니다만.”

“어… 네, 네.”

“혹시… 능력 사용에 부담이 큰 편이십니까?”

“어, 글쎄요? 부담이 있는지 확인할 만큼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등급이 높지도 않고요….”

“…….”

신해량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읽히는 게 처음이라 박무현은 약간 신기했다.

“그, 문제가 있었나요?”

신해량이 방 한쪽을 묵묵히 곁눈질했다. 청년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박무현은 헉 소리를 냈다. 거무튀튀하게 마른 피웅덩이와 핏자국이 드문드문 보이는 잠옷 상의가 문 앞에 어질러져 있었다. 박무현은 저도 모르게 제 머리며 몸을 더듬었다. 아픈 곳은 없는데…?

“선생님이 사라지신 뒤 문 안쪽에서 큰 소리가 났고… 불안한 생각이 들어 문을 강제 개폐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건 죄송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디 부딪쳤나요? 문은 어떻게 여셨습니까?”

“팀장 권한으로 해저기지의 모든 문을 개폐 가능합니다. 선생님도 의료직이라 권한이 있으실 겁니다. 제가 들어갔을 땐 선생님은 이미 쓰러져 계셨고… 다행히 의자나 탁자 등에 부딪치지는 않으셨지만 안색이 좋지 않으셨고 코피를 심하게 흘리셨습니다.”

박무현은 당황해서 코 밑을 더듬었다. 얼굴 쪽은 뭐가 만져지지 않았는데, 머리카락에서 마른 피가 가루가 되어 투툭 떨어졌다. 맙소사.

“가이딩을 해주신 이유가 그래서였군요.”

“예. 적확한 판단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만….”

무슨 소리지? 박무현의 지금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신해량이 솜씨 좋게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제가 하시던 말씀을 끊었군요. 마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죠… 제 에스퍼 능력으로 돌아가면, 음… 아무튼, 팀장님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다 가이딩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뒤로 가이딩을 받고 싶어서 자주 팀장님을 불러냈습니다. 이게 다예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사람을 무급으로 부려 먹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난 박무현은 조금 민망해졌다. 그런데 생각에 잠겨 있던 신해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실, 그 부분이 조금 의아했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제게 가이딩을 받으셨다는 부분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네? 하지만 어젯밤에도 계속 접촉 가이딩을 하셨다고… 하신 게 아닙니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요. 기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제 제가 느낀 현상이 가이딩이 맞다고 가정할 때, 제게는 이번이 첫 가이딩 경험이 됩니다.”

뭐? 신해량은 얼이 빠진 박무현 앞에 여전히 다소곳하게 앉은 채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계측을 기준으로 할 경우 저는 4급 수준의 가이드입니다. 급수만 따지면 그럭저럭 쓸만한 정도입니다만… 가이딩 자체가 되지 않아, 대개는 특기하지 않는 편입니다. 특이체질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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