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 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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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 。*1부 4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3) | 여우 수인 김재희 X 마법사 박무현

月明 by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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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1부 4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3)

여우의 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무현은 23일 오늘부터 다음날까지 휴가를 냈다고 했다. 그 덕에 재희는 어젯밤에 무현이 퇴근하고 나서 무현과 졸릴 때까지 크리스마스에 무슨 음식을 먹을지 토론 같은 상의를 했다. 무현은 거의 매일 일기를 쓰던 일과도 미루고 재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자 샐러드.’

‘음.’

‘싫어? 칠면조 고기는?’

‘좋아요. 없으면 큰일 나요.’

‘고기 스튜.’

‘형 고기 스튜밖에 몰라요? 이건 평소에도 먹잖아요. 그치만 좋아요.’

‘케이크는?’

‘당연히 있어야죠. 초콜릿이나 딸기가 좋아요.’

‘쿠키도?’

‘네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무현은 재희와 대화하면서 메모장에 뭔갈 끼적끼적 적고 있었는데, 재희는 무현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그것을 무사히 입수했다.

 

재희는 무현의 글씨가 적힌 메모를 소중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비장하게 목발을 짚었다.

재희는 무현 없는 외출을 결심한 참이다. 무턱대고 형의 동전 지갑을 몰래 들고, 형이 사려고 한 물건의 쪽지를 주머니에 넣은 채 힘차게 나섰다.

그 이유는 별거 없었다. 내일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그럼 장식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리스나 전등이나 나무 한 그루 들여놓지 않은 이 칙칙한 집에 설마 음식만 늘어놓을 생각인가? 재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부탁하면 같이 가서 살 수는 있겠지만 재희는 무현에게 무현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결정한 외출이었다.

재희는 무현이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무현 몰래 조용히 오두막에서 나왔다. 큰 귀를 충분히 가릴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모자도 썼고, 꼬리도 단추를 잘 잠근 겉옷 아래로 넣어두었으니 이제 감쪽같이 인간이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떵떵거리며 걸어 다닐 수 있다. 아니, 목발을 짚어서 떵떵거리진 못하겠구나.

거기다 여기 쪽지에 적힌 내용을 보니 약초도 몇 개 필요한 모양이다. 이걸 사다 주면 무현이 좋아할 거고, 도움 되는 사람이 된다면 무현도……. 자신을 몰아내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심이었다.

재희의 야심 찬 작전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무현과 산을 돌아다니면서 알아낸 완만한 경사로를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내려간다.

두 번째. 내려가자마자 상점에서 트리에 달 장식을 구매한다. 무거운 물건은 집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형은 대부분 이렇게 하던데. 주소는 저번에 무현이 재희를 가방에 넣고 시가지에 내려갔을 때 무현이 말하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은행 건물 쪽 산 입구에서 길 따라 올라오면 보이는 오두막.

세 번째. 장보기를 마치면 바나나 우유 하나 들고 늦지 않게 돌아간다.

아주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제 가보자, 하고 목발을 고쳐잡았는데, 어디선가 뱀이 스르륵 기어나와 재희의 곁에 멈췄다. 무현이 오래 키웠다던 뱀이었다. 재희는 분홍빛 리본을 단 그 뱀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긴장했다.

“왜?”

재희는 무현이 뱀에게 말을 걸듯이 물었다. 말을 걸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뱀은 멈춰서 재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해.”

다른 동물, 그것도 파충류와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 재희는 본인의 말을 뱀이 알아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리본을 단 뱀은 혀를 낼름거리며 재희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같이 가게?”

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목발을 타고 올라와 앞으로 목에 걸어 멘 재희의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흥. 짧게 콧숨을 내쉰 재희가 앞으로 목발을 짚으며 말했다.

“안 무거워서 데려가는 거야.”

적어도 혼자는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재희는 거의 한 시간 반을 넘게 걸려 산을 내려왔다. 무현의 등이나 가방에 실려 내려왔을 때는 15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체력이 완전히 쭉 빠져서 대단히 힘들었다. 재희가 다섯 번 목발을 짚는 사이에 지나가는 행인은 열 걸음 앞섰다. 솔직히 쓰고 있던 모자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당장 모자를 벗고 귀를 털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솔직히 거기까지 마음이 닿았지만, 금방 시가지가 보이자 여기까지 온 거 구경이라도 해야겠다는 오기로 상점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재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잡화점이 늘어서 있는 거리였다.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 이 동네에 살았을 때부터 이렇게 모자를 눌러 쓰고 그쪽 주변을 서성였다. 여우로 변해서 돌아다닐 때도 있었다.

움직이기 불편해서 그렇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즐겁다.

잡화점에는 친절한 사람도 있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손님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재희는 친절하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의 가게를 택했다. 문 앞에 걸어둘 리스 하나와 오두막 앞 침엽수에 걸어둘 장식……을 가방에 들어갈 정도만 샀다.

재희는 자신이 돈을 셀 줄 안다는 점이 무척 뿌듯했다. 거기다 주인에게 칭찬도 받았다. 어린데 셈도 잘하네~ 하면서. 목발을 짚어 바깥으로 나오면서부터는 무현이 갔던 약초상에 가서 쪽지에 적혀있는 것을 그대로 읊었다. 무현은 항상 여기에 오면 그것만 사 갔는지, 약초상 주인은 ‘박무현 선생님 심부름으로 왔구나.’ 하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약초를 사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재희는 이제 적당히 돌았으니 자신이 먹을 바나나 우유 하나만 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재희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리고 재희는 순식간에 여러 명에게 둘러싸였다. 심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얌전히 걸어.”

누구냐고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재희는 이미 그들의 얼굴을 알았다. 재희는 그들의 말을 따를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큰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서 대답 없이 목발을 앞으로 짚었다.

말하자면 길어서 구태여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니까, 재희는 무현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어쩌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둘일 수도, 셋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묻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묻는다면 술술 불어야 할 어떤 대답들 말이다.

무현에게 말하기 두려운 것들. 이를테면, 자신이 설산 위에서 혼자 기어가고 있었던 이유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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