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설원에서는 눈을 뜰 수 없다.

어바등

눈을 뜨니 그곳은 새햐안 설원이었다.

박무현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침대에서 떨어져야 했고 온 몸이 바닥에 내팽겨쳐지는 고통에 이제는 드디어(이 말이 적당한가?)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그 죽음의 와중에 생각했는데.

아니면 죽지 않고 탈출에 성공한 것일까? 쌓여 있던 케케묵은 시간들이 봉인에서 풀려나듯이 흘러가버려서 대한도에도 겨울이 온 것은 아닐까?

박무현은 마지막까지 회차를 반복하는 동안 함께 남았던 신해량과 함께 탈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회차에서는 탈출정을 탔고 어떤 회차에서는 중앙동 엘리베이터에 올랐으며 어떤 회차에서는 케이블카를 탔던 것 같다. 과거의 기억(과거라고 하기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되었지만)이 뒤엉켜서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셔츠에 뭉텅이로 엉겨붙은 눈덩이를 손으로 탈탈 털었다. 그제서야 추위가 몸 안으로 스미는 것에 몸을 떨었다. 주변을 살펴보자 저 멀리에 작은 점이 보였다. 아마 건물인 것 같았는데 확신은 들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확신이 없더라도 저곳으로 걸어야 했다. 박무현은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삐그덕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갓 태어난 기린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뗐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안한 기분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두 번째였던가, 흐릿해진 기억의 저편에서 들었던 우주에서 홀로 살아 남았다는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 직전에서 시간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혼자 살아 남았다고. 박무현은 어쩌면 자신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섬칫 어깨를 떨었다. 추위 탓은 아니었다. 추위보다 더한, 뒷목에 드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사람들을 대한도로 올려보낸 것이 무한교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면 어쩌지?

박무현은 고개를 저으며 차게 식어서 오히려 열이 오르는 것 같은 양 볼을 문질렀다. 그럴리가 없다. 모두 죽었을리가...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숫자를 셌다. 뒤를 돌아보니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꽤나 걸었는지 하얀 눈밭 위로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었다. 그러고보니 신발을 신고 있네. 방에서 깨어났다면 신고 있을 리가 없는데. 신발을 신고 있을 거면 점퍼도 입고 있으면 어디가 덧나나. 추워 죽겠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은 종아리 아래까지 쌓여 있었고 그 탓에 걷는 것이 힘겨웠다. 사위는 적막했다. 눈은 그곳에 쌓인지 오래된 것인지 제법 굳어서 발이 눈을 밟을 때마다 푹신한 느낌은 없었고 뽀득뽀득 하는 소음을 냈다.

검은색 점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환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무현은 한 가지 가정을 세웠다. 내가 진짜 대한도로 빠져 나왔다면, 저곳에 대한도로 탈출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무한교를 피해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이다.

검은 점이 건물이 아니라 죽은 나무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버리고 간 거대한 쓰레기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싶었다. 피곤했다. 분명 다시 깨어나면 몸의 피로나 상처들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적이 피로감은 늘 여전했다. 오히려 누적되면 누적 되었지 해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싶었다. 가장 희망적인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박무현은 그러기로 했다. 건물에 들어갔을 때 무한교도들이 있더라도 일단 따뜻한 옷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도. 담요가 있다면 그것도 달라고 해야지. 전기 담요면 좋겠다. 얼어 죽을 것 같으니까.

기억 속의 누군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누구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가 추위에 감각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의지와 상관 없이 다리는 끊임없이 눈길을 헤치며 걸었다. 무릎을 눈 위로 들어올릴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눈을 걷어차듯 길게 길을 내며 걸었는데 덕분에 물건이 질질 끌린 것 같은 모양새로 흔적이 남았다. 야생동물 전문가들은 발자국을 보고 무슨 동물이 그곳에 왔다 갔는지 한 번에 알아차리던데 내가 남긴 흔적을 보면 무슨 동물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허튼 생각이 들었지만 추위에 지쳐 나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인간인 것이 자신이 보기에도 명확해서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주변으로 그 어떤 족적흔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것은 물론이고 동물의 흔적도 없었다. 동물의 흔적이 없는 것은 다행이라 여겨야 할 지 모르겠다. 작은 소동물들은 무겁지 않아서 눈 위로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위협이 될만한 몸집이 큰 동물인데 그들의 흔적도 없었다. 겨울에는 월동을 준비하느라 동면에 들어가니 흔적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곳이 북극이어서 북극곰이...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북극곰이 멸종한 지 꽤 되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냈다.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방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적어도 날짜와 시간만큼은 무엇보다도 명확했는데 이제는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도, 시간도, 현재에 대한 감각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렸다.

몇 회차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박무현은 침대에서 떨어지고 시간을 되돌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절망에 허덕이며 울었다. 이후 최근 회차에 가까워지자 우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코피가 나는 것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몸은 되돌아가도 뇌에 걸리는 과부하는 켜켜이 쌓이는 것인지 갈 수록 머리가 무거웠다.

추위에 생각조차도 얼어붙는 것 같이 느껴질 즈음 작은 점은 엄지 손톱만큼 커졌다. 그것은 검은색 큐브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보통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저런 양식의 건물은 짓지 않는다.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지붕을 기울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 눈이 적재 되더라도 쉽게 치울 수 있고 하중을 받은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없다. 이곳은 원래 눈이 내리는 지역이 아닌 건가?

일단 목표지점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몸은 추위에 덜덜 떨리다 못해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 이상 설원을 걷는다면 얼어 죽을 것이 뻔했다. 눈에서 죽으면 안된다. 눈이 녹으면 꼭 익사체 같은 모양일 것 같았다. 익사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눈에서 죽으면 안된다.

박무현은 이것이 누군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억을 더듬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져서 손으로 앞길을 푹푹 퍼내며 걸었다. 조금이라도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다지 소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손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터질 것 같았다. 동상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저곳에 도착할 즈음 손가락이 붉다못해 파랗게 변하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에서 새햐얀 입김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나오자마자 얼어붙어 흩어졌다. 

유금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가영은, 이지현이나 강수정, 엠마는? 헨리나 고양이나 뱀은? 서지혁과 백애영은? 마지막으로 함께 탈출했던 신해량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을 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나만 이제야 바깥으로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시간은 왜곡되니까 되돌아갔던 만큼 앞으로 흘러버려서 내 시간은 어쩌면 회차를 반복한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지나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시간을 얼마나 많이 되돌아 간 거지? 

만약 시간을 되돌린 것이 한 달 정도가 아니라 몇 년 만큼의 분량이라면, 아니면 시간이 불공평하게도 되돌아간 것의 배로 흘러가 버린 것이라면. 대한도로 탈출한 이들 모두 죽었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채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라면.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박무현이라는 존재는 없어진 것이 되었다면.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일단 목표한 곳으로 걷자. 해저기지를 탈출하는 것은 긴 터널을 걷는 행위와 비슷했는데 설원을 빠져나가는 것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반대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해저기지는 바다에 있고 설원은 육상인데. 그런 잡념들이 끊임 없이 끼어드는 것을 보니 아직 살만한 모양이라고 스스로 이죽거렸다.

손톱만하던 검은 큐브는 어느 덧 건축의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큐브 위에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그걸 보완할 정도로 강한 신소재를 사용한 건축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인간의 흔적이다. 박무현은 그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얀 설원을 목표점 없이 끝없이 걸어야 했다면 절망에 나가떨어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명확한 확신이 없어도 목표가 있다면 인간은 좌절에서 일어날 수 있다. 박무현은 그 사실을 믿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자 기관지가 아렸다. 그런데도 힘에 부쳐서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숨을 내쉴때마다 입김이 눈앞을 가렸다가 흩어졌다. 빨리 저 건물에 도착하고 싶었다. 동시에 건물에 손을 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박무현에게 현실이란 그런 것이었다. 손에 잡힐 듯 하다가도 사라지고 마는.

검은 큐브가 거리감각으로 50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그것이 마냥 검은색이 아니라는 것이 보였다. 작게 난 창문들이 큐브의 한 면에 두 개씩 있었다. 문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반대편에 나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없으면 창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창문을 뭘로 부수지?

불가능하지만 거의 뛰다시피 해서 건물의 코앞까지 다가가자 그 큐브 형태의 건물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2층인지 3층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았다. 아마 층고가 꽤 높은 2층짜리 건물이지 싶었다.

순간적으로 기쁜 마음과 건물이 진짜 신기루처럼 사라질까하는 두려움에 건물에 손을 대려 했지만 건물의 외벽이 철 같은 재질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하마터면 손가락 거죽이 뜯어질 뻔 했다.

박무현은 손을 거두고 건물 외벽을 따라 빙 둘러서 문을 찾기 시작했다. 창문이 나 있는 면을 둘러 다른 면으로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창도 문도 없었다. 완전히 새까만 벽이었다. 새하얀 설원에 새까만 건물은 입체감이 없어 보였다. 그냥 차원에 검은색 네모난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우주에서 블랙홀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는데 실제 블랙홀은 빛을 빨아들여 생각보다 밝게 빛이 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과는 다르겠구나 싶었다.

다시 다른 면으로 향하자 마찬가지로 작은 창문이 두 개 나 있었고 가장 왼쪽에 무언가 불툭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문 손잡이였다. 박무현은 기쁜 마음에 문까지 달려갔다. 이번에는 생각없이 손을 대려는 짓은 하지 않고 셔츠 자락을 덧대어 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제서야 노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당황했으나 추위가 거센 탓에 일단 "실례합니다!" 하고 크게 외친 후 손잡이를 마저 돌렸다. 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내부는 어두웠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깜깜했다. 외벽만큼이나 어두운 내부에 잠시 당황했으나 손을 더듬어서 문 옆으로 난 스위치를 켤 수 있었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천장의 전등이 켜졌다. 박무현은 내심 안에 누군가 숨어 있을까봐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벽난로는 식어 있었지만 장작이 들어가 탔던 흔적이 있었고 카페트에는 신발자국과 무엇인가 음료를 흘린 듯한 얼룩이 나 있었다. 원목으로 된 거실 테이블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 종이가 한 장 접혀져 있었다. 박무현은 홀린듯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종이를 펼치는 손이 떨려서 몇 번이고 펼치지 못하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손이 건조해서 그런가 싶어 손에 입김을 호호 불고 겨우 종이를 펼쳤다. 내용은 영어로 적혀져 있었다.

[이 편지를 읽는다면 당신은 시간에서 탈출한 것일테죠. 축하합니다. 이 건물은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잠시 머무르다 돌아가세요.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가세요.]

편지의 내용은 그것이 끝이었다. 박무현은 읽었던 내용을 읽고 다시 읽었다. 자신이 오독한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읽었다.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으로부터 탈출한 것을 축하한다고.

박무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탈출한 거야. 해저기지에서.

안도감과 함께 잠시 보류하듯 밀어두었던 추위가 온 몸을 덮쳐왔다. 어깨가 덜덜 떨려서 거의 기다시피 하며 벽난로에 다가가 토치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일자 그 앞으로 손을 가져다 대어 얼어 붙은 손을 녹였다. 온기가 노곤했다. 그리곤 잠시 까무룩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여전히 벽난로 앞이었다. 카페트 앞이라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바닥에 향했던 왼쪽 면의 몸은 차가웠고 벽난로를 향해 있었던 앞면과 오른쪽 면의 몸은 훈훈했다. 감기 걸리기 딱 좋겠군.

체력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을 느끼고 박무현은 비척이며 일어나 집안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난방 시스템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눈길을 헤치고 들어올 사람을 위해서 편지에 '난방 시스템이 있으니 일단 그것부터 켜세요.' 하고 말해줄 수는 없는 거냐?

투덜거리며 난방을 켰다. 천장에 달려 있는 히터에서 따뜻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카페트도 그렇고 바닥 난방이 없는 것도 그렇게 이 집은 분명 한국인이 지은 것은 아니겠다. 생각해보니 메모도 영어로 적혀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려나. 박무현은 가구랄 것이 원목 테이블과 소파 이외에는 딱히 보이지 않는 거실을 나와 층계 옆으로 난 부엌으로 들어갔다. 커피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커피머신이 떡하니 있었다. 커피 머신은 다룰 줄 모른다. 이런 것 말고 인스턴트 커피는 없나 싶어서 찬장을 뒤져봤지만 깨끗하게 닦인 그릇들과 컵, 와인잔만이 늘어서 있었다.

찬장을 닫고 냉장고를 찾아봤지만 냉장고는 없었다. 대신 부엌 옆문을 열자 식품 창고가 나왔는데 비상용 레토르트 식품이나 캔통조림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구호물품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아도 식욕이 일지는 않아서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층계를 올라가자 2층이 나왔다. 층계의 끝 옆에 난 스위치를 켜자 긴 복도에 양 옆으로 문이 두 개씩 나 있는게 보였다. 외벽의 창문은 이 방들마다 하나씩 난 것 같았다. 그 중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어 젖혔다.

방안은 집에 처음 들어왔던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올 것을 생각했는데 무거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곳의 원 주인이 누구이든 간에 추위에 대비하는 방식이 매우 단순하거나 아니면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철저하게 지키고 싶어하는 종류의 인간인듯 싶었다.

손을 앞으로 뻗어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 무거운 커튼을 훽 열어 젖혔다. 밖의 눈이 빛을 반사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집주인이 암막 커튼을 단 이유를 알겠군. 박무현은 그래도 커튼을 다시 치지는 않았다.

창에서 뒤를 돌자 빛이 든 내부로 빛 입자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먼지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박무현이 동작을 크게 해 움직인 탓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이 공기중으로 일어난 모양이었다.

박무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태생적으로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차마 신발을 신고 침대 위로 올라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발을 벗을 기운도 없어서 그냥 다리만 침대 밖으로 낸 채로 등을 뒤로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해저기지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천장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실감이 나자 우습게도 눈물이 차올라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살아 있구나. 몇 번이고 그치고 끝났다가 다시 시작했던 삶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 나가고 있구나.

박무현은 그 자리에서 잠시 숨죽여 흐느껴 울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질문이 차올랐는데 마땅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메모를 보아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 집을 살펴보다 보면 어디로든 향 할 수 있는 길이 나올 것 같았다. 동시에 아주 긴 시간동안 잠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장 무언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존적 불안과 대척되는 지점에 있는 죽음에 가까운 본능이었다. 잠드는 것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던데 그렇게 치면 나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으니 죽음과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일까 하는 하잘 것 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으로는 책상이, 그 옆으로는 책이 몇 권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꽂혀 있는 것은 책이 아니라 일기장이었다. 양장으로 된 두꺼운 커버로 감싸인터라 언뜻 보면 그냥 오래 된 고서처럼 보였다. 박무현은 그 중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영어 필기체로 휘갈겨 쓰여 있어서 읽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다시 덮고 꽂아 넣은 후 그 옆의 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무슨 나라의 언어인지도 알기 어려운 문자로 적혀 있어서 다시 덮었다. 세 번째 일기를 꺼낼 때는 기대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 일기는 익숙한 문자로 쓰여 있었다.

박무현은 한국어로 쓰인 일기를 한 장 한 장 읽어 나갔다. 좌절과 절망이 가득한 내용이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을 펼쳤다.

나는 오늘도 살아 남았다. 죽음이 또다시 나를 피해갔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박무현은 일기장을 덮었다. 책상 위에는 깨끗한 새 양장커버의 일기가 놓여 있었다. 박무현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일기를 펼쳐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된 것처럼 서 있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서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에는 자신의 필체로 쓰인 글이 적혀 있었다. 쓴 기억도 없는 내용의 수기가 그곳에 있었다. 박무현은 그 내용을 읽었다.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에 잠에서 깼다.

그것이 첫 문장이었다. 이후로는 해저기지가 붕괴하고 탈출하기 위해 애쓰다 죽었던 모든 시간들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다. 그것들을 선 자리에서 모조리 읽은 후 다시 책상 위에 내려 놓았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박무현은 그것은 자신이 지금 써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의자를 끌어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일기장 옆에 보란듯이 놓여 있는 펜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무엇이라 써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끝내야 할 지, 내 시간을 어떻게 닫으면 좋을 지.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쓸 수 있는 내용은 하나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저기지를 탈출했다. 먼저 탈출한 사람들은 각국에서 온 지원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다시 앞으로 흐른다. 뒤로 돌아가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일기장을 덮자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생각은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 통제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시간이 멋대로 과거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러나 무력하지는 않았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박무현은 무신론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신이든, 아니면 현상이나 자연, 또는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것이든,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 없었다. 박무현은 그것에 이끌려 방 문을 열고 나가 층계를 내려갔다. 벽난로는 어느 샌가 꺼져 있었다. 불이 붙은 적도 없는 것처럼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옆을 지나쳐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던 현관 앞에 섰다.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상하게도 긴장 되지는 않았다. 문을 열었다.

그곳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눈이 빛에 반사되어 그런 걸까 싶었는데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자세히 보니 눈이 없었다. 하늘도 바닥도 벽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딛었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도 밟히지 않았지만 서 있을 수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문이 없어져 있었다. 문은 커녕 검은 큐브 집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설원의 검은 점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이곳은 눈 속인가?

어쩌면 눈 밭에서 잠들어서 그 안에서 얼어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보는 마지막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려왔다는 표현은 잘못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가 느껴졌다. 그것은 특정한 언어가 아니었고 문자도 아니었으며 소리로 표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태초에 만들어진 원생 그 자체의 언어였다. 언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박무현은 고개를 젓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돌아가는 것은 질색이었다. 나아가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 순방향에 몸을 맡기고 이치에 따르고 싶었다.

"돌아가지 않아."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박무현은 해저기지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해저기지에 입사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해저기지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미사일은? 겨우 탈출해서 대한도로 올라간 사람들은? 내가 개입했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내가 그 자리에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면 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카누가 들려준 우주에서 혼자 살아 남았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만약 그 사람이 여기에서 시간을 돌아갔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다. 가족들이 사고를 당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박무현이 선택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에 잠에서 깼다.

다시는 설원에서 눈을 뜰 일은 없었다.

설원에서는 눈을 뜰 수 없다.

-fin.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그 외
캐릭터
#박무현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