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 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 。*1부 3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2) | 여우 수인 김재희 X 마법사 박무현

月明 by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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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1부 2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2)

왕국력 913년 12월 12일

“수인이요?”

“예.”

“수인?”

“예.”

“그것도 어린?”

“예에.”

“선생님. 제가 평창에 왔더니 말입니다. 오자마자 술집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뭔데요?”

“여어기 산에서 홀로 사는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어린아이들을 잡아간대요. 데려가서 잡아먹는다나 뭐라나. ……혹시?”

나는 서지혁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대체 그건 어디서 듣고 오신 겁니까? 그냥 어린 수인을 잠시 보호하게 됐을 뿐입니다.”

서지혁은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술집에는 별 소문이 다 돕니다, 선생님. 저야 물론 안 믿죠. 농담이에요.”

‘산속에서 홀로 사는 무시무시한 마법사에 대한 소문’은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한 달 전, 마탑에서 어떤 괴팍한 마법사가 와서 산에 틀어박혔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 의료원으로 출근할 때 내가 마탑 출신 마법사라는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소문이 돈다는 사실만 알고 조용히 살았는데, 어머니들이 북부 산 속에 아주 무서운 마법사가 사는데, 너희들이 말 안 듣고 생떼를 부리면 마법사가 산에서 내려와서 너희 데려가 잡아먹을 거라고 아이들에게 겁을 줬다고 한다. 제가요?

“이렇게 다쳐 오셔놓고 농담할 여유가 있습니까?”

“아시는 분 얼굴을 보니까 갑자기 안심되어서요. 선생님이 하나도 안 아프게 치료하시기도 하고.”

“크게 안 다치셔서 다행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서지혁. 용병. 수도에서 주로 남에게 일을 의뢰받아서 일하고 있다. 나와는 예전에 부대 치유사로 지원했을 때 같이 일한 적이 있다. 이번에 북부 변경으로 원정을 가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습격한 마물에게 크게 다쳐서 급하게 근처 의료원으로 온거라고 한다.

재희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음.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마침 서지혁이 수인 구조 관련 일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그쪽 일을 많이 맡아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음, 무슨 수인인가요?”

“여우 수인입니다.”

“아하. 아이를 데려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죠?”

“나흘…….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나이는?”

“여덟에서 아홉 정도로 생각됩니다. 안 물어 봤어요.”

“흐음, 부모가 잃어버렸거나 독립시켰을 가능성이 크네요.”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 이거 조금 따끔합니다.”

“예, 예에. 아야!”

마법 치료를 끝낸 나는 물리적인 치료를 위해 약을 꺼내 서지혁의 팔에 가볍게 도포했다.

“윽. 사실상 어렵다고 보셔야 합니다. 수인마다 다 다르긴 한데요. 우리 인간과 다르게 동물의 본능이 더 강해서 쉽게쉽게 무리에서 독립시키거든요.”

“그런가요…….”

“독립 여부는 아이에게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아이가 아무리 어려도 그걸 모르진 않을 거거든요.”

설령 독립시켰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어린아이를 독립시킬 수가 있어. 주둥이도 다 나오지 않았는데. 입도 작고 손도 엄청 작은데. 사람이 되면 더 작은데. 나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투덜거렸다. 서지혁은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다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일주일은 평창에 더 머물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볼까요?”

“그래주시면야 감사하지만 지혁 씨가 환자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산책 겸 한 번씩 둘러보는 건데 뭐 어때요. 선생님 혼자 찾으시는 것보다 제가 몇 번 더 둘러보겠습니다. 제가 고향이 남부 순천이라 눈 볼 기회가 흔치 않거든요. 이참에 눈 구경 좀 하게요.”

“예, 그러면……. 그냥 지나가다 가볍게 사람만 주의 깊게 봐주십시오. 일단은 북부방위대에도 알렸고, 마을 게시판에 공고도 써 붙였습니다. 집에서도 꾸준히 바깥에서 누굴 찾고 있지 않나 보고 있고요. 근데 중요한 게 있습니다.”

“중요한 거요?”

“예. 아이가 부모를 찾고 싶지 않아 합니다.”

“폭행당했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고요?”

“몸에 크고 작은 화상자국이 있고, 다리 하나가 없긴 한데 어떻게 다쳤는지 이야기해 준 걸 생각하면 부모랑 관련된 건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맞은 자국도 없고요.”

“화상자국에 다리 하나가 없다라. 덫에라도 걸렸나? 야생에서 거하게 굴렀군요. 어, 저 아이인가요?”

누굴 말하는 거지? 하고 서지혁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는데, 문 틈새로 재희가 나와 서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목발 쓰는구나. 안녕? 들어 와!”

서지혁의 말에 내가 재희를 보며 손을 까딱이니, 재희가 그제서야 목발을 짚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지혁이 그런 재희를 보며 말했다.

“휠체어는요? 휠체어가 더 편하지 않나요?”

“오늘 맞춰주려고 데려왔는데 어린이 휠체어는 없다더군요. 주문제작해야 한다고 해서 일단은 주문 넣었습니다.”

곁에 가까이 다가온 재희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며 대답했다. 서지혁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데리고 내려와야 할 때는 어떻게 오가시려고요?”

“제가 업어서 왔다갔다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 척추도 안 좋으시면서.”

“아직 아이가 크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도는 운동 삼아 움직이는 게 훨씬 낫습니다.”

나도 휠체어가 아이 움직이기에는 제일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당장 아이가 쓸 수 있는 휠체어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인용 휠체어를 나의 좁은 오두막에서 굴리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목발을 쓰기로 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바로 의료원 소속 의료기구 목공소에 가서 재희의 키와 팔 길이에 맞는 목발을 하나 맞춰주었다.

몸이 불편해 남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생각보다 큰 탈력감을 준다.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가뜩이나 재희는 이미 다리 하나를 잃은 적이 있다. 다른 한쪽마저 당장 못 움직이게 되었고 누워있거나 앉아서 지내야 하는데,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엄청 힘들 거다. 우울해질 거고. 몸에 힘이 빠질 거고.

목발이라도 있으면 내가 없을 때도, 또는 혼자서도 잘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산을 오르내리는 건 어렵겠지만.

다행히 목발은 재희에게 잘 맞았다. 재희는 목발 사용이 익숙한 건지 목발을 짚고 거리를 날아다녔다.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집에서는 뭔가 부수거나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집이 좁단 말이다.

서지혁은 붙임성 좋게 재희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형이 잘 해줘?”

“김재희요. 네에, 잘해줘요.”

“그래. 형 말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그래라. 선생님, 저 가보겠습니다.”

“예. 들어가세요.”

서지혁이 모자를 쓴 재희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곤 일어났다. 수인이라니까 궁금했을 텐데, 굳이 재희에게 네가 그 수인이라며?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건 신기했다.

“누구예요?”

“응? 아. 서울에 있을 때 일하다 알게 된 동료.”

오랜만에 봐서 무척 반가웠다.

 

 

왕국력 913년 12월 17일

 

퇴근길에 집으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언제 씻지?

생각해 보니 재희가 집에 온 동안 씻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샤워가 어려우니 몸을 열심히 닦아주긴 했는데, 그래도 찝찝하거나 하지 않냐고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발걸음을 절로 서둘러 집에 왔더니 재희는 여우 몸을 한 채 뱀과 나란히 둥지를 틀고 자고 있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 몸이었다가 여우 몸이었다가 하는 것 같았다.

잠든 재희의 다친 다리 쪽을 슬쩍 살펴보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거의 아문 상태였다. 이렇게 손으로 건드리고 만져도 아프진 않은지 깨지 않고 입맛까지 다시며 푹 자고 있었다. 씻겨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재희를 두고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쯤 재희가 그새 사람이 되어 목발을 짚고 삐걱삐걱 걸어와서는 내 엉덩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하필 묻어도 왜 거기다.

“깼어?”

“에.”

발음이 먹혀서 그렇지, ‘네’라고 대답한 것 같다. 나는 뒤돌아서 재희에게 계란 후라이 조각을 입에 넣어줬다. 재희는 그걸 또 얌전히 받아먹었다. 이러니까 진짜 애 키우는 기분이네. 나는 재희 입에 묻은 계란 부스러기를 닦아주며 물었다.

“밥 먹고 산책하고 와서 씻을래? 형네 집에 와서 한 번도 안 씻었잖아. 씻는 거 도와줄게.”

방금까지 눈을 거의 감다시피 서 있던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슬슬 저었다.

“싫어?”

“네. 안 씻어도 돼요.”

“수인은 안 씻어도 되는 거야?”

“그건 아닌데.”

재희는 그래도 씻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여우는 원래 씻기 싫어하는 습성이 있나?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동물들이 다 씻기 싫어할 것 같다. 어디서 봤는데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렇다고 했던 것 같다.

재희에게는 몸을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그런 거냐고 물으니 잠시 고민하다 그렇다고 끄덕였다. 뭐, 그럴 수 있지. 몸 자체는 물 적셔서 항상 닦아주고 있었으니까. 재희가 생활하는데 문제없다면 나는 괜찮았다.

밥을 먹고 나서는 재희를 등에 업고 목발은 팔에 끼워 챙긴 채 집 근처 산길을 한 바퀴 돌았다. 산책이라고 해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 내 산책의 의미는 주변에 여우의 흔적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지만, 답답해하는 재희를 겸사겸사 데려가는 것은 나에게도 재희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땅이 평평한 길에 재희를 내려주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으려고 했는데, 그 나이대 아이들은 힘이 아주 넘쳐나는지 빠르게도 목발을 짚어 뛰어가듯 걸어갔다. 재희야. 조심해! 천천히 가! 하고 부르며 따라가다, 내가 눈더미로 잘못 넘어졌는데, 재희도 넘어진 나를 보다가 눈 속에 파묻힌 돌에 잘못 걸려 눈 위로 픽 넘어졌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파할 틈도 없이 일어나 재희를 보았고, 재희는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내 쪽을 바라보았다.

“…….”

“…….”

재희의 얼굴에 붙은 눈이 후두둑 떨어졌는데 그 안에서 드러난 재희의 표정이 퍽 어이가 없어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얼굴에 붙은 눈부터 털어주는데 창피해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그새를 못 참고 결국 못 참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형은 내가 넘어진 게 웃겨요?”

“형도 넘어졌는걸. 다치진 않았어?”

“몰라요.”

“이리 올라 와.”

나는 재희를 업어서 일으켰다. 거대한 바위 위에 잠시 앉혀두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역시 털어주는 걸로는 수습이 안 될 만큼 진흙이 많이 묻은 상태였다.

“안 되겠다, 재희야. 가서 씻어야겠어.”

재희는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러운 상태로 생활하게 할 수는 없어. 나는 꼬질꼬질해진 재희를 등에 업었다. 내 등이나 팔이 흙투성이가 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재희는 어지간히 씻기 싫은지 집에 오는 길에 내 뒤에 업혀서 울먹이며 형아, 형아아 하고 애교를 부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싫다고 했고 여우일 때 알아서 몸관리 잘 할 거라고 생각해서 안 씻기려고 했는데 넘어져서 진흙 다 묻는 바람에 영락없이 씻게 됐잖아.

나는 그대로 재희를 들고 집으로 들어와 욕실로 향했다. 재희에게 잠시 욕실 벽을 짚고 서 있으라고 한 뒤에 부엌에서 쓰던 나무 의자를 가져왔다. 거기에 재희를 앉혀두고 씻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재희가 벽을 짚은 채로 영 맘에 안 든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물었다.

“……왜?”

“저 혼자 씻기 싫어요.”

“그럼? 같이 씻고 싶어?”

“네에. 형이랑.”

재희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다. ‘형’이 아니면 절대 씻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이때는 내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다시 재희를 봤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희가 말했다.

“형이 벗겨주세요.”

“아까는 몸 보여주기 싫어서 씻기 싫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랬는데 형도 같이 벗고 같이 씻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이런.

씻고 싶다는 긍정적인 의지를 표명하는 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태도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안 될 건 없었다. 같이 씻고 싶다고 하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 차라리 재희가 긴장하지 않게 편하게 씻으려면 그게 나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재희가 초롱초롱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발 같이 씻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희야. 네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새까맣고 예쁜 건 알겠지만 그 눈망울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나는 의자를 욕조 앞에 내려놓고, 의자를 가지러 가기 전에 불에 올려둔 뜨거운 물을 가져와 욕조에 부었다. 그리고 재희에게 다시 돌아와 말했다.

“만세 하자. 만세.”

“만세에.”

재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두 팔을 내 양쪽 어깨에 걸쳤다. 난 재희가 그렇게 활짝 웃은 걸 처음 본 것 같다. 잔뜩 신이 난 얼굴의 재희는 두 손을 번쩍 든 채 내가 옷을 벗겨주길 기다렸다. 나는 재희의 옷을 천천히 머리 위로 벗겼다.

옷 아래로 훤히 드러나는 온갖 화상자국과 흉터들은 자꾸만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여기서 적응이 안 된다는 말은 볼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는 소리다. 어린아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온몸에 이렇게 흉터가 가득한가. 이것도 어렸을 때 다쳤다던 그 사고일까? 내가 앉아서 재희의 옷가지를 다 벗겨주자 재희는 내 옷을 멱살 잡듯이 움켜잡았다.

“벗어요!”

“아, 알았어. 잠깐만!”

어휴. 애 키우기 힘들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줄무니 셔츠를 단추 하나하나 빼서 벗었다. 그새 내가 땀을 흘렸는지 셔츠를 벗자 욕실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옷을 전부 벗고나면 재희는 빨리 고개를 숙여보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욕조 앞까지 가자는 손짓이었다. 재희가 움직이기 쉽지 않으니 내가 항상 업어주거나 안아주거나 했는데 그새 며칠 버릇이 이렇게 들었나 보다.

내가 몸을 굽혀주자, 재희가 내 목에 팔을 둘러 안았다. 재희가 안전하게 내 목을 잡은 것을 확인하고 재희를 번쩍 안아 욕조 앞 의자에 앉혔다. 내가 살면서 이런 경험도 해보는구나. 무진이를 이렇게 씻겨준 적도 별로 없는데. 몹쓸 형이네.

나는 바가지를 이용해 물을 떠내서 재희의 몸을 적당히 씻겨준 뒤에, 내 몸도 가볍게 씻고 같이 욕실로 몸을 던졌다. 따끈한 물이 몸에 구석구석 쌓인 피로를 풀어준다.

재희의 몸을 받쳐 안고 있으면 재희가 얼굴만 겨우 내민 채 입으로 수면에 바람을 넣어 기포를 만들었다. 그게 또 신기하다고 여러 번 하니, 내가 숨을 불어넣는 재희의 입놀림을 방해하려 손가락으로 기포가 올라온 부분을 가볍게 헤집었다.

그러자 재희가 손끝을 아프지 않게 살짝 물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재희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파.”

“아하요?”

“응.”

“그애됴 앙 나 줄례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재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안 놔 줄래요 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아프게 문 것도 아닌데 그냥 두기로 했다.

어느 정도 씻고 나서 비누칠 좀 하려고 일어났는데, 재희가 등진 나를 보며 물었다.

“형 등에 뭐예요?”

나는 재희에게 등을 다 드러낸 채로 등을 짚었다. 등에는 큰 수술 자국이 있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 비누를 가져오며 말했다.

“어렸을 때 좀 다쳤어.”

“눈만 다친 게 아니었어요?”

“응. 죽을뻔했을 정도로 큰 사고였거든. 지금은 괜찮아.”

나는 돌아와서 의자에 앉아 재희를 마주 보고 무릎에 앉혔다. 재희는 그대로 내 품에 포옥 안기더니, 아직 짧은 손으로 내 수술 흉터를 만져보았다. 남이 만지면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아픈 것도 아니고 만져서 싫은 것도 아니라 그냥 만지게 두었다.

“아팠겠다.”

나는 그 음성을 들으며 아무 대답 없이 재희의 등을 충분히 비누칠해줬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나는 재희의 짧은 오른쪽 다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실수로 귀 쪽에 거품이 들어갈 뻔했는데, 재희가 때맞추어 귀를 파드득 털어 거품을 털어냈다. 그 때문에 얼굴을 비롯하여 사방에 거품이 튀고 말았다. 내가 얼굴을 닦고 있으면 재희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가 즐거우면 됐어. 욕조 물로 얼굴을 겨우 닦아내고 재희의 몸을 돌려 머리에 비누를 비벼 거품을 충분히 적셨다.

“저어, 있잖아요. 형.”

“응, 재희야.”

“저 나중에 커서 형이랑 결혼할래요.”

내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벌써부터 결혼하자고 고백하냐. 얼마나 며칠 더 볼 형인 줄 알고.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재희의 두피를 마사지하듯이 꾹꾹 눌러주었다.

“형 좋아?”

“네에. 저랑 결혼해 주세요.”

“음, 나중에 재희가 커서도 마음이 안 변하면 생각해 볼게.”

“으응, 생각만 하는 거 말고 제대로 약속해 주는 게 좋아요…….”

재희는 마사지가 좋은지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엽군. 까짓거 아이 동심은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약속할까?”

재희는 내 품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뒤돌아보며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작은 새끼 손가락을 탁! 하고 치켜들더니 눈을 빛냈다.

“새끼손가락! 지장도 찍어요.”

“그래, 그래.”

나는 재희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고 다시 재희의 몸을 살짝 돌려 두피를 눌러줬다.

“그럼 열심히 먹고 커야겠네. 형보다 많이 커서 형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면. ”

“네에……. 그때까지 다른 사람한테 가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알았어.”

나중에 크면 잔뜩 놀려줘야지. 재희야 너 기억해? 너 어렸을 때 나한테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그때쯤 재희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날은 자기 전까지 재희가 성인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다 잠들었다.

왕국력 913년 12월 18일

 

재희는 나를 자주 형이라고 부른다.

그럼 나도 모르게 나를 형이라고 칭하면서 달래게 된다. 형은 뭐 했어요? 하면 응, 형은 했어. 식으로 말이다. 뒤늦게 알았는데 내가 꽤 자주 그런 화법을 쓰더라.

무현이 형은 조금 낯 간지러운 호칭이지만 듣기 나쁘진 않다. 가끔 잘 보이고 싶을 때는 또 형아……라고도 하는데 이건 좀 부끄럽다. 이것도 애니까 그렇지, 애가 아니었으면 뭘 형아라고 부르냐고 한마디 했을 것 같다.

장작을 팰 때 형아 또는 형 형 하면서 쫓아다니는 게 제법 귀엽다. 뭐라도 하고 싶다고 깨금발로 뛰어가면, 아서라고 말린다. 저러다가 다시 다치면 어떡하려고.

다행히 다치진 않았고, 장작도 잘 쌓아놨다.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맞나. 아직 다리 아플 텐데.

“재희야, 무리하지 마. 완전히 나은 건 아니잖아.”

“괜찮아요. 제가 할 거예요.”

거기다 집 바닥에 앉아서 내가 내 유리병들을 닦는 것도 도왔다. 저건 다리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하지 말라고 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재희가 엄청나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조금도 아니다. 엄청나게!

“닦는 거 재밌어?”

“재미는 없고요. 그냥 하는 거예요. 앉아만 있으면 재미없어서 형 돕는 거라도 하려고요.”

“고마워, 재희야. 언제든지 하기 싫으면 그만해도 돼.”

“이런 건 어디에 쓰는 거예요?”

“여기다 약물 넣는 거야. 저기 말려놓고 있는 약초 썰고 쪼개서 솥에다 넣고 끓이는 거.”

“이것도 마법이에요?”

“이건 엄연히 말하면 연금술. 마력을 넣는 제조법도 있어서 마법이랑 관련 있긴 하지.”

“우와아.”

나는 어느새 말린 약초 앞에 가서 약초를 구경하는 재희를 바라보며 웃었다. 쟤는 목발 짚었으면서 저렇게 움직임이 빠르네. 약초를 슬쩍 건드려 보려는 재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번에 보니까 마법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 가르쳐줄까?”

재희는 약초 만지기를 그만두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저도 쓸 수 있어요?”

“해봐야 알겠지만 사실 수인은 예전부터 정령의 후손이라는 가설이 있어. 하나부터 끝까지 마력으로 이루어진 정령의 후손이니 마력이 인간에 비해 엄청 많다고. 여러 가설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하나는?”

“재희가 혼자 여우가 되었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하는 거.”

“저도 마법을 이미 쓰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직접 본 건 나도 네가 처음이지만.”

인간 재희는 내 말을 시험 해보듯 내 눈앞에서 여우가 되었다가, 다시 동물 귀 달린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길 반복하다 눈동자를 밝히며 말했다.

“저어, 마법 배울래요. 형한테.”

“그래. 나중에 형이 가르쳐줄게. 지금은 이거 닦아.”

자고로 뭔가 배울 때는 항상 기초에서 비롯한 잡일부터 하는 거다. 내가 난생처음 제자가 생기면 일기장에도 자랑하러 오겠다. ‘내 첫 제자, 김재희.’라고 적을 테다.

재희는 마지막 병을 닦아서 햇빛 잘 드는 쪽에 올려두고는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약간 졸린지 두 눈을 꿈뻑이며 창문 밖을 바라본다. 추운 날씨에 창문 사이로 깃드는 햇빛은 엄청 나른하지. 공감한다.

“형은 어쩌다가 마법사가 됐어요?”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잠깐 당황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의사 선생님이 마법을 안 배우면 평생 휠체어 신세라고 했거든.”

열두 살에 마차 사고로 몸과 눈을 크게 다쳤다. 나는 척추가 나가 하반신 마비로 걸을 수 없게 됐고 각막을 크게 다쳐 볼 수 없게 됐다. 상태가 심각한 나머지 치료할 수 없다고 모든 병원에서 나를 거절했고, 부모님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루빨리 아들의 몸과 눈을 고쳐줄 곳을 찾다가 마법부 관할의 병원까지 찾아갔다.

마법부 부속 병원은 왕국 내에서 가장 독보적인 의료술을 가졌고, 그래서 마법부 병원만이 내 몸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진 최후의 보루였다고 한다. 그런 간절함이 통했을까, 마법부 병원은 내 몸도 당연히 고쳐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가공석부터 의안, 수술비, 입원비까지 돈이 꽤 많이 들었다. 스물 중반에 들어선 내가 아직도 그 빚을 갚고 있을 정도로.

부모님은 돈보다 내가 더 중요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빚을 내고 내 병원비를 냈다. 부모님은 내가 살아있을 수 있게 도와주신 일등공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살아있지.

나는 마력가공석 (*마력을 머금을 수 있는 철을 특수 가공한 의료용 광석)을 척추에 심고 실명된 눈에는 의안을 심는 대수술을 했다. 수술도 수술이지만 후처리가 더 문제였다.

수술 이후에는 병원을 다니면서 꾸준히 조정을 받는 게 좋지만, 꾸준히 다니지 않는다면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 병원에 꾸준히 다녀야지.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살지 않을 방법이 하나 있다고 했다. 마력 운용 실력, 즉 마법을 익혀 스스로 마력 균형을 유지하는 훈련을 하면 나중에는 굳이 병원에 다니지 않아도 잘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마법을 다룰 줄 알면 몸에 알아서 마력이 깃들기 때문에 몸에 심은 가공석이나 의안이 더 잘 자리 잡게 되는 원리라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일까, 마력가공석을 통한 신체 이식은 나라 차원에서 지원하는 자원이라 마법학교를 전액 장학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수술을 집도하신 선생님은 학비가 무료로 나올 테니 마법학교 입학을 고려해 보라며 추천서를 줬다.

어린 나에게 마법을 배울지 말지에 대해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휠체어 신세가 되고 싶지 않으면 마력을 몸에 깃들게 하라고 했다. 나는 살기 위해 무조건 배워야 했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하반신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마법을 배워야 살아남는다니.

딱 2년 죽었다 생각하고 마법을 배우고 몸을 움직이고 나니 나는 걸을 수 있게 됐다. 병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몸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훨씬 괜찮아졌고, 마법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일반인과 별다를 게 없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을 정도로 몸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몸이 호전되면서도 일이 무척 많았다. 집이 빚더미에 앉으면서 우리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내가 전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마법은 살기 위해서 배우는 동시에 내 생계 수단이 되었다. 내 대외활동 기록을 뽑아보면 일반 학생들에 비해 10배 이상 나오는 건 그것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한 대외활동을 통해 나는 원정도 가보고 지원임무도 나가보고 별걸 다 했다. 그건 경험이기도 했고 생존 본능이기도 했다. 내가 도울 수 있고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도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남들에게 오해를 샀는지, 학기 중에 나도 모르는 소문이 돌았다. 마법사 박무현은 나태에 빠져 겸손하지 못하고(?) 여색을 밝히며(?) 학문을 게을리하니(?) 아주 못돼 먹었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이걸 졸업할 때 알았다.

나는 당장 집안일이 급한데 내가 다른 사람을 꼬시고 뭐 할 게 뭐가 있나? 그냥 학교생활 하면서 여자 동기들이 치유사가 필요하다길래 나가서 지원 좀 하고, 짐 많은 거 좀 들어주고, 참고 도서랑 잉크 좀 쓰라고 밀어줬을 뿐인데 그런 소리를 듣는단 말이지. 그런 건 같은 동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서로 좀 돕고 사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쁜가? 여담으로 나는 마탑에 다닐 때까지도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언제 꼬시고 다녔다고 그러냐고.

이것도 생각하자면 하나하나 추억이구나. 나는 어제처럼 재희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그때 생각 때문에 당시에 쓴 일기장을 추억 삼아 읽어보기로 했다. 벌써 10년이 넘어서 종이는 많이 낡았고, 일기를 쓴 글씨체는 선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난리였다.

5월 8일

마차 사고를 당했다.

사실 사고 당하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 떠보니 여기가 마법부 직속 병원이란다.

무진이 빼고 가족끼리 마차를 타고 집에 가다가 마차가 전복당했다고 한다. 부모님도 크게 다치셨다고 하지만 내게 자세한 상태는 알리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 눈도 안 보인다. 너무 아프다. 한 쪽 눈만 겨우 보여서 어떻게 적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진을 도는 의사 선생님께 그냥 마법으로 척추랑 눈이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마법으로는 안 된다고 해서 울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래. 마법은 자연을 잠시 빌려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돌려줘야 한다는데. 마법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런 말은 다 거짓말인가 봐.

내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울자 엄마가 손을 꽉 잡았다. 고개를 들었지만 엄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걱정 끼쳐 드린 것 같아서 죄송했다. 그런 말 하지 말 걸 그랬다.

 

음.

아무래도 그만 읽어야 할 것 같다.

 

 

 

 

왕국력 913년 12월 22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스케치북 한 권에는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가득했다. 잠든 재희 몰래 스케치북을 뒤적이며 보고 있는데 한구석에서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마법사, 뭐 이런 단어도 적혀있었고. 마법을 쓰는 듯한 사람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한쪽 눈이 파란 것을 보니 누가 봐도 나였다.

내 일기장도 재희가 몰고다니는 재해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장 앞부분만 펴서 읽어보면 ‘보고 싶어’ ‘무현이 형 바보’ ‘형 언제 와’ 따위의 심술 난 글씨체가 크레파스로 적혀있었다.

괜히 미안하네. 혼자 있게 해서.

재희의 부모님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오두막 근처를 지나가는 여성 또는 남성 그리고 여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실종신고라도 들어오면 모를까 마을 게시판에 가도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서지혁이 아마 찾기 어려울 거라고 했던 말이 진짜였을까. 재희의 부모님은 재희를 정말 두고 간 걸까.

하루는 서지혁의 조언대로 재희에게 혹시 부모님에게서 독립했냐고 물었지만, 재희는 가만히 대답을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거 부모의 말을 들어봐야 알 것 같은데.

혹시 야생 고양이처럼 인간의 손을 타면 버리고 가고 그런 걸까? 헉. 내가 만져서? 주둥이도 아직 제대로 나오지 않은 애를 내가 데려다가 사람 냄새도 묻히고 밥도 주고 씻기고 그래서 안 오나?

나는 덜컥 두려워져서 일기를 막 적다가 침대에서 잠든 작은 여우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인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새 언제 여우가 된 거야?

재희는 내가 집에 오면 내 곁에서 하루종일 떨어지지 않았다. 자유자재로 인간과 여우로 변하길 반복하면서, 내가 책을 보든 집안일을 하든 밥을 하든 내 동선이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내 곁을 청할 뿐이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재희를 살짝 쓰다듬어 주자 재희가 움찔거리며 깼다.

“……?”

작은 여우가 털이 다 흐트러진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꾀죄죄한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못 참고 웃었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머리를 마구 쓰담아주는 척 부스스한 털 사이의 재희의 눈을 드러냈다.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예쁘장한 여우 한 마리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온 시선을 나에게 향했다.

재희는 여우가 되었을 때는 인간 말은 못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쓰담아주자 둥근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깽 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으응.”

약 한 달 동안 이 아이에게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내가 누굴 책임질 군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완전히 떠나가면 아쉬울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부모를 찾아가고 나서도 자주 여기에 놀러왔으면 좋겠다. 누굴 가르칠 정도의 교수법이나 교육학을 익힌 건 아니지만 차라리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부모의 허락을 받고 데리고 있을 수 있겠지.

나는 아쉬움에 쩝, 소리를 내며 재희에게 물었다.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인데, 집에서 뭐라도 할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재희의 꼬리가 마구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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