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 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재희무현] 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 。*1부 2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1) | 여우 수인 김재희 X 마법사 박무현

月明 by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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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록이 겨울을 지날 때

1부 2화

12월에는 매일 꿈을 꾸는 여우를 만났다 (1)

왕국력 913년 12월 10일

산 아래 시가지의 빛이 찬란하다. 영원히 밝지 않을 듯 아득하게, 밤은, 겨울은 점점 깊어만 간다.

눈이 산골의 모든 소리를 먹이 삼듯 하나하나 집어삼킨 덕에 산골짜기에는 고막이 먹먹하게 느껴질 정도의 적막만 돌았다.

예로부터 겨울에 이리 조용하게 내리는 눈은, 눈의 요정이 물질 형태로 세상에 내리는 축복이라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아직 건재하시던 조부가 쇠 막대기로 벽난로를 뒤적이며 그렇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도 이렇게 눈보라 없이 눈이 조용하게 내렸었지.

나는 손에 낀 가죽 장갑을 벗어 눈송이를 손바닥에 몇 점 받아냈다. 손바닥에 살포시 앉은 눈은 손에 닿자마자 형태를 잃고 녹아버렸다.

아무리 이 나라에 이렇게 조용히 내리는 눈이 적다고 해도 말이지, 이렇게 아주 작고 아주 차가워서 손에 닿으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눈을 축복이라고 하다니. 이렇게 금방 사라져버리면 세상에 축복 따위 없고 축복을 바라는 마음은 덧없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북부는 겨울에 눈이 없는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럼 여긴 축복의 땅이기라도 한가?

한 발 한 발 천천히 넘어지지 않게 산을 오르다 보면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천천히 스민다. 그 차가운 공기가 마음에 깊게 스미는 것처럼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자, 입술 새로 허연 숨이 새어 나왔다. 구름과 달과 별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 아래, 내 허연 숨결은 구름이 되길 원한다는 듯 하늘로 떠올라 뭉게뭉게 무리 지어 하늘로 사라졌다.

설산의 풍경은 아름답다. 어두운 와중에도 땅과 나무에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서 내 눈이 호강하는 것을 느꼈다. 와. 조금만 구경하다 갈까? 그러던 중에 차가운 바람이 내 옷을 기필코 벗기겠다는 듯 등골을 타고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그 고민을 철회했다.

하하. 그래, 무슨 소리야. 날이 춥다. 아름답긴 하지만 추워서 안 되겠다. 어서 들어가자.

내가 다시 발길을 돌려 오두막 문을 열어젖힌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빨간 털뭉치 같은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저거 털뭉치가 맞나? ‘털뭉치’는 잠깐 굴러갔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굴러가길 반복했다. 바람에 끌려가는 낙엽을 잘못 보고 있나 싶어서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낙엽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낙엽이 바람에 끌려갈 정도로 세게 불지도 않는다. 만약 동물이라면 어떡하지? 데려와야겠지? 언제 눈보라가 칠지 모르는데 데려오는 게 맞지 않나?

아니,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이기다. 알아서 잘 사는 야생동물을 바깥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멋대로 데려오면 안 된다. 그리고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들인다는 거야. 이럴 때는 얌전히 지나가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내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문고리를 잡았지만 나는 도저히 문을 열지 못했다. 털뭉치가 신경 쓰였다. 낙엽인지 동물인지 제대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눈이 쓸린 자국을 보니 털뭉치는 그새 저쪽으로 사라진 듯 보였다.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안다.

어쩔 수 없었어. 동물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확인을 해두려고 하는 거잖아. 동물이었는데 내가 발견하고도 무시해서 얼어 죽은 게 나중에 발견되면 여기 사는 동안에 자꾸 생각나서 후회하며 살 것 같단 말이야. 결국 미래의 나 자신에게 댈 핑계를 중얼거리며 털뭉치가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발자국이 아니고 무게가 있는 것이 그대로 끌려간 것처럼 땅에 끌린 자국이 남아있었다. 낙엽이나 풀더미 따위가 아닌,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것을 질질 끌며 움직였다는 뜻이다.

눈 위에 길이 난 모양을 따라가 보니 수풀과 나무가 촘촘한 쪽에 다시 털뭉치가 보였다. 어찌나 조금씩 움직이던지, 내가 조금만 성큼성큼 걸어도 털뭉치, 아니, 조그마한 동물에게 닿았다. 그렇게 도달한 내 발끝 앞에서 울고 있던 것은 붉은 털의 여우였다. 여우? 웬 여우? 아직 주둥이가 짧은 것을 보아 어린 여우 같았다. 어디 다쳤나? 왜 제대로 못 걷지?

그때, 나는 북부에 처음 온 날에 네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게 주인에게서 도망치던 시가지의 여우를 떠올리고 말았다. 설마 그때 그 여우인가? 아니나 다를까 꼬리가 정말 크고 풍성했다. 그 여우도 꼬리가 저렇게 풍성했었다. 나는 이 여우가 그 시가지에서 본 여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여우는 나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붉은 여우는 앓는 소리를 끼잉끼잉 내며 뒷다리를 질질 끌고 어떻게든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 여우가 그 여우든 아니든, 다쳤으면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수의사에게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응급처치라도 해줘야 후에 무탈하게 나을 테니까.

나는 여우의 상태를 살피기 전에 일단 주변에 부모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부모랑 같이 행동하는데 내가 멋대로 데려갔다가 이도 저도 못 한 상태가 되면 안 되니까.

바닥에 있던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들고 마법을 써서 불을 켠 채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역시 주변에서 짐승이 살던 흔적을 찾긴 쉽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생존에 목숨을 거는 야생동물들이 은신처를 인간에게 쉽게 발견될 장소에 두진 않을 테니까.

코가 빨개지도록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여우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저 여우는 혼자 기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걸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둘 수 없어서 눈에 보이는 여우부터 빨리 챙기기로 했다.

내가 다시 그 여우에게 조심스레 다가가자, 이번에는 기척을 느꼈는지 펄쩍 튕겨 나가더니 요란하게 왝왝 울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우가 너무 맹렬하게 울기에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여우는 뒤로 물러나다 결국 나무에 가로막혀 갈 길을 잃었다. 여우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여우의 다리에 덫이 물려있던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사냥꾼이 설치한 덫에 뭣 모르고 걸린 모양이었다. 덫에 물리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거지?

여우는 내가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는데도 여우는 자신을 해칠까 두려운지 온갖 소리를 다 내며 발악했다. 분명 사람 말이면 대단한 욕이었을 것 같다. 이해해. 나 같아도 무서울 거야. 그래도 내가 멈춰서 두 팔을 벌린 채 어정쩡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자, 몸을 파르르 떨던 여우가 으르렁거리다가도 컹컹 짖었다. 여우는 다시 도망가려고 앞발을 옆으로 쓱 뺐지만, 덫에 물린 다리 때문인지 더 움직이지 못했다.

잠깐,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사냥꾼 같잖아. 혹시 내가 사냥꾼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털이 비쭉 섰다. 내가 이 여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친구야.”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털썩 엉덩이를 대고 앉아 이름 모를 여우를 불렀다. 여우는 당연히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아주아주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뻗어 작은 몸을 토닥이려 들자, 여우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내 손에 달려들어 물었다. 장갑을 뚫고 들어온 이빨이 살갗에 눌렸다. 조금 아팠지만 비명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여우는 내가 물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데다 눈까지 똑바로 마주치고 조금도 물러나지 않으니 당황했는지 눈동자를 굴리며 물고 있던 손을 빼냈다. 나는 그대로 눈을 마주친 채 등에 올린 손을 엉덩이 쪽으로 살짝 쓸었다.

등을 내어준 여우가 긴장한 숨을 들이 내쉬는 것이 손에서 다 느껴졌다. 이건 좋아서 내어준 게 아니라 그냥 무서워서 움직이길 포기한 것 같다. 여우가 다시 물거나 도망갈까봐 많이 긴장되었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뒤로 감춰두고 용기내어 차분히 등을 쓰다듬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우를 자극하지 않게 덫을 빼주고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겠지만, 덫에 물려 거동조차 쉽지 않아 보이는 녀석을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그냥 죽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두면 분명 죽을 거야. 집에 뱀이 있지만 이 작은 애를 잡아먹진 않겠지. 여우가 겁을 먹을 것 같으면 뱀을 잘 타일러서 여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게 설득해야겠다. 여우를 나중에 놓아주는 한이 있어도 집에 데려가서 응급처치라도 해주고 놓아줘야 할 것이다.

나는 목에 둘둘 말았던 내 목도리를 풀어 여우의 몸과 머리에 덮었다. 덫을 열 때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뒷다리가 물린 덫의 두 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파악했다.

이런 단어 선택은 유감이지만, 덫의 주인은 동물을 손상 없이 잡을 생각이었는지 닫힌 날이 다리가 잘릴 정도로 날카롭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 입지 않을 정도로 날이 무디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살에 깊게 박혔다. 이거 엄청 아팠겠는데.

나는 그대로 덫의 날을 단번에 벌려 뺀 뒤 옆으로 치웠다. 목도리 아래로 ‘끼웅’ 소리가 났다. 나는 여우의 머리를 덮었던 목도리를 아래로 당겨 담요처럼 덮어주었다.

여우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를 다쳐서 못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착하게 있어 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다리 상태를 확인하려고 하면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발악을 하니 아마 둘 다였던 것 같다. 어쨌든 얌전해진 틈에 집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나는 부상 당한 동물을 안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안아야 이 아이가 불편하지 않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설프게도 여우가 엎어져 있던 자세 그대로 들어서 허리를 팔 하나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여우가 아주 놀란 목소리로 깽깽 울며 벗어나려고 했다.

“자, 잠깐만!”

다친 다리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으악. 나는 여우와 얼굴을 짓누르고 바둥거리는 몸을 제압하는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아기를 안은 것처럼 등과 다리를 받쳐 안은 자세를 택했다. 그제야 여우가 아프지 않은지 행동을 멈추고, 축 늘어져 낑낑거렸다. 달빛에 비친 여우의 얼굴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어떡해. 내가 건드려서 아팠나 봐.

내가 눈물을 훔쳐주듯 손등으로 여우의 옆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러자 여우가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꽉 물었다. 아파! 내 손은 먹이가 아니야! 하고 다그쳐도 듣질 않는다.

“미안해. 많이 아팠어? 조금만 참아. 내가 집에 가서 치료해 줄게. 응?”

아프단 말이다. 여우는 꼬리를 탁탁 흔들다 말고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입에서 내 손가락을 빼줬다.

“착하지. 고마워.”

품에 끌어안은 여우를 손등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우는 내 손길에 안심이 되는지 손등을 핥았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여우의 작은 혓바닥이 무척 따뜻했다. 그 작은 혓바닥을 보고 다짐했다. 아이의 다리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는 내가 보호해야겠다고.

나는 혹시라도 여길 지나갈 다른 동물이 덫에 잘못 걸려 다치지 않게 덫을 챙겼다. 집에 데려온 여우를 벽난로 앞 소파에 눕혀두고, 불을 붙인 성냥을 통째로 벽난로 장작 사이에 던져넣었다.

불이 어느 정도 커지고 소파 주변을 밝게 비출 정도가 되자, 나는 여우의 다른 한쪽 뒷다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친 쪽 말고 반대편 말이다.

“…….”

무심코 숨을 죽였다. 뒤늦게 시선이 간 다른 쪽 뒷다리는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아무리 다친 다리의 상태가 심각하더라도 다리 하나가 없는 쪽에 더 눈이 갔다. 내가 사고로 잃은 척추와 눈 한쪽을 마법 덕에 갈아 끼워 10년 넘게 연명해 온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런 내 당황스러운 시선을 깨달았는지 여우가 나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번지는 생각을 뒤로한 채 나는 태연하게 여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이런 말은 사람에 따라서는 나쁘게 들리겠지만, 아마 그런 다리로는 어디 도망가진 못할 거다.

나는 저장해 둔 물 수조에서 물을 가져와 벽난로의 솥에 부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 몇 장과 소독약, 연고, 붕대를 챙겨 자리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아 땅바닥을 구르느라 꼬질꼬질한 여우를 아기 안듯이 들어 안았다. 이 자세가 작은 몸과 최대한 밀착할 수 있는 자세라, 여우에게도 나에게도 편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 겉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로, 물이 완전히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깨끗한 수건을 약간 데워진 물에 적신 뒤 환부부터 천천히 닦았다.

역시 물이 닿으니 아픈지 여우는 끼잉끼잉 소리를 내며 발을 떨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여우를 토닥였다.

“응, 아프지. 조금만 참아.”

더러운 것 없이 말끔하게 닦아주고 나면 새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살살 닦아주었다. 여우는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벗어나려 애썼지만, 이번에는 내 힘이 조금 더 셌다. 아플 때는 이러나저러나 청결이 제일 중요하다. 잘 닦아야지.

닦으면서 슬금슬금 봤는데, 한쪽 뒷다리는 이미 없어진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얼마나 아팠을까. 몸을 닦아주면서 상태를 보기 위해 없어진 다리 쪽을 만져보려고 시도했는데, 여우는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귀신같이 손으로 내 얼굴을 꾹 짓눌렀다. 나는 한쪽 눈을 눌린 채로 배에서 손을 뗐다.

“만지지 마? 알았어.”

그래, 여긴 싫구나. 내가 손을 떼자 여우도 얼굴에서 손을 뗐다. 흙이 묻은 발을 꼼꼼히 닦아주면서 더 앞발이 서로 모양이 다른 것을 확인했다. 설마 여기도 다친 건가?

몸을 다 닦아주고 나면 환부를 소독했다. 연고도 발라주고, 붕대도 단단히 감아주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겉옷을 벗었다. 여우가 생각보다 얌전히 말을 잘 들어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피 좀 보지 않았을까. 물론 내가.

나는 여우가 먹을만한 게 있나 고민했다. 달라고 하진 않아도 분명 밖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배고프겠지. 뭐라도 먹여야겠지? 먹긴 할까? 시도는 해보자. 아침에 닭고기 삶은 거 남았을 텐데. 그거라도 먹여야겠다. 나는 저장고에 보관해 둔 삶은 닭고기가 상하지 않았는지 먼저 한 점 찢어 먹어보고, 멀쩡한 음식임을 확인한 뒤 여우에게 가져왔다. 먹기 좋게 결대로 찢어 손바닥에 하나 올려 여우에게 내밀었다.

여우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내가 손바닥을 조금 더 내밀자 닭고기를 입으로 물어 가져가 단번에 먹어치웠다.

역시 배고팠나 보다. 얼마나 배를 곯렸던 걸까. 나는 몇 점 더 찢어서 손에 올려주었다. 여우가 밥을 먹는 사이에 슬금슬금 여우의 배로 손을 뻗었다. 근데 그걸 그새 알았는지 닿기도 전에 꿍얼꿍얼 짜증을 내며 내 얼굴로 발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짓눌린 채로 여우에게 남은 고기를 내밀었다.

“윽, 알았어. 안 할게. 이것도 먹어.”

이걸로 배가 찰까? 여우가 몸이 앞으로 넘어갈 기세로 고기를 먹고 있는 사이, 배가 뻔히 보이기에 손을 뻗어 부드럽게 만져보았다. 여우의 배는 거의 뱃가죽만 있다시피 홀쭉했다. 더 먹고 싶다는 눈빛으로 날 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안 만진 척 내가 먹으려고 가지고 온 닭고기까지 내어주었다.

여우는 고기를 한입 가득하게 물고는 엉덩이를 뒤로 꾸물꾸물 뺀 채 덩어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물까지 코앞에 내밀고 나서 여우가 밥을 먹게 두고 나는 다른 먹거리를 찾았다. 남아있던 호밀빵에 시장가에서 샀던 잼을 쓱쓱 발라 먹고 있을 때, 여우는 식사를 마치고 혀로 입가에 묻은 닭고기 부스러기를 핥아먹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우의 새까만 눈 한 쌍이 나를 향했다. 나는 한 손에는 빵을 든 채 조심스레 다른 손을 뻗어 여우의 턱을 손등으로 매만졌다. 여우는 눈을 곱게 접어 휘며 손등에 턱을 치댔다. 이제는 이를 세우진 않네. 여우는 영리하고 똑똑한 동물로 유명하다. 살려도 줬고, 먹이도 줬고, 치료도 해줬다. 짐승도 예의는 안다 이건가.

여우는 옆에 앉은 나에게 바짝 다가와 엉덩이를 맞붙였다. 눈으로는 무슨 속셈이냐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멀어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건가.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쓰다듬어 주니까 좋다? 근데 나야말로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머리를 박박 문질러주면 여우는 얼굴을 다리에 바짝 맞붙였다. 곧 잠을 청하려는 듯 몸을 둥글게 만 여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 자?”

여우가 대답할 리가 없는데 물었다. 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곁에서 벗어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여우는 아예 그 자리에서 잠들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너도 피곤했겠지. 그 눈보라를 견뎠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 내 잠자리는 소파가 될 것 같다. 나 하나는 누워도 괜찮은 크기로 사서 다행이지.

나는 담요를 당겨서 여우에게 살짝 덮어주었다. 그런데 귀가 눌린 게 싫은지 먼지 털어내듯 머리를 털어버렸다. 그리고는 멀쩡한 두 다리로 몸을 끌어와 무릎에 앉더니 품에 마구 얼굴을 묻어댄다. 개도 아니고. 아니, 개과 동물이긴 하지.

그래, 추운 계절이다. 체온 높은 생명체 둘이 부대끼고 자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변온동물인 뱀을 끼고 잘 순 없잖아. 내가 뒤로 살짝 눕자 여우는 내 배 쪽으로 조금 더 파고들어 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여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누워서 가만히 듣자니 어쩐지 편안해져서 잠이 왔다.

왕국력 913년 12월 11일

꿈에서 따뜻한 털덩어리를 품에 안았다.

털덩어리는 내 품 안에 꽉 차게 들어와 털이 복슬복슬한데, 잡히는 대로 주물주물 만지면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해서 먹을 수는 없는 찐빵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털덩어리가 어디 있고 그런 찐빵이 어디 있겠나. 누가 봐도 꿈인데, 나는 그 꿈이 너무 생생했던 나머지 꿈인 줄 모르고 따뜻한 느낌이 기분 좋아 털찐빵을 막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여우의 털 같았다. 특히 꼬리가 딱 끌어안고 쓰다듬으면 이런 촉감이겠거니 했다. 어디서 이런 게 생겼지? 하고 생각하던 꿈속의 나는, 그 털찐빵에 얼굴을 찰싹 맞았다. 그리고 꽉 짓눌렸다. 털찐빵이 혼자 뛰어올라 내 얼굴을 짓누른 것이다.

나는 얼굴을 얻어맞은 충격에 꿈에서 깼다.

알고보니 털찐빵, 아니, 여우의 꼬리가 내 얼굴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내 얼굴을 덮은 꼬리가 통통거리며 얼굴을 두드렸다. 쓸데없이 폭신했다. 아무래도 나는 이 꼬리를 꽉꽉 쥐고 주무른 모양인데. 그러니 꼬리로 얻어맞지.

나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꼬리를 옆으로 치웠지만 꼬리는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오더니 내 얼굴을 통통 두드렸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하고 있자니 잠이 다 깨 버려서 비몽사몽 자리에서 일어나 여우를 쳐다봤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내 옆에 여우가 아닌 어린아이가 누워있던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악!”

“으악!”

아이가 그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 버둥거리다 뒤로 손을 잘못 헛디디는 바람에 침대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내가 아이의 팔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팔을 잡은 손이 주르륵 미끄러지는 바람에 놓칠 것 같아서, 아이의 몸을 팔로 둘러 안전하고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아이는 다행히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

대답을 듣기 이전에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아이의 머리 위에 달린 성인 손바닥만한 여우 귀였고, 그다음에 들어온 것이 아이의 알몸이었고, 그 위로 얼룩덜룩하게 남은 크고 작은 화상자국, 그다음이 얼굴이었다.

누구든 이 아이를 처음 본다면 한 번쯤은 뒤돌아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림잡아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키와 앳된 얼굴에도 드러나는 외양의 분위기가 화려했다.

화려한 외모에 비해 유순한 눈매가…… 아.

나는 그제야 아이가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한참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와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물었다.

“……응?”

아이는 그제야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꽉 구겨 잡았던 내 옷을 놓았다.

아이가 고개를 숙인 시선에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다리의 붕대는 느슨하게 풀렸고, 그 사이로 하얀 다리에 겨우 아물어 붉게 그인 것처럼 남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무릎 위로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른손이 안 보이도록 꽉 붙잡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가리려 들어도 오른손의 약지와 소지가 없다는 것쯤은 다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 하나는 무릎 아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이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들자,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네가 어제 내가 구한 그 여우니?”

“…….”

아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으나, 여우, 아니, 아이는 자신이 그 여우가 맞다고 대답하듯 꼬리를 등에 바짝 붙여 뒤로 숨기고 큰 두 귀는 삐죽 내린 채 이불을 뒤집어써서 가렸다.

얘 좀 봐라. 그런다고 귀랑 꼬리가 가려지니?

“나 뭐라고 하려는 거 아냐.”

나는 이불을 두른 채 얼굴만 겨우 내놓은 아이를 툭툭 토닥여 달랬다. 그렇다고 이불을 억지로 내리거나 떼어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자극이 될 수도 있잖아.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옛날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포유류의 귀와 꼬리가 달린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했다. 외양 별로 종족은 다양했지만 인간은 그들을 뭉뚱그려 수인이라고 불렀는데, 사실 이들은 인간의 몸을 가진 정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가설이 어디서 나왔냐면, 마법으로 신체를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논문을 읽다가 쉽게 동물화 및 인간화하는 수인이 종족적 특성으로 보유하고 있는 마력이 이 신체 재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이런 걸 왜 적고 있냐. 나는 문장을 적다 말고 문장 위에 선을 직직 그어버렸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수인은 인간과 공존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인간에게 박해받은 역사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사람이 많은 곳에 나타나는 건 드물고, 산골이나 평원, 사막 등 인간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주로 산다고 했다. 내가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수인은 북부에도 많이 살 걸. 인간은 자신과 다르게 생긴 종족과 인종이 두렵기만 한가보다. 박해하고 따돌리니. 아무튼 아예 안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역시 보기 드문 종족이다. 나 역시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다. 성년 수인도 아닌 어린 수인을.

나는 아이에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이름이 뭐야?”

“…….”

“혹시 말을 안 배웠나? 그…….”

“김재희요.”

망설이는 내 말을 누르고 튀어나온 목소리에 심장이 약간 떨렸다. 왜 떨렸는지는 모르겠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이 어린아이는 이렇게 봐서는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너무 예쁘장하고 머리도 길어서 더 그랬다.

“내 이름은 박무현이야.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 내가 재희라고 불러도 될까?”

“……네에.”

다행히 말은 할 줄 아는 것 같다. 재희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최대한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다리는 좀 괜찮아? 어제 많이 아팠지. 어제 내가 연고를 발라주긴 했는데…….”

재희는 어제 덫을 물렸던 다리를 침대 바깥으로 뺀 뒤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그 사이에 내 셔츠를 아무거나 가져와서 맨몸의 재희에게 걸쳐주고 단추를 잠가주며 말했다.

“움직일 수는 있어요.”

“디디는 건?”

재희가 다리를 바닥에 내리자, 나는 재희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먼저 내밀었다. 하지만 재희는 괜찮다고 손을 젓더니 소파 팔받침을 붙잡고 일어나려고 했다. 비록 일어나지도 못하고 실패했지만.

“못 하겠어요.”

“그래. 무리하지 말자.”

다행히 나는 인간은 치료해 본 경험이 제법 많다. 수인은 치료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인간의 골격이고 체형이니 어디가 어떤지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치유사 자격은 있어서 다행이다. 전문의는 아니어도 사람 전문적으로 치료할 자격은 된다.

나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서 아예 침대 앞에 깔아둔 러그에 주저앉았다. 잠깐만 만질게, 하고 재희의 다친 다리와 발을 살살 잡고 관절 정방향대로 다리를 움직이며 상태를 확인하는데 재희의 표정이 그닥 좋지 않았다.

“아파?”

“네.”

“이렇게 하,”

“아……파요.”

재희가 바로 말했다. 나는 손을 바로 떼어냈다. 아프다는 걸 억지로 더 만질 이유는 없었다.

“알았어.”

당장 걷는 건 무리겠군. 나는 재희에게 잠시 있어 보라고 한 뒤 연고와 새 붕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어제처럼 연고를 꼼꼼히 발라주고, 쓸리지 않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아.”

재희가 짧게 말했다. 아파서 낸 말이 아니라 무언가 발견했다는 어투였다. 나는 재희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딱 위치에 맞게 창 틈새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눈부셔서 눈을 찌푸리는 사이, 재희가 작은 두 손으로 내 뺨을 꽉 잡았다. 어어?

“오……. 왼쪽 눈.”

나는 두 볼이 제대로 짓눌려 붙들린 채 얌전히 재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 고개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조금씩 돌려 얼굴을 보던 어린 꼬마는,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말했다.

“이쪽만 색이 다르네요. 파란색이에요.”

왼쪽 홍채가 오른쪽 홍채와 색이 다른 건 사실이다. 홍채이색증이라고, 어렸을 때 당한 마차 사고로 생긴 흉이다. 거의 실명까지 갔었는데 파랗게 변한 눈은 가까스로 살았고 다른 한쪽 눈은 아예 잃었다. 그때 부모님이 두 발로 뛰어 수소문해서 마법부 직속 병원에서 돈을 많이 들여 의안을 끼웠다.

“응. 맞아, 파란색.”

“왜 파란색이에요?”

”음……. 어렸을 때 사고로 눈을 크게 다쳤어. 낫는 과정 중에 색이 이렇게 변한 거야.”

“그럼 이쪽 눈은요? 여긴 까매요.”

“여기는 아예 안 보여서 결국 가짜 눈을 새로 끼운 거고.”

“가짜 눈? 마법 같아요. 신기해요.”

“굳이 말하면 마법이긴 하지.”

몸에 깃든 마력으로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니까. 이런 설명은 지금 아이에게 해도 못 알아들을 게 뻔해서 생략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재희는 딱 어린아이 다운 감상 몇 가지를 늘어놓았다. 왼쪽과 오른쪽의 색이 다른 게 오드아이 고양이의 눈동자인 것 같다느니, 사실 눈 색이 달라서 오드아이 수인인가 했다던지, 햇빛에 대보면 색이 달라지는 돌멩이 같다느니. 사실 몇 개는 일기에 적자니 기억이 안 난다. 재희는 한참을 무어라 말하다가 내 뺨을 놓아주며 말했다.

“저어도. 어렸을 때 다쳐서 이렇게 됐어요.”

재희는 무릎 아래가 없는 다리를 휘적였다. 너 지금도 어린 거 알고는 있는 거지? 라고 묻고 싶지만 그래도 귀여워서 웃으며 들어줬다.

“으응. 많이 아팠겠다.”

“네. 좀요.”

재희가 내민 다리의 절단면이 아물고도 하얀 살이 돋은 걸 보니 다리를 잃은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여우 상태일 때는 털에 덮여서 안 보였는데. 아팠겠다. 아직 이렇게 어린데. 내가 잠시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재희가 말했다.

“덫이랑 총 때문에요.”

“응?”

“다리요. 네 발로 산에서 뛰어다니다가 사냥꾼한테 잘못 걸렸었어요. 총으로 빵 하고 잘못 맞아서 도망치다가 덫에 걸렸어요. 그대로 다리가 뚝.”

나는 그 말을 듣고 왜 재희가 숲에서 사람 하나 물어 죽일 것처럼 경계하고 울었는지 알았다. 죽을까 봐 그랬나 보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으면 어제의 내가 사냥꾼이랑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을 테니까.

나쁜 놈들. 북부 산은 대공령이라 허락 없는 수렵 금지라고 들었는데 허락받았을까? 처벌은 받았고? 안 받았겠지. 어린아이에게 그 사람들 처벌은 받았냐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아마 못 받았겠지. 재희라고 알 리도 없을 거고.

그보다 죽을뻔한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재희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번에 걸린 덫의 날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망정이지, 컸으면 재희는 또 다리를 잃는 불상사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구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표정을 확 구기고 있었더니 재희가 내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형……. 화났어요? 아픈 이야기 안 할게요.”

“응? 아니. 아니야. 해도 돼. 나 화 안 났어.”

나는 즉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정수리 위에 손을 올렸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니 머리카락이 무척 부드러웠다. 재희가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내렸다. 눈을 꾹 감은 덕에 드러난 재희의 유순한 눈꼬리가 정말 여우이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살짝 배어 나오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너 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살아서 여기 있으니까 됐다.”

“…….”

재희는 내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말했다.

“형은 저를 왜 구해줬어요?”

“응?”

“엄마 아빠가 인간은 다 이기적이라고 했어요. 제가 봐도 인간은 이기적이에요.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던 거 아니에요?”

부모가 있었나. 있긴 했구나. 그리고 본인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뭐. 비슷하게 생겼을 뿐이지 엄연히 다르다. 개와 여우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과 같다.

구해주지 않으면 어제 같은 겨울밤만 되면 조그만 여우 한 마리 못 구해준 게 항상 생각나서 잠 못 잘까 봐 같은 말은 못하겠고. 결국 고민하다 전형적인 답을 했다.

“생명 구하는데 이유가 있나. 거기 있으면 네가 죽을 것 같아서 살린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재희는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다가 물었다.

“그럼……. 형은 사냥꾼 아니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나……. 저기 시내에 의료원 알아? 거기에서 거의 한 달 전부터 일하고 있는 마법사야. 봐봐.”

나는 시범 하나 보이겠다고 재희의 다친 다리를 살짝 잡고 주문을 외웠다. 재희는 놀란 듯이 마법을 쓰는 것을 잠깐 쳐다보다가 내가 손을 떼자 ‘저는 조금도 신기해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듯 태연하게 다리를 휙휙 저었다.

“신기해? 빨리 낫게 해주는 거야.”

재희는 그대로 한쪽 다리를 디딘 채 일어나려고 했다. 어? 어?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버티지 못한 재희가 휘청거리며 앞으로 무너지는 게 먼저여서 급하게 재희를 받았다.

“위험하잖아!”

“안 되네요……. 마법 맞아요? 아니, 형 마법사 맞아요? 빨리 낫게 해준다면서요.”

“완전히 낫는 건 아니지. 그냥 몸에 자가치유능력을 촉진시켜줄 뿐이야. 마법은 만능통치약이 아냐. 치유에 도움을 주는 거지 진짜 치유가 되는 건 아니거든. 거기다 마력을 너무 많이 주입 받으면 몸이 쉽게 피곤해져.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

사람이, 특히 아이가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마력의 양에도 한계가 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재희를 소파 위에 눕혔다. 그의 몸을 이불 아래로 꾹꾹 밀어 넣고 살짝 덮어주었다. 힝. 시무룩한 소리를 낸 재희가 이불을 목 끝까지 당긴 채 웅얼거렸다.

“한 번에 낫게 해주면 좋은데…….”

“그랬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마법을 배우려고 난리겠지. 다리 어느 정도 나으면 너희 엄마 아빠 찾으러 가자. 내가 부모님 찾을 때까지 옆에 있을게.”

그러자 재희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나는 재희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말했다.

“응? 왜 그래?”

“…….”

“싫어?”

“네……. 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그래도 더 걱정하시지 않게 만나러 가야지. 지금쯤 많이 찾고 계실 거야.”

“…….”

내가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재희의 얼굴은 더 터질 것처럼 붉고 둥글둥글하게 부풀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다 결국 눈물이 터질 것 같은지 내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크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그런 쿨쩍이는 소리를 들으면 ‘얘가 울고 있구나’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저……. (쿨쩍.)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훌쩍.) 엄마 아빠 어디 있는지도, (쿨쩍.) 모르는데…….”

“뭐? 아니, 그래도 여기로 다시 오시겠지. 산속에서 딸을, 아니, 아들을…….”

“아들이에요. (쿨쩍.)

“아,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남자아이였구나. 말을 고치면서도 쿨쩍이며 우는 재희를 달래려 토닥였다. 하지만 재희는 완전히 삐졌다는 얼굴로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재희야. 부모님이 계시면 부모님한테 가야지.

나는 재희의 정수리를 북북 긁어주며 방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자 재희는 흐끅 하고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저 여기 있을래요…….”

내 집은 어린아이를 오래 맡기에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다. 일단 나 혼자 살기 위해 구한 집이라 소파에 식탁, 책장 몇 대, 부엌,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갈 작은 방에 부엌 옆에 딸린 음식 저장고가 다다. 그렇게 넓지도 않고, 틈틈이 마법을 연구하고 약물을 쪼개어 끓이길 반복하는 곳에서 아이에게 해로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깨지기 쉬운 것도 있을 거고, 건드리면 안 되는 것도 많다. 호기심 많은 재희 또래의 아이들에게 여긴 호기심 천국일 테다. 그러다가 사고 쳐서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생각하기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게 아니다. 머나먼 북부로 온 건 혼자 살고 싶어서의 이유도 있었다. 오랜 마탑 생활에 지쳐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오후 네 시 퇴근이긴 하지만 누구 하나를 책임질 정도로 넉넉한 살림도 아니란 말이다.

부모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나? 싸우고 집을 나왔다거나, 집에서 쫓겨났다거나. 이 추운 날씨에 아이를 내쫓은 것도 그닥 좋은 일은 아닌데. 하지만 이렇게까지 부모를 찾고싶지 않다고 하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잖아.

보통 이 나잇대 아이들이면 엄마 보고 싶다고 울먹이지 않던가? 여우라 또 다른가?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부모에게 가기 싫다고 하는 게 아닌가?

재희가 고개를 빠끔 들어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재희의 울망한 눈빛이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재희가 여기 있고 싶다고 울먹이는 것이 동정받기 위한 거짓이든 진실이든 나는 그걸 본 이상 재희를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소파 아래로 내려가 눈높이를 맞추었다.

“형이랑 살고 싶어?”

“네에. 형아랑.”

형아래. 어디서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하…….

그래도 재희를 아예 데리고 사는 건 안 될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아이의 부모가 나타나서 저 천하의 나쁜 마법사가 내 아이를 유괴했다는 식으로 오해받으면 곤란하잖아. 잠시 데리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하고…….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는 건 지금 아이에게 너무 충격이 될 것 같아서, 차분하게 재희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래도 형이랑 살고 싶으면 엄마 아빠한테 허락은 받아야지. 형 나쁜 사람 만들 거야? 막, 멋대로 납치한 사람이라거나. 응?”

재희는 톡 건드리면 눈물이 펑 터질 것처럼 벌겋게 부푼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 얼굴을 톡 눌러보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형이랑 지내고 싶으면 부모님한테 허락부터 받자. 허락받으면 그때는 여기 있어도 돼. 그전까지는 재희 갈 곳도 없고, 당장 내가 네 다리도 봐줘야 하니까 같이 살자. 응? 그래도 되지?”

내 머리가 너보다는 컸으니까 나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네 부모를 찾아줘야 할 의무 말이다. 재희의 머리를 쓰담아주었다. 하지만 재희는 내 대답을 듣고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내가 위로하려고 그저 쓰담아 주면 다리에 기어와 앉아서 품에 얼굴을 부볐다.

귀여웠다. 이래서 다들 아이를 낳고 동물을 키우나?

나는 내 무릎에서 가만히 앉은 여우가 몸을 치는 바람에 딥펜을 잘못 눌러 생긴 잉크 자국을 더 번지지 않게 꾹꾹 누르며 동물은 역시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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