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해저기지 출근일지 (3)
※ 방수기지 AU
※ 설정 날조 주의
"선생님, 가시죠."
신해량이 치과 입구에서 진료실에 있는 나를 불렀다. 나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치과 문을 잠근 후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 주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벌써 금요일이었다. 오늘은 엔지니어 가팀의 티타임에 초대받아 가기로 했는데, 신해량 팀장이 주간 보고를 마친 뒤 치과에 들러 나를 데리고 티타임 장소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를 여기에서 다시 보게 되니 문득 지난번에 보였던 추태가 떠올라 조금 민망해졌지만, 신해량은 딱히 지난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가시죠."
"네, 좋습니다. 다른 팀원분들은 먼저 모여 계신가요?"
"예."
엔지니어팀 사무실에는 이전에 사무용품을 얻으러 잠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지난번과 달리 사무실 한켠에 택배박스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택배들 중 일부는 내용물을 이미 꺼냈는지 상자가 뜯어져 있는 것도 있었다.
"선생님 택배입니다. 여기에 두셨다가 나중에 찾아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내 택배 상자들 중 하나를 뜯어 무설탕 비스킷을 꺼낸 후 상자를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나머지 물건들은 다음에 찾으러 와야겠군. 신해량과 나는 탕비실 수납장에서 즉석밥들을 꺼내 전자렌지에 돌린 다음, 냉장고에서 냉동 만두, 콩고기 소시지와 햄을 꺼내 배낭에 넣고 생수병을 몇 개 챙겼다.
사무실에서 챙겨 나온 짐을 각자 나눠 들고 사무실을 나와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물었다.
"신해량씨는 이번에 택배로 뭘 주문하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뜨개실을 샀습니다."
"아, 취미가 뜨개질이신가요?"
"예."
"제 주변에 뜨개질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신기합니다. 요즘은 뭘 뜨고 계신가요?"
“양말을 뜨고 있습니다.”
“어떤 양말일지 궁금하네요. 다음에 자랑해 주세요."
"자랑할만한 솜씨는 아닙니다만, 궁금하시다면 다음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기대되네요."
주먹으로 치아를 부수며 다닌다는 사람의 취미가 의외로 평화로워보여서 내심 놀랐다. 아니지. 뜨개질을 하려면 강한 악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대한도에 도착하자, 우리는 인공해변으로 향했다. 햇볕이 따뜻해서인지 해변가 곳곳에 사람들이 앉거나 드러누운채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닷바람에 신해량의 머리카락이 날리며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흰색 티셔츠를 입고 해변을 걷는 모습이 마치 어느 이온음료 광고 모델처럼 청량했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 걷다보니 해변 끄트머리에 숲과 해변이 만나는 지점이 나타났다.
"이쪽입니다."
신해량을 따라 커다란 바위 옆으로 돌아가니 바위 벽 뒤로 살짝 가려진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해변 끝까지 온 적이 없어서 이런 공간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멀리서 보면 지형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엔지니어 가팀 직원들에게 인사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몇몇이 나와 신해량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버너 위에 올려진 큰 냄비 옆에 강수정이 서있었고, 이지현, 백애영, 김재희, 정상현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서 양파, 대파, 양배추, 마늘을 손질하고 있었다. 내가 재료 손질팀에 합류하여 아까 챙겨온 햄과 소시지를 적당한 크기로 써는 동안, 서지혁은 식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각종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 처리하고 수저와 즉석밥, 캠핑용 컵을 테이블에 세팅했다.
손질한 재료들을 모아 냄비 안에 넣자, 강수정이 그 위에 냉동 만두, 라면 사리, 양념장, 김치, 곰탕 스프를 넣었다. 거기에 신해량이 베이크드 빈스 통조림을 따서 넣고 생수를 부어 끓였다. 내가 식재료들을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해하자, 강수정이 헬기를 자주 띄우는 미국팀 팀원에게 부탁해서 한인마트의 식재료를 구했다고 알려주었다.
"음......"
"뭔가 부족하죠? 마늘을 좀 더 넣어야할것 같지 않아요?"
어느 정도 찌개가 끓자, 신해량과 강수정이 국물 맛을 보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도 한번 맛 좀 봐주세요."
강수정이 옆에 서있던 나에게 국물을 조금 덜어 주기에 맛을 봤다.
"......마늘을 더 넣죠."
내가 강수정의 말에 동의하자, 신해량이 냉큼 다진 마늘을 한 움큼 더 집어넣고 끓였다. 해저기지의 외국인들이 봤다면 기겁했을지도 모를 양이었지만, 한번 더 국물 맛을 본 3명의 한국인들은 대단히 만족했다.
부대찌개가 다 준비되자 그릇에 담아 분배했는데, 그릇들이 하나씩 테이블에 닿기 무섭게 옆에서 옆사람으로 넘겨져 각자의 자리에 안착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다들 부대찌개와 즉석밥으로 열심히 식사를 했다. 서지혁이 '아..알콜이 있으면 완벽한데..'라며 중얼거리자 김재희가 '지혁이형, 술 필요해요?'라고 하더니 갑자기 발 아래 모래사장에서 무를 뽑듯이 맥주병을 쑥 뽑아냈다.
도대체 왜 이런게 모래사장에 묻혀 있는거지? 술은 금지되어 있는게 아니었나? 하긴 생각해보니 해저기지 내에서 수통 안에 보드카를 넣어 들고 다니는 인간도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김재희가 신해량에게 은근히 물었다.
"팀장님. 이거 다른 팀 애들이 숨겨놓은거 같은데 그냥 슬쩍 뜯으면 안되나요? 아무도 모를거에요."
"안돼."
"살짝 맛만 보는건요? 냄새만 한 번 맡아보면 어때요?"
"......"
신해량의 싸늘한 표정을 본 서지혁이 쓸쓸한 얼굴로 김재희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지현이 조용히 김재희의 손에서 맥주병을 가져가 제자리에 고이 묻어줬다.
"소시지가 몇 팩 남는데, 이건 구울까요?"
"이리 줘봐."
백애영이 소시지 팩들을 모아 건네자, 신해량이 포장을 뜯어 남은 소시지들을 그릴에 구워냈다.
"선생님, 거기 있는 빈 접시 부탁드립니다."
내가 접시를 내밀자, 신해량이 주방가위로 소시지를 먹기 좋게 잘라 접시 위에 올렸다. 집게와 가위를 들고 소시지를 균일한 크기로 절단내는데 집중하던 신해량이 문득 내얼굴을 보고는 멈칫 했다. 그리고는 집게를 고쳐 쥐고서 검지로 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
무슨 뜻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맛을 보고 싶으니 하나 달라는 뜻이군.' 이라는 결론을 내린 나는 젓가락으로 소시지 조각을 집어서 신해량의 입에 냉큼 넣어주었다.
'?'
소시지를 받아 먹은 신해량이 이상한 표정을 짓기에 나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마주 쳐다봐주었다. 아직 덜 익었나?
그러자 갑자기 옆에서 김재희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지만 모두에게 들렸다.)
"의사선생님 입가에 음식이 조금 묻었네요. 닦으라는 뜻이에요."
뭐야, 그런거였냐.
"재희야, 너는 그걸 봤으면 아까 살짝 말씀해드리지 그랬니."
강수정이 내 손에 티슈를 한 장 쥐어주며 말하자 김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아까 방금 봤거든요."
내가 정말인지 묻는듯한 표정으로 신해량을 쳐다보니 그가 멋쩍게 말했다.
"......민망해하실까봐 그랬습니다."
"......그랬군요. 제가 식사를 너무 맛있게 했나봅니다."
얼굴이 약간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티슈로 입을 닦았다. 아까 국물을 마시다 입가에 조금 묻은 모양이었다.
"신팀장님은 말을 좀 자세히 할 필요가 있어요. 평소에도 최소한으로만 말하시면서, 심지어 오늘은 그렇게 입만 두드리시면 선생님이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서지혁이 이때다 하고 신해량을 탓하는 척 놀려대는데도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가위질하는 손길이 약간 삐끗하는게 보였다. 크기가 제각각 다르게 잘린 마지막 소시지 조각들을 보며 조금 웃었다.
8명의 한국인들은 정말 잘 먹었다. 부대찌개와 소시지까지 싹싹 비워서 배가 불렀는데, 순식간에 테이블 위를 치우더니 이제 디저트를 먹어야 한다며 간식거리와 음료를 늘어놓았다. 나도 챙겨온 무설탕 통밀 비스킷을 테이블에 돌렸다.
늘어놓은 간식이 사라져가는 동안 저마다 택배로 이번에 뭘 주문했는지, 이번주에 치과에 내원했던 강수정의 후기가 어땠는지, 휴가때는 뭘 할건지, 그리고 해저기지에 떠도는 각종 소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새 통역기를 구입하고싶다고 하니 다들 자신이 쓰는 통역기는 어떤지, 어느 통역기가 좋다더라는 등 정보를 주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합시다."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늦어져 다들 주섬주섬 철수 준비를 했다. 백애영과 이지현이 버너를 챙겨 운영본부 창고 건물 쪽으로 사라졌고, 나머지 인원들은 쓰레기와 설거지거리를 분류해 차곡차곡 자루에 넣고 뒷정리를 했다.
"김재희. 안돼."
옆에서 남은 간식들을 추려 배낭에 쓸어담고 있던 신해량이 갑자기 허공에 대고 말하기에 뒤를 돌아보니 김재희가 멸균 바나나우유의 마지막 한방울을 쪼옥 빨아먹으면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술병이 파묻혀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안거지.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가.
김재희와 정상현이 쓰레기자루를 분리수거장 구역까지 운반하게 되었는데, 정상현이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 해야하느냐고 불평했다. 서지혁이 그럼 자기가 쓰레기 자루를 맡을테니 대신 설거지를 하는건 어떠냐고 묻자 갑자기 정상현의 말문이 막히더니 김재희와 함께 쓰레기자루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강수정과 신해량이 접이식 테이블을 들고, 나와 서지혁이 설거지거리를 담은 자루를 챙겨 운영본부 창고로 향했다. 테이블을 창고에 넣고 옆에 딸린 간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해치운 다음 함께 중앙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앞으로 자주 놀러오십쇼."
"들어가십시오."
"오늘은 바빠서 못오셨지만 연구원분들 중에 다른 한국인 직원분들도 계셔요. 다음 기회에 소개시켜드릴게요."
아마도 유금이와 내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직원을 말하는 것 같았다.
"네, 저를 꼭 불러주세요."
사무실로 향하는 엔지니어 가팀 인원들과 헤어져 백호동 숙소로 향했다. 휴일을 앞두고 사람들과 함께 금요일 저녁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해저기지에 입사한 이후 가끔 밤중에 혼자 조용한 숙소에 있으면 문득 가족들과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 울적해지기도 하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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