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2

독감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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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공기보다 밀도가 높다.

어떤 물체가 물을 통과할 때 물체와 상호작용하는 분자의 수가 증가하는데, 이로 인해 물체는 물속에서 이동할 때 더 많은 저항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인체 역시 물보다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으며 물속에서 인체가 이동할 때, 수중 저항이라는 힘이 작용하게 된다. 이 저항은 인체가 물을 통과하면서 발생하며 인체의 형태와 속도에 영향을 준다. 또한, 물속에서의 중력에 대한 저항은 공기 중에서의 저항보다 비교적 큰데, 이로 인해 물속에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움직이게 된다. 물체를 떨어뜨렸을 때, 공기 중에서 보다 물속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게 이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물속에서 움직일 때, 슬로모션을 건 것처럼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물속일까? 서지혁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느리게 보였다. 서지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적지 않게 놀란 듯한 표정의 신해량. 그 역시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는데, 실제로 그런 것인지 그저 느리게 느껴지는 것인지 인식이 되지 않았다. 너무 놀라면 뇌가 굳어버리기라도 하는 건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 있는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서지혁은 자신이 발을 붙이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떠올려야만 했다. 몸과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로 젖은 딱딱하고 매끄러운 바닥. 실내 온도 조절을 위해 틀어둔 에어컨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약한 바람. 물기가 묻은 손으로 꽉 잡은 미지근한 문 손잡이. 사우나에 몇 시간은 갇혀있었던 것처럼 달아올라 후덥지근한 열을 풍기고 있는 몸뚱이. 현실감이 사라져 붕 뜬 머릿속과 제 눈앞에 있는 실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두 눈.

하나하나 천천히 의식해 보자. 나는 목욕을 하고 있었고, 아니지. 이게 먼저가 아니라. 나는 호텔에 머물면서 며칠 내내 감기를 앓고 있었고, 백애영이 죽과 약을 배달시켜준다고 그랬지. 그 사이에 목욕을 하고 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고,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는데. 열었는데……. 왜 신해량이 있지? 다시 생각해도 이곳은 바닷속이고, 익사해서 딱 죽기 전에 헛것을 보고 있는 게 더 현실적인 것 같았다. 이거 봐. 숨도 잘 안 쉬어지잖아.

"서지혁."

"……예. 예? 어. ……아니. 예?"

와. 세상에서 제일 바보 멍청이 머저리 같은 대답이었다. 익숙한 부름에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서지혁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뇌 속에 산소가 돌자 눈앞이 더 선명하게 보였는데, 어떻게 보아도 신해량이었다. 이런 얼굴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지. 그것도 배달 알바라니. ……아니.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지? 반응을 보아하니 백애영이 두 곳에 사기를 친 거 같은데. 이 망할 백상아리!

넋 나간 대답에 작게 한숨을 쉰 신해량이 물에 빠진 강아지 꼴을 하고 있는 서지혁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 서지혁은 샤워가운을 더 끌어당겨 몸을 최대한 가렸다. 서지혁이 처량하게 젖은 발가락만 꼼질거리고 있으니 이번엔 신해량이 서지혁의 젖은 머리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 시발. 진짜. 왜? 왜? 왜? 왜 이 인간이 여기 있는 건데! 서울역 광장에서 알몸으로 서 있어도 이 보다는 덜 쪽팔릴 거 같았다. 시벌. 존나.

서지혁의 상태를 얼추 파악한 것인지 신해량은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과 포장된 죽이 담겨진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애영이가 부탁한 거야. 받아."

"……."

해명인지 핑계인지 모를 사족을 덧붙이는 걸 보니 저쪽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 같았다. 역시 백애영. 용기도 가상하지. 저 인간을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신해량의 말에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거린 서지혁이 종이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봉투 손잡이에 손이 닿자마자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떠올랐다.

이걸 받으면 분명 이대로 돌아가겠지. 임무를 완수한 로봇처럼 귀환 코드를 실행시켜 망설임도 없이 돌아갈 신해량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한 것이 며칠째인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신해량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서지혁은 그대로 종이가방 손잡이가 아닌 신해량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신해량의 표정을 보니 꽤 놀란 것 같았는데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서지혁은 신해량의 손을 잡아당겼다.

"……."

"……."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해량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라? 내가 많이 아픈가? 힘이 다 떨어져 나갔나? 서지혁이 다시 있는 힘껏 신해량의 손을 당겼다. 여전히 신해량의 몸은 1cm도 당겨지지 않았다. ……원래 이랬나? 아닌데. 당기면 잘 당겨졌는데. ……아니구나. 여태 이 인간이 나를 많이 봐준 거였구나. 그냥 자의로 나에게 와준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과거의 깨달음에 감동받을 틈도 없이 서지혁은 차가운 현실에 내던져졌다. 이제는 내게 와주지 않는 걸까. 억지로 들어 옮길 수는 있겠지만 쉽게 잡혀주지도, 들려주지도 않겠지. 망할. 여태껏 누려온 것들의 상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켁! 켁! ……쿨럭!"

"……."

차분하게 말을 하려 했는데 갈라진 목소리와 기침이 형편없이 튀어나왔다. 시발. 힘으로 당기려 할 땐 꿈쩍도 않던 신해량은 서지혁의 연약하고도 우렁찬 기침에 움직였다. 탁. 현관문이 닫히고 마침내 신해량이 서지혁의 호텔방 안으로 들어왔다. 목적을 달성한 서지혁은 간질거리는 목으로 연신 기침을 해대며 소파에 힘 없이 쓰러지듯 앉았다. 드디어 멎은 기침에 깊게 숨을 내뱉고 있으니 신해량이 호텔방 안을 둘러보며 소파 앞 테이블에 종이가방을 올려두었다.

"독감이야?"

"……그런 거 같죠?"

신해량이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뽑아서 축축해진 손을 닦았다. 서지혁이 막무가내로 잡은 탓에 묻은 물기를 닦는 거였지만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랑 닿기도 싫은 건가. 울적해졌지만 누굴 탓한다면 대상은 자신뿐이라 괜히 젖은 손만 가운에 벅벅 닦았다.

손을 닦은 신해량은 테이블 위에 약을 몇 개 늘어놓았다. 그리고 포장된 죽 두 통을 꺼내 뚜껑을 벗기고 수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죽은 전복죽과 소고기야채죽이었는데, 신해량은 따로 사 온 후리카케 봉지를 뜯어 두 죽에 나눠 뿌렸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건데. 죽의 종류나 먹는 방법이나 모두 서지혁의 취향이었다.

포장된 밑반찬 뚜껑까지 모두 벗긴 신해량이 서지혁을 보며 먹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뭉클한 기분이 든 서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먼저 전복죽 위에 놓인 내장과 적당히 잘 뿌려진 후리카케를 섞었다. 고소한 냄새에 종일 굶고 있던 서지혁이 허겁지겁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 하는데 신해량이 다급하게 그 손을 제지했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손을 놓았다.

"호텔 바로 앞에서 산 거라 뜨거워. 식혀서 먹어."

"아. ……예."

습관이 참 무섭다. 김이 나는 걸 보면서도 또 바로 입에 넣어 입천장까지 홀랑 태워먹을뻔했다. 식겁한 서지혁이 숟가락을 들고 후후 입김을 불었다. 몇 번 바람을 불다가 못 참고 입에 넣었더니 여전히 뜨거웠지만 겉은 어느 정도 식어 참을만했다. 슴슴한 간의 죽에 짭짤고소한 후리카케가 잘 어울렸다. 적당히 간이 잘 된 음식을 선호하는 서지혁이 죽을 먹는 방법이었다.

"……저인 거 알고 오신 겁니까?"

서지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신해량이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머뭇대는 반응을 보며 다시 죽을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고 있자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영이가 독감으로 죽은 놈이 있다고 했어."

"예?"

"가서 죽었으면 시체 좀 치우고, 살아 있으면 약이랑 죽이라도 먹여달라길래 온 거야."

"이 백상아리가 진짜……!"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다가 헛웃음이 나서 잠시 멈춰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앞으로 장조림과 오징어 젓갈도 슬쩍 밀었다. 그걸 본 서지혁이 죽을 입에 넣고 오징어 젓갈도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쫄깃 꼬들한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죽은 놈이 저인 건 몰랐습니까?"

"……대충 예상은 했어. 애영이가 한국에서 챙길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애영이한테 부탁한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종이가방만 두고 가려고 했는데 꼭 직접 확인해 달라고 해서."

왜 말이 길어지나 했더니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자신이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지혁과의 약속 아닌 약속을 본의 아니게 깨트리게 된 것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서지혁이 그런 신해량의 반응에 망설이며 제 뒷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 하…….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감사하다구요."

서지혁이 고개를 꾸벅이며 나름의 감사 인사를 하니 신해량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주 인연을 끊자고 지랄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쉬운 듯 구는 서지혁의 태도가 영 낯선 모양이었다. 그런 신해량의 반응에 서지혁은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먹고 나서 제대로 사과를 해야지. 이번엔 소고기야채죽을 잘 식혀서 입에 넣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신해량이 서지혁을 향해 약 몇 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이건 해열 진통제인데 지금 열이 나는 거 같으니 꼭 먹어야 한다. 콧물과 기침 증세가 있으면 이 약을 먹으면 된다. 목이 심하게 아프면 이걸 먹어라. 밥을 먹고 한 알씩 먹으면 된다. 약 종류 정도야 서지혁도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신해량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신해량은 자신의 설명을 잘 듣고 있는 서지혁을 확인하고는 빈 종이가방을 손에 들었다. 어어어어? 벌써 가려는 건가?

"잘 챙겨 먹어. 난 이제……."

"더 있다가 가면 안 됩니까?!"

랩을 하듯이 다급하게 내뱉은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의 눈이 커졌다. 서지혁은 신해량이 잠깐 멈춘 틈을 타 다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열이 나고 있기 때문인지 신해량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어렴풋한 온기가 느껴져 속이 울컥했다. 갑자기 손을 붙잡힌 신해량은 서지혁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쳐다보았는데, 서지혁은 최대한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한 짓이 있어서 양심이 아프긴 했지만 당장은 뻔뻔하게 애원했다. 얼굴 전체로 속을 훤히 보여준 서지혁을 마주한 신해량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다 서지혁과 조금 떨어진 소파 끝에 앉았다. 평소엔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줬는데. ……벌써 마음을 정리한 걸까. 양심도 없게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저. 제가 진짜.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요……."

"……그럴 거 같았어."

"예? 아니. 뭐. 예? 어떻게 아는데요?"

"전화했었잖아."

"제가 언제……. 아. 아! 그게, 그. 연락이 갔습니까? 아니, 바로 끊었는데."

"부재중 남아 있었어."

"아……."

어색한 정적이 돌았다. 그게 알림이 갔구나. 젠장. 프로필 염탐하다가 걸린 전남친 짓을 해버렸구나. 심지어 이 인간은 프로필 사진도 없는데. 이름만 떠있는 빈 프로필을 아련하게 보다가 잘못 연락한 구질구질한 짓을 들키니 쪽팔려 뒤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지…….

"……아니. 그런데 왜 연락을 안 하셨어요?"

"바로 끊겨서 잘못 눌렀구나 싶었어. 구질구질한 짓 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지."

"……정확하시네요."

"……그래서 연락할 거 같긴 했어."

"예……. 제가 그. 보다시피 몸 상태가 이런 꼴이라 좀 미룬 건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보니까 좋네요."

신해량은 대답이 없었다. 질질 짜며 당신이 내 불안이니 뭐니 남 탓만 실컷 하다 도망친 놈이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나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신해량은 헛소리하지 말라거나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소용없다거나 서지혁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지혁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해량은 집에 있다가 급하게 온 것인지 하얀 반팔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는데 꼭 모델처럼 잘 어울렸다. 남들은 동네 마실 패션이라던데 혼자 런웨이 위에 던져둬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마저도 광고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른 건지 이전에 봤을 때보다 앞머리나 뒷머리가 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머리 자르셨네요."

신해량이 서지혁의 말에 제 앞머리를 살짝 매만지며 정리했다. 잘 어울립니다. 그래. 작게 대답한 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에 죽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죽을 퍼먹고 있으니 신해량도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아. 예. ……당신이 머리 짧은 게 어울린다고 해서."

"……."

아 미치겠네. 어색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괜히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고 연신 숟가락질만 해대고 있는데 멀리 앉아 있던 신해량이 슬쩍 옆으로 와 젓가락을 들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려 죽만 씹어 먹고 있는데 신해량이 젓가락으로 장조림 고기를 집어 서지혁의 죽 위에 올려 주었다. ……어? 뭐지?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려 신해량을 쳐다봤더니 시선을 슥 피한다. 어? 어어?

심장이 터질 거 같아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진짜 돌겠네. 손이 좀 떨려서 헛손질을 몇 번 하고 장조림이 올라간 죽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짭짤하고 달콤한 간장으로 간이 잘 된 고기가 쫄깃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지? 이상한데. 왜 그 난리를 쳐놓고 간 쓰레기 새끼한테 아직도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거지?

"……저 혹시. 애영이가 말했습니까……?"

"……너 운 거?"

"아. 시발! 내 이럴 줄 알았어! 망할 백상아리!"

서지혁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어쩐지. 너무 반응이 유하다 했더니 질질 짰던 것까지 다 털렸구나.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거울을 안 봐도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너무 뻔해서 서지혁은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백상아리 이 의리 없는 자식! 아니. 그걸 홀랑 말해? 내가 한 이야기는 뭐로 들은 건데?

"……제가 언제 울었다고 하던데요?"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다가 울었다던데. ……호텔에서 전화했을 때도."

"악! 이 의리 없는 놈!"

서지혁이 그대로 소파에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콱 죽어버릴까. 가만히 있어도 쪽팔려서 뒤질 판이었다. 소파를 주먹으로 팡팡 치고 있으니 신해량이 일어나서 죽이나 먹으라고 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은 서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 죽을 떠먹었다. 이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네.

"……할 말 있으면 해봐."

조근조근한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죄를 지었는데 친히 기회를 주는 친절에 목이 꽉 막힌 듯 먹먹해졌다. 아 제발. 못난 꼴 이미 너무 많이 보였으니 말이라도 제대로 잘 하자, 서지혁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죽을 씹어 넘기고 물도 한 모금 마신 서지혁이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신해량을 마주 보았다.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대화도 제대로 안 하고 당신 말도 안 들어보고 혼자 마음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진정하고 대화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멋대로 통보하고 당신 탓만 했어요. 당신 마음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제가 이기적으로 굴었습니다. ……잘못했다고 백번 빌어도 부족한 거 압니다. 그래도. ……그래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용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당신 탓이 아니라고.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어떻게든 잘 참았다. 끝엔 목소리가 갈라지고 떨리긴 했지만 이미 못난 꼴은 많이 보여서 이 정도는 부끄럽지도 않았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애절한 사과를 듣고도 아무 말 없었다.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해봤자 소용없다고, 너무 늦었고 난 이제 너 따위 다 잊었으니 너도 혼자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이 돌아와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지만 신해량은 여전히 침묵했다.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서지혁은 남은 죽을 해치웠다. 이런 상황에 죽이나 퍼먹고 있는 건 웃기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아플 땐 배도 안 고프더니 신해량을 마주하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죽 두 그릇과 반찬을 싹싹 긁어먹고 나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신해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약 먹어."

"……예."

눈치를 보며 신해량이 사 온 약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종류별로 한 알씩 다 삼켰다. 원래 식후 30분이 정석이긴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릴 정신머리도 없었다. 물을 삼키고 빈 용기의 뚜껑을 닫고 정리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손에 들린 용기를 빼앗아 종이가방에 모두 담았다.

테이블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고 또 침묵이 감돌았다.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할 말이 없는 거였나? 힐끔힐끔 옆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신해량은 서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예? 아. 그게……."

사과에 대한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다시 질문이 날아왔다. 당황한 서지혁이 허둥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물에 젖은 꼬라지를 하고 있었구나. 죽을 먹는 동안 어느 정도 말랐는지 젖은 머리카락의 겉만 퍼석했다. 물기에 덩어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가르고 있으니 신해량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답을 바로 안 해서 화가 났나? 가려는 건가? 팔을 잡을 타이밍은 놓쳐서 급하게 티셔츠 옷자락이라도 잡았더니 신해량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쳐다본다. ……어라? 가려던 게 아닌가.

"……머리 먼저 말려. 이리 와."

"예……!"

아니었구나. 하하하. 너무 쫄아 있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골이 다 흔들리네. 갑작스러운 두통에 휘청거렸더니 신해량이 바로 서지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를 붙잡은 신해량의 손이 떨리길래 왜 그러지 싶었는데 떨고 있는 건 서지혁이었다. 순간 왜 떨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는데 그러고 보니 더럽게 추웠다. 화장실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은 탓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깨 위에 떨어졌고 등이나 가슴을 타고 가운 안쪽을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가운은 옷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차가웠다.

"왜 그래? 몸은 왜 이렇게 떨어?"

"예? 아니. 갑자기 두통 때문에……. 좀 춥기도 하네요."

"……왜 물기도 제대로 안 닦았어? 머리 말리고 바로 옷 입어."

"약 받고 바로 다시 물에 들어가려고 했죠. ……저도 속은 겁니다. 백상아리한테."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호소하니 신해량이 대충 알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어깨를 붙잡고 방구석에 붙어 있는 화장대로 향했다. 서지혁이 의자에 앉자 신해량이 드라이기를 들고 바람의 온도를 체크했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신해량이 서지혁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예의상 자기가 하겠다는 말을 할 법도 했지만 서지혁은 얌전히 신해량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드라이기를 들 팔 힘도 없을뿐더러 굳이 포상과 같은 호강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따뜻한 바람으로 떨리던 몸도 잠잠해졌다. 머리 뿌리부터 말려주는 섬세한 손길에 서지혁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 약 기운이 도는 건가. 안 되는데. 더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눈이 감기면 2초 뒤 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번쩍 뜨는 짓을 다섯 번쯤 하니 뒤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웃은 건가 싶어서 거울로 신해량의 얼굴을 살폈는데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잘못 들었나? 짧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작전 들어가면 며칠 밤을 새는 일도 많았는데. 고작 따뜻한 바람으로 이렇게 졸리다니. 추운 지역에서 전쟁을 할 때 적군을 향해 커다란 온풍기를 틀어놓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지간한 정신력으론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필승법을 팔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꿈나라와 현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반쯤 정신을 놓고 거의 헤드뱅잉을 하고 있으니 따뜻한 바람이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다시 오한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졸음이 가시질 않았다. 의자에 앉아 눈도 못 뜨고 저 안 자요.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등과 다리 뒤로 불쑥 뭔가 들어오더니 몸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어? 뭐지? 붕 뜨는 기분에 감긴 눈을 떠 보니 신해량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어어? 뭐, 뭡니까?!"

"그냥 자. 옷 갈아입혀줄 테니까."

"예? 아뇨. 저 안 자요."

문짝만한 공주님을 번쩍 안아 든 신해량이 서지혁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혀두고 옷장에서 대충 편해 보이는 옷을 골라 서지혁에게 던졌다. 머리에 옷을 뒤집어쓴 서지혁이 버둥거리며 옷가지를 침대 위에 올려두니 이번엔 속옷이 날아왔다. 멍하게 속옷을 들고 보다가 다시 눈이 스르륵 감겼다. 몸을 당기는 느낌에 뭔지 싶어 눈을 떠 봤더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샤워가운 끈을 풀고 있었다.

"어? 어. 왜?"

"옷 입어야 할 거 아니야."

"아니. 저.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요……?"

"알아."

신해량의 손은 멈추지 않고 서지혁이 열심히 여민 가운을 벗겨냈다. 상체가 반 이상 드러난 서지혁이 이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며 샤워가운을 붙잡았다. 이미 볼 거 다 봤으니까 내숭 떨지 마. 안돼요……. 왔다 갔다 하는 정신으로 눈도 못 뜨고 가운 자락만 붙잡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서지혁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결국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침대에 던져진 서지혁이 꾸역꾸역 손을 내려 열심히 몸을 가렸다. 하지만 신해량은 가차 없이 그 손을 쳐내고 서지혁에게 속옷을 입혔다. 빠르게 바지와 상의도 입혔는데 서지혁은 내내 이러면 곤란하다는 우는소리만 해댔다. 신해량은 그런 서지혁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폭신하고 무거운 이불의 무게에 안정된 서지혁이 편안한 얼굴로 잠드……나 했는데 갑자기 눈도 못 뜨고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갔어요?"

"안 갔어."

뻗은 손에 시원하고 커다란 손이 잡혔다.

"……가면 안 돼요."

"알겠어."

"……할 말이 많아요."

"기다릴게."

"……저 아직 당신 좋아합니다."

"……알아."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에 서지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몽롱한 기분에 숨을 색색 몰아쉬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인데. 절로 생글거리는 미소가 지어졌다. 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눈을 뜨고 싶었는데 떠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내 행복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당신을 두고 뭘 찾으려고 했던 걸까.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꿈이라면 푹 자고 깨어나서 현실의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사랑해요.

머릿속의 상상인지 입 밖으로 내뱉은 혼잣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중얼거림을 끝으로 깜깜한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서지혁을 빨아들였다. 몽롱했던 정신이 완전히 흐릿해지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서지혁은 두렵지가 않았다.

어떤 꿈을 꾸어도 깨어난 현실에 당신이 있을 테니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의 감각이 멀어지고 중력조차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때, 서지혁의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이미 잠에 든 서지혁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감은 눈과 입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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