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3

겨울 바다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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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구나. 지금 막 꿀잠을 자고 일어난 서지혁의 감상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신해량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호텔방에서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달린 은은한 주황빛 조명만이 신해량을 비추었는데, 뮤지컬이나 연극에 나오는 극적인 연출 같았다. 위에서 내려온 빛으로 인해 오똑한 코에 그림자가 져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다. 책을 읽는 반쯤 내리깐 눈의 속눈썹은 더욱 짙어 보였고 시선에 닿은 페이지를 넘기는 기다란 손가락이 섹시했다. 집중한 모양인지 아직 자신을 향한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신해량은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는데, 어느 순간 눈이 살짝 커졌다. 눈썹을 위로 씰룩 들어 올린 신해량은 이미 읽었던 앞쪽 페이지 몇 장을 넘기더니 다시 읽기 시작했다. 뭐지? 재밌는 내용이라도 있나?

손가락을 살짝 끼워두었던 원래의 페이지로 돌아온 신해량은 다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꽤나 흥미로운 모양인지 책을 훑는 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슨 내용이길래 저런 반응일까. 책을 들고 있는 손 사이로 책표지가 살짝 보였는데 서지혁이 최근 서점에서 산 소설책 중 하나였다. 시집을 먼저 읽느라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책이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요?"

"깼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서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니 그제야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했다. 신해량은 망설임 없이 읽던 책을 덮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바로 침대로 다가왔다. 몸은 좀 어때? 아까보단 훨씬 낫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의 끝이 갈라지고 바로 쿨럭거리며 기침을 해대서 신해량은 영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쳐다봤다. ……진짜 괜찮은데. 몇 번의 재채기 끝에 서지혁이 변명하듯 말하자 신해량은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대더니 이내 서지혁의 이마에도 가져다 댔다.

"아직 미열이 있어."

"미열이면 고열보다는 낫죠. 저 몇 시간 잤습니까?"

"세 시간."

"예? 아니. 그렇게 오래 잤어요? ……심심하지 않았습니까?"

"책이 재밌던데. 따뜻한 물 좀 마셔. 목이 완전히 맛이 갔군."

세 시간이라니. 으으.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일으켜 앉으니 신해량이 미리 물을 끓여둔 건지 티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냈다. 김이 펄펄 나는 물에 찬물을 섞으며 온도를 내리더니 바로 서지혁에게 건넸다. 뜨거울지도 모르니 천천히 마시라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서지혁이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적당히 따뜻한 물이 병들어 너덜너덜해진 목구멍을 소독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작은 컵을 커다란 양손으로 잡고 마시고 있으니 신해량이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서지혁의 삐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유독 한 곳이 눈에 띄는 모양인지 신해량은 손가락으로 서지혁의 머리카락을 눌러 쓸었다. 하지만 세 시간 동안 베개에 눌려 있었던 자기주장 강한 짧은 머리는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손을 떼면 계속해서 튕겨지듯 삐죽 튀어나왔는데, 신해량은 그게 좀 거슬린 모양이었다. 몇 번을 꾹 누르다가 손을 뗐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은 것인지 결국 포기를 한 신해량이 뚱한 표정으로 서지혁에게 따뜻한 물을 리필해 주었다.

"꿀이 있으면 좋을 텐데."

"방랑자 신세에 꿀은 사치죠. 받은 소고기도 구워 먹을 곳이 없어서 책이랑 바꿔 먹은 판에."

"소고기?"

"예. 수영장 다시 다니고 있는데 회원들끼리 수영 대결 좀 했습니다. 1등 했죠."

"수영장? ……잘 됐네."

"……."

아. 이 죽일 놈의 업보. 또다시 신해량에게 쏟아부은 망언이 떠올랐다. 서지혁의 갈 곳 잃은 동공이 흔들렸다. 애꿎은 컵만 입에 물고 있으니 신해량이 더 줄까? 하고 묻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넋을 놓고 대답하던 서지혁이 컵을 협탁에 내려두고 침대 앞에 서 있는 신해량의 손을 잡았다. 정말 열이 내린 것인지 신해량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살짝 잡아당기니 신해량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괜히 울컥한 서지혁이 입술을 깨물며 신해량의 손을 당겨 침대에 앉게 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뜻대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몸을 살짝 돌려 서지혁을 마주했다.

"……당신 때문이 아니었어요. ……제가 그때,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죄송합니다."

"……."

신해량은 말이 없었다. 용서를 해주겠다거나 괜찮다거나 서지혁을 달래는 위로의 말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서지혁을 탓하거나 냉대하지 않았다.

"……당신한테 해야 하는 말이 너무 많은데, 정리가 잘 안돼요."

"당장은 네 건강이 먼저야."

"……저 병원도 꼬박꼬박 잘 다녔어요. 약도 먹고. ……많이 좋아졌대요. 잘 하고 있다고 했어요."

"응. 잘했어."

신해량은 눈치 보듯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는 서지혁의 머리를 칭찬하듯 쓰다듬었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서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더 누워 있으라며 권유했고 서지혁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앉아 있는 신해량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과 설렘을 느끼며 손만 이불 밖으로 내밀어 다시 신해량의 손을 잡았다. 신해량은 잡은 손을 빼지 않고 서지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명을 등진 탓에 얼굴에 그림자가 졌지만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하게 빛났다. 손과 손이 닿은 틈이 따뜻했다. 몽글몽글한 기분에 서지혁은 저도 모르게 헤실 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신해량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 미소에도 햇빛이 있어."

"어? ……어! 어? 그걸 어떻게……."

순간 놀란 서지혁이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려 하니 신해량이 막듯이 가슴팍을 눌러 다시 눕혔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당신의 미소에는 햇빛이 있어요' 서지혁이 신해량에게 선물했던 노란 튤립의 숨겨진 꽃말이었다. 그건 말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토끼 눈이 된 서지혁이 입을 떡 벌리며 놀라고 있으니 신해량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네가 뻔히 들킬 거짓말을 했잖아."

"아니. 그……. 굳이 따지자면 거짓말은 아닌데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게 더 보편적인 게 맞고……."

"네 마음은 거짓말이라던데."

"……마음은 거짓말한 게 맞긴 하죠."

서지혁이 말끝을 흐리며 이불을 끌어올리려 했는데 침대에 신해량이 앉아있는 탓에 당겨지지 않았다. 쪽팔려서 얼굴이라도 좀 가리려고 했더니 하여간 도와주질 않는다.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신해량이 몸을 살짝 들어 이불을 올려 덮어주었다. 아니. 이러면 또 할 말이 없는데.

"……그럼 파란색 장미 꽃말도 아세요?"

"그래. 네가 말한 건 파란 장미가 개발되기 전 꽃말이잖아."

"……잘 아시네요. ……그걸 다 찾아보셨습니까?"

"넌 그런 거 좋아하잖아. 어떤 단어나 물건에 의미 부여하는 거. 시처럼."

……제가 그랬습니까? 응. 떨떠름한 물음에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괜히 부끄러워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이미 들킨 마음인데 왜 이렇게 숨긴 걸 들킨 것처럼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건지. 이 인간을 너무 오래 안 봐서 그래. 하여간 내성이 안 생긴다니까.

"……파란색 장미 꽃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 '기적'이래요. 이미 아시겠지만. ……당신을 닮았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였는데. ……죄송해요."

"……너도 노란 튤립을 닮았어. 뜻도 잘 어울리고."

"어……. 정말요? 저는 당신 생각하고 고른 건데. 음."

나와 어울린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헛된 사랑'과 같은 원래의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눈치라도 챈 것처럼 서지혁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웃는 게 예쁘다고 했잖아."

"그랬죠……."

하여간 이 인간은 빨간 불도 안 켜고 훅 들어온다니까.

애초에 꽃에 담긴 의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꽃은 그저 꽃일 뿐이고, 뜻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꽃말이 담긴 꽃을 골라 소중한 이에게 선물한다. 그건 말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꽃말을 통해 전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서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줍고도 소중한 마음을 내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전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덮어둔 채 도망쳤다. 그럼에도 신해량은 서지혁이 숨겨둔 카드를 뒤집었고, 진심을 찾아냈다.

"꽃말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전부 당신이네요."

"그런 의미를 붙여준 건 너니까. 나는 그걸 읽을 뿐이지."

"시처럼요?"

"그래."

괜히 울컥한 마음에 서지혁은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런데 노란 튤립은 어떻게 안 겁니까? 그건 인터넷에 검색해도 똑같은 뜻은 안 나오던데."

"네가 방문했던 꽃집에 가서 물어봤어."

"예? 어. 아니. 예? 어떻게 알구요?"

"카드 있었잖아. 뒷면에 상호가 적혀 있길래."

"카드요?"

카드? 무슨 카드를 말하는 거지?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서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해량이 그걸 왜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뚱한 얼굴을 보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카드. 카드……. 카드. ……아! 기억났다. 꽃다발을 포장한 후 남기고 싶은 글귀가 있냐는 플로리스트의 말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던 것이 떠올랐다. 짧은 문장이 깔끔하게 인쇄된 카드를 꽃다발 안에 넣어두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다.

"카드가 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꽃다발엔 카드가 들어있는 거 아닌가? 보통 하고 싶은 말 같은 걸 써서 주잖아."

"……아. 예. 제가 꽃다발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요."

"……."

꽃 많이 받아봐서 좋겠네요. 투덜거리며 말하니 신해량이 눈을 슬쩍 피한다. 저, 저, 저! 열받네! 서지혁이 가자미눈을 뜨고 신해량을 노려봤는데, 신해량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딴청을 피웠다. ……물 마실래? 딴소리하지 마십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니 그제야 다시 서지혁과 시선을 맞춘다.

"……'제 마음을 골라 담았어요. 이번엔 내가 읽어줄게요.' 이렇게 썼던 거 같은데."

"맞아. 그런데 네가 거짓으로 읽어줬잖아. 그래서 내가 찾은 거야."

"그렇네요. 언제나처럼요."

서지혁이 웃으니 그제야 신해량도 미소를 지었다. 저 웃음으로 캄캄한 방 안을 다 밝힐 수 있을 거 같은데. 실없는 생각에 헤실 거리고 있으니 신해량의 표정이 묘해졌다. 왠지 의기양양해 보이는데. 정답을 찾았다 이건가? 왜 귀엽게 저런 표정을 짓지?

"난 네 비밀 다 알아냈어."

"예? 제 비밀이요?"

"그래. 네가 읽던 시도 찾았어. 솔직히 힌트는 도움 안 됐지만 단서를 남기고 갔더군."

"……아니. 예? 무슨 시요? 힌트요?"

뿌듯해 보이는 신해량의 얼굴을 보며 서지혁이 혼란스러워했다. 비밀? 시? 힌트? 단서? 이게 다 무슨 소리지? 크게 아팠더니 바보가 된 건가?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기 어려웠는데 신해량이 눈썹을 씰룩거리더니 더 의미 모를 질문을 했다.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이게 힌트라고 했잖아."

"어……. 아. 아? 아!"

떠올랐다. 계기가 너무 확실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신해량이 대한도에 있을 때 통화를 하며 했던 이야기였다. '무슨 시를 읽고 있었는데?' 피곤할 신해량을 배려해 전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서지혁에게 신해량이 아쉬움을 담아 물었던 질문이었다. '제가 당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서지혁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맞 질문을 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당신을 두고 용기 없이 도망을 쳤는데. 신해량은 여전히 남겨진 것에서 정답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찾은 게 뭔데요?"

"'겨울 바다는 얼지 않는다' 맞지?"

"……어떻게 아셨어요?"

"책을 다른 곳에 꽂아뒀던데."

"예? 어. 아닌데? 제자리에 꽂아뒀던……거 같은데?"

"아니야. 왼쪽으로 한 칸 더 가야 했어."

"아니. 책장에 책이 몇 개인데 꽂아둔 순서도 다 기억을 하세요?"

"그래."

와. 이 인간은 정말……. 경악과 감탄의 그 사이쯤의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신해량이 웃는다. 저, 저. 하여간 미친 인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영 다른 곳에 꽂아둔 것도 아니고 바로 근처에 꽂아두었는데도 눈치를 채다니.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너무너무 무섭다 정말.

"네가 내 생일 선물로 준 책이잖아."

"……그렇죠. 당신 만나고 첫 생일이었는데. 기억이 나세요?"

"나지."

서지혁이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병아리 군인시절, 처음으로 맞이하는 신해량의 생일에 그에게 시집을 선물했었다. 당시 그들의 부대에서는 생일 선물이 뇌물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물을 2만원 이내의 익명 선물만 전달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래서 대부분 PX에서 간식이나 생필품을 선물했는데, 집을 나와 2만원의 돈도 부담이 되었던 어린 서지혁은 가지고 있던 시집을 선물했다. 선물은 모두 한 박스에 포장된 상태로 신해량에게 전달되었다.

"그땐 저도 당신을 잘 몰랐잖아요. 지나가면서 몇 번 보고 이름만 아는 정도였고. ……저는 돈도 없었고. 당신 인기가 워낙 하늘을 찌르다 보니 슬쩍 빠지기도 눈치 보여서 그냥 읽던 책이나 보낸 거였거든요."

"네가 눈치를 봤다고?"

"거. 저도 그땐 어렸잖습니까. 완전 아기였죠. 병아리가 따로 없었다구요. 그래도 다른 놈들 생일엔 그냥 모른 척 넘어갔습니다."

"잘했어."

신해량이 칭찬하듯 잡은 손을 토닥였다. 그에 웃음이 터진 서지혁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곤 영 인물이 없긴 했죠. 그 말에는 신해량이 웃었다.

"그 후엔 저도 뭐 잊고 지냈죠. 그러다가 시간 좀 지나고 당신 작전 대장 달고 같이 임무 들어갔잖아요. 그때 막사에서 당신이 그 책 들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라면 받침대로라도 쓰라고 준 건데 읽고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래. 그래서 네가 준 거 눈치챘어. 시집에 관심 가지는 놈은 너밖에 없었거든."

"하하하. 그렇죠. 제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마음에 드는 시가 있냐고 물었지."

"예. 그리고 당신이 그 시 이야기했잖습니까. '겨울 바다는 얼지 않는다' ……저는 솔직히 그때 당신이 구라 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 시집 몇 번을 읽었는데 그 제목은 처음 들어봤거든요. 그냥 기억나는 거 없는데 쪽팔리기 싫어서 아무 말이나 하는 줄 알았어요."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그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거군."

"예. 그렇다고 거기서 당신 책 빼앗아서 그런 시가 있는지 확인 좀 해보자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딸랑딸랑하면서 넘어갔죠. 그리고 또 그렇게 잊고 지냈거든요. 임무도 끝나고 휴가 받아서 오랜만에 서점이나 갔는데, 그 시집이 딱 있는 겁니다. 반가워서 훑어보다가 맨 앞장 펼쳐서 차례를 봤는데. 와. 뒤에서 세 번째였나? 그 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 인간이 구라를 친 건 아니구나. 그때야 깨닫고 얼마나 안목이 없길래 내가 기억도 안 나는 시를 골랐나 하고 봤죠."

"뭐? 시집 선물한 건 너면서 내 안목이 없어?"

"아니. 들어보십쇼. 제가 그땐 성격이 좀 꼬여 있었습니다. 아시잖아요. 힘든 시기였던 거."

눈썹을 내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지혁을 황당하게 보던 신해량이 더 지껄여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시 내용도 기억하세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침묵했다. 생각을 하고 있구나. 서지혁은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서 생각에 잠겼던 신해량이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겨울 바다는 얼지 않는다.

매서운 바다는 얼지 않는다
그 위에 끝없는 곡선을 그리는 파도들은
드넓은 자유를 향해 흘러간다

거센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도
바다는 눈물을 얼리지 않는다
젖은 모래 위에 흘러내린 눈물은
씨앗이 되어 새로운 삶의 싹을 틔운다

푸른 바다는 얼지 않는다
얼어붙지 않는 물속의 생명은
어둠 속을 빛내는 무수한 등불이 되어
청량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겨울의 바다는 얼지 않는다
끝없이 순환되는 삶의 흐름 속에
자유롭고 따스한 손길을 더해
피어난 아름다움은 언제나 영원하다

담담하게 시를 읊은 신해량이 서지혁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외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인간은 날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구나. 말을 잃은 서지혁이 먹먹한 숨을 내뱉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 그만 반하게 하십쇼. 여기서 더 좋아지면 저도 곤란합니다."

"곤란할 게 뭐가 있지?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건가?"

"하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요. ……좋더라구요. 제가 왜 기억을 못 했는지 모를 정도로. 왜 몰랐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좋아서 그 자리에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읽고 또 읽고. 구절 하나하나 또 음미하면서 읽었습니다. 곱씹을수록 좋더라구요."

"그랬어?"

"예. 그리고 시집 전체를 다시 읽어 봤는데 그 시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구요. 웃기죠? 기억도 못 했던 시였는데 의식하고 보니 좋아진 게. ……당신이라면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게 해줄 것 같았어요. 덮어두고 지나간 페이지도 넘겨보게 만드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시처럼 당신을 의식하게 되었어요."

"……."

신해량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넘실대는 파도처럼 느껴졌다. 서지혁은 자신의 바다에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시원한 뺨이 닿았다. 블루홀 같은 까만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길을 잃더라도 몇 번이고 빠져들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

"……그래도 참을게요. 당신한테 독감 옮기긴 싫으니까."

손에 닿은 입꼬리와 볼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아니. 뭐가 '그래.'입니까? 그럴 분위기 아니잖아요. '그딴 거 신경 안 써.'하면서 어? 키스해 줄 타이밍 아니에요? 뭡니까? 몸 사리는 거예요?"

"그냥 감기면 그러겠는데, 독감은 나도 싫어."

"허. 참나. 저예요? 독감이에요?"

"네가 독감이잖아."

"잉잉잉! 너무해."

서지혁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우는척했다. 그럼에도 신해량은 단호했다. 찡찡거리는 서지혁의 이마에 손등을 대고 열을 체크한 신해량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건가 하고 지켜보고 있으니 신해량은 서지혁이 자는 사이 챙겨둔 짐과 가방을 손에 들었다. 열은 많이 내렸는데, 걸을 수 있겠어? 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서지혁이 협탁에 놓아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신해량은 침대에 앉아있는 서지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서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가자. 집으로."

"……예. 갑시다. 우리 집으로."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독감이라는 건 아주 좆같은 거구나. 신해량과의 재회 후 사랑의 힘으로 하루 만에 독감이 낫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꾸준히 챙겨주는 약을 먹고 질려 죽을 것 같은 죽도 먹고 좋은 곳에서 쉬고 있으니 몸은 이전보다 편했지만 이 망할 놈의 독감은 거의 일주일째 서지혁에서 떨어질 생각도 안 했다. 그 덕분에 바로 코앞에 사랑스러운 연인이 있어도 입을 맞출 수도 없었다.

신해량의 집은 서지혁이 떠나기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서지혁의 방도 청소만 해둔 것인지 두고 간 물건들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에만 처박혀서 끙끙 앓고 있느라 다른 곳은 살펴보지 못했지만 비슷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누워있는 것뿐이었지만 그마저도 기꺼웠다. 호텔방에서는 느끼지 못한 익숙함이나 포근함을 즐겼다.

서지혁이 독감을 앓는 며칠 동안 신해량은 그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침대에 종일 누워있는 서지혁의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따뜻한 꿀물을 수시로 가져다주었다. 어디서 산 것인지 원래 있었던 것인지 모를 체온계로 열도 자주 체크했다. 영 가버렸던 목소리는 돌아왔고 기침도 많이 멎었지만 체온이 계속 높았다. 해열제를 먹어 열을 내려도 미열이 계속 남아있었다.

매 끼니는 죽이었는데, 질리지 말라고 신해량은 온갖 종류의 죽을 다 시켜주었다. 다른 걸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소화가 잘 되는 걸 먹어야 탈이 없다나 뭐라나. 미열과 근육통을 제외하곤 아픈 곳도 딱히 없었지만 눈썹을 내리고 저 아픈데요……. 하고 엄살을 부렸더니 신해량이 죽을 떠먹여줬다. 입을 크게 벌려 받아먹어도 종종 입가에 죽이 묻었는데, 신해량이 다정하게 손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죽 맛은 모르겠고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긴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이 가뿐한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이 미친 독감이 떨어진 것이다. 서지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부터 하고 협탁 위에 놓인 체온계로 열을 체크했다. 서지혁을 내내 괴롭히던 미열이 드디어 떠나갔다. 와. 미친. 드디어. 인간다운 삶의 시작이구나!

서지혁이 기뻐하며 방을 나섰는데 신해량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거실이 조용했다. 일단 좀 씻어야지. 서지혁은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익숙한 바디워시와 샴푸 냄새가 반가웠다. 샤워를 끝낸 후 양치도 꼼꼼히 하고 치실도 사용했다. 오랜만에 진하게 뽀뽀할 생각에 설레서 양치도 한 번 더 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려다 그냥 수건으로 물기만 털었다. 머리는 말려달라고 해야지. 히히. 히죽거리며 거실로 나왔더니 그 사이 신해량이 부엌에서 아침밥을 하고 있었다. 서지혁은 기쁜 마음으로 신해량에게 날듯이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저 다 나았습니다!"

"그래?"

"예!"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말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좋은 서지혁은 낄낄 웃으며 신해량을 향해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입술에 닿는 것은 없었다. 이 인간이 또 시작이네. 하여간 말로 안 하면 뭐든 들어주질 않는구나. 다시 눈을 슬쩍 떠보니 신해량이 무표정하게 서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뽀뽀해 주세요. 저 이제 다 나았어요."

올라가는 입꼬리가 주체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입술을 쭉 내밀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볼을 감싸 잡았다. 따뜻하다. 그리 생각하고 눈을 감았는데 볼을 잡은 손이 서지혁의 얼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 부끄러운 건가. 여전히 서지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점점 웃음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이건 너무 거친 거 아니야? 왜 그러냐고 말을 하려는 순간 신해량의 손이 서지혁의 볼을 세게 꼬집었고, 순간 얼굴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 서지혁이 악! 소리를 질렀다.

"미쳤습니까?! 아파요! 남자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누가 네 남자친구지?"

"예?"

싸늘한 물음에 서지혁이 아픈 볼을 잡고 눈만 꿈뻑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서로 마음도 확인한 마당에 아직도 이름 없는 애매한 관계란 말인가? 손도 잡고 애틋하게 달달한 말도 주고받았잖아! 애들도 아니고 사귀자고 해야 사귀는 거냐고. 서지혁의 억울한 얼굴에도 신해량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기분 안 좋으세요?"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놓고 도망간 주제에 뭐? 남자친구? 양심도 없군."

"……예?"

"자기 마음대로 그만두니 마니 하더니 다시 시작하는 것도 네 마음인가?"

"……자, 잠시만요. 아니. 그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니었어요? 당신이 저 용서……."

"용서?"

"……한다거나 괜찮다는 말은. ……안 하긴 했네요. 예. 그렇네. 생각해 보니."

어. 시발. 그러고 보니 그렇네? 사과는 했지만 받아준다곤 안 했군. 그러고 보니 그날에 대한 설명도 아직 제대로 못해줬다. 하도 다정하게 굴길래 다 해결된 줄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내가 아파서 잘해준 거였나. 이 미친 강강약약 태도에 정신이 어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플 때 다 쏟아내고 용서를 받았어야 했는데. 아니. 용서를 바라는 것도 양심 없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우리 좋았잖아! 미치겠네! 사람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이렇게 바꾼다고?

신해량의 눈빛을 보니 당장이라도 서지혁을 죽일 기세였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었는데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서지혁의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아니. 시발.

"……어어. 저 아직 덜 나았나 봐요. 머리가 어지럽고.. 켁켁! 기침도 나고.. 목도 다시 맛이 간 거 같죠?"

"……."

사냥하기 직전의 맹수의 눈빛이다. 제발. 좀! 사람이 좀 일관성이 있어라! 아니. 일관성 있는 건가? 헷갈리네. 거짓말은 기가 막히게 눈치채는 남자 앞에서 꾀병이 통할 리가 없었다.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서지혁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해봐."

그렇게 바다로 돌아온 물개의 목숨을 건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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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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