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성장통2

여름 제철 청게 젹량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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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서지혁은 체육 특기생이 아니었다. 예체능 계열로 유명한 학교이긴 했지만 서지혁은 100% 성적으로 입학한 일반학생이었다. 그럼에도 서지혁은 타고난 체격과 운동신경 덕분에 운동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여럿 받았다. 특히 큰 키가 유리한 농구부와 배구부는 점심시간마다 서지혁을 찾아와 간식을 주거나 함께 게임을 하자며 꼬시기도 했다. 서지혁 또한 운동을 좋아했기에 여러 동아리를 돌며 분위기를 파악하거나 훈련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를 본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 서지혁은 점심시간에 야구부의 꼬드김에 넘어가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유심히 보던 서지혁은 타이밍 좋게 배트를 휘둘렀고, 깡-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튀어 오른 공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틈에 서지혁은 빠른 달리기로 1루를 찍고 2루 베이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전속력으로 달리던 외야수가 바닥을 구르며 공을 잡았고, 서지혁의 안타는 무효가 돼 아웃 처리가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아쉽지만 잘했다며 서지혁을 격려했지만, 서지혁은 모두를 제치고 심판을 맡고 있던 야구부 주장에게 항의했다. '공이 땅에 닿았는데요.' 서지혁의 당당한 항의에 주변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야구부 주장 또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서지혁이 자존심 때문에 괜한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지혁은 곧바로 공을 잡았던 외야수에게 달려갔다.

서지혁에 의해 끌려온 외야수는 우물쭈물하며 방금 전 일을 실토했다. '땅에 한 번 튀고 잡은 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야구부 주장을 포함한 모든 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워낙 멀기도 했고 공이 몸에 거의 가려졌기에, 공을 잡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중에 뜬 공을 잡은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지혁은 그대로 야구 배트를 반납했고 자신을 붙잡는 야구부 부원들을 뒤로하고 운동장을 떠났다. 그때 서지혁의 앞에 등장한 게 신해량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당연하다는 듯 소리 없이 따라와서 한다는 말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너 시력이 어떻게 돼?'

서지혁은 눈이 좋았다. 평소 전자기기를 자주 사용하지 않은 덕도 있었지만 타고나길 시력이 좋았다. 남들 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는 건 대체로 편하긴 했지만, 그다지 자랑하거나 쓸만한 재능은 아니었다. 서지혁은 떨떠름하게 자신의 시력을 알려주었고 신해량은 그에 또 짧게 한마디 했다.

'어디 쏴 죽이고 싶은 놈 없어?'

웃음기 하나 없는 살벌한 질문에 서지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신해량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총을 잡아본 서지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사격부에 입부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엉켜 걷던 서지혁과 신해량은 드디어 마주한 숙소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섰다. 신해량은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며 서지혁을 먼저 숙소로 들여보냈다. 홀로 숙소에 들어온 서지혁은 곧바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뛰어 들어갔다.

시원한 물로 몸을 씻으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몸을 닦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온 서지혁은 옷 정리를 하고 숙소 건물 내에 있는 강당으로 향했다. 로드워크도 날려 먹은 마당에 그저 편하게 쉴 수 없었던 서지혁은 먼저 에어컨을 켜두고 매트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감독이나 코치도 없이 혼자 사격장에 갈 순 없었기에 서지혁은 고민하다 강당에서라도 못다 한 로드워크를 하기로 결심했다.

서지혁은 강당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넓게 돌았다. 두 바퀴 정도는 가볍게 달렸지만 서서히 다시 뼈관절이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을 참고 달리던 서지혁은 결국 매트 위로 넘어졌고 그 상태로 누워 숨을 골랐다. 이 놈의 망할 성장통은 도대체 언제 사라지는 걸까. 억울한 마음에 서지혁은 몸을 일으켜 주먹으로 무릎을 망치질했다. 제발! 그만 좀! 아프라고! 신경질적으로 무릎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서지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지 마."

"……아."

서지혁이 주먹질을 멈추자 신해량은 손을 놓고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샤워를 하고 온 모양인지 마주한 얼굴은 열감이 가신 뽀얀 낯이었다. 신해량은 손에 든 것들을 바닥에 내려 놓았는데, 살펴보니 스포츠 테이프와 파스 그리고 뜬금없는 젤리였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반쯤 접힌 다리를 붙잡고 오른쪽 다리를 쭉 펴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조종당한 서지혁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신해량은 서지혁의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손으로 마사지하듯 주무르기 시작했다. 서지혁이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니 신해량이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또 아파?"

"……예. 조금 뛰었더니."

"쉬라고 했는데 왜 또 강당에 왔어."

"그……. 죄송합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특별하게 주어진 휴식 시간을 제대로 낭비하며 만끽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조급한 서지혁은 쉬는 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서지혁의 기죽은 사과에 신해량은 픽 웃었다. ……왜 웃는 거지? 무릎에 열이 오른 탓인지 신해량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눈치를 보며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고 있으니 신해량의 손이 서지혁의 무릎 안쪽을 눌렀다. 그의 손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서지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왠지 모를 민망한 기분에 제 무릎을 만지는 커다란 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도 쉴 땐 쉬어. 넌 기본 체력이 좋아서 훈련 며칠 빼먹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아. 그동안 쌓아온 게 있잖아."

"……예. 감사합니다."

"약하고 아플 때 무리하면 더 다치기 쉬워. 너 사격 올해만 할 거 아니잖아. 더 길고 오래 봐야지."

"……예. 주장 말이 맞습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서지혁을 보며 신해량이 작게 웃었다. 신해량은 어정쩡하게 접혀 있던 서지혁의 왼쪽 다리도 쭉 펴게 하고 무릎을 마사지했다. 제 다리 사이에 앉아 무릎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신해량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지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제어하기 위해 애썼다. 집중하지 않으려 해도 신해량의 손이 닿는 모든 곳이 신경 쓰였다. 괜히 힘을 주다 움찔거리고 무릎 뒤가 간지러워 또 몸을 떨었다. 신해량의 손길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았다. 서지혁은 자신의 얼굴이나 귀가 붉어진 것은 아닐지 걱정이 돼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해량의 마사지는 계속되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양쪽 무릎을 붙잡고 꾹꾹 누르거나 당기며 주변 근육을 풀어주었다. 길쭉한 손가락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서지혁의 근육을 매만졌고, 그럴 때마다 서지혁은 숨을 몇 초 참았다가 천천히 공기를 내보냈다. 온 신경이 신해량의 손에 쏠린 탓에 성장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릎은 충분히 풀어준 것인지 신해량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허벅지까지 올라간 반바지 안쪽까지 신해량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후배의 허벅지 근육까지 풀어주는 친절에 서지혁은 속으로 경악하며 올라간 바지를 아래로 내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허벅지는 괜찮아요!"

"그래?"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의 손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시원하고 커다란 손은 서지혁의 무릎을 지나 종아리까지 내려와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좀 시원해? 예, 엄청요. 신해량의 물음에 서지혁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에 신해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표정이 꽤 장난스러워 보였다.

"맨날 까불거리더니 조용하니까 이상해."

"어……. 저 말입니까?"

"그래. 너."

"제가 언제 맨날 까불거렸다고 그러세요?"

"그렇게 까불거렸잖아."

신해량이 고개를 들어 웃었고, 그를 마주한 서지혁이 떨떠름하게 눈만 깜빡였다. ……자기가 이렇게 할 말이 없게 만들면서. 멋쩍은 서지혁이 뒷머리를 긁었고, 그 사이 신해량은 바닥에 내려둔 스포츠 테이프를 손에 들었다. 신해량은 스포츠 테이프를 적당한 길이로 끊어 자르더니 서지혁의 무릎뼈 주변을 둥글게 감싸며 테이핑했다. 네 번 정도 나눠 끊은 테이프가 양쪽 무릎에 동일한 모양으로 붙었다.

"오……. 이렇게 하면 뭐가 더 좋습니까?"

"피부랑 근육 사이에 공간이 생겨서 혈액순환이 잘 돼. 통증이 좀 완화될 거야. 근육도 더 편할 거고."

"주장도 예전에 이렇게 했어요?"

"응. 나도 그때 당시에 선배한테 배운 거야."

"어떤 선배요?"

"넌 몰라. 나 1학년 때니까."

"아 맞다.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서지혁에게 신해량은 스포츠 테이프와 파스를 건넸다. 잘 기억해서 너도 나중에 써먹어. 옙. 이건 밤에 아프면 붙이고. 감사합니다. 서지혁이 고개를 꾸벅이며 테이프와 파스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신해량은 마지막으로 남은 젤리를 손에 들었다. 그가 군것질을 하는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었기에, 서지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젤리는 뭡니까?"

"그냥 눈에 보이길래. 너 이거 좋아하잖아."

"……제가요?"

"응."

짧게 대답한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젤리 봉지를 건넸다. 떨떠름하게 젤리를 건네받은 서지혁은 자연스럽게 비닐을 뜯어 곰 모양 젤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말랑한 포도 맛 젤리였다. 맛있긴 한데, 내가 이걸 좋아했었나? 서지혁이 고민하며 젤리 봉지를 노려보다 주황색 젤리 하나를 꺼내 신해량에게 건넸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저 보다 주장이 더 잘 아는 거 같은데요."

"그래?"

"예. 아까 음료수도 그렇고 젤리도 그렇고."

"넌 표정이 다 보여서 그래."

"……그렇습니까."

신해량이 건네받은 젤리를 입에 넣었고, 서지혁은 마주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 보이면 안 되는데.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이지? 실내의 공기는 시원해졌지만 몸은 더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괜히 무릎이 간지럽고 손에 땀이 고였다. 의식하지 말자. 티를 내면 안 돼. 서지혁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손을 바지에 대충 닦았다. 넘어지면서 쓸린 살갗이 따가웠다.

한참을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서지혁을 향해 신해량이 손을 내밀었다. 제 앞에 펼쳐진 커다란 손을 보던 서지혁은 또다시 숨을 참았다. ……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서지혁은 긴장을 숨기며 제 오른손 손등을 신해량의 손바닥 위에 가져다 댔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신해량의 손이 서지혁의 손을 감싸 잡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서지혁은 애써 태연한척하며 잡힌 손을 떨지 않으려 집중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해량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서지혁의 까진 손바닥에 펴 발랐다. 따끔따끔했다.

"총 쏘는 놈이 손을 너무 막 쓰는 거 같던데."

"……아니. 그. 뭐 어쩔 수 없었잖아요. 손 안 짚고 넘어질 수도 없고."

"성장통은 성장이 끝나면 멈추지만 부상은 끝이 없어. 작은 것부터 신경 써야 해. 이렇게 다치면 약도 바르고. 아프면 병원도 가고."

"햐. 혼자 자빠진 것도 서러운데 잔소리까지. 서럽다. 서러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하하하! 서지혁이 크게 웃었다. 작게 따라 웃은 신해량은 서지혁의 왼손 손바닥에도 연고를 정성스레 펴 발라주었다. 신해량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간지러웠다. 계속해서 신해량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서지혁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신해량의 말처럼 서지혁이 조금 더 자랐기 때문인지, 앉아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둘의 눈높이는 언뜻 비슷해 보였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다 자라면 제가 주장 보다 더 클지도 몰라요."

"그래?"

도발은 먹히지 않은 모양인지 신해량의 반응은 미미했다. 그는 잡고 있던 서지혁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펼쳐진 큰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해량은 자신의 손을 서지혁의 손바닥에 맞춰 마주 댔다. 신해량의 손가락 위로 서지혁의 손가락이 조금 더 솟아 있었다. 맞닿은 손바닥이 떨렸다.

"그렇겠네."

짧게 닿았던 신해량의 손이 거둬졌다. 서지혁은 숨을 참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을 열면 참았던 말들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서지혁은 한참 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로드워크를 마친 부원들이 녹초가 되어 숙소로 복귀했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강당에 온 강아영은 신해량에게 로드워크 1등을 했다며 자랑했다. 이후 부원들은 저녁 식사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졌고, 곧바로 저녁 훈련을 위해 숙소와 10분 거리에 있는 사격장으로 향했다.

신해량이 해준 테이핑 덕분인지 성장통은 잠시 멎었지만 과녁 위 탄환 자국은 여전히 중구난방이었다. 서지혁이 한숨을 내쉬며 엉망인 과녁을 노려보고 있으니 감독이 다가와 서지혁을 격려했다. 평소 성실하고 실력이 워낙 뛰어났던 덕분인지 감독이나 코치는 서지혁을 나무라지 않고 잠깐의 슬럼프로 여기며 그를 다독였다. 서지혁은 그런 배려가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신해량의 말처럼 정말 성장이 끝나면 다시 몸에 적응할 수 있을까. 만약 그 후에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기 위해 서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비웠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여태 쌓아온 것들은 배신하지 않을 거야. 서지혁은 의미 없는 총질을 멈추고 뒤쪽의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했다. 신해량이 붙여준 테이프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며 무릎 주위의 근육도 풀어주었다. 자랄 거면 빨리 자라란 말이야. 애꿎은 무릎을 매만지다 문득 고개를 드니 부원들의 결과지를 확인하고 있던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무릎은 괜찮아?

신해량의 움직이는 입술에 집중해 의미를 파악한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량은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띠더니 다시 결과지로 시선을 옮겼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전지훈련의 마지막 날까지도 서지혁의 성장통은 계속되었다. 5일 내내 제대로 된 훈련을 소화하지 못한 서지혁은 스스로가 답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해량과 강아영의 관계를 신경 쓰는 자신이 가장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록 둘의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어딜 가든 붙어 다니며 다정하게 대화를 했다. 종종 강아영은 웃을 때 신해량의 팔이나 어깨를 잡았고, 그 사소한 스킨십은 서지혁의 어린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해량이 자신을 봐줄 때면 눈치도 없이 가슴이 설레 몰래 입 안쪽을 씹었다.

마지막 저녁 훈련을 앞두고 설상가상으로 서지혁은 몸살에 걸렸다. 성장통으로 인한 근육통이 온 몸으로 퍼진 것이다. 상태가 좋지 않은 서지혁은 숙소에 남았고, 불이 꺼진 방에 누워 홀로 끙끙 앓았다. 마지막 훈련까지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몸이 아파서인지 억울한 마음 때문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온 몸에 열이 오르니 에어컨을 틀어둔 숙소 내부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더운 여름에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겨 덮은 서지혁은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눈을 감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서지혁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 사람의 형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서지혁은 잠결에 손을 뻗어 검은 실루엣의 팔을 붙잡았다.

"깼어?"

"예……. 뭐 하세요? 아직 훈련 시간 아닙니까?"

"잠깐 들렀어. 너 많이 아픈 거 같길래. 일어났으면 약 먹어."

"약이요?"

잠이 덜 깬 서지혁이 멍청하게 묻자 신해량이 예고도 없이 방의 불을 켰다. 어둠에 적응한 눈에 갑작스럽게 빛이 들어오자 서지혁의 얼굴이 절로 꾸깃꾸깃해졌다. 오만상 인상을 쓴 얼굴을 마주한 신해량이 작게 웃으며 서지혁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다. 서지혁이 이미 늦었다고 투덜거리니 신해량이 다시 손을 거뒀다.

"진통제야. 편의점에서 사 왔어."

"예에.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킨 서지혁에게 신해량이 물과 약을 건넸다. 진통제 하나를 꺼내 물과 함께 삼킨 서지혁이 멍한 얼굴로 신해량을 바라봤다. 침대 앞에 서 있는 신해량은 뜬금없이 서지혁에게 빵 하나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봤더니 처음 보는 캐릭터가 그려진 초코롤빵이었다.

"이건 또 뭔데요?"

"아까 저녁도 제대로 안 먹은 거 같길래. ……그거 요즘 유행하는 거 아니야?"

"이거 말이에요? 처음 보는데……."

눈을 비빈 서지혁이 빵 봉지를 노려봤다. 포x몬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이 최근에 유행하긴 했지만 신해량이 사 온 빵 봉지에 있는 캐릭터는 아무리 봐도 포x몬은 아니었다. 웬 낯선 동물 캐릭터를 가만히 바라보던 서지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짭 같은데요."

"짭?"

"유행한 건 포x몬인데 이건 처음 봐요."

"그래?"

신해량의 시선도 빵 봉지를 향했다.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표정에 서지혁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서지혁은 낄낄거리며 비닐을 벗겨내 빵과 포장된 스티커를 꺼냈다. 초코롤빵 하나를 한입에 구겨 넣은 서지혁은 종이 포장을 찢어 스티커를 꺼냈다. 누가 봐도 어설프게 생긴 바보 같은 갈색 강아지 캐릭터가 나왔다. 서지혁은 또 한 번 웃으며 신해량에게 스티커를 보여주었다.

"……이건 포x몬이 아니야?"

"아니죠. 절대 아니죠."

빵을 우물거리며 삼킨 서지혁이 뚱한 신해량의 표정을 보며 소리 내 웃었다. 포x몬도 잘 모르면서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입니까? 실망한 건 아니야. 실망한 거 같은데요. 서지혁이 낄낄거리며 신해량을 놀렸다.

"그냥 유행한다니까 너도 좋아할까 봐 사본 거야.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라고."

"전 포x몬 별로 관심 없어요. 빵은 맛있네요. 기분도 나아졌구요."

"그럼 됐어. ……스티커는 너 닮았네."

"예? 이게 어딜 봐서 절 닮았어요? 완전 바보 같구만."

"그게 닮은 건데."

서지혁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 바보 같은 게 나랑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서지혁은 작은 스티커를 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봐도 닮은 부분이 없는데. 서지혁이 스티커와 눈싸움을 하든 말든 신해량은 서지혁의 빈 무릎을 보고 베개 옆에 놓인 파스를 집었다. 이제 겨우 한 장 남은 파스를 꺼내든 신해량은 침대에 앉아 있는 서지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신해량의 행동에 서지혁이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하세요? 갑자기?"

"앉아봐. 파스 붙여줄게."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신해량은 안절부절못하는 서지혁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다시 그를 침대에 앉혔다. 서지혁은 마음이 불편해 죽을 거 같았다. 신해량은 위계질서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았지만 원래 체육계에서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동경하는 선배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태연하게 파스를 붙여주고 있다니. 괜히 죄를 짓는 기분에 서지혁은 애꿎은 이불만 구겨 잡았다.

걸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무릎뼈 주위에 파스를 잘라 붙여준 신해량이 고개를 들어 서지혁을 올려다보았다. 동아리 부원 중 가장 키가 큰 신해량은 모두를 내려다 보았는데, 서지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신해량의 올려다보는 시선은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치켜 올려 뜬 신해량의 눈 위의 쌍꺼풀이 더욱 도드라졌다. 위에서 비추는 빛에 의해 속눈썹의 그림자도 유독 길어 보였다. 자신을 향하는 까맣고 맑은 눈동자에 서지혁은 눈을 떼지 못했다.

"좀 더 자. 난 가볼게."

"잠시만요."

신해량이 일어나 서자 이번엔 서지혁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서지혁은 다급하게 신해량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온도를 느끼며 서지혁은 손을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해량이 침대에 앉아 있는 서지혁을 내려다 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표정이었다. 서지혁은 허둥거리며 손에 든 스티커를 떼어내 신해량의 손등에 붙였다. 바보 같은 갈색 강아지 스티커가 신해량의 손등에 찰싹 붙어 웃고 있었다. 서지혁이 손을 놓아주자 신해량은 자신의 손등에 붙은 스티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야?"

"빵은 제가 먹었으니까 스티커는 선배 줄게요."

"포x몬이 아니라서 나한테 버리는 게 아니고?"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서지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신해량이 웃으며 응징하듯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신해량은 방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고, 서지혁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짧게 손을 흔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 다시 혼자 남은 서지혁은 무릎을 끌어당겨 안았다. 시원한 파스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신해량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꾸만 서지혁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신해량은 꼭 서지혁에게 흔적을 하나씩 남겼다. 그 흔적은 살갗에 박히는 총알 같은 게 아닌, 고작 붙였다 떼어낼 수 있는 스티커 같은 거였기에 더욱 소중했다. 그가 남긴 것들은 모두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너무 소중해 어느 하나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사준 음료수는 내용물이 비워진 뒤 분리수거 되었고, 그가 붙여준 무릎의 테이프는 다음날 샤워를 할 때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파스조차 무릎에 붙여진 탓에 간직할 수 없게 되었다. 서지혁은 하나 남은 빵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시원해진 제 무릎을 주물렀다. 내일 떼어낼 수밖에 없겠지. 이왕 줄 거라면 내 손으로 버리거나 떼어내지 않아도 되는 거면 좋겠는데……. 어린 바람이었다.

서지혁은 자신이 신해량에게 남긴 하찮은 흔적을 생각했다.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당신도 내 생각을 해주기를. 아주 거슬려 신경이 쓰이면 좋겠다가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바랐다.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나를 떠올려주었으면…….

심장이 따끔거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떠올리며 서지혁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아플 거라면 신해량 보다 조금이라도 더 커지면 좋을 텐데. 그 시선을 오롯이 혼자 독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치한 상상을 하며 서지혁은 밀려오는 약 기운에 다시 눈을 감았다.


전지훈련 일정이 끝나고 사격부 부원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짐을 챙겼다. 서지혁은 일어나자마자 진통제를 먹고 없는 정신으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다. 부원들은 다 같이 식당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고 드디어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힘든 일정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부원들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좀 더 자겠다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서지혁은 마음이 조급했다. 운동 부원들은 방학 때에도 매일 훈련이 필수였다. 다만 전지훈련이 끝나면 3일간의 휴가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동안은 훈련 없이 진정한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오늘 이후 3일 동안은 개인적인 약속을 잡지 않는 이상 신해량을 볼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함께 휴가를 보낼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신해량이라면 이미 휴가 일정도 꽉 차 있을 게 뻔했기에 오늘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3일 후에나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오늘따라 신해량과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다.

숙소는 학년별로 나눠 썼기에 짐을 싸며 신해량과 마주칠 일도 없었고, 식당에서도 3학년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신해량의 뒷모습만 멀리서 본 게 다였다. 그 외에도 주장인 신해량은 감독과 함께 이번 전지훈련의 성과나 부원들의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그를 방해할 수는 없어 멀리서 잠시 지켜만 보던 서지혁은 결국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신해량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탑승 인원에 비해 버스 좌석 수가 여유 있었기에 대부분의 부원들은 짐을 옆자리에 두고 혼자 편히 앉거나, 친한 부원끼리 같이 앉았다. 서지혁 또한 조용히 가고 싶었기 때문에 옆자리에 편의점에서 사 온 빵과 음료를 올려두고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신해량은 올 때처럼 강아영과 같이 앉겠지. 별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지혁은 신해량이 버스를 타기 전에 눈을 감고 잡념을 떨치려 노력했다. 아쉽지만 감사 인사는 톡으로 해야겠네.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데 머리를 기대고 있던 창문에 똑똑- 소리가 들렸다. 머리로 느껴진 진동에 서지혁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멍하게 창문을 노려보고 있자 이번엔 위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앉아도 돼?"

깜짝 놀란 서지혁이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올려다보았다. 신해량이 서지혁의 옆자리 의자에 팔을 올리고 서 있었다.

"어어……. 예? 예!"

서지혁이 허둥지둥 대답하니 신해량이 의자에 놓인 빵과 음료를 손에 들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 반사적으로 목을 쭉 빼 버스 안을 둘러보니 강아영은 다른 친한 부원 옆에 앉아 떠들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어……. 약 먹어서 지금은 괜찮아요. 이번에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아직 아픈가 보네. 휴가 땐 푹 쉬어."

"예. 감사합니다."

신해량은 손에 든 빵과 음료를 내려다 보았다. 이전에 신해량이 서지혁에게 사주었던 오렌지 맛 탄산음료와 포x몬빵 짭인 초코롤빵이었다. 피식 웃은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빵과 음료를 건넸고, 서지혁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해량의 손등에 여전히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손등에 붙은 스티커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아직 떼어내지 못한 제 무릎 위 파스를 만지작거렸다. 심장이 고장 난 듯 뛰었다. 무릎도 욱신거리며 열이 올랐다. 오랫동안 붙어 있던 파스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또 성장통이 말썽을 부렸다.

서지혁은 신해량에게 묻고 싶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거냐고. 왜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자판기까지 뛰어가 시원한 음료를 사 왔는지. 나도 몰랐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왜 굳이 직접 테이핑을 해주면서 어떻게든 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는지. 왜 훈련 도중에 번거롭게 약까지 사서 나를 찾아왔는지. 왜 내가 붙여준 스티커를 아직도 떼어내지 않은 건지.

그 이유가 혹시 나와 같은지.

이해되지 않는 의문과 어렴풋한 희망이 점철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참아온 질문들을 쏟아내는 순간, 신해량이 손등에 붙은 스티커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채고 떼어낼 것만 같았다. 그게 무서웠던 서지혁은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삼키며 신해량이 건넨 빵과 음료만 손에 들었다.

그럼에도 피어오른 호기심은 삼켜지지 않아 체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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