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4

30303 by 30

“아, 금이 씨. 가영 씨!”

카페에 들렀다가 몇 달 전에 없어진 메뉴가 아직, 당연하게 남아있는 걸 보고 너무 들떴던 걸까.

갓 나온 빵을 한 아름 끌어안고 지나가는 유금이, 김가영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 박무현은 돌아오는 어색한 반응에 아차 하고 손을 내렸다. 2개월이었지. 주작동에 상주하는 연구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해지기에는 아직일 때였다.

그나마 유금이는 첫날에 빵도 얻어먹었고 치과에서도 제일 먼저 만났고 붙임성도 좋은 데다가 논문 쓰는 것에 지친 사람이라 자주 얘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김가영은……이맘때쯤에는 아직 대화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놀랐겠네. 미안해라.

텀블러를 챙기고 머쓱함에 목 뒤를 주무르며 걷다가 이번에는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늘 그랬듯이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곧장 시선을 맞춰왔다.

“…….”

신해량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 섰던 박무현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향해 발을 뻗었다.

“……?”

보고, 멈췄다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는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에 신해량뿐 아니라 옆에 있던 서지혁의 시선까지 끌려왔다. 말 안 듣는 패드를 퍽퍽 치던 손이 애매하게 손바닥을 들었다.

“치과 선생님 왜 저럽니까? 팀장님 뭐 하셨어요?”

“…….”

뭘 한 건…저쪽인데. 신해량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이쪽을 보지 않고 열심히 멀어지는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를 찾아가서 믿겠다고 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역시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애인이라는 말도 의심하지 않겠다 했고, 같이 상황을 지켜보자고, 협조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왜?


“왜 그러셨습니까?”

또 모르는 척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못하게 아예 치과로 찾아왔다. 환자 하나를 막 돌려보낸 박무현은 구겨진 노을이를 끌어안고 주물주물 풀어주고 있다가 불쑥 등장한 얼굴에 다시 와락 구겨 안고 말았다.

“어어. 그게…….”

고맙게도 자신을 믿어주겠다고 한 건 분명 기억한다. 신해량 입장에선 모르는 사람이 대뜸 방에 쳐들어와서 망상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을 거고, 정신이 이상한 스토커라고 신고해도 할 말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건 그거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지 않나. 둘이 어떻게 친하냐고 물으면 그것 역시 뭐라고 할 말이 없고.

“…….”

박무현을 관찰하던 신해량의 눈길이 그 품에 안긴 고래 인형에 닿았다. 자신이 꿰매주었다는 흔적, 그 옆으로 이어서 간밤에 자신이 몇 바늘 더 꿰매놓은 곳을 보며 나름의 추측을 꺼냈다.

“혹시 저희 비밀연애 중입니까?”

그걸 자신이 먼저 제안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대가 원했다면 따랐을 것이다. 박무현의 연기력이 조금 전 본 바와 같다면 숨기기가 그다지 수월하지 못했을 것 같지만……그거야 자신이 뒤에서 해결하고 다니면 될 일이고.

신해량의 머릿속에 자신이 했을 법한 몇 가지 계획이 스쳐가는 동안 박무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래서라기보다는…….”

좌우로 흔들린 손이 제 몸과 신해량 사이에서 어정쩡한 원을 두어 번 그리며 돌았다.

“여기서 저희는 그런……사이가 아니잖습니까. 괜히 해량 씨, 신 팀장님 이상하게 소문나면 어쩝니까.”

나름대로 설명을 해보았지만 눈앞의 1년 어린, 아직 애인이 되려면 한참 남은 남자는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소문이야 언제든 있었고, 그게 저에게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가? 박무현은 눈을 위로 굴렸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까지 꼬리표로 붙어 다녀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단둘이 있을 때 이거랑 저건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넌지시 말해주던 걸 보면 신경은 쓰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나중에 사귀게 될 텐데, 조금 일찍 소문난다고 별일 있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이번에는 해량 씨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고…….”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목소리가 작게 쪼그라들었다. 달라질 수도 있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내뱉고 나니 덜컥 불안이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 여기서 1년을 다시 보내야 한다면.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서 노을이와 뒤척이며 했던 고민이었다. 엔지니어 나팀 팀장의 치아를 다시 뽑아야 하는 건 좀 힘들겠지만 본인은 모를 테니 그냥 나만 다시 고생하면 되는 거고.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치아들도 아직은 괜찮은 상태일 테니 최대한 살려야겠다. 치실도 더 많이 뿌리고 다니자. 신해량의 주먹에 깨지고 털렸던 앞니, 어금니들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주먹다짐을 했는지 미리 알아둘 걸 그랬네. 그리고, 또…….

그런 긍정적인 변화만 생길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반대로 원래 충치가 없던 사람이 이번에는 사탕을 몇 개 더 먹고 양치도 몇 번 까먹어서 충치가 생길 수도 있지 않나? 신해량의 주먹 각도가 아주 약간 더 틀어져서 전에는 하나만 깨졌던 게 이번에는 세 개나 박살나면? 그냥 서른 넘은 치과의사가 아니라 너랑 사귀는 사이였다고 주장하는 이상하고 나이도 많은 치과의사라서 신해량이 이번엔 연애감정을 못 느낀다면? 게다가 나 지금은 한 살 더 많은 셈…….

“……제가 별로 믿음을 못 드렸나 봅니다.”

쑥쑥 자라는 불안을 싹둑 자르듯 신해량이 끼어들었다. 이상하군요. 한 마디를 툭 던져놓은 신해량은 뭐가 이상하지, 나 뭐 잘못 말했나, 하고 동그랗게 뜨인 눈의 안쪽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듯 고개를 숙여왔다.

“제가 연애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속삭임을 닮았지만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한 말소리가 통역기를 거치지 않고 귀에 바로 들어왔다. 그렇게, 가 아니면 어떻게 하는지……알지. 눈앞의 남자를 직접 보고 듣고 겪어서 익히 알고 있는 장면들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떠올랐다. 이랬던 거나 저랬던 거, 아니면 이렇게 하고 또 저렇게까지 했던…것들.

애써 눈을 깜박여 옆으로 치워낸 기억들 너머에 서 있는 신해량은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약간 올라간 입꼬리쯤은 눈치챌만한 경험이 지금의 박무현에게는 있었다.

저거 지금 장난치는 거다, 무현아. 알잖냐. 눈을 질끈 감은 치과의사는 곧 다음 예약환자가 올 테니 나가달라고 두 손으로 105kg을 꾹꾹 밀어댔다. 두 발 달린 드럼세탁기는 걸려있는 통역기만큼 붉어진 귀를 내려다보며 즐겁게 밀려나 주었다.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신해량은 입가에 걸린 웃음을 숨기지 않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인사를 밀어 넣었다. 나중이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가늠하지 않고 꺼낸 말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

“…….”

그 나중이 누군가의 영구치 하나를 박살 낸 직후가 될 줄은, 참으로 몰랐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치아를 노린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걸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신해량은 얼음처럼 굳어있는 박무현의 얼굴과 뭔가를-아마도, 조금 전 날아간 이빨 조각을-들고 있는 손을 곁눈질하고는 틀어쥐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세자릿수는 족히 나갈 무게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잠깐 좀 보겠습니다.”

쿵 소리에 얼음에서 풀려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박무현은 신해량의 앞을 그대로 지나치고는 바닥에 짐짝처럼 널브러진 몸을 뒤집었다.

입 벌려보세요. 아 하세요. 아. 뭉개진 발음으로 씬해냥 캐새끼를 웅얼거리던 남자는 느닷없이 나타나 제 턱을 붙잡은 사람을 향해 성난 화살을 돌렸다. 넌 또 뭐야? 뭐? 치과? 됐어!

그는 바닥에 떨어질 때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 도망가버렸다. 그 머릿속에서는 캐새끼가 부숴놓은 이빨을 미친 치과의사가 드릴로 완전히 조져버리는 무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힘없이 나동그라진 치과의사는 드릴을 들고 광기의 추격전을 벌이는 대신 놓친 조각을 찾아 주위를 더듬거릴 뿐이었다.

“…….”

다가온 신해량이 복도에 엎드린 박무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박무현은 마중 나온 손바닥 위에 자연스럽게 막 주운 조그마한 파편을 올려주었다.

“……?”

“? ……아.”

이때쯤의 신해량이라면 당연히 뭔가를 달라는 뜻일 줄 알았다. 아니었구나. 박무현은 당신과 내가 사귀는 사이라는 말을 했을 때보다 더 황당해진 신해량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얼른 다시 거둬들였다. 대신 그러고도 계속 기다리는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일어났다.

엉덩이와 무릎의 먼지를 툭툭 털어낸 박무현은 유리구두 대신 치아 조각만 남겨두고 신데렐라처럼 사라져버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누굽니까?”

“모릅니다.”

“…….”

“……채굴팀인 건 알지만 이름은 모릅니다. 꺼내지는 않았지만 왼쪽 바지 주머니에 폴딩 나이프를 소지하고 있고 왼손잡이에 억양은 미국 남부 쪽이라는 것 정도만 파악했습니다.”

“……그런가요.”

작게 한숨을 쉰 박무현이 아직 놓지 않은 신해량의 손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늦게 물어서 미안합니다. 다친 데는요?”

“없습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돌아온 즉답에 박무현은 말없이 맞잡은 손을 뒤집었다. 쇳덩이처럼 단단한 손이지만 피부까지 철판은 아닌지라, 손등이며 손가락 관절에 붉게 긁힌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는…….”

“네, 네. 침 바르면 낫는다고요.”

이미 들어본 적 있다는 듯이 뒷말을 가로챈 박무현이 잡은 손 그대로 신해량을 뒤에 매달고 걷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정도 생채기조차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당신 발소리에 멈칫하느라 그랬다는 말은, 도저히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대로 딥블루로 직행해서 챙겨온 치아 파편부터 따로 보관해두고, 상담실 조그만 의자에 앉아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신해량은 계속 박무현을 보고 있었으니, 박무현이 눈을 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덕분에 반듯한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카락이며 깜박이는 것은 보여도 그 아래의 색은 보여주지 않는 각도의 눈, 셔츠 깃 사이로 비스듬히 보이는 목선 같은 것들을 한참 시야에 담던 신해량이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실망했나?’

하지만 난 계속 이랬을 텐데. 신해량은 박무현의 옆에 선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그 자리를 지키려고 철저하게 숨기고 내숭을 떨었나? 그렇다고 보기엔 그다지……애인의 숨겨진 이면을 보고 충격받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일단 치료부터 끝내고 보자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보았지만, 박무현은 치료를 다 끝내고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패드를 꺼내 들고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결국 이쪽이 먼저 말을 꺼냈다.

“화 안 내십니까?”

“……?”

해저기지 게시판에 뭐라고 글을 올려야 아까 그 남자를 치과로 불러올 수 있을지 고민하던 박무현이 패드에서 시선을 들었다. 이제야 저 두 눈에 자신이 똑바로 담기는 것이 이 와중에도 반갑게 느껴진다고 하면…정말 혼날 것 같다.

“화를 낸다면 해량 씨한테 맞은 사람이 내야죠. 제가 뭐라고 대신 화를 냅니까.”

당연하다 못해 덤덤하게 들리는 어조에 곧게 뻗은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당신이 뭐냐니. 내 애인이라면서.

“음. 그 사람이 와서 이 깨진 거 어떻게 할 거냐, 안 말리고 뭐 했냐고 화내면 사과는 하겠지만요.”

애인이니까. 달래는 듯한 한 마디가 끄트머리에 살짝 붙었다. 손 대신 다가온 눈길이 불만 어린 눈썹을 쓰다듬고 가기도 했지만, 신해량은 무엇 하나 영 마음에 차지 않는 기색이었다.

박무현은 쓰게 웃으며 만지작거리던 패드를 책상에 엎어두었다. 어쩔 수 없지. 이 문제만큼은 1년 후에도 평행선이었다. 1년 후를 잠시 떠올리던 박무현이 아, 하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양귀비 키우는 방. 지금도 백호동에 있나요?”

“…그때까지도 제가 그 방을 불태우지 않았습니까?”

“불이 나서 사람들이 껐……. 잠깐만요. 그럼 그 불을 해량 씨가 낸 거였습니까?”

“…….”

미래의 방화범일지도 모르는 남자는 침착하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래, 뭐…아직 여기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니까……. 박무현도 못 들은 척 넘어가 주었다.

1년 후에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화재사건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주인 없는 방에 갑자기 불이 났고, 불을 끄러 사람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다가 그 방 안에 뭐가 자라고 있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버렸다.

화재 뒷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 방의 주인을 찾아서 경찰이든 어디서든 잡아갈 줄 알았는데, 주변에 둘러놨던 출입금지 테이프만 조용히 사라지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더라…….

“그래서 신고를 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그렇다면 더 확실하게 불을 질러야겠군, 따위를 생각하던 신해량이 마지막 말에 박무현을 쳐다보았다. 어디에 신고를 하든 이 해저기지에서는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을 텐데.

약간의 염려가 담긴 시선이 처음은 아닌지 박무현은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 어디에서도 정식 답변은 안 왔지만……. 저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걸 보면 그중에 뭐 하나는 조금이라도 먹혔나보다고 생각 중입니다. 이왕 1년 돌아온 김에 일찍 시작하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고요.”

“……그냥 저한테 맡기시는 게 더 쉽고 확실할 것 같습니다만.”

잘생긴 얼굴에 불만이 번졌다.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왜 당신이 가능성이 크지도 않은 일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래야 하는지. 내가 옆에 있으면서 그걸 그냥 내버려 둔 것인지도.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상 너머에 앉은 사람은 농담하듯 웃기만 했다.

“매번 해량 씨를 불러다 의심스러운 방마다 불을 놓고 다닐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반사적으로 그의 앞에 꺼내놓을 뻔했다. 나오려던 말을 삼킨 것은 박무현이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더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해량 씨 없을 때는 어떻게 하고요. 신해량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거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자신이 없을 때. 며칠 동안의 휴가 같은 일시적인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짐을 들고 헬기장에 내리기 전부터 계약 기간이 정해진 시작이었고, 그 기간이 연장될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이 해저기지를 떠나고 나면. 힘으로 붙들어놓았던 균형이 절로 다시 기울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자신에게 이것저것-월급이든, 이빨이든, 다리 사이의 무언가든-털린 놈들이 저열한 화풀이를 할 가능성이 크니 나갈 때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자신의 연락처를 건네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연락처를 넘기고 간다 해도 그 연락에 반응할 수 있는 건 길게 잡아도 석 달 정도. 그 후에는……한국으로 돌아가든 다른 나라로 가게 되든 먼 바닷속에는 신경을 못 쓰고, 안 썼겠지.

그러니 그 이후를 대비한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반가워할 만한 일이었다. 신해량은 박무현과 자신 사이에 놓인 크지 않은 책상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자신이 없을 때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하는 게. 그것이 당신이라는 것이.

왜……서운하지.

지난밤 자신의 방을 찾아왔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고도 순순히 물러나던 걸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믿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 걸음이 다시 자신의 방에 오는 일은 영영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그때 즈음, 입이 저절로 달싹였다.

“……선생님보다 제가 더 많이 좋아했나 봅니다.”

“……예?”

신해량에게 줄 무설탕 사탕을 부스럭부스럭 꺼내고 있던 박무현이 갑자기 책상 위로 한숨처럼 떨어진 말에 멀뚱멀뚱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왜……?

박무현은 신해량의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주세요’ 버튼을 누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이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 정도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는데 더 어려운 게 있더라며, 여자친구의 ‘넌 나 얼마나 좋아해?’ 시험을 말아먹었다고 머리를 쥐어뜯던 친구 놈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럴 시간에 꽃이라도 사 들고 뛰어가라고 등짝을 때렸었는데. 정답이 뭐였는지는 물어보고 때릴 걸 그랬나.

“어, 음, 그건……아닐걸요.”

좋아. 그놈이 보면 너도 똑같다고 등짝을 때릴 것 같은 소리군. 박무현은 상상의 손바닥에 등이 얼얼해지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고민했다. 뭐라고 하지? 해량아, 형 못 믿어? ……나라도 못 믿겠는데. 그렇다고 지금 냅다 안아줄 수도 없고. 어쩐다.

고민하던 박무현이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그대로 책상을 빙 돌아 신해량의 곁에 멈추어 섰다. 저 대신 한쪽에 있던 노을이를 들어다 그 품에 안겨주고, 푹신한 등을 쓰다듬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손도 잡아다 그 위에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건 1년 후의 해량 씨도 모르는 건데…….”

올려다보는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멈춘 입이 혼자 간직하고 있던 작은 비밀 하나를 꺼내어 속삭였다. 그리 대단치는 않은 것이라 연하의 애인, 보다도 한 살 더 어린 친구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걱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신해량이 제 손바닥 아래 눌려있던 인형의 선명한 수술 자국이 스르륵 사라진 것을 2초쯤 늦게 인지할 정도는 되었으니,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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