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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3

30303 by 30

박무현은 가운 주머니를 계속 힐끔거렸다. 무설탕 사탕을 먹고 남은 쓰레기 아니면 카페 영수증 정도나 쑤셔 넣고 잊었던 주머니지만, 오늘은 낯선 무게를 담고 있는 탓에 자꾸만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주머니에 든 것은 딱 신해량의 손목에 맞춰서 만들었는지 자신에게는 조금 많이 남는 크기의 팔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앞에 떡하니 놓인 미남의 얼굴에 한번 놀라고, 허둥지둥 일어나다가 손목에 모르는 팔찌가 감겨있어서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던 바로 그 녀석.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억은 어제 그대로인데, 대신 없던 물건이 생겨난 건가 싶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옆에 누워있던 신해량이 자기 팔찌라고 해서 냉큼 풀어주려고 했지만, 팔찌 채로 손목이 덥석 잡혔다.

“그냥 하고 계십시오.”

지금은 그게 더 마음이 놓일 것 같다고 말하는 낮은 목소리와 뜨거운 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 중에는 영 어색해서 빼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주머니에 잘 챙겨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발치하는 수고를 건너뛰고 살피게 된 사토의 입안이나, 분명 얼마 전에 왔을 때는 충치 하나 없어서 칭찬까지 해줬었는데 1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모를 환자를 보는 틈틈이 주머니를 들여다보았다. 팔찌 한 번 보고, 팔찌 주인 생각 한 번 하고.

직접 만든 건가? 손재주가 좋구나. 엔지니어라 그런가. 아, 노을이도 꿰매줬다고 했었지. 근데 나한테 언제 채워놓았던 거지? 나 잘 때? 그때 깼으면 조금 민망했으려나. 아, 미남은 자다 깨도 정말 잘생겼더라. 그런 미남이 왜 나를 만나는 거지?

아니, 정말로. 왜?

‘그건……못 물어보지.’

애인이 이상해져서 당황스러울 사람한테 그런 질문까지 할 수는 없지 않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엄밀하게 따지자면……‘나’를 만나는 게 아니기도 하고.

마지막 환자의 손에 치실을 들려 보내고 딥 블루 문 앞에 선 박무현은 한쪽 소매를 걷고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풀어두었던 팔찌를 다시 차는 것뿐인데 다른 생각을 같이 하려니 자꾸만 손이 헛돌았다. 가령, 만약 왜 자신을 만나는지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궁금한 이 감정이 걱정인지 아니면 기대인지 같은…….

“제가 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끼어든 손이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목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팔찌를 꼭 맞춰 채우고 물러난 신해량은 마치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박무현은 붉어지려는 귀를 슬쩍 긁고는 손목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진료 보는 동안만 잠깐 풀었습니다. 좀 무거워서요.”

“그렇군요.”

담담히 대꾸한 신해량이 불 꺼진 치과와 박무현을 차례로 보고는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제안했다.

“그럼 이제 데이트하러 갈까요.”


“해파리 수족관이 또 생기는군요…….”

천장까지 닿은 수족관을 올려다보는 박무현의 눈이 유리처럼 빛났다. 칫솔을 물고 돌아다니며 감상하던 것과는 또 다른 녀석들이 그 안에서 여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이거 언제 생겼습니까?”

“수족관은 반년 전에 설치됐지만, 해파리를 푼 건 3개월쯤 됐습니다. 안에 넣을 종류를 결정하는 데에 오래 걸렸다고 하더군요.”

3개월…. 그럼 내 기준으로는 언제지? 한 몸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 또 우르르 물러가는 해파리 떼를 눈으로 따라가다가 헤아리던 날짜도 잊어버렸을 즈음, 유리에 비친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아, 내가 사람을 옆에 두고 너무 해파리만 봤나. 박무현은 머쓱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고맙다, 덕분에 좋은 구경 했다, 아니면 다른 무슨 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시선을 마주하고는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아무나를 옆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실감이 뒤늦게 밀려와 발끝을 건드렸다. 이때쯤의 나는 항상 이런……눈빛을 받는 건가?

“마음에 드십니까?”

……해파리 말하는 거겠지. 박무현은 뜨끈해진 손바닥을 식히려고 차가운 유리에 슬쩍 갖다 대며 뻣뻣한 목을 끄덕였다. 옆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들렸다.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그냥 또 고개만 끄덕였다. 뭐가 됐든 나쁘지 않으면 됐지. …됐겠지? 미지근해진 손이 여전히 더운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해파리 수족관 다음은 근처에 있는 식당이었다. 이곳도 처음 보는 곳이었는데, 신해량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이쪽에만 펼쳐주었다. 이건 별로 입에 안 맞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면서 어딘가를 짚어주지 않아도 같이 와 본 곳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데이트하러 가자는 게 데이트했던 곳에 가자는 뜻이었나보다. 박무현의 눈이 가게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로 돌아왔다.

자극받아 기억이 돌아오기를-이걸 돌아온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바라는 걸까. 물론 그게 최선이겠지만, 만약……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대로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두어야 하지 않나.

말을 꺼내자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을 축이던 신해량이 물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나야 내 앞가림만 하면 되지만, 당신은 연인을 잃어버린 건데.

무엇을 묻든 곧장 답을 내어주던 신해량이 잠시간 침묵했다. 아래로 향한 눈이 바닥보다 더 깊은 어딘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깜박임 한 번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짧게 덧붙인 신해량은 박무현의 손목을 단단히 감은 자신의 팔찌를, 그 매듭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응시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제게 기회만 주시면 됩니다.”


신해량은 계속 같이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해저기지의 엔지니어는 1년이 지나도 여전히 교대직이었다. 덕분에 박무현은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냐고 눈치 없이 묻는 대신, 늘 하던 대로 세탁실에 들러 옷가지와 노을이를 최신식 기계에 맡기고 혼자 카페에 앉아 갓 나온 커피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카페의 메뉴는 이미 한 번씩 다 도전해 보았는데 1년 사이에 새 메뉴가 나온 건지 처음 보는 게 있어서 그걸 골랐다. 원래대로면 새 해파리 수족관을 구경하려면 9개월쯤은 있어야 할 테고, 이 커피는 얼마나 기다려야 만날 수 있으려나. 신해량과 만나기 전일까, 후일까…….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가 그려진 컵을 만지작거리며 알 수 없는 시간을 헤아렸다. 감싸 쥔 커피잔은 따뜻했고, 머릿속에는……신해량의 얼굴이 가득 찼다.

수족관 앞에서 저만 바라보고 있던 눈. 속눈썹이 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있던 모습. 깊은 바닥을 한참이나 더듬다가 올라온 차분한 눈동자에 깃들어있던 빛. 당신은 그저 기회만 주면 된다고 말하는 목소리. 1년 후의 나는……그런 신해량의 표정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러면 뭐든 해줄 말이라도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기껏 시킨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잊고 머릿속의 신해량과 마주 보고 있던 박무현은 덩치 큰 남자가 발을 쿵쿵 구르며 저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 역시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그 남자의 주먹이 테이블을 쾅 울릴 때까지.

“너, 씬해량이랑 사귄다며. 그래서 그렇게 나대고 다니는 거냐?”

“……?”

내가……뭘 한다고? 왜 영문모를 질문이 더 늘었냐. 박무현은 테이블에 넘쳐 흐른 커피부터 닦으며 남자를 올려보았다. 일단은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아는 사이일 수도 있지. 최근의 내가 뭔가 실수한 걸 수도 있고.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나댄다는 건 뭘 말하는 거지? 너넨 이렇게 잘생긴 애인 없지, 하고 다녔나? 팔짱 끼고 온 기지를 돌아다니면서 자랑한다거나?’

나름대로 자신이 나대는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남자가 박무현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무례한 손가락이 얼굴을 향해 불쑥 뻗어 나왔다.

“남자친구 믿고 겁 없이 신고하고 다니나 본데, 그러다 헤어지고 후회하지 말고 몸 사려.”

“……제가 뭘 신고한 겁니까?”

학창시절에 많이 본 한심한 놈들이 자연스레 떠올랐지만, 한 번 물어는 봤다. 삿대질까지 하며 험악하게 굴던 남자는 그것까지 말하기엔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는지 눈치를 보더니 어색하게 어물거렸다.

“그,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말 돌리지 말고, 뒤에서 신고할 바에야 차라리 남자친구한테 가서 한 대 패달라고 해. 한 대쯤은 맞아줄 테니까.”

물론 세 배로 돌려줄 거지만. 허세를 담아 으스대는 남자의 귀에 한숨 섞인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한 대 맞으면 그만둘 겁니까?”

“……뭐?”

이놈이 지금 여기서 날 때릴 셈인가? 아니면 정말 씬을 부르려고? 남자가 빠르게 눈을 굴려 테이블 위를 훑었다. 박무현의 손은 주먹을 쥐지도 않았고, 휴대폰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잔을 들어서 식은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럼 스스로 한 대 쥐어박으세요. 누가 때리나 아픈 건 똑같은데, 굳이 남이 해줘야 정신이 차려집니까.”

통역이 느린 건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가만 서 있는 남자를 두고 박무현은 커피잔과 젖은 종이냅킨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그대로 카운터에 트레이를 반납하고 가려다 아, 하고 돌아서서 직원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여기서 인공해변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인가요?”

이것도 저것도 이곳 생활이 1년이 넘으면 익숙해질지 모를 일이지만, 아직은 영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거 참. 맨발로 걷기에 위험한 것도 여전하고. 박무현은 모래 사이에서 발끝에 걸린 유리 조각을 하나 주웠다. 갈색인 걸 보니 누가 시원하게 맥주라도 마시고 깨 먹은 모양이었다.

해변. 바다. 바람. 하늘……. 이렇게만 보면 여기가 1년 후인지 전인지도 모르겠다. 전에 본 적이 있는 구름 같기도 하고. 먼 곳을 한참 보고 있자니 뒤에서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신해량이다.

“아직 근무시간 아닌가요?”

그가 입고 있는 엔지니어복으로 시선을 내리며 물으니, 신해량이 옆으로 눈을 굴리며 손의 장갑을 슥 벗었다.

“……잠깐은 괜찮습니다.”

“이런. 해량 씨 지금 애인 믿고 노는 겁니까?”

장난스레 말하며 씩 웃어 보였지만 잘생긴 얼굴에는 같은 미소가 걸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묵묵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앞에서 눈을 굴리는 건 박무현의 몫이었다. 음. 알고 왔구나.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정말로요. 거짓이 아님을 열심히 어필했지만 신해량의 굳은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저 말이 진심인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직접 찾아와 큰소리를 치며 위협한 놈쯤은 바로 일러도 좋으련만, 며칠 후에야 알고 물어보면 별일 아니어서 말을 안 했다고 하는 게 자신의 애인이란 사람이었으니.

“……서운해요?”

조심스레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저보다 어린-그래, 1년이나 건너뛰어도 신해량은 여전히 박무현보다 어렸다-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희 원래 이런 거 다 얘기하는 사이였습니까? 다른 사람처럼 굴어서 속상해졌나 싶어서……. 아 물론 다른 사람이 맞기는 하지만요. 그러니까, 제 말은…….”

봉변을 당한 건 자신인데도. 오히려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 신해량은 기껍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박무현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 안에 뺨을 담았다.

“예. 서운합니다.”

처음엔 나이 차이를 의식할까 봐 더 신경을 썼던 적도 있지만, 차라리 어리광을 피우는 게 잘 먹힌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다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한테, 제일 먼저. 기회만 주어진다면 몇 번이고 박무현의 마음에 들 자신이 있는 남자가 손바닥에 기대어 속삭였다.

“어, 그…….”

손 위에 새끼고양이라도 잠든 것처럼 꼼짝 못 하고 굳어있던 박무현이 간신히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래요. 그럽시다….

그리고 감긴 눈이 열리기 전에 살그머니 손을 빼냈다. 쿠션으로 삼았던 손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또 서운해할까 봐 빼낸 손으로는 얼른 저 앞을 가리켰다. 네가 싫어서 손을 피한 게 아니라 앞을 가리키려고 한 거다. 그런 뜻을 가득 담아서.

“그, 시간 정말 괜찮으시면 좀…걸을까요?”

눈을 뜬 신해량이 기울였던 고개를 세웠다. 되는대로 뻗어진 박무현의 손은 얼굴이 붉어진 주인 모르게 바다 쪽을 짚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를 이끌어 나란히 해변을 따라 걸었다. 시간이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지금의 박무현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의 옆을 비워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와서 그랬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고요. 아니, 정말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예? 그냥……평범하게 생겼던데요.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에 결국 줄줄 털어놓던 목소리가 한 뼘 위를 향했다.

“해량 씨한테 가서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일이 없는 게 최선이겠지만, 만약 있다면 신해량에게는 무슨 얘기를 하려나. 치과의사 남친 믿고 사람 어금니를 이렇게 깨 먹냐! 이런 거? 신해량이 깨 먹은 걸 내가 고치는 건 맞으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닌데.

“저한테는 아직 아무도 안 왔습니다.”

신해량은 그게 퍽 아쉬운 눈치였지만 박무현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더라도 나이 많은 나한테 와야지. 아까 같은 헛소리는 몰라도 도둑놈 소리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박무현의 표정을 힐끗 내려다본 신해량이 노을빛을 받아 빛나는 모래 위로 만족스러운 발자국을 남겼다. 두 사람이 모래를 밟는 소리, 점점 멀어지는 대화 소리가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건조기 안에서 외롭게 방치되고 있던 노을이의 배 위에 한 명에게 익숙하고 한 명은 본 적 없는 실밥이 돌아오기 한 시간쯤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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