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성장통5

여름 제철 청게 젹량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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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복도를 달려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서지혁이 저 멀리 점이 되어가는 까만 뒤통수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서지혁의 우렁찬 목소리에 까만 점처럼 보이는 신해량이 멈칫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신해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발을 옮겼다. 서지혁은 신해량을 향해 달렸다. 긴 다리를 쭉 뻗어 보폭을 넓히고, 발에 닿는 땅을 있는 힘껏 밀며 도약했다. 그 모습을 육상부 부원이 봤다면 당장이라도 서지혁을 영입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지혁은 빠른 속도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좁혔고, 점처럼 보이던 신해량의 모습도 점점 선명해졌다.

"주장!"

신해량과의 거리가 약 50m 정도로 좁혀지고, 서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신해량은 서지혁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의 무반응에 서지혁은 이를 악물고 다리를 더 길게 뻗어 달렸다. 닿고 싶은 등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들리잖아. 그런데 왜 돌아봐 주지 않는 거야?

서지혁은 신해량의 등을 향해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더운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급한 마음에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었다. 산소가 부족한 듯 머리가 핑 돌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비틀거리다 넘어지지 않으며 시선을 내리니 바닥이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발을 헛딛은 서지혁이 바닥을 구르며 넘어졌다.

성장통은 멈추었지만 갑작스럽게 자란 몸은 아직 적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몸에 익은 낙법도 제때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몸을 부딪혔다. 그 와중에도 신해량의 조언이 생각나 손을 쓰지 않았더니 무릎이나 다리가 땅에 닿아 살갗이 까지고 피가 났다. 괜한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 들리면서. 내가 부르는 거 알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데. 미워.

"서지혁."

"……주장?"

그를 왜 꼭 이런 식일까. 신해량은 늘 서지혁의 가장 한심하고 바보 같은 순간을 내버려 두지 못했다.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신해량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서지혁의 앞에 쪼그려 앉아 상처가 난 무릎을 살폈다. 그렇게 부를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꼭 못난 꼴은 모른척해 주는 법이 없었다.

"조심했어야지."

"……주장이 계속 모르는 척했잖아요."

원망 가득한 서지혁의 말투에 신해량은 꽤 미안한 눈치였다. 신해량은 한숨을 푹 쉬며 가방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서지혁의 다리 상처에 맺힌 피를 닦아주었다.

"……미안."

"……."

일부러 모른 척을 한 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변명 없는 솔직한 사과에 더 서러워진 서지혁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신해량은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상처 난 무릎에 발라준 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서지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망이 가득 묻은 불만스럽게 젖은 얼굴이었다. 신해량이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서지혁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나도 화가 나서 그랬어."

"좋아해요."

"……."

"제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르죠. 그런데 왜 못하게 합니까? 왜요?"

서지혁의 울분에 찬 고백에 신해량은 당황한 듯 입을 작게 벌렸다. 겨우 내뱉어낸 속마음이 애달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저 안 좋아합니까? 제가 너무 늦었어요?"

"……서지혁."

왜 늘 외면보다 그의 애정 어린 관심이 더 원망스러운 걸까. 괜히 더 투정 부리고 싶은 어린 마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못난 질문뿐이었다. 서지혁은 스스로 뱉어낸 질문에 서러워 눈물을 쏟아내며 울었고, 신해량은 그 모습을 놀란 듯 지켜보았다. 땡볕의 아스팔트에 닿아 있는 다리가 뜨거웠고, 더운 여름 공기에 상해버린 속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주장 글씨체를.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못 본 거…… 였다구요!"

서지혁이 히끅거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토하듯 외치고는 손에 든 수첩 조각을 내밀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이 건넨 눈물에 젖은 종이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남긴 짧은 메모를 잠깐 바라보더니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어나."

"제가 바보짓 한 거. ……맞는데요. 근데 저도 그래서 엄청 힘…들었는데요. 주장까지 그러니까 저는……."

"알겠으니까 일어나."

"일어나면. 저… 버리고 갈 거 아니에요? 또 모른 척하고. 혼자……. 가버릴 거죠?"

"……아니야. 안 그래. 일어나. 가서 이야기하자."

터져나오는 울음에 목이 메여 말이 자꾸만 뚝뚝 끊겼다. 먼저 일어난 신해량이 서지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지혁은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비벼 닦았다. 눈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고는 신해량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서지혁이 일어나자 신해량은 자연스럽게 잡은 손을 풀었는데, 서지혁은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멀뚱 쳐다보는 시선에도 굴하지 않은 서지혁은 코를 훌쩍이고는 손을 바꿔 잡고 신해량을 이끌었다.

"……어딜 갈 건데요?"

"……일단 우리 집으로 가."

"예."

눈물은 질질 흘리고 있는 주제에 대답은 씩씩했다. 서지혁은 자꾸만 새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신해량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신 없이 달린 탓인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탓인지 알기 어려웠다. 신해량의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더운 탓에 잡은 손에 땀이 찼지만 그럼에도 놓지 않았다. 느린 걸음 속에서도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신해량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해량이 누나와 둘이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물어봤더니 누나는 방학 동안 조부모님 댁에 내려가 지낸다고 했다. 그의 누나는 대학생이라 훨씬 일찍 방학을 맞이했는데, 그런 덕분에 신해량은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조부모님을 안 뵈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전지훈련 후 휴가 때 잠깐 조부모님 댁에 내려갔었다고 했다.

집까지 오는 동안 간신히 울음을 멈춘 서지혁은 손을 씻고 거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퉁퉁 부은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신해량의 집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내부는 딱 상상한 것처럼 깔끔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으니 한 공간에 신해량과 자신 둘뿐이라는 것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신해량이 틀어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인데도 얼굴이 새빨갛게 열이 올랐다. 신해량은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것인지 잠깐 기다리라는 말만 하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오기 전에 이 바보 같은 얼굴을 좀 수습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방에서 나온 신해량은 예상대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신해량은 소파에 앉아있는 서지혁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손에 든 흰색 티셔츠를 건넸다. 서지혁이 멍청한 표정으로 티셔츠를 받으니 신해량도 소파에 앉았다.

"네 옷이야. 그때 빌렸던 거. 한 번 빨았어."

"아. ……예. 오. 감사합니다……."

서지혁의 바보 같은 대답에 신해량이 피식 웃었다.

"……."

"……."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으니 절로 정적이 돌았다. 들리는 거라곤 에어컨 바람 소리, 집 밖에서 나는 작은 소음 같은 것뿐이었다. 둘 사이에 나도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서지혁의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 이러다가 심장 소리가 신해량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찬 바람도 식혀주지 못해 달아오른 얼굴로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옆에 앉아 있던 신해량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섰다. 당황한 서지혁이 올려다보며 신해량의 손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세요?"

"……? 내 집인데 어딜 가겠어?"

"아……."

멍청한 짓은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은데 이 굳어버린 머리는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서지혁이 잡은 손을 놓자 신해량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따라가야 하는 건가? 그냥 앉아있으면 되는 건가? 서지혁은 신해량의 뒷모습을 보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신해량은 부엌 찬장을 뒤적거리더니 상자 하나를 들고 다시 거실로 왔는데, 아무래도 구급상자인 것 같았다. 신해량은 소파에 앉아 있는 서지혁의 앞쪽 바닥에 편히 앉고는 칠칠치 못한 후배의 다친 다리를 살폈다.

"몸 좀 아껴. 어리다고 몸 막 쓰다간 나중에 힘들어져."

"……아니, 주장이 모른척하니까 그렇죠. 원래 뛰다가 넘어지는 일 잘 없습니다."

"전에 로드워크 때도 넘어졌잖아."

"……그것도 주장 보다가 그런 건데요."

익숙하게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밴드를 붙여주던 신해량이 고개를 들어 서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 서지혁이 눈을 슬쩍 피하니 신해량이 소리 없이 웃었다. 칫. 뭐가 웃기다고. 한껏 뾰로통해진 서지혁이 딴청을 피우고 있으니 신해량은 다시 제 앞의 무릎에 집중했다. 신해량은 무릎 위의 까지고 쓸린 상처들에 연고를 다시 발라주고 덜 털린 흙이나 피를 닦아주었다. 그의 손이 다리에 닿을 때마다 서지혁은 움찔거리며 제 앞에 있는 까만 머리를 쳐다봤다. 동그란 머리통과 정수리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다 무심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랐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쓸고 있으니 곧바로 신해량이 뭐 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에 개의치 않고 서지혁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느꼈다. 기분 좋은 간질간질함을 느끼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손을 피하며 빠져나가더니 구급상자를 들고 다시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이 꼭 사람의 손길을 피해 달아나는 고양이 같아서 좀 웃었다.

"버르장머리 없긴."

"주장도 제 머리 맘대로 쓰다듬었잖아요."

"내가 선배잖아."

"선배만 후배 머리 만질 수 있습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구급상자를 놓고 돌아온 신해량이 툴툴거리며 서지혁의 옆자리에 앉더니 버릇 없는 후배의 머리를 헝클였다. 에잇! 정말! 서지혁이 거친 손길에 삐죽삐죽해진 짧은 머리를 털어냈다. 그 사이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꼬깃꼬깃한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는데, 뭔가 싶어서 보니 아까 서지혁이 건넸던 찢어진 수첩 조각이었다. 눈물에 범벅되어 신해량의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서지혁은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손에 들고 아련하게 쳐다봤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는데. 혼자 조급해하다 망쳐버린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제가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

풀죽은 서지혁의 사과에 신해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내리 깐 눈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왜 잘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예? ……어. 그. ……같은 동아리 후배라서……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죠……?"

서지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신해량은 무표정하게 시선을 맞췄다. 괜히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서지혁이 눈을 슬쩍 피하니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작 같은 동아리 후배라서?"

"……아니. 주장은 주장이잖습니까. 원래도 후배 잘 챙기고 책임감이 강하시잖아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죠."

"아. 내가 주장이라서."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진 것을 느낀 서지혁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신해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이마를 반쯤 덮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훈련 시간에 기껏 챙겨주고 살펴봐 줬더니. 뭐? 주장이라서? 기껏 얻은 쉬는 시간 쪼개서 너 보살피러 가고 휴가 도중에도 연락도 안 받는 놈 기숙사까지 뛰어갔더니. 후배라서 챙겨줘? 책임감 때문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주장이 대체 뭔지 궁금해지는데. 안아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는데 단지 네가 동아리 후배라서. 라고."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너무 멍청이 같은데요……."

"그리고 내가 강아영이랑 사귄다고? ……넌 내가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너한테 그렇게 대한 줄 알았다는 거지? 그리고 넌 여자친구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행동했고?"

눈물이 들어가니 이번엔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신해량의 입으로 들으니 그동안의 망상이 얼마나 무례한 생각이었는지 와닿았다. 미안함에 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니, 그. 주장. 제가 진짜 여러모로 아프고 힘들어서 머리가 안 돌아가서……. 주장을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요……. 저 혼자 진짜 미친 등신짓 한 거네요. 주장 말 들으니까 정신이 바짝 드는데……."

"주장이라고 그만 불러. 난 네가 생각하는 주장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다른 놈들한테까지 이렇게 대하라고? 양심도 없군. 넌 나 졸업하면 주장 달고 다른 부원들 그렇게 챙겨주든지 해."

"예? 아니, 제발요. 주장. 아니 선배! 제가 무슨 주장을 해요? 절대로 싫어요! ……이게 아니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진짜 죄송해요. 제가 키만 컸지 뇌는 덜 컸나 봅니다……."

마지막 말은 나름 웃으라고 한 소리인데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신해량의 표정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따뜻하고 말랑하게 대해준 거였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왜 모든 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걸까. 쪽팔림과 미안함에 얼굴이 새빨개진 서지혁이 안절부절못하다 신해량의 손을 잡았는데, 신해량은 곧바로 손을 빼내었다. 진짜 망했네. 어떡하지?

"작년부터 티는 내면서 고백은 안 하길래 귀여워서 잘해줬더니. 뭐? 좋아하지 않으려 했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 옹알이 같은 소리를 기어코 들었다니. 서지혁은 부끄러움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첩을 늦게 발견한 것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짚은 거였다. 기껏 호감을 가지고 챙겨줬는데 상대가 저딴 멍청한 소리나 해대면 화가 안 날 리가 없지. 그럴만했구나. 그동안 신해량이 자신에게 한 행동과 자신이 신해량을 대했던 태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적극적이고 알기 쉬운 호감 표현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었다니. 혼자만의 오해에서 시작된 비극이었다. 신해량이 어려워진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바보였다니.

서지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민망함을 느끼며 때늦은 반성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철도 없이 피실 피실 웃음이 새 나왔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이 올라갈 듯 말 듯 하고 있으니 그 꼴을 본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 노려봤다. 뭘 잘했다고 웃냐는 표정이었는데, 서지혁은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지 못하고 결국 뱉어냈다.

"……근데 저 귀엽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하다고?"

"……그것도 중요한데요. 저는……."

여전히 정색 중인 신해량의 차가운 얼굴에 다시 기가 죽은 서지혁이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신해량은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서지혁을 한 대 쥐어박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동아리 부원들이나 후배들에게 단 번도 체벌을 한 적 없는 물러터진 주장이었지만, 신해량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지금 그다지 서지혁의 주장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

평소 사격부를 아니꼽게 보던 선생놈에게 주장이라는 죄로 대표로 깨졌던 때에도 덤덤했던 게 신해량이었다. 그는 억울하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눈치 보던 후배들을 다독이며 화풀이 한 번 한 적 없었다. 어떤 일을 당하든 속이 어떻든 간에 부정적인 감정을 얼굴 위에 드러낸 적 한번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해량이 지금 서지혁을 화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이런 반응이 낯설기도 했지만 서지혁은 이상하게 무섭다기 보단 복에 겨움을 느꼈다. 신해량의 올라간 눈꼬리와 짙은 눈썹이 예뻐서일까? 뚱해 보이는 표정이 꼭 삐진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낮은 목소리로 정색을 하고 있지만 결국 하는 소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게 화났다는 이야기라, 서지혁은 당장 신해량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선배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불안했던 게 컸어요. 선배처럼 완벽한 사람이 저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도 못 했고……. 저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고 못나서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했나 봐요. ……저 사격도 선배 덕분에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자존감도 뚝뚝 떨어지고 선배가 저한테 실망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습니다. ……멍청한 소리나 하고 바보 같이 굴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사과와 고백에 신해량의 화난 눈썹이 점점 일자를 그리는 게 보였다. 평소엔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신해량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서지혁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서지혁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준 거였다. 하여간 참 무르다니까.

화해의 의미로 사심을 담아 다시 신해량의 손을 잡았다. 눈치를 슬쩍 보니 신해량은 정말로 서지혁을 용서해준 모양인지 아까처럼 손을 빼지 않았다. 몽글몽글 간지럽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서지혁이 행복하다는 듯이 눈을 접으며 웃자, 신해량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귀한 웃음을 넋을 놓고 보다가 정신 차린 서지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또 속 터지는 질문이면 답 안 할 거야."

"예?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닐……걸요?"

"뭔데?"

혹시 이게 속 터지는 질문인가? 서지혁이 잠시 고민을 하며 눈을 굴렸다. 음, 아니지 않을까. 이 정도야.

"저희 처음 만났던 날 말입니다. 제가 사격에 재능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영입한 겁니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던 질문이었다. 신해량은 야구를 하고 돌아가던 서지혁에게 대뜸 시력을 묻고는 그를 훈련장에 데리고 갔다. 그 덕분에 서지혁은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여태 없었던 목표나 꿈도 생겼고, 그런 것들은 서지혁이 현재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해량의 눈썰미나 감은 인간을 뛰어넘은 짐승 같은 감각이었다. 그 덕분에 신해량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종종 소름 끼쳐 하거나, 불쾌해하기도 했다. 서지혁 또한 가벼운 거짓말이나 장난을 그에게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신해량의 날카로운 감을 신기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처음 자신을 봤을 때 어떤 것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척 보면 재능이 눈에 보이는 걸까? 야구하는 모습에서 뭔가를 눈치를 챈 걸까? 시력이 좋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격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거였을까? 서지혁은 궁금하다는 듯이 신해량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해량은 태연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몰랐는데."

"예?"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무속인 같은 것도 아니고."

"예……? 아니, 알고 영입한 거 아니에요? 저한테 시력 물어본 거는요? 막 쏴 죽이고 싶은 놈 없냐고도 물었잖아요. 시력이 좋으면 유리하다거나 동기나 목표가 있으면 더 좋다거나 그런 거 있는 거 아니었어요?"

"시력이 좋으면 유리한 건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뒤에 말한 건 더 상관 없던 거였고. 일종의 흥미 유발 같은 거지. 넌 그냥 운 좋게 얻어걸린 거야. 눈으로 보기만 해서 천재를 찾아내면 내가 왜 선수를 하겠어. 선수 캐스팅을 하러 다니지."

"아니. 예? 진짭니까?"

신해량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서지혁이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허…… 저 좀 허탈한데요. 저는 선배가 아무도 몰랐던 제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봐 주고 발굴해준 은인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배트 잡는 게 어색해서 자세는 엉성한 주제에 다리로 안정적으로 중심 잡는 거나, 날아오는 공을 정확하게 보고 망설임 없이 쳐내는 거나. 뭐 그런 걸 보면서 사격하면 잘 할 거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시력이 뛰어난 게 특수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네가 사격 천재인지 알 수는 없지."

"그럼 저를 왜 데려온 건데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피식 웃었다.

"그냥 귀엽길래."

"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온 동아리 깔짝거리는 게 귀여워서 제안해본 거야. 신규부원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그런데 운 좋게 네가 천재였을 뿐이지 내가 널 알아본 건 아니야. 널 발견한 건 닥치는 대로 뭐든 해봤던 너지."

"……그러니까. 선배 말은……. 그래서 제가 귀엽다는 거죠?"

"그게 중요한가?"

"예. 엄청요."

진지한 표정으로 결연하게 답하자 신해량이 황당해하며 웃었다. 귀엽대. 내가 귀엽대. 서지혁은 승천하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 웃으며 잡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제가 선배보다 더 커졌는데도 귀여워요?"

서지혁은 자란 몸을 구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해량은 구긴다고 줄어들 리 없는 서지혁의 덩치를 보며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짜요?"

"아니. 계속 보다 보니 좀 징그러운 거 같기도 하고."

"아 진짜! 장난하지 말구요! ……진짜예요? 그럼 계속 보지 말고 좀 덜 보는 게 어떻습니까?"

"농담이야. 네가 3m가 돼도 귀여워해 줄게."

"아니 그건 제가 좀 곤란한데요."

3m가 되면 얼마나 심한 성장통을 겪을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져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렇게 이쁘게 웃으면서 왜 아까는 나한테만 정색을 해서는. 신해량의 미소를 멍하니 보던 서지혁이 그를 따라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잡은 손을 내려다 보다 이전에 신해량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겹쳐댔다. 조금 더 위로 솟아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히히 웃던 서지혁은 제 허벅지에 올려둔 하얀 티셔츠를 내려다 보았다.

"선배."

"왜."

"저 자고 가도 돼요?"

"오늘?"

"예. ……저 재워주시면 안 돼요? 지난번처럼요."

서지혁이 눈썹을 내리며 최대한 간절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간절해 보이는 후배의 표정을 본 신해량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허락의 신호에 서지혁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싫어."

"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한 표정인 서지혁에게 신해량은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럼 왜 고개를 끄덕인 건데? 넋이 나간 서지혁이 경악하며 입을 쩍 벌리니 신해량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는다.

"장난이야. 자고 가."

"잉잉잉. 진짜 너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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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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