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4

청문회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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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은 서지혁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다. 원래 호텔에서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깜빡 잠들어서 못했을 뿐이다. 직접 보지 않았느냐. 거의 기절을 했었다. 깨어난 뒤에도 정리가 잘 안돼서 말을 못 했던 거고, 그때 당신도 내 건강이 우선이라고 하지 않았냐. 하도 다정하게 예뻐해 주고 쓰담뽀담 해주길래 마음이 다 풀린 줄 알았다. 매일 죽도 먹여주고 옆에서 간호도 해주지 않았냐. 덕분에 그 지독한 독감도 다 나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니 근데, 갑자기 이럴 수가 있는 거냐. 생각하니까 나도 어이가 없다. 이러려고 그렇게 열심히 낫게 도와준 거냐. 다 나으면 그렇게 사람 죽일 듯이 쳐다보려고 약도 직접 입에 넣어준 거냐. 진짜 싸이코패스 아니냐. 살면서 이런 도라이 중에 상 도라이 본 적도 없다. 당신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게 노려보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아는 거냐. 하나도 안 무섭다. 아니 존나 무섭다.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라. 죄송하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독감으로 일주일 동안 고생한 사람한테 이러기냐. 다정하게 머리 말려줄 땐 언제고, 지금 내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로 한강도 만들 수 있겠다. 추워 죽겠는데 꼭 지금 그래야 하는 거냐. 아니 잘못했다. 그냥 추워 죽을 테니까 머리는 가만히 둬도 될 거 같다. 실언을 했다. 나도 억울해 죽겠다. 아플 땐 그렇게 아껴주고 이뻐해 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나았다. 그냥 평생 독감에 걸려 살 걸 그랬다. 알겠다. 잘못했다. 그만 좀 노려봐라. 무릎이 너무 저려서 그런데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되느냐. 어쩌고.

서지혁의 정성스러운 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신해량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한 마디 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아뇨. 아뇨. 아뇨!"

아 시발. 이게 아닌데.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왜 이런 개소리나 지껄이고 있었지? 대가리는 영 안 나은 게 틀림없었다. 하여간 생각을 안 하고 말을 하면 꼭 매를 버는 소리만 하게 된다니까.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 뚝 떨어져 서지혁의 어깨를 적셨다. 순간 느껴진 한기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는데, 서지혁의 헛소리에도 내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신해량이 그 꼴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말리고 와. 할 말 정리도 좀 하고."

"예……. 감사합니다."

신해량의 눈치를 보던 서지혁이 저릿저릿한 다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축축한 바닥에 더 앉아 있다간 쥐가 날뻔했다.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던 서지혁이 쭈뼛거리다 신해량 쪽으로 돌아보았다. 신해량이 뭘 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서지혁이 눈썹을 내리고 수줍게 말했다.

"혹시 머리 말려주시면 안 돼요……? 저 팔이 좀 아픈데……."

"……."

"……예. 안 되는구나. 안 되겠다. 안 되겠네."

아주 죽어라 노려보네. 건강한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머리를 말리고 거실로 나오니 신해량이 소파에 앉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긴장이 된 서지혁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소파 옆자리에 앉을지 또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신해량이 서지혁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인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서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신해량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가까이에 앉으니 서지혁은 심장이 좀 두근거렸다. 이 콩닥거림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두 사람의 무게로 인해 소파가 부분적으로 푹 꺼졌는데, 서지혁은 이 익숙한 감각이 반가웠다. 거실을 잠시 둘러보니 예상대로 서지혁이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서지혁이 선물한 커다란 티비도 벽에 잘 붙어 있었고 꽤나 섹시한 추억이 묻었던 러그도 세탁만 된 채 그대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심지어 서지혁이 두었던 꽃병까지 커피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었다. 그 위에 꽂혀 있던 꽃다발은 없었지만, 이미 한 달이 지나기도 했고 직접 망치기까지 했으니 버리는 게 당연했다. 꽃다발을 제외하고는 서지혁의 흔적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까 잠깐 본 부엌에도 서지혁의 간식 같은 것들이 전과 다르지 않게 쌓여 있었다. 정말 모두 그대로구나. 집을 떠났다 돌아온 서지혁만이 유일한 변화였다.

"……다 그대로 있네요."

"그래."

"정리할 줄 알았는데요."

"……할 말 있으면 해봐."

은근슬쩍 말을 돌리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이제 정말 고해의 시간이었다. 서지혁의 짧은 머리만큼이나 짧았던 드라이 시간 동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럴듯한 변명이나 이유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애영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저 떠오르는 솔직한 마음과 심정을 털어내면 될 뿐이었다. 속 이야기를 하려니 괜히 떨려서 손가락만 만지작대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안절부절못하는 손을 천천히 토닥인다.

"……제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꿈을 좀 꿨는데요."

"악몽 말이지?"

"예. ……그래서 자다가 자주 깼었는데. ……하. 솔직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봐."

토닥거리던 커다란 손이 서지혁의 손을 덮었다. 따뜻한 온기에 마음이 점차 안정됐다.

머뭇거리던 서지혁은 그동안 꾸었던 꿈 이야기를 신해량에게 들려주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아 흐릿한 감각만 남아 있는 꿈 몇 개와, 메모를 해둔 덕분에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꿈. 그리고 잊고 싶었지만 결국 기억이 되어버린 마지막 꿈까지. 문제의 그 꿈을 꾼 직후 일어났던 발작과 그때 느꼈던 두려움, 감정에 잡아먹혀 스스로를 해하고 결국 신해량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날의 이야기.

그 후 혼자 호텔에서 며칠을 질질 짜다가 병원에 가 약을 처방받고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일과 애영이와의 만남으로 마음을 다잡고 상담을 받았던 이야기. 신해량의 곁을 떠나 있었던 한 달 동안의 일을 보고하듯 말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여전히 잡은 손은 따뜻했다.

"……고작 꿈 좀 꿨다고 별 유난을 다 떨었죠."

"그렇게 생각 안 해."

기다린 듯한 단호한 대답에 서지혁이 작게 웃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웃기지만, 저는 솔직히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잘할 수 있다는 자신도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늘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하는 거예요?"

서지혁의 한탄 어린 진지한 물음에 신해량이 침음했다.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해량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라고 뭐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도 실수를 하고 틀려. 사람이 다 그렇지."

"그래도 제가 볼 땐 당신이 다 정답인 거 같은데요."

투덜대는 듯한 서지혁의 말투에 신해량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답인 게 아니라, 네가 날 믿는 거지. ……그냥 우선순위나 효율을 생각할 뿐이야. 그래도 가끔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기도 하는 거지. 뭐든 기계처럼 입력된 프로세스를 다 따를 순 없어. 비효율,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해도 포기 못하는 것도 있고."

"……당신도 지난 결정에 후회라는 걸 해요?"

"그래."

지나간 일에 굳이 미련을 두지 않는 사람도 후회를 하는구나.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영 적응되지 않았다.

"……저는 솔직히 살면서 뭘 간절하게 가지고 싶었던 것도 없었고, 흔한 꿈이나 목표 같은 것도 없었거든요. 아시잖아요. 저는 그냥 길고 가늘게 살고 싶었어요. 어디 정착할 생각도 없고 되는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거든요. 뭐 그렇다고 당장 뒤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삶이란 게 저한테는 그다지 간절한 것도 아니었다는 거죠. 살면 운 좋은 거고, 뒈지면 뒈지는 거고. 그게 솔직히 편했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운 좋으면 시체라도 건지는 거고 나쁘면 뭐 생판 모르는 땅에 묻히는 거고."

"……."

탄식처럼 내뱉은 말에 신해량은 손을 거두어 서지혁의 뒷머리를 긁듯이 쓰다듬었다. 같은 처지에 나름 위로라고 하는 짓이었다. 위로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슬쩍 눈을 마주치니 까맣고 깊은 눈이 천천히 깜빡인다.

"그랬는데. 그랬는데요. ……하. 당신이랑 살다 보니 계속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계속 당신이랑 이렇게 살고 싶었어요. 망할 애정촌 생활이 다 끝나더라도 그냥 당신 옆에서 살고 있고 싶더라구요. 이제 진짜 포기가 안 될 거 같아서. ……그게 무서웠나 봅니다. 흔해빠진 말로 당신 옆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가능할 거 같지가 않아서 그게 두려웠던 거 같아요."

신해량은 말을 아꼈다. 서지혁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신해량의 무릎 위로 돌아갔다. 눈을 마주하고 있어도 이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웠다. 새삼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읽히는 건 언제나 서지혁이었으니까. 지금도 신해량은 서지혁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직접 읽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습관적으로 심호흡을 했지만 불쾌한 떨림은 아니었다. 긴장이 돼 땀이 고인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슥슥- 마찰 소리에 신해량의 시선도 서지혁의 손으로 향했다. 서지혁은 제 무릎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한 손을 들어 신해량의 손등을 감싸잡았다. 기껏 식힌 손바닥에 다시 열이 올랐다. 온기가 닿자, 신해량은 다시 고개를 들어 서지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감히 당신을 가지고 싶나 봅니다."

"……."

신해량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독심술을 하는 인간도 이건 예상을 못했나 보다. 놀란 신해량의 반응에 서지혁은 남은 손으로 제 볼을 긁었다. 아니. 부끄러워 뒤지겠네. 각오를 하고 한 말이었지만 서지혁의 귀가 점점 붉어졌다. 어울리지도 않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괜히 했나? 어디 쥐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왕 내뱉은 말이니 진지하게 굴려고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한계였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 인간한테도 다 보일 텐데 얼마나 머저리같이 보일까. 결국 서지혁은 참지 못하고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시발. 진짜. 괜히 말했어! 취소할래요. 취소. 취소. 아 시발. 존나. 내가 왜 그랬지? 대가리가 돌아버렸나?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십쇼. 이 망할. 염병!"

쪽팔림을 못 이기고 바닥에 발을 구르니 곧이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차라리 웃어라 웃어. 실컷 비웃어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찬물에 세수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화장실로 가려고 하는데 신해량이 서지혁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서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놓으십쇼. 왜 잡는데요?"

"도망갈 거잖아."

"허. 참나. 예. 쪽팔려서 도망이라도 가야겠습니다."

"이제 안돼. 앉아."

"아니, 세수만 좀. 아! 잠깐. 당기지 마십쇼! 바지 벗겨지잖아요! 아니!"

결국 서지혁은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남의 바지를 왜 벗기고 난리야. 서지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신해량이 또 웃었다. 제 팬티 봤어요? 그래. 아니, 이럴 땐 봐도 못 봤다고 해줘야죠. 못 봤어. 말을 말아야지. 서지혁이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지가 변태야 뭐야, 왜 남의 바지를 벗겨. 민망함에 괜히 궁시렁거리고 있으니 신해량도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가지고 싶다고?"

"허! 남은 용기 쥐어짜서 말한 건데. 뭡니까? 그 가소롭다는 듯한 말투는?"

"어떻게 가질 건데?"

"……아니. 그건. ……모르겠는데요."

뭐 이딴 질문과 이딴 대답이 다 있는지. 사랑 고백을 한 건지 면접을 본 건지 알 수가 없네. 여기서 대답 제대로 못하면 불합격인 거냐고. 보통 이런 소리를 하면 '난 이미 네 거야.'라거나 '날 가져도 좋아.' 뭐 이런 대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이 인간한테 보통의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가질 거냐니. 허허허. 염병. 뭐 기획서나 제안서 같은 거라도 제출하라 이건가. 결재해 주면 그때 가질 수 있는 거냐고.

"됐어요, 됐어요. 안 가져요. 사람이 어떻게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삽니까? 그냥 무소유 실천하면서 살겠습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염병."

"그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중에 안 해요!"

빽 소리를 지르니 신해량이 또 웃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꼭 이럴 때만 잘 웃지.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 죽일 듯이 노려봐놓고. 나중에 해. 싫다니까요! 나중에 하자. 들은 척도 안 하네. 아휴 그래, 뭐. 아주 다 지맘대로지. 놀랍지도 않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쩌자고 이런 인간한테 코가 꿰여서. 성질이 나서 노려봤더니 신해량은 그에 미소로 답했다. 허. 그 와중에 뒤지게 이뻐서 뒤지게 억울했다.

"……아무튼, 저는 계속 당신 옆에 있고 싶습니다. 이게 제 결론이에요. ……꼭 연애 같은 걸 안 하더라도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나랑 연애는 하기 싫다고?"

"아니. 뭐 말을 그렇게 꼬아 듣습니까? 당신이랑 연애 당연히 하고 싶죠! 아까 제 말은 뭐로 들었습니까?"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네. 서지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니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니. 왜 웃지? 이게 웃긴가? 뭐가 웃긴데?

"……당신은 어떤데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솔직히 이런 거 물을 자격 없는 거 아는데요. 당신이 계속 기대하게 만들었잖아요. 저랑. 그. ……잘 해볼 생각이 있는 거예요?"

"내가 널 왜 다시 여기로 데려왔을 거라 생각하는데?"

"못 도망하게 가둬두고 고문해서 지난날을 참회하게 만들려구요?"

"그걸 원해?"

또. 또. 또. 농담 좀 했다고 사람 또 죽일 듯이 보네. 어떻게 눈빛이 이렇게 초 단위로 바뀌는 거지? 방금 전까진 세상에서 제일 이쁘게 웃고 있었으면서. 표정도 별로 없는 인간이 얼굴 근육 순발력까지 왜 이렇게 좋은 건지. 아니, 농담입니다. 농담. 농담도 못해요? 사람이 거참. 서지혁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신해량은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아, 망했네. 저려면 백퍼 대답 제대로 안 해주고 '몰라.'같은 소리만 반복할 텐데.

"……죄송해요. 그래서 저를 왜 여기 데리고 왔는데요?"

"몰라."

내 이럴 줄 알았지. 망할. 왜 또 헛소리를 해서 다 된 일을 망쳤지? 하여간 간질간질한 분위기 못 참는 이 입이 문제다. 그래도 7월에 한 달 동안 붙어살 땐 서로 달콤한 이야기도 해주고 깨 볶으며 잘 지냈는데. 또 잠깐 떨어져 지냈다고 내성이 다 뒤져버린 건지. ……하긴. 그때도 진심이긴 했지만 지금과 무게감이 달랐으니까. 일방적인 마음일 때가 좀 더 속이 편했던 것 같긴 하다. 이 인간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죽어 버리겠으니까.

"……이제 진짜 진지하게 답할게요. 제가 장난치는 게 아니라, 막 좀 낯간지럽고 그래서 괜히……. 예? 그래서 저 계속 당신 옆에 있어도 됩니까?"

"……그래."

신해량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지만 서지혁이 원했던 대답을 해주었다. 서지혁이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히죽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헛웃음도 웃음이라고, 신해량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고 서지혁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렇게 이쁘다는 눈웃음을 발사해 주니 신해량도 결국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넌 무섭다고 했잖아.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겠어?"

"아, 그건……."

서지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어물거렸다. 잠시 고민을 하던 서지혁은 결심을 한 듯 한숨을 푹 쉬고 미소를 걸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그 꿈 말입니다. ……혹시 어쩌면 내가 꿨던 꿈들이 그날 나도 모르게 겪었던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을 잃었던 순간들이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의외인데. 넌 그런 거 잘 안 믿잖아."

"저 아니어도 누가 그런 걸 믿겠어요? ……아무튼요. 처음엔 그냥 저도 인지 못한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개꿈이겠거니 했는데, 꿈치곤 그럴듯하기도 했고. 그날 사람들 죄다 기억이 다르지 않았습니까. 테러의 충격으로 본 환각이라기엔 그 와중에도 같은 소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애영이도 저희랑 기억이 달랐잖아요. 자기 버리고 먼저 나갔다고 얼마나 욕을 처 들었는지 모릅니다. 무한교니 뭐니. 그놈들이 하는 소리도 영 찝찝하고."

"……그래서?"

"뭐어. 그렇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구요. 그냥. 아주 만약에 그게 모두 제가 겪은 일이라면요."

말을 잇다 만 서지혁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신해량을 바라보았다.

"당신 코앞에 두고 발로 뻥~ 차버리면 다른 서지혁들이 얼마나 저를 죽이고 싶겠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울 텐데. 제 마빡에 총알 두 발은 박고 싶을 겁니다."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 모습을 본 서지혁도 낄낄대며 따라 웃었다.

"다른 서지혁들이 꿈에서 나와서 널 죽일까 봐 무서워?"

"솔직히 당신보다 다른 서지혁이 더 무섭습니다. 그 미친 도라이. 어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네. 괜히 이마도 근질거리고."

"걱정하지 마. 다른 서지혁이 나타나도 넌 총에 안 맞게 해줄게."

"참 고맙네요."

낄낄거리며 웃던 서지혁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해량을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다. 넓은 어깨에 턱을 얹고 듬직한 등을 어루만지듯 쓸었다. 닿은 가슴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울렸다. 쿵쿵쿵.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서지혁은 눈을 감고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귓가에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 닿은 피부 틈 사이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은은하게 나는 익숙한 샴푸와 스킨로션 냄새. 그리고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까지.

사람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할 때 꿈만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이제 서지혁은 현실이 꿈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안다. 서지혁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통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거실에 쏟아져 내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중에 가장 빛나는 건 역시 제 품의 남자였다.

"여전히 무섭긴 해요. 후회할까 봐 걱정도 됩니다. 지금이야 괜찮다고 해도, 또 언제 불안해질지 몰라요. 힘든 일도 많고 고생도 죽어라 하겠죠. 그래도 그냥 당신 옆에 붙어 있으려구요. ……당신이 낙원이 아니더라도 그 속에 살고 싶은 건, 아마도 사랑일 테니까요."

"……."

"전 당신이 스스로를 좀 아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덜 불안할 거 같은데요.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노력해 볼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예. 저도 노력해 볼게요."

서지혁은 안고 있던 몸을 떼어내고 다시 신해량과 마주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진 탓에 신해량의 등 뒤에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왠지 익숙한 장면에 서지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럽게 터진 서지혁의 웃음에 신해량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태양도 아주 자기 소품이지.

"저는 당신 생각이 궁금해요."

"무슨 생각?"

"그냥……. 당신은 안 무서워요? 재수 없는 말이긴 하지만, 언젠가 저를 잃으면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 안 들어요?"

"후회하겠지."

"오……?"

지체 없이 들려온 대답에 서지혁이 놀라 눈썹을 들썩였다.

"지금 이 순간도, 너한테 같이 살자고 했던 날도, 해저기지에 입사한 것도 후회하겠지. 그리고 널 만난 것과 입대를 한 것까지 모두 후회되겠지. 그럼 끝일 거 같아? 입대를 결심하게 된 내 가정환경과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걸 만들어낸 또 그전의 과거들 모두 후회할 거야. 기억도 안 나는 유년 시절까지 후회로 보내고 나면 이미 해가 떠 있더라. 그렇게 후회하고 나면 뭐가 남는지 알아?"

"……뭐가 남는데요?"

"아무것도 안 남아. 후회한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거든. 일방향인 시간의 흐름조차 원망스러워지고 머물고 싶은 과거를 끈질기게 잡고 싶어도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해. 그렇게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나 하나밖에 없어. 그때 내가 어떤 꼴이었는지 알잖아, 넌."

"……."

"미래 같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 모든 후회를 감당할 거야. 지금 널 내 옆에 두기 위해서."

담담하게 뱉어낸 이야기지만 그 속에 어떤 시간이 들어있는지 서지혁은 잘 알았다. 그건 신해량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평생 잃지 않을 거라는 비현실적인 약속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또 그 시간을 감당할 거라는 현실적인 각오뿐이었다. 그렇게 아파했으면서 어떻게 또 같은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용감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용기였다. 서지혁은 먹먹한 숨을 내뱉었다.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만 찾던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좀 이상한데요."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더니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겁먹고 도망친 놈한테 들을 말은 아니지."

"아야! 아야! 말로 때리는 것도 폭행입니다!"

서지혁이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찔대며 엄살을 떠니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정답 같은 건 몰라. 네가 떠났을 때는. ……힘들다니까 보내주는 게 맞다 싶었어."

"아. ……그건."

"나라고 뭐든 쉽지 않아. 네 방도 며칠을 그대로 두다가 겨우 청소라도 한 거야. 괜찮지도 않았고 멀쩡하지도 않았어.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었지. 나도 힘들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입이 백 개여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넌 괜찮길 바랐어. 내가 없는 게 더 나은 거라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지."

"……."

서지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훨씬 더 잘 지내길 바랐는데. 얼마나 이기적인 욕심이었던가. 평생 힘들다는 소리 한 번 입에 올린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무거운 속내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신해량에게 서지혁은 서지혁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존재였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서지혁은 눈가가 시큰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내 상담사가 그러더군.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위한 일을 해보라고.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라고. ……그래서 호텔에 간 거야. 널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가 아니라 날 위해 너한테 간 거야. 나한테도 기회를 주려고. 나도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싶었으니까. 합리나 효율 같은 건 생각 안 했어. 그래서 확신 같은 건 할 수 없지만.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그게 다야."

"……저도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다시는 도망 가지 마."

"물개가 바다 떠나서 어딜 가겠습니까. 당신이 제 집인데요."

지금이라도 대가리를 박을까. 미안해서 죽어버릴 거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참회의 의미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고작 3층이라 진심이 흐려질 것 같았다. 어떡하지. 망할. 서지혁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촉촉한 눈을 부릅 뜨고 신해량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신해량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넌 집 없잖아."

아니. 여기에 이런 대답을 한다고? 눈물이 쏙 들어가고 분위기가 다 깨지네.

"하. 참나. 그러니까, 당신이 제 집이라고 로맨틱한 소리를 한 거잖아요! 근데 이걸 홀랑 깨 먹네. 에라이. 그래, 저는 집도 없는 떠돌이 똥개입니다. 됐어요?"

"똥개라고 한 적은 없어."

"아, 예. 예. 집 몇 채씩 있는 귀하신 분께 빈대처럼 빌붙어 살아서 참 죄송합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나도 민망해서 그랬어."

"집도 없는 놈 먹여살리며 가장 노릇 하시느라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만하라고 했지."

"옙."

자기도 장난쳐놓고 왜 나한테만 난리인지. 괜히 삐져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으니 신해량이 사냥 직전의 고양이처럼 빤히 쳐다본다. 아니. 또 왜? 저 인간 머릿속은 진짜 알 수가 없네. 왜 그러냐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신해량이 기습적으로 서지혁에게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서지혁이 순간적으로 으악!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신해량이 입술을 떼고 커진 눈으로 서지혁을 쳐다봤다.

"뭐, 뭡니까? 갑자기?!"

"……네가 뽀뽀해 달라며."

"예? 제가 언제요?"

"입술을 쭉 내밀었잖아."

"예? 아니. 예?"

무슨 헛소리야, 이게? 삐졌다고 입 댓 발 내밀고 있는 걸 뽀뽀해 달라는 시그널로 알아들었다는 건가. 미치겠네. 예전엔 대놓고 뽀뽀해 달라고 코앞에서 입술 쭉 내밀고 있어도 안 해주더니. 그리고 뽀뽀를 할 거면 좀. 이게 얼마 만에 하는 입맞춤인데 꼭 그렇게 사람 잡아먹듯이 달려들어야 하냐고. 좀 더 달달하고 꽁냥꽁냥 설레고 그런 거. 어? 모르냐고. 어? 왜 매번 이런 식이실까? 이 인간은?

"아니면 됐어."

"되긴 뭐가 됐어요? 깜짝 놀랐네, 진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으니 신해량이 웃는다. 이게 웃기냐? 웃겨? 웃기겠지. 그래. 웃으니까 얼마나 이뻐. 기깔나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져서 헤실 거리며 따라 웃고 있는데 신해량이 낮은 목소리로 서지혁을 불렀다.

"서지혁."

"옙."

"또 도망가면 내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라도 널 찾을 거야."

"……예? 그, 그렇게까지요?"

"그리고 도망간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어. 예?"

"또 도망갈 거야?"

"아뇨! 아뇨. 절대 아뇨. 당신 옆에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서 안 떨어질 겁니다."

"그래."

신해량이 만족한 듯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아무래도 미친놈한테 단단히 잘못 걸린 거 같은데. 이게 맞는 건가? 이게 맞아? 내가 상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상하다?

나 좆 된 건가?

쿵쿵쿵쿵.

연애의 시작을 알리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렘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떨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양치했어?"

"예! 치실도 썼어요!"

그래, 뭐 아무렴 어떠냐. 사이코 도라이 남자친구한테 도망만 안 가면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

미친놈 손에 뒤지기 싫으면 평생 옆에 붙어살아야지 어쩌겠어.

난 그냥 죽여주게 섹시한 남자친구랑 진한 키스나 할란다.

겹쳐진 두 사람 위로 햇빛이 파도처럼 부서져 내렸다. 진득하고 축축한 바닷속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영원히 빠져 살고 싶은 포근한 바다였다. 눈을 감으면 바닷물이 몸을 간지럽히듯 달라붙었고 눈을 뜨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바닷속에 푹 빠진 물개는 온 세상인 바다를 가진 듯 자유롭게 헤엄쳤다.


살살 좀 해. 아, 죄송해요. 흥분 좀 가라앉혀. 저도 오랜만이라 잘 조절이 안 되네요.

꽤 오랜만인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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