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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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자기~"
"자기?"
"꼭 그렇게 잘못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굴어야 합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에 기분이 좋아서 기껏 애교 섞인 호칭을 불러뒀더니 이런 반응이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에휴.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쉰 서지혁이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평소라면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고 조깅을 갈 시간이었지만, 어제 애틋한 재회의 감동으로 종일 격한 운동을 해댄 덕분에 서지혁은 오늘 모든 운동은 패스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재결합이었다. 그리고 옆에 멍하니 누워있는 신해량 또한 서지혁과 같은 계획인 것인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제 물건 왜 정리를 안 했어요?"
"……."
30초가 지나도록 대답이 없길래 옆을 쳐다보니 신해량은 여전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건가. 힘들긴 했나 보다. 그러게 왜 그렇게 도발을 해대서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있으니 신해량도 고개를 돌려 서지혁을 바라봤다. 햐. 진짜 이 인간은 아침부터 혼자 끝내주게 반짝거리네. 얌전히 일자를 그리고 있는 입술에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전에 들어야 할 대답이 있어서 참았다. 정작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질문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있길래 손을 뻗어서 헝클어져 내려온 까만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었다.
"돌아올 거 같아서."
"예? 아니.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그냥."
더 말을 해주나 해서 기다렸더니 그대로 다시 입을 꾹 닫는다. 허허허. 뭐지? 더 길게 설명을 해달라구요. 서지혁의 손가락이 맨살인 신해량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랬더니 신해량이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로봇처럼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 덕에 걸치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려 근육이 잘 잡힌 상체가 드러났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 내리는 두툼한 흉통이 아침부터 자극적이었다. 수영이 취미인 사람을 물어뜯어 놓을 수는 없어서 알뜰살뜰 입만 맞추며 아껴줬더니 오래된 흉터를 제외하곤 몸이 깨끗했다. 서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쩝 다시고는 신해량을 따라 침대에 앉았다.
"왜 대답을 안 해줘요? 그러니까 뭐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거 같잖아요."
"대단한 이유랄 건 없어. 나중에 말해줄게. 씻고 와."
"아니. 지금 말해주면 안 됩니까?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씻어."
신해량은 그 말을 하고는 기어코 침대 밖으로 나갔다. 허. 참나. 어이가 없어서 좁은 골반에서 이어지는 탄탄한 엉덩이만 바라보고 있는데, 신해량은 방바닥을 살펴보다 서지혁의 방에서 나갔다. 옷가지를 찾다가 거실에 죄다 던져둔 게 생각난 것 같았다. 에이. 침대에 붙어서 좀 더 꽁냥거리려고 했더니. 몸도 힘들면서 부지런 떨기는. 서지혁은 입을 쩍 벌려 크게 하품을 하다 입을 옷을 챙겨 거실의 화장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니 어제 무리한 근육들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제 상태를 보아하니 상대의 상태는 안 봐도 뻔해서 걱정이 좀 되었다. 씻고 마사지나 좀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저 샤워를 끝냈다. 양치질의 마무리로 치실 사용도 빼먹지 않고, 머리까지 말리고 옷을 입고 거실로 나가니 때마침 신해량도 방에서 나왔다. 예쁜 이마를 가지런히 덮은 앞머리가 보송보송해 보였다.
"잠깐만 이리 와보십쇼."
"왜?"
오라는 소리를 해놓고 그 사이도 참지 못해 신해량의 앞까지 빠르게 걸어온 서지혁이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신해량은 웬일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친히 발걸음을 옮겨주었는데, 서지혁은 그런 신해량을 침대에 앉혔다. 여전히 뭘 하는 거냐는 표정의 신해량이 서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엎드려 보십쇼. 마사지 좀 해줄게요."
"괜찮아."
"그놈의 '괜찮아' 압수입니다. 그냥 얌전히 좀 누우십쇼. 빨리빨리."
신해량의 눈이 잠시 방 밖을 향했다가 순응한 듯 얌전히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워낙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양반이라 이 시간에 밥을 꼭 먹고 싶은 것 같았다. 몸도 힘들 테니 평소보다 더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다. 그건 서지혁도 마찬가지였지만, 신해량은 밥을 먹고 나면 또 소화를 시킨다고 운동을 할 게 뻔해서 몸을 미리 풀어주고 싶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누워있는 신해량의 어깨부터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눌러 쓸어주었다. 보기엔 단단해 보였지만 평소에도 몸을 잘 풀어두는 습관 때문에 의외로 말랑한 편이었다. 그래도 어깨를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풀어주고 팔도 한쪽씩 잡고 손바닥으로 꾹꾹 쓸듯이 눌러 마사지했다. 괜찮다고 해놓고 정작 주물러지고 있으니 기분이 좋은 건지 앓는 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잘 누워 있는 꼴이 귀여웠다.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에 뽀뽀를 해주니 곧바로 돌아본다. 아파요? ……아니. 그럼 다시 고개 돌리고 앞만 봅시다. 그리 말하면서 엉덩이를 두 번 토닥였더니, 신해량의 눈빛이 순간 매서워졌지만 곧바로 다시 고개를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팔을 열심히 주물러주고 다시 어깨를 한 번 쓸어준 다음, 너른 등에 손을 올렸다. 넓은 승모근부터 지압하듯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고 날개뼈 부근의 근육까지 힘주어 눌러주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마사지를 하니 영 맛이 안 나서 상의 속으로 손을 불쑥 넣어 광배근과 척추 사이를 눌러주었더니 신해량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서지혁이 실실 웃으며 신해량의 척추를 쓸어내렸다.
"지금 느끼신 겁니까?"
"그런 거 아니야."
"햐.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걸 보니 맞는 거 같은데요."
"아니라니까. ……네 손이 차가워서 놀란 거야."
"예이예이. 그런 걸로 합시다."
시원찮은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또 고개를 돌려 노려보길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앞이나 보라니까요. 그건 상관없잖아. 그럼 목 근육 아프게 계속 그러고 계시든가요. 그랬더니 신해량이 뚱한 표정으로 다시 베개를 끌어안았다. 척추 기립근과 골반 쪽 근육까지 살살 풀어주니, 바지를 입었어도 탄탄한 굴곡이 보이는 엉덩이가 서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젤 고생했지. 서지혁은 키득거리며 신해량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콱 쥐었다. 바로 고개가 다시 돌아갈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반응은 재미없지만 어쨌든 고생을 시킨 장본인이라 서지혁은 정성스럽게 신해량의 바지 위로 엉덩이를 주물렀다. 넓은 어깨와 등에 비해 좁은 골반과 작은 엉덩이가 참 예술적인 조화였다. 어떻게 못난 부분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발가락도 섹시한 인간이니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몸매였다. 인생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남자를 가진 서지혁은 불평할 데도 없었다.
"유독 한 부분만 너무 오래 주무르는 거 같은데."
"여기가 제일 고생했으니 보상은 톡톡히 해줘야죠."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당연히 둘 다 좋자고 하는 거죠."
장난기가 도져 바지 안으로 손을 넣을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아침부터 불이 붙을 것 같아서 참았다. 어제 고생했다고 마사지를 해주는 건데, 이게 불씨가 되어 버리면 진심이 퇴색되기 딱 좋으니까. 신해량의 엉덩이로 거의 촉감놀이를 한 서지혁이 드디어 손을 아래로 옮겼다. 튼실한 허벅지를 주물러주니 그제야 작은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종일 땅에 닿을 틈 없이 들고 있었으니 아플 만도. 엉덩이 바로 아래쪽 부분부터 천천히 커다란 손으로 압박하듯 마사지를 하니 하아……. 하는 옅은 숨을 내뱉는 게 들렸다. 햐. 아침부터 꼴리는 소리를 내주시네. 서지혁은 허벅지 안쪽과 침대에 닿아있는 앞쪽까지 손을 밀어 넣어 모든 손가락을 사용해 지압했다. 근육이 충분히 풀릴 때까지 만져준 뒤 종아리와 발목까지 누르거나 당겨준 뒤 마사지를 끝냈다. 앞쪽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그대로 옷을 다 벗겨버릴 것만 같아서 참았다.
"손님. 마사지 끝났습니다. 몸은 잘 풀리셨는지요?"
"너도 누워봐. 마사지해 줄게."
"됐습니다. 저는 샤워하면서 풀었어요. 배고파 죽겠는데 밥이나 먹읍시다. 배고파 뒤지겠는데요."
신해량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서지혁을 노려보는 꼴을 보아하니 당장 억지로 눕혀서 강제로 마사지를 해줄지 배고프다고 하니 밥을 먼저 먹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눈치 빠른 서지혁은 배고파 죽기 직전이라며 우는소리를 해대면서 신해량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은 신해량은 그대로 서지혁에 의해 부엌으로 끌려갔다.
아침밥은 간단하게 차려 먹으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배가 많이 고팠던 터라 아침부터 과식을 했다. 너무 배가 불러서 토할 것 같다는 서지혁을 강제로 스트레칭 시킨 신해량은 위장에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소화를 시키고 서지혁을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신해량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9월이라고 해봤자 봄과 가을이 사라진 한국의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9월 내도록 이렇게 덥겠지. 쨍한 해를 노려보고 있으니 커다란 손이 서지혁의 눈을 가렸다. 어째 낯익은 장면에 서지혁이 웃었다.
"해를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서지혁의 뜬금없는 질문에 신해량이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졍으로 쳐다봤다.
"……눈에 안 보이게 가리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비유적인 표현인가? 심리테스트 같은 거야?"
"하. 당신은 진짜 재미가 없어요."
"네가 이상한 소리를 했잖아."
"예, 예. 차나 타죠. 더워요."
삐빅. 차 키 소리가 나자마자 서지혁이 부리나케 운전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앉았다. 코앞에서 자리를 빼앗긴 신해량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안전벨트 매고 꽉 잡으십쇼~ 장난스럽게 말한 서지혁이 차를 운전했다. 신해량의 차는 서지혁이 머물렀던 호텔로 향했다. 신해량의 집으로 올 때 덜 챙긴 짐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며칠 만에 온 호텔방에 오니 그래도 한 달 동안 머물렀다고 꽤 반가웠다. 통 정이 들지 않는 공간이었는데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다시 보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삼을 수는 없겠다 싶었다. 호텔방을 비운 동안 룸서비스를 모두 중단해 두었더니 신해량의 집으로 떠나기 전과 같은 상태였다. 독감으로 비실거리며 앓느라 빨래통을 비우지 못해 빨랫감이 몇 개 쌓여있긴 했지만 그를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평소에 깔끔 떨어둔 덕분이었다.
애초에 신해량의 집에서 챙겨 나온 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짐은 많지 않았다. 이전에 신해량이 눈에 보이는 짐을 몇 개 챙겨둔 덕도 있었다. 부피가 큰 옷가지부터 가방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비우니 30분도 되지 않아 모든 짐 정리가 끝났다. 뿌듯한 마음으로 호텔방을 둘러보던 서지혁이 아! 하며 침대 근처 벽 쪽으로 달려갔다.
"왜 그래?"
"와. 이걸 깜빡할 뻔했네. 내 역작!"
서지혁이 조심스럽게 벽에 걸어두었던 터프팅 그림을 빼내 신해량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천 조각을 받아든 신해량은 갈색 강아지 모양의 보들보들한 천을 만지작거리며 살폈다. 그 사이 서지혁은 침대 옆쪽에 빼둔 액자를 벽에 걸어두었다. 원래 호텔방에 걸려 있던 갈대 풍경 그림 액자였는데, 터프팅 그림을 걸어두기 위해 빼둔 거였다. 액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 둔 서지혁은 다시 신해량을 쳐다보았는데 신해량은 여전히 강아지 그림을 매만지고 있었다. 털실도 가지고 놀더니 이것도 실이라고 좋아하는 건가 싶어 웃었더니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했다.
"네가 만든 거야?"
"예. 귀엽죠? 이것도 총 쏘는 거라고 제가 또 소질이 있더라구요."
"총? ……잘 만들었네. 언제 만들었는데?"
"어……. 그냥 뭐 수영 다니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보려고 했던 때에? 얼마 안 됐어요."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제가 좀 재주가 많죠."
서지혁은 신기하다는 듯 그림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신해량의 손을 잡고 침대에 앉혔다. 그렇게 신기한가? 자기가 이것저것 만들어 온 게 더 많으면서. 호기심 많은 고양이같이 구는 게 귀여워서 서지혁은 신해량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곧바로 신해량이 쳐다보길래 불만 있으면 덤비라는 소리를 하려고 했더니, 신해량은 그대로 서지혁에게 입을 맞추었다. 쪽. 어라?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신해량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갈색 강아지 그림을 만지작거렸다. 뭐지? 뭐지? 뭔데? 원래 막 노려봐야 하는 타이밍 아니었나? 왜 입에 뽀뽀를 해주지? 남자친구처럼?
아. 남자친구 맞구나. 맞지. 맞다. 우리 연애하고 있는 거지. 하. 적응 안 돼 죽겠네.
"거. 질투 나게 강아지 그만 보시고 옆에 있는 남자친구 좀 봐주시죠?"
"너 닮았는데."
"가만 보면 뭐 좀 귀엽거나 이쁜 거 있으면 다 저 닮았다고 하시네요. 콩깍지 몇 겹 꼈습니까? 눈 좀 봅시다."
"너도 바다 관련된 거면 다 나 같다고 그러잖아."
"그건 진짜 닮았으니까 그렇죠."
"이것도 너 닮았어."
하여간 고집은. 그럼 나 닮아서 그렇게 쓰담뽀담 눈도 못 떼고 있었다는 건가? 갈색 강아지 캐릭터와 닮았다는 소리는 클래스를 진행할 때도 들어서 그다지 놀라울 건 없었지만, 신해량의 입으로 듣는 건 괜히 더 간질간질했다. 털실의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서 서지혁 또한 자주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신해량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신기했다. 터프팅 그림에서 손을 못 떼는 신해량을 보고는 서지혁이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한 100년 뒤에 팔면 30억의 가치는 할 정도의 명작이긴 하지만 까짓것, 성질 드럽고 이쁜 애인한테 주죠. 뭐."
"선물?"
"예. 그렇게 이뻐 죽겠다는 듯이 보고 있는데 도로 달라고 하기도 뭐 한데요. 저 닮았다고 하니 방에 걸어두고 보면서 제 생각 많이 하십쇼."
"……고마워."
어어? 괜찮다면서 한번은 튕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홀랑 받는다고? 햐. 그렇게 마음에 드나? 다음엔 아예 덮고 잘 수 있게 이불 같은 걸 만들어 줄까.
"빠진 거 없이 다 챙겼으면 가자."
"예? 벌써요? 아니. 그. 모처럼 호텔도 왔는데요?"
"다른 할 일이 있나?"
"할 일이야 많죠."
서지혁은 신해량이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강아지 그림을 빼앗아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는 신해량의 몸을 깔아뭉개듯 눌러 눕혔다. 고집부리지 않고 얌전히 잘 누워 있는 두툼한 몸뚱이 위에 엎드리듯 끌어안은 서지혁이 신해량의 입술에 쪽쪽쪽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하자고?"
"예. 9월 말까지 머무는 걸로 예약했는데, 또 생돈 날리게 생겼잖아요. 뭐라도 하고 가야 덜 억울하죠. 심심할 때마다 여기 와서 호캉스나 할까요? 뭐 우리 집보다 좁아서 호캉스라고 하긴 뭐하다만."
"부분 환불도 안 된대?"
"되기야 하겠죠. 그건 규정 좀 봐야 되겠는데요. 애초에 한 달 숙박권으로 산 거라 이제 와서 취소해 봤자 뭐 얼마나 돌려주겠습니까. 50퍼나 해주면 감사할 거 같은데. 그럴 거면 그냥 종종 여기서 노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어차피 여행도 취소됐겠다, 9월에 할 일도 없잖아요."
"여행이면 하와이 말하는 거지? 취소 안 했는데."
"예? 아니. 엥? 왜요? 미쳤습니까?"
서지혁이 물 밖으로 나온 생선처럼 펄쩍 뛰며 침대에 앉았다. 아니. 항공권 취소를 안 했다고? 호텔도? 식당도? 그 온갖 것들을 다? 미친 건가? 그게 다 얼만데?
"아니. 제가 떠났으면 바로 취소했어야죠. 그걸 다 그냥 두면 어떡합니까?"
"돌아왔잖아.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면 돼."
"돌아오긴 했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돌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니에요? 당신 돈 많은 건 아는데 생돈 날릴 인간은 아니잖아요. 그게 다 목숨 값인데."
"돌아올 거 같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안 건데요? 왜 말을 안 해줍니까? 빨리 좔좔 불어보십쇼. 뭐 진짜 신내림이라도 받았어요? 눈에 막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보이고 그래요?"
"그런 거 아니야."
"웃지만 말고 말을 해달라니까요!"
궁금해서 미치고 폴짝 뛰어버리겠다는 듯한 서지혁을 보며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기만 웃기면 단가? 누구는 소름이 끼쳐서 죽겠는데. 빨리 다 털어내보십쇼! 속도 모르고 웃기만 하는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드니 웃음을 갈무리한 신해량이 손바닥으로 서지혁의 얼굴을 밀어냈다. 악!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랬죠. ……아니. 그래서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사랑이라는 단어에 급 차분해진 서지혁이 볼을 긁으며 물었다.
"이별에 수많은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게 사랑이 될 수는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사랑 때문에 괴로울 수는 있어도, 사랑 때문에 헤어질 수는 없어. ……적어도 난 그래."
"그래서 제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 ……그래서 돌아왔잖아."
"돌아왔지요. 하하. 저는 여전히 당신 손바닥 안에 있는 거 같네요. ……제가 돌아올 거 알았는데도 힘들었습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는 거니까. ……보고 싶었다고 했잖아."
말하는 투가 꼭 투정 부리는 것 같아서 여전히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는 신해량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이마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면서 짐도 그대로 두고 함께한 약속도 져버리지 않고 있었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 신해량씨 참 도라이야. 저보다 저를 더 믿는 거 같은데요."
"네가 널 너무 안 믿는 거겠지."
"어……. 그런가? 아닌데. 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 아닌데. 아닌가?"
"됐어. 이제 집에 가자."
"예? 아니. 진짜 그냥 가려구요? 이렇게 크고 깨끗하고 폭신한 호텔 침대를 그냥 두고요?"
"그럼 가져갈 거야?"
"아니. 진짜. ……하. 됐습니다. 어제 무리해서 제가 봐줬습니다. 그럼 뭐 여기 다시 올 일도 없을 테니 부분 환불이라도 해달라고 해볼게요."
"못 받아도 걱정 하지 마. 나는 월세 안 받잖아."
"아주 참으로 고맙네요."
밖에서 점심까지 사 먹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바로 서지혁의 방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짐을 쌀 때와 마찬가지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작은 잡동사니를 먼저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서지혁은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넣고 이미 세탁된 옷을 옷장에 정리했다. 붙박이 옷장 문을 닫고 무심코 옆에 붙어 있는 두 번째 옷장을 열어 보았는데, 못 보던 잠옷 두 벌이 걸려 있었다.
뭐지 싶어서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잠옷을 살펴보니 신해량이 출장을 갔을 때 사둔 커플 잠옷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신해량이 서지혁의 방을 청소하다 발견하고 세탁해 걸어둔 것 같았다. 옆을 보니 그때 같이 산 옷가지 몇 개와 모자도 걸려 있었다. 깨끗하고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걸려 있는 걸 보니 모두 이미 한 번 빨래를 한 것 같았다.
서지혁은 신해량을 주려고 샀던 옷과 잠옷을 꺼내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협탁 첫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는데 수첩과 볼펜이 들어 있었다. 서지혁이 꿈일기를 썼던 수첩이었다. 펼쳐보니 비몽사몽한 상태로 날려 적어 알아보기도 어려운 말들이 꼬불거리며 쓰여 있었다. 나도 참 노력했구나. 지난 꿈들을 돌아보면 여전히 마음 한편이 답답했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서지혁은 수첩 몇 장을 넘겨 비워둔 종이에 볼펜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어제 날짜를 적고 고민하다 짤막한 문장을 썼다.
[신해량 내 거 된 날!]
유치한 문장에 웃으며 아래쪽에 오늘 날짜를 적어두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이건 자기 전에 써야지.
어차피 버리지 못하는 거라면 그 위에 좋은 것을 쌓아두면 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서랍은 어제 종일 열어두었기 때문에 따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뿌듯하게 둘러보고 있으니 신해량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거실로 나가 여보~ 자기~ 하면서 장난스럽게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길래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신해량이 손에 터프팅 그림을 들고 방 벽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건 또 언제 빼갔대.
"거기 걸려구요?"
"고민 중이야."
신해량은 침대 근처 벽에서 얼쩡거리며 방에 어울리지도 않는 깜찍한 강아지 그림을 벽에 대보며 고민했다. 서지혁이 뽑아준 인형에 이어 두 번째로 방에 안 어울리는 물건이 추가되었다.
"그냥 책상 근처에 걸어두죠? 뜨개질 할 때 보면서 제 생각 하면 되잖아요."
"네가 뜨개질할 시간도 안 주잖아."
"어……. 그렇네요? 그래도 뜨개질보단 저랑 노는 게 더 재밌지 않습니까? 제 생각 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게 더 좋기도 하고. 그렇죠?"
신해량은 대꾸도 하지 않고 책상 앞 벽에 핀을 꽂아 강아지 그림을 걸어두었다. 드디어 자리를 찾은 보송한 갈색 강아지가 더욱 행복해 보였다. 햐. 좀 흐뭇한데.
"그건 뭐야?"
"아. 이거 당신 주려고 샀던 건데. 받으십쇼."
방에서 들고 온 잠옷과 여름 옷을 건네니 신해량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서지혁을 쳐다봤다. 빨래하면서도 자기 건 줄은 몰랐나 보다. 옷을 건네받은 신해량이 제 몸 위에 옷을 살짝 대보았다. 누가 골랐는지 찰떡같이 잘 어울리네.
"고마워. 잘 입을게."
"예이예이."
"나도 줄 게 있어."
"어? 뭡니까? 선물이에요?"
"응."
짧은 대답만 남기고 신해량은 옷방 쪽으로 걸어갔다. 따라갈까 했는데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못 보던 동그란 물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유리 같은 구의 형태였는데 안쪽에 꽃이 들어 있었다. 생화인가? 신기해서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봤더니 노란색 튤립이었다. 어어? 그리고 그 옆에는 파란색 장미가 들어 있는 동그란 물체가 있었다. 이거 내가 선물했던 거 아닌가? 조심스레 물체를 들어 돌려가며 봤는데 색이며 모양이며 익숙했다. 말려서 넣은 것인지 생기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꽃 모양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책상 위를 다시 보니 비슷한 모양의 원형 물체 몇 개와 투명한 책갈피 모양의 물건도 몇 개 있었는데, 모두 투명하고 안쪽에 꽃이 들어 있었다. 이건 주황색 메리골드, 라넌큘러스. 메인 꽃송이 외 장식을 위해 사용한 작은 꽃도 알뜰살뜰 들어가 있었다. 이런 건 또 어떻게 만든 거지? 신기해서 손에 가득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으니 옷을 옷장에 넣고 온 신해량이 돌아와 서지혁의 옆에 섰다.
"이거 뭐예요? 이것도 직접 만든 거예요?"
"응. 문진이랑 책갈피로 만들었어."
"제가 준 꽃다발 맞죠?"
"맞아."
내가 다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그대로였다.
"……저 기다리는 동안 만든 거죠?"
"그래."
"……당신은 진짜. 뭐든 다 해주고 싶게 만들어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선물할 맛이 나네요."
"네가 예쁜 것만 줘서 그래."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음이 찡해서 예쁜 입술에 뽀뽀를 했더니 말랑거리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사탕 먹듯 혀로 살살 쓸었더니 촉촉해진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속에서 마중 나온 붉은 혀가 서지혁의 입술을 짓이기듯 힘주어 눌렀다. 더운 숨을 느끼며 혀를 얽었더니 신해량이 입술을 떼어냈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신해량이 입술을 손등으로 눌러 닦고는 줄 게 있다고 했잖아. 한다. 아니, 키스하고 주면 어디 덧나나? 하여간, 자기가 생각한 게 있으면 그걸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인간 답긴 했다.
이 중에 뭘 주려나 싶어서 꽃이 들어 있는 문진을 손에 쥐고 있는데 신해량은 뜬금없이 책상 서랍을 열어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저건 또 뭐지?
"그건 뭐예요? 이게 선물이 아니었어요?"
"그건 내 거야."
그렇게 말한 신해량은 서지혁이 손에 쥐고 있던 문진을 빼앗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허. 뭐지? 이건 나한테 주기 아깝다는 거야 뭐야? 빈손이 된 서지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신해량은 태연하게 서지혁의 손에 작은 상자를 올려 두었다. 확인해 보라는 눈짓에 포장을 풀어보니 스마트 워치 스트랩이었다. 갈색에 가까운 가죽 소재였는데 스티치 형태나 마감이 척 봐도 장인이 만든 물건처럼 고풍스럽고도 고급스러웠다. 이게 워치 보다 더 비쌀 거 같은데.
예상도 못 한 선물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왼쪽 손을 잡더니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풀었다. 그러자 손목에 새겨진 두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는데 신해량은 워치 스트랩을 풀고 서지혁이 들고 있던 케이스에서 가죽 스트랩을 빼내 교체했다. 스트랩을 빼내니 가죽 안쪽에 서지혁의 영어 이니셜과 생년월일, 혈액형이 새겨진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바로 붙어 있는 영어 단어를 보고 서지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Full Code'요? 제 의견은요?"
"마음에 안 들면 버리든가."
남의 신상명세서를 적어둔 것도 모자라서 DNR에 본격적으로 반대되는 용어를 떡하니 써두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이건 언제 맡긴 건데요?"
"좀 됐어."
"잘 보이지도 않는 시계 안쪽보다는 몸에 새긴 게 더 우선으로 처리 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냥 문신을 지우라고 협박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이 피식 웃었다.
"사람은 남이 못 바꿔."
"저는 이미 글러먹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스스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가? 그래도 저는 당신이나 애영이나 뭐. 주변 영향받고 바뀐 게 없진 않은 거 같은데요."
"그것도 네가 스스로 변하는 걸 선택한 거지."
그게 그렇게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왼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신을 누르듯 쓸었다.
"난 너 고쳐먹을 생각 없어. ……그래도."
신해량은 갈색 가죽 스트랩을 단 스마트 워치를 서지혁의 왼쪽 손목에 채워 주었다. 그리곤 문신이 있던 자리를 딱 가리는 스트랩을 또 문지르더니 서지혁과 시선을 맞추었다.
"작은 변화 정도는 줄 수 있겠지."
문장을 끝맺는 입술이 싱긋 올라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서지혁도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거 풀 일 없게 해."
"족쇄처럼 느껴지는데요."
"족쇄 맞아."
"그 말 들으니까 좀 꼴리는데요. 이거 좀 변태 같습니까?"
"그래."
"족쇄 선물하는 사람이 더 변태 아닙니까?"
"맞아."
하하하하. 하여간 우리 신해량씨 참 도라이라니까.
그래서 저건 진짜 저 안 줄 거예요? 안 줘. 왜요? 내 거라고 했잖아. 치사하네, 저희 사이에 니 거 내 거가 어디 있어요? 있어. 제가 다 훔쳐 가면 그만인데요. 해봐.
고집하고는. 서지혁은 제 손목에 채워진 스트랩을 매만졌다. 부슬부슬한 가죽의 느낌이 기분 좋았다. 안쪽에 적힌 몇 글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 그래도. 어차피 벗을 일도 없을 텐데 일단은 그냥 차고 있을까. 가격도 더럽게 비싸 보이는데.
아늑한 집에서 보내는 소중한 연인과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진짜 진짜 저 안 줘요? 안 줘.
아 왜!! 이 치사한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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