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해량무현] 미래진행완료 5(.5)

30303 by 30

이렇게 끝이라고? 진짜?

박무현은 노을이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갔던 거니까 갑자기 오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만……진짜로? 끈질긴 추궁에도 주황색 천에 까맣게 박힌 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옆구리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던 꿰맨 흔적도 없었다. 분명 어제 신해량과 세탁실까지 같이 와서 건조기를 열었을 때 눈으로 보고, 손으로도 만져서 확인했었는데. 이게 자신이 꿰맨 부분이라 알려주던 목소리도 아직 귀에 생생한데, 하룻밤을 자고 난 지금은 다시 바늘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 꿰맨 게 없어진 게 아니라 노을이가 어제 먼저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밤이 지나는 동안 자신이 그 뒤를 따라 돌아온 거라고.

건조기 안에서 신해량이 꺼내는 노을이를 보는 순간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얘는 내 노을이가 아니구나. 그럼 내 노을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랑 같이 온 녀석이 이 노을이랑 바뀌어서 먼저 돌아간 거라면 그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느낌이.

박무현은 노을이의 변화에 자신과 같은 것을 느꼈는지 다시 한번 침대 옆자리를 청하던 이를 떠올렸다. 상대는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느냐고 처음과 같은 말을 했고, 이번엔 이쪽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안 된다고 거절해냈다.

만에 하나라도 같이 휘말려서 한쪽에 신 팀장님이 두 명이 되어버리기라도 하면요. 치과에 환자가 두 배로 밀려올 텐데, 전 그거 감당 못 합니다. 짐짓 심각한 척 그렇게 말한 게 통했는지 가만히 생각하던 신해량은 방문까지만 동행하고 문 앞에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거기서 그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면 아무 말이나 하다가 당신이 옆에 누워있으면 도저히 못 잘 것 같다는 말까지 해버렸을지도 모르겠으니까.

턱과 치아에만 위험한 게 아니라 심장에도 위험한 남자를 그렇게 돌려보내고 혼자 잠들었고, 이렇게 오늘이 왔다. 와 버렸다.

‘음. 뭐. 그래. 잘 돌아왔으면 된 거지. 좀 아쉽기는 하지만…….’

……뭐. 조금 더 같이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못 한 게 아쉽다는 거다. 왜 그렇게 보냐. 박무현은 저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향해 변명을 늘어놓으며 1년 후에도 똑같아 보일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마자, 신해량과 마주쳤다.

1년의 차이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똑같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팔목에서 눈에 익은 팔찌를 본 건 그다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예. …안녕하세요.”

평상시와 같은 인사를 이전보다 두 배는 어색한 몸짓으로 받은 박무현은 옆을 지나간 남자를 돌아보는 대신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방금 본 것과 같은 것이 주머니 안에서 손에 잡혔다.

신해량을 문 앞에서 돌려보내면서 같이 들려 보내는 것을 잊은 물건이었다. 그대로 잤다가 여기까지 가져와 버린 것이기도 했고,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표이기도 했다.

주머니로 들어온 손끝이 단단히 엮인 매듭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더듬었다. 자신이 미쳐서 헛것을 봤던 게 아니라는 증거도 있고,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했으니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이 기분은 뭘까. 이제 저 사람은 나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아니, 이제가 아니라 원래……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돼?

등 뒤에 남은 박무현의 왼발이 서운함에, 오른발이 혼란에 붙들려있는 사이 신해량은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그 역시 박무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곁에 서서, 자신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던 것을.

이건 1년 후의 해량 씨도 모르는 건데…….

그다음 숨을 한 모금 들이키면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웃음소리가 스치고 이어진 말까지.

먼저 좋아한 건 접니다. 이거 비밀이에요.

……언제일까. 그 직후 고래 인형에 생긴 이상을 확인하느라 더 묻지 못해 알 수가 없었다. 그럼…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등 뒤에 두고 온 기척과 꽤 멀어졌을 즈음, 신해량의 걸음도 멈추었다. 이번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던 말이 그를 잡아 세웠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다는 건, 보다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고.

앞을 보고 있던 몸이 뒤로 돌아섰다. 지금쯤이면 서운함에 발목을 잡혔던 치과의사가 다시 걷기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엔지니어 가팀 팀장에게 그 정도를 따라잡는 일은 애인의 인형을 몇 바늘 꿰매는 것만큼이나 쉽고도 기꺼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저기지 생활만 수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어디든 발을 들이기 전에 버릇처럼 내부를 훑어보는 신해량의 눈에 비친 것은 두 사람이었다. 패드를 보고 있다가 열린 문을 힐끗 보고 다시 패드로 눈을 돌리는 여성 한 명, 그리고 박무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한국어로 적당한 인사가 건너왔다. 신해량 역시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네모난 공간에 잠시 침묵이 고였다가 패드를 든 여성이 중간에 내리느라 커다란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닫혔다.

비로소 단둘이었다. 앞을 보고 선 신해량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을 향해 서서 바뀌는 층수 표시를 보고 있던 박무현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얼굴은 똑같지 않았나요? 1년 사이에 그렇게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 텐데.”

농담으로 건넨 말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박무현의 고개가 소리 없이 슥 돌아갔다.

“……아닙니까? 저 1년 새 많이 늙었나요?”

만약 그렇다면 거기 해량 씨 지분이 상당하다는 것만 알아두시죠. 불만스레 중얼거린 입속말에 신해량이 옆으로 한 걸음 크게 다가와 섰다.

“1년 전의 선생님하고는 이걸 못하니까요.”

얼굴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뺨 위를 가볍게 찍고 물러났다.

“그건…그렇군요.”

눈만 옆으로 굴리고 도망치지 않는 뺨에 한 번 더.

“작년의 신 팀장님이 귀엽기는 했지만…….”

입가에 가까운 위치에 세 번째를 찍으려다가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순간 멈칫한 신해량을 대신해서, 이번엔 이쪽이 발돋움했다.

“이런 건 해량 씨하고 해야죠.”

넓은 엘리베이터에 단 두 사람. 쪽 소리가 나기까지에는 아주 조금이면 충분한 거리만 남아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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