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바다의 토끼가 되어
2023 아이소 배포본
약 해량무현...인듯 아닌듯? 해무제조공장에서 발행하였습니다
바닷속이라 그런가, 해가 바뀌었다는 게 별로 실감이 안 나네.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가 무슨 동물이더라?
아니면 여기.
어, 호랑인가? 그건 작년이야. 그럼 토끼네. 어느 나라에서는 토끼 대신에 고양이래요. 고양이? 고양이띠도 있어? 상현이가 보던 만화 내용 아니고? 아 형!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여기쯤?
전에 보니까 거기 교복 입은 여자애들이 다 동물 귀 달고 나오는 거 같던데. 토끼도 있고 고양이도…. 아 그건 십이지랑 상관없는 거거든요! 그리고 애니가 아니고 게임…….
업무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샤워실의 반투명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잠깐 떠들었던 이야기. 바로 그 덕분에 바뀐 해를 실감 나게 해줄 무언가가 머리에서 솟아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아직은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떠들고 있는 세 남자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샤워기 물줄기만 묵묵히 맞고 있는 잘생긴 팀장도, 저 멀리 자기 방에서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우리의 운 없는 치과의사도.
* * *
“뭐야 저게?”
“씬이 드디어 미친 거야?”
“드디어라니, 씬은 원래 미친놈이었어.”
“아까 마신 보드카에 이상한 게 섞였나. 자꾸 이상한 게 보이네. 니키타, 애들 챙겨서 해장술이나 하러 가자.”
괴상한 수군거림이 배경음악처럼 깔린 가운데, 제일 괴상한 것은 엔지니어 가팀의 머리 위에 달려있었다. 아주 귀엽고 깜찍하고 보송보송한 털이 달린 토끼 귀 한 쌍이 그것이다.
본체의 침울한 기분이 스며든 건지 귀가 무겁게 축 처진 서지혁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어헝…. 지현이가 날 이상한 눈으로 봤어…….”
“이미 다섯 번에 세 번은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형.”
“그건 애영이 아니야?”
“애영이는 다섯 번 중 일곱 번을 그렇게 보죠.”
잔인한 위로를 친절하게 건네준 김재희도 귀가 달려있긴 마찬가지였다. 김재희는 제 머리카락 색과 똑같이 불그스름한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옆에서 불만스럽게 까딱거리고 있는 귀에 대고 예고 없이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아 미친, 형!”
“하하, 움찔거리는 거 봐. 살아있는 것 같아. 징그럽다.”
“남자가 남자 귀에 왜 바람을 불어요! 변태예요?”
빽 소리를 지른 정상현이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써서 귀를 덮었다. 아, 이런 이벤트는 미소녀 아니면 인정 안 되는데, 라며 한참 구시렁대던 정상현의 눈이 가장 높이 솟은 까만 귀를 향했다.
“어떻게 좀 해봐요, 팀장님!”
뽑든가! 자르든가! 뭐든 해보라고요! 정상현이 발을 동동 구르자 실실 웃는 김재희 다음으로 평소에 가까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신해량이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근육이 이어져 있으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
정상현은 그 말을 듣고도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억지로 귀를 잡아당기다가 악 소리를 내며 욕과 눈물을 찍 흘리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우리 상현이 탐구 정신이 투철하기도 하지. 놀리는 김재희의 뒤 저편에서 누군가 경박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헤이! 바니 걸 이벤트야? 여자들은 어디 갔어!”
낄낄 웃으며 지나가는 채굴팀 덩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준 서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여자들은 문제없어서 다행이네요.”
물론 지현이는 토끼 귀를 달아도 깜찍하고 귀엽겠지만! 한 번쯤 보고는 싶지만! 작게 욕망을 토해내는 서지혁을 외면한 채 패드만 들여다보고 있던 신해량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지혁의 말대로 가팀 여성들에게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고, 주변 반응으로 보건대 다른 팀에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것이 ‘가팀 남성’에 한정된 일이냐, 아니면 ‘한국국적 남성’에게 해당하는 일이냐. 그걸 확인하려면 한 사람의 대답이 필요한데…….
다가온 서지혁이 신해량의 어깨너머로 같이 패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빨선생님도 남자라고, 쪽팔려서 대답 안 하는 걸까요?”
혹시 신체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박무현의 대답이 아직이었다. 분명 메시지를 읽기는 했는데.
“저희 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냅니까?”
“전 죽어도 안 찍어요!”
“전에 너 고양이 귀 필터로 사진 찍은 거 봤는데. 토끼 귀는 싫어?”
“무, 무슨 소리예요! 안 찍었거든요!”
등 뒤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익숙하게 무시한 신해량은 조용히 백호동 38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직감에 꼿꼿하게 솟은 까만 귀 끝이 작게 움찔거렸다.
잠시 후 아무리 두드려도 응답 없는 방문을 팀장 권한으로 열었을 때, 머리에 토끼 귀를 단 남자 네 명은 침대 위에서 패드를 밟고 쩔쩔매고 있는 작은 토끼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토끼 귀를 단 치과의사가 아니라, 토끼가 된 치과의사였다.
* * *
“와, 신기하네. 어떻게 인공 안구까지 딱 맞춰서 변했지?”
까만 토끼를 높게 들어 올린 김재희가 햇빛에 보석이라도 비춰보듯 손을 여러 각도로 기울이며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빛이 반사될 때마다 까만 눈동자 한쪽이 새파랗게 반짝였다.
허물이라도 벗어놓은 것처럼 침대 이불 밑에 구겨져 있는 옷가지를 살피던 서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머리에 달린 건 안 신기하고?”
“이것도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똑같은 게 네 명이나 되니까 희소성이 없잖아요. 형은 안 신기해요?”
“신기고 나발이고,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려고. 깨자마자 복권이나 사야지.”
“개꿈이 아니라 토끼꿈인데요. 그쵸, 선생님?”
아, 말은 못 하나? 소리도 못 내요? 토끼는 어떻게 울더라. 바닥보다 천장에 훨씬 가까운 높이에서 자신을 이리저리 돌리며 묻는 불안한 손길에 바짝 긴장해있던 작은 몸을 다른 손이 넘겨받았다. 훨씬 커다랗고 안정적인 손이었다.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네. 본능적으로 스쳐 간 생각을 털어낸 박무현은 신해량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다가 패드에 온 메시지 소리에 깨보니 천장은 까마득히 높고, 침대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자신은 온몸이 털로 뒤덮인 네발짐승이 되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싶어도 털로 뒤덮인 푹신한 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짐승이 된 김에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잠시 내려놓고 패드를 혀로 누를까 고민까지 하고 있던 찰나에 기적처럼 문이 열리고 아는 얼굴들이 우르르 들어온 건 정말, 정말 반가웠는데…….
왜 너네는 귀만 달린 거냐…….
부럽다. 태어나서 저런 걸 부러워할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부럽다. 신해량의 손바닥 위에 침울하게 주저앉은 박무현이 애써 앞발에 힘을 주고 턱을 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얘네도 눈떠보니 전신이 토끼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사람으로 돌아와서 귀만 남은 걸 수도 있어. 그럼 나도!
“저희는 귀만 생겼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짐작하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토끼는 그만 앞발로 두 눈을 덮어버렸다.
“어, 쓰러졌다.”
“선생님, 울어요?”
* * *
든든한 노을이 옆에 기대어 앉은 박무현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운을 차리기까지는 약 5분이 걸렸다. 그동안 네 남자는 까만 털로 복슬복슬해진 치과의사를 누가 데리고 있을 것인가를 놓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었다. (당사자는 그냥 혼자 방에 있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을 전할 방도가 없었다.)
“전 싫어요! 만졌다가 옮아서 저도 저렇게 되면 어떡해요?”
“넌 토끼라도 되는 게 낫지 않을까? 토끼는 귀엽기라도 하지.”
“상현이는 토끼 말고 고양이가 좋은가 봐요. 취향은 존중합시다.”
“아, 형!”
정상현 놀리기에 진심인 대화가 오가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신해량이 한숨처럼 말했다.
“난 그날이야.”
“아, 맞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서지혁이 팀장의 머리 위를 노려보았다. 쓰읍, 영 불만스러운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거, 그 꼴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도발하긴 편하겠군.”
그날이 무슨 날인데? 소개팅이라도 하나? 소개팅 상대가 토끼 귀를 달고 나오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무리 아니냐. 어떡하냐. 걱정 어린 시선으로 서지혁과 신해량을 번갈아 쳐다보는 박무현을 눈치챈 김재희가 몸을 기울였다. 입가에 손까지 대고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는 모양새였지만 목소리는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월급을 건 도박판에 가는 날이라는 뜻이에요.”
도박. 해저기지에서 금지되는 행위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자 박무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동그란 토끼 눈이라서 별로 티는 안 났지만.
“팀장님이 석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가서 털어오거든요.”
세상에, 그것도 정기적으로? 도박판 말고 스케일링이나 정기적으로 와라, 이놈들아. 속이 터진 치과의사의 뒷발질에 밀려난 노을이가 옆으로 드러누웠다. 포커 테이블에 살아있는 토끼를 데리고 갔을 때 발생할 만한 돌발상황을 헤아려보던 신해량은 배를 내놓은 고래 인형을 보며 머릿속 목록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역시 곤란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는.”
“전 이따가 조명 손보러 가야 하는데. 공구 가방에 넣어놔도 괜찮으면 제가 맡고요.”
“형 공구 가방 잘 안 들고 다니잖아요?”
있는 줄도 몰랐네. 팀장님처럼 주먹으로 다 해결하는 줄 알았다며 웃은 김재희가 자기 방인 양 자연스레 침대에 앉고, 침대 주인은 의족을 단 무릎을 보고 옆으로 꼬물꼬물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 굳이 비켜줄 필요가 없어 보이는 크기를 눈으로 가늠하던 서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순 없잖아.”
“인형이라고 하고 다니면 되죠.”
“일하러 가면서 인형 들고 가는 미…….”
…친 놈이 어디 있냐고 코웃음 치려던 서지혁의 눈이 고래 인형을 데리고 출퇴근하는 치과의사의 눈과 마주쳤다. 재빨리 ‘미’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를 찾아 머리를 굴리는 서지혁을 도와 김재희가 소곤거렸다.
“미친놈이래요, 선생님.”
물론 박무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노을이를 들고 가기는 하지만 그가 일하는 동안 인형을 끌어안는 건 환자들이었으니까. 고장 난 조명을 수리하면서 전구나 전선에 인형을 안기고 다독여줄 일은 없을 테니 당연히 자신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렇기에 자신을 쳐다보는 눈을 아무 감정 없이 그저 같이 마주 볼 뿐이었지만, 서지혁에게는 동물의 표정을 읽어내는 재주가 없었고 당장 다음 주로 잡힌 치과 진료만 있었다.
도와주십쇼, 팀장님. 저 치과 예약해놨단 말입니다. 분노한 치과의사가 자신의 연약한 입안에 마취도 없이 무자비하게 드릴을 꽂아버리는 상상에 간절해진 부하의 시선을 받은 신해량이 적극적으로 서지혁의 편을 들어주었다.
“성인 남성이 동물 인형을 들고 다니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고, 불필요한 관심을 끌 겁니다. 지혁이 말대로 하시지요.”
아니, 그거 말고……. 꼭 이럴 땐 귀신같이 도움이 안 되는 팀장 뒤에 숨은 서지혁은 조용히 등 뒤로 패드를 꺼내 치과 예약을 취소했다. 내 잇몸은 소중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서지혁이 인형을 끼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고 관심을 가질 만한 놈들 중에는 평소 들고 다니지 않던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 역시 이상하게 보고 접근할 놈도 있다는 것.
문제는 바로 거기서 터졌다.
* * *
가방 속에 들어앉은 박무현은 최대한 작게 숨을 쉬었다. 그런다고 덜 무거워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들고 가는 서지혁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이 덜 되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서지혁은 가방 속을 전부 비우고(조명 수리에 쓸 공구는 대체 어디에 챙겼는지 모르겠다. 설마 정말 김재희의 말처럼 주먹을 쓰는 걸까?) 바닥에 수건을 깔고 박무현을 넣고 그 위를 다시 수건으로 덮어놓았다. 덕분에 어디 부딪히더라도 푹신할 것 같았는데, 살짝 열어놓은 지퍼 사이로 보이는 바깥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가는데도 부딪치기는커녕 걷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내 방 침대 매트리스도 이것보다는 흔들리겠다. 어떻게 걷는 걸까. 이 정도면 머리에 책 얹어도 안 떨어뜨리고 걸을 수 있겠는데. 물그릇…물그릇은 좀 위험한가……. 푹신하고 어둡고 따뜻한 공간에 가만히 있으려니 잠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던 박무현이 머리에 물그릇을 올리고 조신하게 다니는 문짝만 한 엔지니어들과 자기 물은 한 방울도 안 흘리면서 남의 그릇들을 죄다 박살 내버리는 신해량이 나오는 꿈을 꾸며 소리 없이 경악하고 있을 때, 서지혁은 언제나처럼 주먹으로 벽을 두들겨 공구를 꺼냈고,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미심쩍게 쳐다보는 눈들이 있었다.
“저놈 가방도 챙겨 왔으면서 왜 벽에서 꺼내냐.”
“대가리에 달린 건 안 이상하고?”
“머리띠겠지. 캐새끼도 저러고 카드 치러 왔다더라. 뭔가 수작 부릴 속셈이 뻔해. 그럴 땐 상대 안 해주고 발 빼는 게 상책이지.”
“상책은 개뿔, 감봉으로 판돈 딸려서 못 끼는 거면서.”
낄낄거리던 남자들 사이에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그럼 써지혁 저놈은 무슨 속셈으로 여기서 저런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건데?”
잠깐의 침묵. 그 사이에 남자들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평소 들고 다니지도 않던 걸 굳이 챙겨 왔으면서 열지 않고 가만히 들고만 있는 가방. 저기에 뭔가를 몰래 넣어서 옮기는 거라면……. 돈? 술? 담배? 약? 뭐가 됐든 대박이다. 의미심장한 눈짓이 빠르게 오갔다.
술 처먹은 놈이 지나가다 발로 걷어차기 딱 좋은 위치라 고장 신고가 잦은 바닥 조명 앞에 앉은 서지혁은 펜을 돌리듯 손가락 사이로 드라이버를 굴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의 숫자, 속도, 무게를 파악하는 데에는 두 바퀴면 족했지만, 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고민하는 데 한 바퀴를 더 돌렸다. 지킬 것이 있는 상황에서는 보수적으로 구는 게 낫겠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시비 걸리기 쉬운 날인데…….
티 나게 휘파람을 불며 등 뒤로 지나가는 놈들의 발끝에 닿지 않을 위치로 가방을 스윽 밀어 치우자, 신호탄이 떨어진 것처럼 눈이 벌게진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하여간 뻔한 새끼들! 좀 참신하게 움직이면 안 되냐!”
보이는 다리마다 공평하게 정강이를 한 대씩 까주고 가볍게 몸을 빼낸 서지혁이 바닥에 놓인 가방을 휙 낚아채다가 안에서 크게 구르는 움직임에 순간 멈칫했다. 어, 수건 깔았으니까 괜찮겠지? 선생님 낙법 아시나?
그 한순간의 멈칫거림이 집요한 놈의 손길에 걸리고 말았다. 우악스러운 힘으로 가방을 콱 움켜쥐는 솥뚜껑만 한 손에 서지혁의 뇌가 자동으로 끔찍한 상상을 토해내며 소리를 질렀다.
“으악! 미친놈아, 터져!”
“터진대! 약이구나!”
“아니야, 미친 새끼야!”
어떻게든 가방을 빼내려는 자와 어떻게든 잡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 손에 더 힘을 주는 자, 도우려고 끼어들었다가 굵은 팔꿈치에 얻어맞고 코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지는 놈에 그놈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머저리까지 가지가지하는 난장판 속에서 쥐어짜이던 가방의 지퍼가 지이익, 열렸다.
됐다! 그 틈새로 보이는 까만 덩어리를 재빨리 잡아 뺀 손이 환호했다. 되긴 뭐가 돼! 서지혁의 손등이 놈의 코에서도 피를 뽑아내고 곧장 달려들었지만 이미 다른 놈의 손으로 넘어간 후였다. 럭비공처럼 옆구리에 숨기고 뛰다가 패스하고, 자빠지고, 구르고, 내던져진 끝에 바닥에 툭 떨어져 힘없이 옆으로 퍼진 건……가방에 깔아두었던 진한 색의 수건이었다.
“하, 가죽……가죽 벗겨진 줄 알았네.”
서지혁은 바닥에 늘어진 게 자신이 상상한 끔찍한 무언가가 아님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았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수건을 들추며 뭐야, 어딨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을 한 번씩 걷어차고 돌아선 서지혁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쉬다 말고, 놈들과 똑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어딨어?”
복도 여기저기에 널린 패배자들과 핏자국과 입을 벌리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빈 가방은 있는데 어디에도 토끼가, 박무현이 없었다.
“……선생님?”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삼키며 서지혁이 소곤거렸다.
“……저 양치 안 했습니다?”
어제도 안 했고 오늘도 안 할 겁니다? 예? 치실 그게 뭐지? 먹는 건가? 혹시라도 못 보고 밟을까 봐 조심조심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되는대로 지껄이는 말들에 나오라는 치과의사 대신 서지혁의 뒤에 남겨진 패배자들만 더러운 새끼……. 하고 작게 훌쩍이며 대답했다.
* *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먼지가 가득 쌓인 낯선 장소에 우두커니 앉은 박무현이 힘없이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자다 깼더니 토끼가 되어있고, 또 자다가 깨보니 모르는 곳이다. 지진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흔들림에 눈도 못 뜨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공중에 붕 뜨는 느낌까지 났었는데…….
서지혁이 심심해서 가방을 칵테일 셰이커처럼 마구 흔들어댄 게 아니라면 외부에서 뭔가 사고가 났다는 뜻일 테고, 가방 안에는 안전띠가 없으니 멀리 튕겨 나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뭐에 깔리거나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박무현은 비싼 돈을 부은 허리가 괜히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앞발, 뒷발을 찬찬히 펴고 움직여보았다.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게 좋다던데. 여기서 기다리면 서지혁이 날 찾아올 수 있을까? 왼쪽은 차갑고 단단한 벽이었고, 오른쪽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기계의 뒤편처럼 보였다. 다행히 벽과 기계의 틈이 비좁지 않고 성인 남성 두세 명은 숨을 수 있을 정도라 토끼 한 마리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박무현의 귀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무서울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소리에 귀를 바짝 세우고 긴장하고 있자니, 기계에서 뭔가 덜그럭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향긋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코끝이 절로 실룩거림과 동시에 쫑긋 일어섰던 귀에 힘이 풀려 나른하게 늘어졌다.
‘커피, 커피다…….’
거대한 기계의 정체는 자판기였다. 커피 전문점에서 갓 내린 커피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오늘 눈을 뜬 후 지금까지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박무현에게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같은 향기였다.
‘커피…….’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카페인의 향기를 따라 슬금슬금 발을 내딛는 박무현의 등을 작은 발이 꾹, 눌러 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본 뒤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유금이였다면 러시안블루라고 바로 알아보았겠지만, 박무현의 눈에는 그냥 주둥이가 귀여운 고양이였다.
‘해저기지에……고양이?’
진짜 동물인가? 아니면 나처럼 누가 변한 건가? 전자여도 문제고 후자여도 문제다. 어떡하지?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빛깔의 눈동자로 박무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고양이가 별안간 혀를 내밀어 보송한 콧잔등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아이고! 생소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은 박무현은 그대로 한참을 고양이에게 붙잡혀있었다.
설마 고양이가 토끼를 잡아먹나? 먹으려고 침 바르는 건 아니겠지? 이게 좋은 뜻이면 나도 같이 좀 핥아줘야 하나. 혀를 내밀까 말까 망설이는 검은 토끼를 양껏 핥은 고양이가 이제 됐다는 듯 허리를 길게 늘이며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앞장서서 돌아보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따르라는 것 같아서, 초보 토끼 박무현은 어설프게 기지개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그 뒤를 따라 총총 걸었다.
동물이 막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서 처음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지만, 고양이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기지 생활을 오래 했는지 인적 드문 길을 아주 잘 알았다. 똑똑하기도 하지. 박무현은 마음속으로 고양이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었다.
고양이가 움직이면 따라가고 멈추면 같이 멈추기를 몇 번. 이번에도 고양이가 멈춘 곳에 따라서 멈췄는데, 하반신이 뱀으로 된 남녀가 그려진 벽 앞이었다. 옆에 난 문 안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호기심에 문틈을 기웃거리는데 여태 조용하던 고양이가 갑자기 길게 울음소리를 내더니 발톱으로 문을 박박 긁기까지 했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 사이 안에서 들리던 노랫소리가 뚝 끊기고, 힘찬 발소리가 걸어와 문을 열어젖혔다. 박무현은 재빨리 고양이의 앞을 막아섰다. 이 몸으로 다 가려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허리도 최대한 세우고 귀도 바짝 세웠다.
“응? 고양이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토끼네.”
의아해하는 여자의 손이 내려와 바짝 굳어있는 검은 토끼를 안아 올렸다. 뒤의 고양이는 못 봤나 보다 싶어 재빨리 내려다본 바닥에는 길게 늘어진 여자와 자신의 그림자뿐,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 갔지? 도망쳤나? 잘했다. 잘했어. 박무현은 고양이의 동그란 눈과 귀여운 주둥이를 떠올리며 안도했다.
잠시 후 닫힌 문 너머로 길쭉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인사하듯 스치고 사라졌다. 그 누구도 못 보았을 정도로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 * *
바닷속에서 토끼를 줍게 될 줄이야!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신난 투마나코의 품에 안긴 박무현은 커다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낯선 토끼를 보며 흐린 눈을 했다. 글쎄. 바닷속에서 토끼가 되었다는 것보다야 훨씬 믿을 만하지 않을까.
차마 거울에 비친 현실을 더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돌려 각종 헤어용품이 담긴 카트를 보고 미용실이구나, 깨닫는데 뭔가 열심히 검색하기 시작한 투마나코의 목소리가 길쭉한 귀 끝에 걸렸다. 토끼 목욕시키는 법……. 목욕? 어……나 지금 더러워?
당혹감에 물든 눈이 진지한 얼굴의 헤어 디자이너와 세면대 사이를 오갔다. 전문가니까 머리는 믿고 맡기겠지만 초면에 온몸을 맡기는 건 좀. 아니, 아는 사이라도 곤란하다. 세 살도 아니고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겼는데. 난 팔십 먹어도 내 손으로 씻고 싶다.
처음 만난 사람의 손에 작은 소망과 그보다는 조금 큰 몸이 벅벅 씻겨질 위기에 처한 박무현을 구한 건 정보의 바다였다. 인터넷을 뒤지던 투마나코의 손가락이 턱을 톡톡 두드렸다.
“흠, 토끼는 목욕시키는 게 아닌가 보네.”
다행이다. 그럼 진짜 토끼들은 어떻게 청결을 유지하나 궁금하긴 한데, 일단은 다행이었다. 안도한 앞발과 뒷발을 물에 담그는 대신 수건으로 가볍게 털어준 투마나코는 어디선가 빨간 끈을 가져다 목에 리본을 멋지게 묶어주고는 눈썹을 아래로 기울였다.
“미안, 친구. 간식은 없어.”
쿠키나 초코바는 있는데, 동물한텐 안 되지. 혼잣말로 덧붙이는 말에 박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안 되겠지. 사람도 동물이니까 가급적 안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뭐 줄 게 없나, 두리번거리던 투마나코가 한쪽에 놓여있던 작은 화분을 발견하고는 가져다 보여주며 신신당부했다.
“아무리 배고파도 이건 절대 뜯어 먹으면 안 돼. 내 친구가 선물해준 거거든.”
조그만 코가 실룩거리는 것을 보고 살짝 긴장했던 화분 주인은 냄새만 맡고 입은 야무지게 다물고 있는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야, 똑똑하네. 주인이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네가 주인을 버리고 나온 거 아냐?”
몰래 키우는 걸 텐데 주인을 어떻게 찾아주지? 중얼거리는 투마나코의 말에 해저에 들어온 후 오랜만에 맡는 흙냄새를 반가워하고 있던 박무현도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러게.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한 명과 한 마리의 고민을 뚫고 손님 한 명이 미용실로 들어왔다. 투마나코는 재빨리 안 보이는 구석에 수건으로 둥지 비슷한 것을 만들어주고는 얌전히 있으라고 속삭이고 손님을 맞으러 가버렸다.
파랗고 까만 눈이 수건 위를 살금살금 기웃거렸다. 손님이 나갈 때를 맞춰서 몰래 빠져나갈까? 음, 자신 있다. 바로 들킬 자신이. 박무현은 본인의 신체 능력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일단 저 손님이 머리를 하는 동안 고민해보자. 못해도 한 30분은 걸리겠지.
그렇게 30분……하고도 3시간이 흘렀다.
대체 머리카락에 무슨 마법을 부리길래 세 시간이 넘게 걸린 걸까. 두 시간쯤에 더 버티지 못하고 깜박 잠들었던 박무현이 수건 더미 사이에서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카락으로 세 시간의 대장정을 펼친 손님은 이미 가고 없고, 투마나코 혼자 카트를 정리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자다 깼을 때 또 모습이 변하거나 모르는 장소에 가 있거나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잠깐 잠들었을 때 꾼 꿈에서는 토끼에서 사람으로 되돌아왔는데 입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투마나코가 목에 매어준 리본만 있었다. 맙소사!), 낯선 방에서 눈을 떠서 얼마나 아찔했던지. 침대와 책상이 있는 구조는 제 방과 비슷하지만, 바닥에 처음 보는 분홍색 꽃 화분 하나가 놓여있는 방이었다.
화분을 보고 자서 그런 꿈을 꿨나. 헉, 설마 투마나코의 방은 아니겠지? 이 무슨 파렴치한…. 다시 생각해도 꼬리까지 오싹해지는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사이에 미용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성큼 들어서는 남자의 얼굴에 수건에 파묻혀있던 귀가 느낌표처럼 반갑게 솟았다. 신해량 씨!
“……토끼를 찾으러 왔다고.”
끝내주는 미남이 손님으로 온 줄 알고 영업용 미소를 활짝 내걸었던 투마나코는 신해량의 첫 말을 듣자마자 경계심 어린 눈으로 팔짱부터 끼고 섰다. 거대한 키를 올려다보다가 머리 위에 솟은 토끼 귀에서 잠깐 움찔했지만, 프로답게 손님의 머리 장식을 존중해서 티 내지 않고 조각 같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키우는 애야?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보여줘 봐.”
그런 게 있을 리가! 박무현이 안타까운 힘으로 뒷발을 굴렀다. 그가 해저기지에 와서 찍은 사진이라고는 동생에게 보내주려고 몇 번 찍은 밥 사진과 환자들의 엑스레이 정도였다. 그마저도 신해량에게 맞은 환자는 있어도 신해량 본인의 것은 없었다. 빨리 한 번 오라고 해야 하는……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어떡하냐.
“…….”
신해량은 코앞에 펼쳐진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사실확인을 위해 마땅히 할 만한 요구였다. 이 해저기지는 뭔지 모르는 것도 일단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보는 놈들이 판을 치는 곳이니까. ‘아까 뭐 들어 오지 않았냐, 그거 내 거 같은데’ 하고 뻔뻔하게 들어오는 놈은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이 관문을 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게 문제일 뿐.
짧게 고민하던 신해량이 입을 조금 열었을 때, 토끼 한 마리가 투마나코의 뒤에서 구르듯이 달려 나왔다. 정확히는 달려 나오다가 굴렀다. 그리고 그대로 거목처럼 서 있는 다리를 퍽! 들이받고는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힘겹게 기어가 발치에 얼굴을 묻었다.
박무현은 이마며 뺨으로 신해량의 발목 근처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친구네 개는 만나면 반갑다고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던데 그건 여러모로 무리고, 이렇게 하면 좀 친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방금 부딪친 머리가 너무 아파서 문지르는 것도 조금은 있었다. 아주 조금. …조금 많이.
“어……네 거 맞나 보네.”
갑자기 굴러나온 토끼가 무서운 소리로 접촉사고를 내는 순간 얼어붙었던 투마나코의 입이 달싹거렸다. 신해량을 경계하던 얼굴이 머쓱한 표정으로 바뀌고, 내밀었던 손바닥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얼굴로 문지르는 건 자기 거라고 냄새 묻히는 거라고 하던데. 너 되게 좋아하나 보다.”
……?!
“아까 목욕시켜도 되나 검색하다가 봤어. 아, 물론 목욕은 안 시켰어! 걱정 마.”
푸른 바닷속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고 굳어버린 토끼를 투마나코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 앞에 선 남자의 너른 가슴에 턱 안겨주었다.
“잘 가. 다음부터는 잃어버리지 말고.”
토끼를 안은 굵은 팔뚝을 친근한 손길로 툭툭 두드린 투마나코는 미용실 문을 열고 밖에 누가 있나 망까지 봐주기까지 했다. 비밀은 지켜줄게. 맡길 데 없으면 나한테 데려와도 돼. 알았지? 작게 속삭이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친절한 헤어 디자이너에게 떠밀려 나온 두 남자는 잠시 조용한 복도에 서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신해량이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지만, 토끼는 그만 앞발로 두 눈을 다시 덮어버렸다.
* * *
엔지니어 가팀과 한 사람을 뒤집어놓았던 사태는 딱 하루짜리 이벤트로 끝이 났다. 아무런 전조 없이 솟아났던 귀는 사라질 때도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 ‘그래서 저 새끼들이 대체 왜 그러고 다닌 거냐’는 의문은 며칠을 더 갔지만, 나팀과 라팀의 몇몇 멍청이들이 올해가 토끼해라는 것을 깨닫고는 ‘십이간지가 너네 건 줄 아냐! 질 수 없다!’라면서 자발적으로 토끼귀 머리띠를 사다가 쓰고 다니는 만행을 저지른 덕에 묻혔다. 나팀과 라팀에 유일하게 고마운 일이었다.
한참 판돈을 털고 있던 신해량에게 SOS를 칠 때까지 박무현을 찾아다니며 미끼로 흔들었던 온갖 소리를 제 꼬리표로 달게 된 서지혁이 줄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걸린 일이라거나, 토끼 귀를 단 신해량의 사진을 찍은 누군가가 비밀리에 판매해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는 소문에 정상현이 자기가 찍었던 셀카도 슬쩍 흘렸다가 처참한 무반응에 절망했다거나, 신해량이 아침 일찍부터 치과의사의 방에서 옷을 훔쳐가는 게 목격되었다는 해괴한 소문이 좀 돌기는 했지만, 별 것 아닌 일들이었다.
박무현이 한동안 신해량을 피해 다녀서 드디어 엔지니어 가팀 팀장이 한국국적 민간인도 친 거냐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고, 투마나코가 신해량을 볼 때마다 눈을 찡긋하며 아는 척을 해오기도 하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괴담 아닌 괴담이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정말로 별 것 아닌 해저기지의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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