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28

데이트2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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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 매장이 줄지어 있는 4층으로 내려온 서지혁과 신해량은 온갖 여름옷을 입어보며 패션쇼를 해댔다. 서지혁이 신해량에게 옷을 골라주면 신해량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서지혁은 새 옷은 입은 신해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중한 표정으로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쓰며 도리질했다. 그러면 또 신해량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짓을 다섯 번 정도 반복했다.

"내 옷은 이제 다 골랐으니까 네 옷 사자."

"예? 벌써요? 이거 하나만 더 입어 보시죠?"

"……식당 예약 시간이 언제인데?"

"아직 여유 있으니까 걱정 마십쇼. 배 많이 고파요?"

"그런 건 아냐. ……그럼 이게 마지막이야."

"예엡. 얼른 입고 나오세요."

뭘 걸쳐도 소화해내는 얼굴과 몸을 가진 인간이라 옷 입히는 재미가 쏠쏠했다. 서지혁은 마지막으로 신해량의 손에 골라둔 옷을 쥐여주고 다시 탈의실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신해량이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서지혁을 향해 걸어왔다. 서지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에 무심하게 뒤를 돌아 보았는데, 신해량을 보는 순간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처음 본 신랑의 반응과 비슷했다. 서지혁의 과장된 표정에 그들의 패션쇼를 구경하던 매장 직원들도 웃음을 터뜨렸고, 신해량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건 무슨 반응이지? 아까 입은 옷이랑 색만 좀 다른 거 같은데."

"애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반하는 남자주인공 연기였는데요. 이걸 몰라주시네."

"그런 건 처음에 했어야지. 그리고 새로울 것도 없잖아. 그냥 평범한 여름옷인데."

"허. 클리셰를 모르시네요. 원래 마지막에 고른 옷이 제일 잘 어울리고 이쁜 거 몰라요? 하여간 무드가 없어. 그리고 저희가 7년을 봤는데. 군복에 정장에 여름옷이든 겨울옷이든 빤스랑 나체까지 다 본 사이에 옷으로 새로울 건 없죠. 죄수복 같은 거면 모를까. 이건 뭐 연기 안 해도 놀라서 까무러칠 만 합니다만."

"그런 거 아니라도 더 있잖아."

"뭔데요?"

서지혁이 바보 같은 얼굴로 물으니 신해량이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잠깐 노려봤다.

"예복."

"허. 그거 지금 프로포즈입니까?"

서지혁이 놀라며 물으니 신해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사람 심장 떨어뜨리는데 선수다. 깜짝 놀랐네. 서지혁이 놀라거나 말거나 신해량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이 입어본 옷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각종 티셔츠와 기장이 다른 바지, 셔츠와 민소매옷까지 서지혁이 골라준 다양한 옷을 차곡차곡 쌓아두다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옆에 빼두었다.

"이건 왜 빼요?"

"네가 별로라며."

"예? 제가 언제요?"

"……인상을 쓰고 고개를 막 저었잖아."

"아. 그건 그냥 해본 거죠. 원래 그런 장면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이것도 이뻤으니까 사요. 제가 사줄게요."

신해량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쳐다보다 말을 말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반바지를 쌓아둔 옷 위에 올려두었다. 그 사이 서지혁은 시시덕거리며 신해량이 자신을 위해 미리 골라두었던 옷 몇 벌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예상은 했지만 탈의실은 서지혁을 담기엔 좁아터진 공간이었다. 간신히 벽에 옷들을 걸어두고 벽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빠르게 탈의하고 상의와 하의를 조합해 입었다. 신해량의 반응을 기대하며 서지혁은 자신감 넘치게 탈의실 문을 열어재꼈다.

"어때요?"

"잘 어울려."

"그게 끝이에요?"

"그럼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그러면 더 좋죠."

신해량은 아무 표정 없이 손을 휙휙 흔들었다. 닥치고 다음 옷이나 빨리 갈아입고 나오라는 뜻이었다. 탈의와 착의를 네 번째 반복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왜 식당 예약 시간을 물었던 건지 이해가 되었다. 드릅게 귀찮네.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그냥 짠! 짠! 하면 옷이 막 바뀌던데.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힘겹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와봤더니 신해량의 반응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손을 흔들었다. 이 인간이 진짜.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진짜 잘 어울리는 게 맞나? 서지혁은 신해량이 자아 없이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결국 의심을 거두지 못한 서지혁이 탈의실로 가다가 옆에 걸려 있는 짙은 장미색 민소매 티를 몰래 손에 들었다. 신해량이 볼까 후다닥 탈의실로 뛰쳐 들어간 서지혁은 히히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당하게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와 당당하게 신해량 앞에 섰다. 짙은 붉은색 민소매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곧 터질 것 같았고, 아래의 반바지는 밝은 푸른색으로 언뜻 보면 굉장한 애국자 같아 보이기도 했다. 상당히 도발적인 패션을 마주한 신해량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서지혁을 쳐다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로 인해 신해량이 그동안 꽤 성의 있게 서지혁의 패션쇼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서지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뭐야? 내가 골라준 옷도 아니잖아."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확인 좀 해봤죠."

"바지는 괜찮으니까 입어. 그 위에 건…… 늘어난 거 아냐?"

"설마요. 제가 이렇게 여리고 가냘픈데요. 곱게 돌려놓을게요."

그렇게 말했지만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한 서지혁이 바로 탈의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 민소매 티를 벗고 늘어나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장미색 민소매 티는 신축성이 상당한 재질이었는지 곧바로 원래의 크기로 잘 돌아갔다. 장난치다가 강매당할뻔했네. 서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마지막으로 들고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드디어 마지막이군.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패션쇼에서 해방이다! 서지혁은 기쁜 마음으로 탈의실에서 튀어 나갔고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해량을 마주했다. 신해량은 여태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서지혁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역으로 훑어보더니 눈썹을 씰룩이며 감탄하듯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인간이 진짜!

"뭡니까? 지금 연기한 거예요?"

"안 하면 삐질 거잖아."

"아 당연하죠. 그래도 기대 이상인데요."

신해량의 성의 넘치는 연기에 빵 터진 서지혁이 그를 끌어안고 볼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추었다. 쪽쪽쪽쪽쪽. 마지막 소리와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이 서지혁의 입을 막으며 밀어냈다. 옷 갈아입고 나와. 예엡. 부끄러워하기는. 입을 막은 손이 거두어지고 신해량이 방심한 틈을 타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서지혁이 부리나케 도망가듯 탈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서지혁의 뒷모습을 보며 신해량도 웃었다.

두 사람이 고르고 입어본 옷들은 모두 계산대로 올라갔다. 아, 짙은 장미색 민소매 티를 제외하고. 서지혁은 당연하게 카드를 내미는 신해량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고는 자신의 카드를 직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지혁은 빼앗은 신해량의 카드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요건 봉인입니다. 씨익 웃으며 말하니 뭐라 할 줄 알았던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 잘 입을게. 한다. 오늘 참 이쁘게도 군다.

양팔 가득 종이가방을 끼우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차에 타고 알차게 놀았던 건물을 빠져나왔다. 서지혁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는 동안 신해량은 장미꽃을 가만 바라보며 포장지를 만지작거리거나 향기를 맡았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드나? 서지혁은 뿌듯하고 흐뭇한 가슴을 안고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운전했다.

서지혁이 운전대를 잡은 지 약 10분 뒤에 도착한 곳은 영화관이 있던 건물 보다 훨씬 높은 타워였다. 약 2년 전에 세워져 높이는 50층으로, 한참 오래 전에 지어진 63빌딩 보다도 낮은 층수였지만, 건물 외벽의 모양이 특이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타워는 전체적으로 구불구불한 덩굴이 위로 솟아 있는 모양이었는데, 중간중간 튀어나온 외벽은 꽃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타워의 40층에는 꽃과 조명으로 잘 꾸며둔 공중정원이 있어 커플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관광명소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타워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감탄하며 하늘과 이어져 있는 듯한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3년을 넘게 처박혀 지냈던 해저기지에 비하면 조촐하기 짝이 없는 스케일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해저기지에 있을 때 이거 세워진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나도 그래. 여기에 있는 식당을 예약한 거야?"

"예. 평일 저녁이라 그래도 박터지진 않던데요. 주말엔 난리라던데. 이런 게 백수의 특권인 거죠."

신해량은 미소를 지으며 반짝거리는 건물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하여간 예쁜 거 참 좋아해. 서지혁은 그런 신해량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밥 먹고 좀 더 구경합시다. 그래.

건물 내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와 내린 곳은 깔끔한 우드톤으로 인테리어 된 편백집이었다. 자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모르고 따라온 신해량은 가게 간판을 보고 놀랍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오늘 이 양반 놀라는 표정 원 없이 보는군. 괜히 뿌듯해진 서지혁은 예약 체크를 하고 지정된 룸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서지혁을 따라 들어온 신해량도 서지혁의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통유리로 된 한쪽 벽으로 야경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예상 못했죠?"

"……그래. 오늘 분위기로 봤을 땐 양식 레스토랑인 줄 알았어."

"그 생각도 하긴 했죠. 스테이크 썰면서 와인 한 잔, 이런 거 좋잖아요. 분위기 있고. 흔해빠졌고. 그런데 당신이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저희 둘 다 양식 보단 한식파니까 칼질 보다는 젓가락질이 낫지 않겠어요? 양식 레스토랑 놀이는 당신 집에서 하기도 했구요. 원래 애인 입맛에 맞춘 음식 먹는 것도 흔한 데이트긴 하죠."

"흔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어?"

"예. 평범하고 흔해빠진 거요. 당신이 전에 말했잖아요. 평범하게도 살아본다고. 저는 솔직히 그 말이 좀 웃겼습니다. 당신이나 저나 뭘 해도 눈에 띄잖아요. 직업도 평범이랑은 거리가 멀지, 덩치도 남다르지, 저희는 그냥 남들 다 입는 옷 똑같이 입고 거리 걸어도 눈에 띄어서 평범할 수가 없다구요. 인파 사이에 자연스럽게 파묻히는 거 저희가 제일 못하는 거 아닙니까?"

서지혁이 한탄하듯 줄줄 말을 내뱉으니 신해량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남들이 다 하는 일상들이 너무 멀게 느껴졌어요. 이미 멀리 와버렸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안 평범한 당신이 그런 말을 입에 담으니까……. 그래도 되는 거구나 싶더라구요. 늦지 않았구나. 그래서 이번에 해본 겁니다. 남들처럼 데이트 신청하고, 영화관 커플석에서 눈꼴시려운 짓 하면서 영화도 보고, 서로 옷 골라주며 쇼핑도 하고. 커플 명소 와서 밥도 먹고 이런 거요. ……몰랐는데요. 저는 이런 삶을 동경한 거 같기도 합니다. 해보니까 진짜 좋은데요."

"나도 좋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여태 말을 안 했으니까요."

"무슨 심경 변화가 있어서 말하는 건데?"

"뭐, 심경 변화라기 보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그……. 애인이잖아요."

신해량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던 서지혁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보았다. 낯간지러워서 미치겠네. 신해량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종종 밀려오는 수줍음이나 부끄러움 같은 건 영 적응이 안 됐다. 그냥 무심하게 툭 내뱉고 싶었는데 얼굴에 열이 오른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느껴졌다. 어두운 창가에 비친 얼굴이 유독 멍청하게 느껴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바보 같이 생겼었나? 그럼에도 서지혁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느껴져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서지혁은 애써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해가 진 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으니 해저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건물들은 무인 탐사선이나 잠수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오징어잡이 배처럼 혼자 빛나던 주작동 연구센터 같기도 하고. 산란하는 빛을 보며 멍하게 있으니 이 시간에 퇴근도 못 하고 야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직장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생겨났다. 그렇게 어느새 딴생각에 몰입하고 있으니 테이블 위에 놓아둔 손을 누군가 콕 찌른 게 느껴졌다. 멍때리던 서지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뚱한 표정의 신해량이 그를 마주했다.

"애인을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놈이라니, 최악인데."

"……그게 보였어요? 하여간 귀신같, …아니. 당신이 계속 빤히 쳐다보니까. 아무튼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유치해도 좀 참으십쇼. 저는 못해본 게 많거든요. 이왕 하는 연애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볼라니까. 그래봤자 다음 달이면 또 복귀지만."

"그렇게 해. 시간 많으니까."

"참 믿음직하네요."

하루를 알차게도 보내는 인간이라 한 달이면 시간이 많은 건가? 백수 생활 참 좋은데. 복귀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라 고개를 젓는 것으로 생각을 떨쳐냈다. 미리 걱정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닥치면 뭐든 하게 돼 있으니까.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잡거나 간지럽히면서 유치한 손장난을 하고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룸의 문이 열리고 드디어 미리 주문해둔 요리가 나왔다. 목재로 된 커다란 찜기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고 각종 소스와 밑반찬이 차례로 올라왔다. 함께 주문한 전골 요리도 찜기 옆에 세팅되었다. 마지막으로 앞접시와 수저까지 정갈하게 놓이고 바로 먹으면 된다는 안내와 함께 직원들이 룸을 나갔다.

"와, 맛있겠다. 그쵸?"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신해량의 까만 눈동자가 크게 뜨이는 것을 확인한 서지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찜기 안에는 팽이버섯을 돌돌 감은 잘 익은 소고기와 숙주, 청경채 등 한숨 꺾인 말랑한 채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비주얼이었다. 옆에 높인 전골은 간장 베이스의 소고기 전골이었는데, 십자가 모양 칼집을 낸 표고버섯과 빛깔 좋은 갈색을 띠고 있는 소고기가 먹음직스러웠다. 달큰하고도 담백한 냄새를 잔뜩 들이마시고 황홀하다는 듯이 숨을 내뱉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해량이 작게 웃었다.

가장 커 보이는 소고기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간장 베이스 소스에 콕 찍은 서지혁이 후후 불어 뜨거운 김을 식히고는 신해량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신해량은 숙주를 집다 말고 자신의 앞에 불쑥 내밀어진 고기를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서지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작은 입이 최선을 다해 벌어지는 모습을 보던 서지혁이 냉큼 고기를 신해량의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덜 식어 아직 좀 뜨거웠던 모양인지 신해량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입을 살짝 벌려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뜨거워요? 괜찮아. 한 번 더 김을 뿜어낸 신해량이 입에 들어온 것을 조심스럽게 오물거리다 삼켰고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씰룩였다.

"맛있어요?"

"맛있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버섯 식감도 좋고 고기도 부드러워. 소스도 맛있고."

오. 최고의 칭찬이 나왔군. 말수가 워낙 적은 양반이라 맛있는 걸 먹어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 아닌데, 꽤나 긴 맛 평가를 남긴 걸 보니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먹어볼까. 서지혁은 앞접시에 청경채를 펼쳐두고 숙주도 깔아준 다음, 배추 조각도 하나 올려주고 단호박도 작게 잘라 놓았다. 마지막으로 버섯을 품은 소고기말이를 소스에 듬뿍 찍어 잘 쌓아둔 채소 쌈 위에 눌러 올렸다. 서지혁은 곧 터지기 직전인 쌈을 젓가락으로 집중해서 말았다. 가장 아래에 깔린 숙주는 거의 찢어질 것 같았는데 젓가락으로 씨름을 하고 있으니 입 앞에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놀라서 봤더니 신해량이 소고기말이 두 점을 서지혁에게 건넨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서지혁은 기쁜 마음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고기를 받아먹었다. 씹는 순간 팽이버섯의 팡팡 터지는 식감에 감탄했고, 씹을수록 소고기의 진한 담백함에 놀랐다. 그 여운이 가기 전 밀려오는 짭짤하고 달콤한 간장 베이스 소스가 감칠맛을 더해주었다. 절로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내려갔다. 깊은 감동을 느낀 서지혁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니 신해량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그런 거 같아 보여."

"아니, 진짜 미쳤는데요?"

크게 감탄한 서지혁이 이번엔 전골 속에서 버섯과 고기를 건져내 후후 불더니 바로 입에 넣었다. 신해량은 국물 먼저 맛을 보았는데 두 사람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혁은 젓가락을 놓고 박수까지 쳤다. 하루를 보람차게 보냈더니 더 맛있는 거 같기도 하고. 서지혁은 그 사이 앞접시에서 식어가고 있는 쌈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또 감격한 서지혁이 제발 야채를 싸서 먹으라며 신해량에게 강력하게 권했다.

신해량은 서지혁처럼 입이 터질 정도로 큰 쌈을 싸 먹기 보다는 소고기말이를 입에 넣은 다음 채소를 차례대로 집어 먹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서지혁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따로 먹으면 안 되고 한 번에 모든 맛을 다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신해량은 따로 입에 넣어도 결국 같이 씹기 때문에 같은 맛이라고 말했지만 서지혁은 듣지 않았다. 결국 서지혁은 또 채소로 쌈을 싸서 신해량의 입 앞에 막무가내로 가져다 댔다.

신해량의 입 사이즈를 생각하며 나름 최소한의 크기로 만든 쌈이었지만 신해량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잠깐 머뭇댄 신해량은 어차피 서지혁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순응하고 입을 크게 벌려 쌈을 받아먹었다. 신해량이 버거운 쌈을 씹는 내내 눈을 빛내며 쳐다보던 서지혁은 신해량이 인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쌈을 싸는 데에 집중했다.

입과 배가 터질 정도의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타워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씩 사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참을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40층에서 섰고 엘리베이터에 있던 모든 인원이 빠져나갔다. 서지혁과 신해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40층 공중정원은 평일 저녁임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은 커플로 보였는데 두 사람도 손을 잡고 당당하게 커플 명소에 입성했다.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했지만 서지혁은 사람이 많고 안전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개인의 행동이 눈에 다 들어오지 않거나 파악되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인파 속에 파묻히면 칼이든 총이든 마약이든 어떤 위험물질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더라도 관광지 보다는 현지인들만 갈법한 조용하고 삭막한 장소만 찾는 편이었다.

"어지러워?"

"아뇨. 갑시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사람이 적은데요? 어어? 저기, 저쪽에 명당이다!"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을 장소였다. 사람은 많고 어둡고 대책 없이 높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제 손을 잡고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총알 밭도 함께 걸어왔는데 꽃밭을 못 걸을까. 조명이 비추는 꽃들 사이에도 가장 빛나고 예쁜 제 사랑을 자랑하고 싶었다.

서지혁은 신해량을 이끌고 꽃길 사이를 걸었다. 꽃다발을 만들 때 보았던 익숙한 꽃도 있었고 처음 보는 꽃도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줄기가 잘린 꽃도 있었고 해저기지 온실에서 보았던 이름 모를 꽃도 있었다. 서지혁은 꽃에 대한 설명이 적힌 푯말을 곁눈질하며 따라 읽으면서 신해량에게 아는 척을 해댔다. 신해량이 푯말을 보려고 하면 온 몸으로 그의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가이드 말을 얌전히 잘 들어야죠. 가이드는 고용한 적이 없는데. 일종의 봉사활동이죠.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 모습은 정원의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다.

서지혁에게 있어 살아간다는 건 그저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존재를 숨기기 위해 숨죽이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견뎌야만 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20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서지혁은 이 시간을 잡아두고 싶었다. 신해량과 함께하는 일분일초가 애틋했고 좋아하는 사람과 있는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함께할 미래가 기대되기도 했다.

서지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 어플을 켰다. 작은 화면으로 담길 순간은 아니었지만, 추억할만한 작은 조각 정도면 충분했다. 서지혁은 자신의 서랍 속을 채워갈 행복한 추억의 한 장면을 화면에 담았다. 신해량은 기꺼이 서지혁의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의 작은 스크린 속에는 서로가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꽃구경을 마치고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기대어 밤하늘을 눈에 담았다. 별 같은 건 보이지 않는 도시의 하늘이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서지혁이 고개를 돌려 신해량을 쳐다보자, 신해량 또한 고개를 돌려 서지혁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또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저 언제부터 좋아했습니까? 아니, 두 개 있습니다. 왜 저한테 같이 살자고 제안한 겁니까?"

"그런 게 궁금해?"

"누가 안 궁금하겠어요?!"

서지혁이 울컥하며 말하자 신해량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기는 웃기다 이거지?

"첫 번째 질문에 먼저 대답하자면, 나도 몰라."

"장난해요?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요."

"정말이야."

"허, 참.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저 좋아하고 있었던 거 맞아요?"

"맞아."

"와. 미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 미친 도라이!"

서지혁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바닥에 발을 구르니 신해량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허, 남은 누구 때문에 삽질을 얼마나 했는데.

"아니, 그럼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죠. 나도 너 좋아한다. 그러니까 사귀자거나 같이 살자거나. 그랬으면 저도……."

"그랬으면 네가 납득을 했을 거라고? 웃기는 소리군. 네 입으로 말했지, 나랑 뭘 해볼 생각이 없다고. 애초에 포기하고 도망칠 생각으로 고백한 놈이 내가 좋다고 해봤자 말을 들었을 거 같나?"

"……아오, 아파 죽겠네. 말로 사람 패는 것도 폭력이라구요."

"이번엔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너한테 욕심이나 목표가 생기길 바란 거야. 노력 없이 뭘 얻어봤자 또 걷어차고 도망이나 갈 거 같았으니까."

"……아니, 진짭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꼭."

서지혁은 온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그래 맞아. 내가 널 작정하고 꼬신 거야."

"와, 이 미친."

서지혁은 크게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사자후 같은 비명을 내지를뻔했다. 어쩐지. 어쩐지. 분명 내가 꼬시는 거였는데 꼬셔지는 기분이 들더라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자기를 유혹하라는 미션을 줘놓고 사실은 내가 낚시질을 당하고 있었다니. ……결과적으로 서지혁이 그를 욕심내게 된 것까지 완벽하게 신해량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이다. 허허허허허허. 이 무서운 인간. 도라이. 미친놈.

서지혁은 소름이 돋은 제 팔을 문질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할 말을 잃은 서지혁은 여전히 능청맞게 웃고 있는 신해량을 보다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허허허허. 허탈한 웃음을 줄지어 내고 있는데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난간 쪽의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신해량의 바로 위에 있던 조명이 켜지자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서지혁이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진짜 예상도 못했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할 때 좀 더 반짝반짝했는데요."

"그래?"

"예, 딱 그렇게요. 눈부셔 죽겠네. 이건 갑자기 왜 켜진 겁니까?"

눈을 잔뜩 찌푸린 서지혁이 조명 아래에서 발광하는 듯한 신해량을 쳐다보자 신해량이 웃으며 서지혁의 손을 끌어당겼다. 몇걸음 옮겨 조명의 빛이 닿는 공간까지 들어온 서지혁은 다시 제 앞에 있는 신해량을 바라보았다. 그와 같은 빛 아래 서 있으니 다시 두 눈을 떠 제 앞의 빛나는 남자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 네가 그래. 반짝반짝 빛이 나. 그리고 나도 그렇겠지."

"그래요? ……그럼 저도 빛나고 있어서 당신이 눈부시지 않았나 봅니다."

밤하늘의 유일한 별이라도 된 것처럼 빛나던 신해량은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아름다운 웃음이었지만, 그를 마주한 연인 또한 밝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서지혁은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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